[익명] 여름밤
사람이 드문 새벽의 골목길은 늘 어두웠다. 가로등은 깜빡거리기를 몇 번 하다 금방 제 일을 관두곤 했고, 겨우 의지하는 달빛마저도 오늘은 유난히 흐렸다. 몸을 쓰는 일이 공부보다 훨씬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는 것과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어쨌거나 공부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잠을 쪼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새벽 빛에 의지해 하는 공부는 의외로 즐거웠다. 모르는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는 재미를 알게 된 민규에게 낙이라고는 얇은 월급 봉투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새 책을 살 때뿐이었다. 이렇게 살다 보면 뭐가 될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긴 했지만 그나마의 여유도 잦지는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서 좀 더 그럴듯한 삶을 사는 것이 민규의 목표였다. 공부도 그 목적의 일부였고, 돈을 모으는 것도 전부 그 삭막하지만 현실적인 목적에 쓰기 위함이었다.
제 아무리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산다지만, 가끔은 민규에게도 쉴 시간이 필요했다. 습도 높은 여름밤은 집중력에는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였고, 공부도 하기 싫고, 잠을 자기엔 괜히 아까울 때마다 나가는 곳은 동네 놀이터였다. 다 낡아빠진 동네에는 이 놀이터를 이용할 어린 아이들도 없었고, 드물게 찾아오는 다른 동네 아이들마저도 밤에는 절대 이 근처에 오질 않았다. 낮에도 제 부모들이 이런 곳에 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밤이라면 더욱 기함하고 들 것이 뻔했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민규는 늘 새벽에 혼자 놀이터를 찾았다. 제 키에 비해 짧기 그지 없는 그네에 앉아 가끔 피우는 담배는 꽤 오랜 시간 그 불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날도 그랬다. 일하는 곳에서도 유독 혼이 많이 난 하루였고, 하던 공부는 막혀서 짜증을 한껏 돋궜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것들이라 책을 덮어버린 민규가 대충 슬리퍼를 끌고 나와 그네에 앉았다. 씨발, 좆같네. 따위의 욕지거리가 자연스럽게 입에 붙어 있었다. 이렇게라도 짜증을 털어내지 않으면 더욱 힘들다는 핑계를 덮은 말들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그때였다. 누군가 귀에 들릴 법한 소리로 민규에게 말을 건 것은.
ㅡ나쁜 말하면 안 돼.
ㅡ뭐야.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던지자 보인 것은, 덥고 축축한 공기를 아랑곳하지 않는지 긴 셔츠를 입은 사람이었다. 하얀 피부에 흰 셔츠를 입어선지 밤임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눈에 잘 띄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보기에도 물기를 잔뜩 머금은 꼴이었다. 뭐냐고, 너. 민규가 경계심을 가지고 묻자 그 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걸어와 민규의 입술을 살짝 잡았다. 나쁜 말 안 돼. 무방비한 상태로 들어온 행동과 말에 민규가 대답을 못 하고 있는 사이에 그 사람은 어디론가 금세 사라졌다. 뭐야, 지금... 내가 헛걸 봤나. 눈을 쓱쓱 비비고 다시 그 하얀 인영을 찾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잠을 덜 자서 이러나, 내가. 가서 더 자자. 제 상태가 피곤해서 이런 거라는 합리화를 한 민규가 몸을 일으켰다. 가서 자자, 일단. 그리고 다시 생각하자.
*
새벽이란 괜히 그런 마음이 드는 때였다. 무언가 비밀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 같고, 그게 어제였으니 오늘도 뭔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 한참 들여다보던 책을 덮은 민규가 몸을 일으켰다. 그냥, 담배 한 대 피우러.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하려 들었지만 궁금한 것은 그 애, 그 사람? 그 사람이었다. 오늘도 있을까. 평소엔 없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을까. 괜한 궁금증은 민규의 발걸음을 빠른 속도로 옮기게 만들었다. 청승맞게 쏟아지는 비 따위는 걸림돌이 되지 못할 정도로 민규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작은 우산을 하나 받쳐 들고 간 놀이터는 민규의 생각과는 달리 비어 있었다. 뭐야, 진짜 헛걸 봤나... 괜히 나왔네. 무슨 상상을 했지, 싶은 마음이 든 민규가 등을 돌린 찰나, 희끗한 인영이 눈에 스쳐갔다. 그 사람이다. 확신이 든 민규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잔뜩 젖어 있는 풀숲 대신에 놀이터 한 켠에 비를 피해 앉아 있는 그 사람이 보였다.
ㅡ여기서 뭐 해.
ㅡ비 오잖아. 저거 다 맞고 있어?
ㅡ아니, 그건 아닌데. 집에 안 가냐고.
ㅡ안 가.
안 가면 어떡해. 몰라. 선문답같은 질문을 몇 번 주고 받은 뒤에 그 남자는 진심으로 그 곳에서 자려는 건지 제 몸을 한껏 웅크렸다. 비 새, 여기. 알아. 걱정을 담은 목소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조차 마주치질 않는 태도에 괜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민규 쪽이었다. 감기 걸려, 위험해, 등의 말을 연신 내뱉어도 움직일 테세가 없는 남자에게 결국 민규가 건넨 것은 제 손이었다. 가자. 우리 집에. 그제서야 고개를 든 남자가 멀뚱히 민규의 손을 살폈다. 일단은 잠만 자자고, 잠만. 민규의 말을 잠시 곱씹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내밀어진 손을 잡고 일어선 남자가 집에 가는 동안 먼저 말한 것은 딱 하나였다. 내 이름은 원우야. 이후로 쏟아진 민규의 질문에 원우는 그 어느 것도 답하지 않았다. 나이도, 왜 거기에 있는지도, 왜 하필 여기인지도. 자꾸 물으면 나 갈 거야. 분명히 호의를 베푸는 것은 민규 쪽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된 건지 민규가 더 쩔쩔매고 있었다.
**
그렇게 시작한 동거 아닌 동거는 생각보다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제가 아무리 낮엔 동네에 있는 법이 없다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이 있지도 않았다. 이웃이라는 낯간지러운 관계까진 아니었지만 마주치는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관계였고, 여자들끼리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서로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속속들이 아는 사이였다. 이런 작달막한 공간에서 원우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은 금방일 것이고, 그것도 민규의 집에서 같이 산다는 것은 수많은 상상을 낳을 일이었다. 그럴 바에야 애시당초에 먼저 선수를 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한 민규가 원우를 데리고 동네로 나섰다. 어디 가? 더워서 싫어. 입이 잔뜩 나온 원우를 데리고 민규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동네 슈퍼였다. 사람들이 그나마 가장 자주 다니는 곳이고, 모든 소문이 퍼지는 근원이기도 했다. 민규 총각, 누구야? 호기심 어린 눈빛에 잠시 숨을 고른 민규가 천연덕스럽게 제 친군데, 같이 살게 됐어요. 인사는 시켜야 될 것 같아서 온 거고요. 앞으로 보이면 잘 좀 부탁드려요. 눈치를 대충 챈 건지 민규를 따라 고개를 꾸벅 숙인 원우가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민규의 말 끝을 따라 뱉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더 돌고 나서야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는 원우가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더워, 하고 칼같이 밀어냈다. 덥다는 소리도 안 하더니? 괜히 장난이 걸고 싶어져 툭툭 던진 말에도 더위 때문인지 입을 다문 원우가 신기했다. 집에 가서 마저 얘기해. 몇 번 걸었다고 그새 앞서 걷는 것이 신기했다. 너 길도 찾을 줄 알아? 장난스런 목소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째림이 가득 담긴 시선이 달라 붙었다. 아, 농담. 손을 내젓자 그제야 시선을 잠자코 돌려 앞을 보는 것마저도 예뻤다. 작은 동네를 느릿하게 걸어 원우가 익숙한 골목에 들어섰을 때 민규의 목소리가 닿았다. 먼저 들어가. 내내 뒤도 돌아보지 않던 원우가 그제야 민규를 돌아봤다. 어디 가? 그새 불안해진 목소리를 알아챈 민규가 원우를 안심시키려 가까이 다가섰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담배. 어? 금방 들어갈게.
ㅡ나쁜 건 왜 혼자 다 해?
ㅡ뭐?
ㅡ말도 안 예쁘고, 하는 것도 안 예뻐.
집에 오지 마. 문 잠궈버릴 거야. 어디서 배운 말툰지 단호하게도 하는 말이 귀여워서 웃음이 샜다. 그 사이에 집 안으로 들어가버린 원우는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았다. 진짜 잠궜나? 몇 번 흔들어도 열리지 않는 문을 앞에 두고 원우 앞에선 차마 지을 수 없는 웃음을 마음껏 흘린 민규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 피울게. 거짓말. 나 못 믿어? 못 믿는데? 한참을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 결국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까지 하고서야 문이 겨우 빼꼼 열렸다. 거짓말 하면 진짜 안 열어 줄 거야. 다짐을 받는 목소리에 괜히 마음이 설렜다. 그럼 대신에 이거. 문을 사이에 두고 쪽, 하는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자 원우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괜히 우스워 킥킥대자 정신을 차린 원우가 민규를 밀어내고 다시 문을 세게 닫았다. 밖에서 자, 너는. 뭔가 화가 난 듯 하면서도 당황한 목소리가 또 새삼 신기하게 웃음이 났다.
*
ㅡ걔? 착해. 인사도 잘하고.
ㅡ어제는 우리 애랑 놀기도 하던데. 바쁜데 고마웠지 뭐.
사람이 드문 동네에서 원우가 동네의 일원이 되기까지는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들린 동네 슈퍼 아줌마는 원우를 그렇게 평가했다. 착한데, 좀 특이한 애. 그래도 심성은 착하더라. 뭐 하나 더 주니까 고맙다고 인사는 꾸벅 잘도 하더라. 의외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제가 아는 원우는 적어도 저한테는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이며 과자며 물려 줘도 말 한 마디 없이 가져가더니. 약간은 괘씸한 마음이었지만 무언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나 없이도 사회 생활은 하려나, 싶었는데 인사도 잘 한다고 하고 또 혼자 이것저것 돌아다니기도 잘 하고. 애를 키우는 기분이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저렇게 예쁜 애가 세상에 또 어딨어.
오늘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놀이터로 와. 날씨가 한층 더워지면서 원우는 유달리 밤에 잠을 못 이뤘다. 평소에는 자느라 민규가 오는지 나가는지도 잘 모르던 애가 내내 잠을 설쳐하는 게 마음이 쓰였다. 선풍기를 틀어 줘도 태생적으로 열이 많은지 뒤척거리는 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인지 밖으로 유난히 나돌았는데, 그래도 사람들 눈에 보이게 돌아다녀서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민규가 올 때까지 놀이터 근처를 헤매다 같이 들어가는 게 일과가 되어버린 이후로 민규는 일부러 놀이터로 돌아서 걷곤 했다.
그 애는, 그러니까 원우는 그랬다. 덥다고 징징거려서 물려 준 아이스크림은 흘리기 일쑤였고, 비 오는 날 다 젖은 상태로 민규를 기다리는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너 바보야? 하고 타박을 줘도 아니야, 하고 야무지게 대답만 잘했다. 그래놓고 또 어딘가엔 상처가 나 있었고, 어디에서 이랬냐고 물어도 고개만 저을 뿐 똑부러진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누가 괴롭혀? 하고 물어도 그런 사람 없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어딨어? 같은 태평한 소리만 해댔다. 없는데, 그래도 조심은 해야지. 어? 몇 번을 당부해도 그냥 고개만 건성으로 끄덕이는 것이 티가 났다.
ㅡ어디서 이렇게 자꾸 까져 와.
ㅡ안 까졌어.
ㅡ이게 까진 게 아니면 뭐야.
몰라. 괜스레 토라진 듯 입술을 내밀고 그네에 앉은 원우가 귀여웠다. 그러니까 다치지 말라고. 가볍게 입술을 톡 건드린 민규가 약을 들고 원우의 앞에 앉았다. 평소에는 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았지만 원우와 살게 된 이후로 각종 약들을 챙겨서 다니는 게 습관이 된 민규였다. 다리 좀 벌려 봐. 허벅지에 난 상처까지 본 건지, 담담히 말하는 어투였지만 얼굴을 붉히기엔 모자랄 것이 없는 말이었다. 상처 나면 안 된다고 해. 민규의 당부를 듣는지 마는지 발끝만 까딱거리던 원우가 민규를 다리로 끌어당겼다. 한층 가까워진 얼굴을 마주한 민규가 가볍게 웃었다. 다치지 마. 너 다치는 거 싫어. 상처가 거의 아물어가는 뺨을 살짝 쓸어내린 민규가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원우가 먼저였다. 놀랄 틈도 없이 입술이 닿았고, 잠깐 떨어졌다 다시금 깊게 마주했다.
ㅡ나 업어 줘.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고 있던 원우가 뜬금없이 뱉은 말이었다. 다 큰 애가 어딜 업히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원우에게 등을 가져다 댄 민규가 원우를 살폈다. 균형 잘 잡아서 업혀. 혹시나 떨어질까 잔뜩 긴장한 등에 원우가 자연스럽게 안착했다. 괜히 고개를 부비는 것이 간지러워 하지 마, 하고 주의를 주자 이내 고갯짓을 멈추고 가볍게 고개를 묻었다. 원래도 긴 길은 아니었지만 괜스레 더 짧게 느껴지는 거리가 아쉬워 한참을 느릿하게 걷던 민규가 작은 목소리로 원우를 불렀다. 원우야. 응. 자? 응. 자는데 어떻게 대답해? 자니까. 그래, 우리 원우 잘 자. 응. 좋아해. 응. 너는? 나도.
***
오랜만이네, 이 시간에는?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동네 아저씨에게 민규가 고개를 숙였다. 잠깐 앉지? 언제나처럼 초라한 술상 끝에 민규가 걸터 앉았다. 원우 줄 건데, 좋아할까... 손에 든 봉지 안에는 몇 가지 간식거리가 담겨 있었다. 입이 유독 짧아 자기가 와서 뭔갈 먹이지 않으면 안 먹는 원우 생각에 고른 것들이었다. 넓은 주제가 이리저리 펼쳐진 술자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던 때, 동네가 곧 헐릴 것 같다던데. 라는 말을 들은 민규는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드는 듯했다. 언제쯤이요? 글쎄, 늦어도 올해 말은 아니겠어? 어차피 볼 것도 없는 동네에. 올해 말, 겨울... 올해까지 남은 달을 곱씹던 민규가 벌떡 몸을 일으켜 놀이터로 향했다. 민규 혼자라면 어디에든 몸 하나 누일 곳이 없겠냐, 싶었지만 원우가 있는 지금은 달랐다.
당장 둘이 살 곳을 구하는 것도, 또 원우가 이런 상황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문제였다. 원우가 자신과 사는 것이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하필 여기에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고 추측 정도만 할 수 있었다. 언젠가 원우와 조금 더 나은 곳에 가서 사는 상상을 했었던 적이 있다. 별로 영양가 없는 상상이었지만 원우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원우야, 여기서 말고 더 좋은 데에서 살면 어떨 것 같아? 잠에 취한 목소리였지만 제법 또렷하게 싫다는 목소리를 냈던 원우를 기억했다. 왜 싫어? 이어진 질문에 원우는 그저 몸을 뒤척이는 것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아마도 정이 많이 들어서겠지, 라는 결론이었고 딱히 현실성 있는 상상도 아니었으니 별로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떠난다는 것이 현실이 된 지금은 이야기가 다른 문제가 됐다.
ㅡ원우야, 나 왔어.
ㅡ일찍 왔네?
평소보다 한참은 빠른 시간에 온 민규를 반기던 원우가 순간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얼굴이 조금 굳은 것을 눈치챈 듯 싶었다. 평소에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주제에, 꼭 이런 민감한 일은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챘다. 여기 앉아 봐. 손에 들린 것들을 대충 내려놓은 민규가 제 맞은편을 가르켰다. 덩달아 심각해진 얼굴을 한 원우가 민규의 말을 기다렸다. 우리, 이사 가는 거, 지금도 싫어? 민규도 원우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꺼낸 말이었다. 그때와 목소리 자체가 달라진 것을 느낀 원우는 대답을 한참 망설였다. 꼭 가야 돼? 당장은 아니야. 조금은 마음이 놓인 건지 한숨을 작게 내쉰 원우가 한참 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데, 안 갈 수는 없는 거지? 그래서 물어보는 거지? 작은 고갯짓으로 대신한 대답에 원우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했다. 지금 가는 거 아니고, 생각은 해보라고.
ㅡ우리 나가자.
ㅡ어?
ㅡ산책하러 가자.
별다른 말 없이 떠다니던 침묵을 깬 것은 원우 쪽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눈에 보이지 않아 다소 걱정까지 되려던 찰나였다. 빨리 나와. 신발을 신고 민규를 재촉하는 모습에 얼떨떨한 채로 끌려나온 민규가 자연스럽게 놀이터 쪽으로 향하는 원우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우리 이제 이사 가면 여기 또 못 오겠지? 유달리 놀이터에 애착을 갖던 원우가 한참 놀이기구를 쓰다듬다 던진 질문이었다. 글쎄...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그렇겠지. 현실적인 대답에 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올 수 있으면 이사도 안 가겠지? 답이 정해진 질문을 연신 중얼거리던 원우가 한 군데에 시선을 빼앗겼다. 여기, 우리 여기서 처음 봤지? 정확하게 짚어내는 장소에 민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그때 사실 좀 무서웠는데. 여기 어두워서. 근데 네가 담배를 피우는데, 그게 밝아서 좋았어. 그렇게 담배를 기함했던 것과는 다른 첫 만남에 민규가 피식 웃었다. 근데 왜 못 피우게 해? 나랑 오래 살아야 되잖아.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는 표정이 예뻤다.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그 자리에 앉은 원우가 손가락만 움직여 민규를 불렀다.
ㅡ왜.
ㅡ빨리.
얼굴 좀 펴고. 아직도 표정이 썩 좋지 못한 민규의 얼굴을 잡고 살피던 원우가 입을 맞췄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놀란 민규의 표정이 웃겼는지 원우가 작게 웃었다. 바보야. 나 어디 안 가. 그땐 그냥 헤어지기 싫어서 그랬던 거고... 혹시 네가 잘 살게 되면 나 버릴까봐 그랬어. 너랑 안 떨어질 거야. 불안한 민규를 알았던 건지, 원우가 민규를 달래는 말을 연신 쏟아냈다. 그러니까 자꾸 그러지 마. 지금은... 그냥 지금 좋은 것만 생각하자. 알았지? 고개를 끄덕인 민규가 원우의 옆에 앉았다. 별다른 말 없이 나란히 앉은 둘은 그렇게 더운 여름밤을 견뎠다. 그리고 말로 하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여름이 지나고, 또 날씨가 차가워져도 둘은 같이일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