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th First time/글

[ㅁㄴ] 첫사랑은 처음이라

Monthly MW 2021. 2. 23. 00:20








"뭐요? 원우형이 첫사랑이요?"

"그렇다니까. 그 전원우가 첫사랑. 나도 얼마나 놀랐다고."

"아니, 저 진짜 상상이 안 가는 데요."

"그치? 지 잘난 맛에 사는 우리 원우는 평생 지만 좋아할 줄 알았는데."





흔한 대학교의 흔한 점심시간. 굶어 죽어도 학식은 먹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닌 정한은 오늘도 석민을 끌고 정문 앞 돈가스집에 왔다. 시끌벅적한 경양식 돈가스집에서 우아한 칼질을 선보이던 정한은 대뜸 석민에게 원우의 근황을 꺼냈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생기고 멋있어서 남에게는 1도 관심이 없던, 그래서인지 연애에는 쥐똥만큼도 관심이 없고 남들 연애할 때 피씨방만 주구 창창 들락거리던 전원우가 남들이 하는 그 첫사랑을 시작했노라고. 





"저기요, 윤정한씨. 저 지금 다 듣고 있거든요?"

"응. 괜찮아. 들으라고 한거야."





마주앉은 원우가 제 앞의 정한을 흘기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그 역시 석민과 함께 정한에게 끌려온 안까가운 신세였다. 물론 원우는 제 몫의 돈가스를 난도질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원우의 노력이 애석하게 석민은 그 꼴을 보고 안 먹을 거면 저를 주지 뭐하는 거냐고 타박하곤 남아있는 성한 돈가스를 제 쪽으로 옮기곤 태연히 물었다. 그래서 첫사랑 상대가 누군데요. 저도 아는 사람이에요?





"비밀이야. 근데 원우야. 첫사랑은 안 이루어 진다는데. 너 어떡하냐."

"짜증나. 하필 들켜도 왜 윤정한한테 들켜서."





원우는 이를 바득 갈며 며칠 전 남의 일인 척 정한에게 제 고민 털어놓은 것을 후회했다. 정한이형 있잖아. 내 주변에 어떤 애가 있거든? 걔가 요즘 같은 과 후배만 보면 가슴이 뛰고 답지 않은 행동을 한다고 한다더라. 예를 들면 방금 점심 먹고 왔는데 걔가 밥 먹자고 하면 점심을 한 번 더 먹는다던가. 아, 참고로 걔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연락 한 번 더 해보려고 쓸데없이 걔한테 다른 후배 연락처 물어보고 그런다던데. 걔가 원래 절대 남한테 연락 먼저 안 하는 애거든. 딱히 그 후배랑 사귄다거나 만나고 싶은 건 아니라는데. 아무튼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원우의 질문에 흥미 넘치는 얼굴을 한 정한의 답변은 바로 '원우야. 너 민규 진짜 좋아하는구나.' 였다. 아, 이 인간 알고 있었어. 순간 원우는 잘못 걸려도 한참을 잘못 걸렸거나를 느꼈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커피나 한잔할래?"





식사 후 더 이상 수업이 남지 않은 원우와 정한은 제 자취방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었지만, 수강신청 전날 거하게 한잔하고 일어나지 못해 우주공강을 만들어버린 석민을 위해 세 사람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 원우를 보고 얼죽아 얼죽아 하다가 진짜 얼어 죽어봐야 한다며 툴툴거리는 정한 앞에 커다란 인영이 다가왔다. 





"정한이형. 아까 승철이 형이 엄청 찾고있던데요."

"어. 민규야 안녕? 나 그거 일부러 도망친 거야."

"네? 승철이 형 좀 화내던데요?"

"아아. 그거 내가 쪽지시험 백지 내서 그런 거야. 괜찮아. 신경 쓰지 마. "





형은 졸업할 마음이 있긴 해요? 진심 반 비꼼 반을 담은 민규의 질문에 정한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뭐 때 되면 하겠지. 근데 민규 너는 지나다니는 데 방해되니까 좀 앉지? 나가주면 더 좋고. 허, 저 도서관 가는 길이었거든요? 대충 승철이 찾고 있다고 말은 전했으니 이만 가던 길 가보겠다던 민규는 정한의 옆에서 멀뚱멀뚱 손장난을 치고 있는 원우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원우형. 그때 빌려주신 노트필기 감사했어요. 덕분에 저 중간고사 점수 엄청 잘 나왔어요. 제가 밥 한 끼 살게요."

"다행이네. 그럼 나 술도 사줘."

"네네. 원우 형이라면 밥도 사드리고 술도 사드려야죠."

"엥? 원우이 술 사달란 소리도 해요? 그리고 노트필기 내가 보여달라고 내가 그렇게...아!"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석민의 허벅지를 꼬집은 원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잊지 말고 꼭 사줘. 나 술 좋아해. 





"네. 형한테 매번 받기만 해서 이번 기회에 제가 제대로 보답할게요."

"내가 뭘 해줬다고."

"그럼 전 가볼게요. 연락해주세요."

"응. 그래."





석민은 제가 보여달라 무릎까지 꿇는 시늉까지 해서 겨우겨우 손에 얻은 필기 노트를 민규에는 단번에 빌려줬다는 사실에 충격이 컸다. 짜증을 받아줘도 내가 김민규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받아줬는데! 왜 필기 노트는 김민규에게만 덥석 준단 말인가. 원우에게 자주 들은 말이라고는 '싫어.', '안 해.', '비켜.' 가 대부분인 석민인 매우 억울했다. 





"헐. 형 설마. 민규를?"

"내가 이래서 원우 덕에 졸업을 못 해. 우리 원우가 이런데 내가 불안해서 어떻게 졸업을 해."

"정한이 형, 그럼 졸업말고 자퇴해주시면 안 돼요?"

"너 차이면 해줄게."





정한은 식어버린 제 몫의 커피를 우아하게 홀짝이면서 웃었다. 원우는 확 차여버리고 자퇴시켜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민규에게 차이면 정한보다 자신이 먼저 자퇴서를 제출하게 될 것 같아서. 한편 석민은 필기 노트의 억울함도 잊은 채 안타까운 얼굴로 원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형 어쩌자고 김민규를……."









*











원우는 교탁 바로 앞, 이제는 제 지정석이 되어버린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책상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뜨끈한 볼이 차가운 책상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원우에게는 자세를 고쳐잡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그의 입은 쉴 틈 없이 권순영을 저주했다. 게임하러 가자며 근데 그게 왜 술 게임인 건데. 술 좀먹고 같이 게임해준다며. 왜 술만 자꾸 먹이는 건데. 한두 번도 아니고 또 권순영에게 홀랑 넘어간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원우는 수업은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어지러운 머리와 울렁이는 속을 이끌고 강의실에 들어왔다. 잠을 자도 강의실에서 자고 있으면 수업에 늦지는 않겠지. 원우는 이제는 제 볼의 열기로 뜨끈해진 책상에 얼굴을 부비며 다시 한 번 저주를 퍼부었다. 권순영 나쁜 자식 이 수업 에프 나와라.





"어? 원우형 여기서 뭐 하세요?"

"3교시 여기서 수업.."

"너무 일찍나오신거 아니에요? 아직 1교시도 시작 안했어요."

"으응... 몰라..."





민규가 저를 내려다보며 걱정하는 걸 알았지만 원우는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민규는 혹시 열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축 늘어진 원우의 이마에 손을 올리려 가까이 다가가다 훅 끼치는 알콜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형, 대체 얼마나 드신 거에요? 무슨 일 일 있었어요? 아니이...권순영이... 아직 물기가 남은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원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야! 이 배신자야!"





그런 원우를 깨운 건 헐레벌떡 강의실로 들어온 순영이었다. 같이 달린 주제에 저를 두고 혼자 가버린 원우가 많이 원망스러웠는지 강의실에 도착하자마자 시체마냥 쓰러진 원우를 달달 흔들어 깨웠다. 야, 머리 울려 흔들지 마. 나 이번에도 지각하면 에프라고 나갈 때 깨워달라고 말했잖아. 몰라. 기억 안 나. 





"됐고, 끝나고 해장국 콜?"

"안 먹어. 너 또 순댓국 먹자고 할거잖아."

"야, 한 번 먹어보자니까. 먹어보지도 않고 맛없다고 하는 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비려서 싫어. 이석민이랑 먹던지." 





엎드린 채로 순영을 쫓아내려 대충 허공을 휘적거리던 원우의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분명히 맨투맨 하나 입고 나온 원우의 어깨 위도 익숙한 코트가 덮여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책상 위에 숙취해소 음료와 쪽지가 올려져 있었다. 





[수업 끝나면 연락해요. 같이 해장국 먹어요.     -민규 ]





평소라면 교수님의 말 하나 놓칠세라 원우는 필기에 열을 올릴 원우였지만, 오늘은 밤새 마신 술 때문인지 수업이 끝나고 만날 민규때문인지 좀처럼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원우를 멀리서 바라보던 순영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원우가 제 탓인 것만 같아 괜히 미안해져 제 노트에 열심히 필기하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본 지훈은 오늘 전원우와 권순영의 영혼이 바뀐 게 아닐까 괜히 생각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자마자 원우는 민규에게 연락했다. 수업이 조금 일찍 끝났다며 원우의 강의실 앞이 기다리고 있던 민규는 제가 괜찮은 해장국집을 데려가 주겠다며 원우를 이끌었다. 형, 순댓국 괜찮으시죠? 으응. 좋아. 애석하게도 민규는 원우를 순댓국집에 데려갔고, 그곳에는 이미 순영이 석민을 앞에 두고 뚝배기에 코를 박고 있었다. 





"어? 전원우? 너 아까 안 먹는다며."

"너랑은 안 먹는다는 말이었어."

"뭐래. 아까는 비려서 싫다며."

"나 비린 거 잘 먹어."





원우는 최대한 순영과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민규와 밥을 먹는데 메뉴가 문제일까. 원우는 민규와 같이 먹는다면 해산물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서둘러 생각을 거두었다. 아무리 민규 앞이라도 해산물의 비린 맛은 무리였다. 





"형도 여기 알고 있었구나. 여기 해장에 장난 아니죠?"

"응. 술 먹고 여기만 한 곳이 없지."





원우는 예전에 순영이 했던 말을 대충 떠올리며 먹은 적 없는 음식에 대한 평을 내렸다. 애초에 메뉴가 순댓국 하나인 식당이라 민규와 원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주인아주머니가 순댓국 두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학생 또 왔어? 술 적당히 마시라니까.' 주인아주머니의 아는 채에 민규는 배시시 웃으며 순댓국 먹으려고 술을 먹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사이 원우는 제 앞의 순댓국을 보며 몰래 한숨을 포옥 쉬었다. 나 이거먹고 괜찮을 수 있을까? 





"형 맛있게 드세요."

"응. 민규 너도."





원우는 맛있게 먹으라는 민규의 말을 지킬 수 없었다. 이미 식당을 들어서면서부터 구석구석 베어버린 특유의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숨을 참으며 기계적으로 순댓국을 퍼먹어 식사를 마친 원우는 커피라도 한잔 하자는 민규를 거절하고 냅다 화장실로 달렸다. 숙취에 엉망인 속에 못 먹는 음식을 억지로 밀어 넣었으니 원우의 연약한 위장이 괜찮을 리 없었다. 맑은 위액에 나올 때까지 다 게워낸 원우는 그 날 이후 식욕이 뚝 떨어져 도통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새봄 대학교에는 컴공과 전원우와 조별과제 같은 조를 한다면 과제점수는 기본으로 만점을 먹고 들어간다는 전설이 있다. 원우는 조원들이 가져오는 복붙 자료나 성의 없는 계획서에 만족할 수 없어 조별과제 시작과 동시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너네는 방해하지나 말고 그냥 조별과제에 신경을 꺼. 자료조사도 발표도 내가 해. 너희는 완성되면 내가 자료 보낼 테니까 그것만 달달 외워 서와. 알았지?' 원우는 교수의 질문이 조원들에게 가는 경우를 대비해 일주일 전에 조원들에게 예상질문 리스트를 보냈고, 교수의 질문은 크게 그 예상리스트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즉, 전원우와 조별과제를 한다는 것은 꿀을 빨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석민은 찰싹 같이 원우를 쫓아 같은 조에 들어왔다. 그러나 갑자기 변한 원우의 태도에 석민ㅇ는 어리둥절했다.





"이석민 넌 자료 조사해서 다음 주까지 보내. 인터넷에서 아무거나 복붙해오면 이름 빠질 각오하고."

"아니 원우형, 저번에는 저 못 믿겠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면서요."

"그래서 서운했어? 이번엔 믿어줄 테니까 열심히 해."





단호한 원우의 대답에 석민은 머리를 쥐었다. 아, 이 형이 뭘 잘못 먹었나? 아 얼마 전에 순댓국 잘못 먹어서 고생했다고 했지. 그러니까 이 형은 먹지도 못하는 걸 먹어서 왜. 석민은 머리를 쥐었던 손을 풀며 다른 조원들의 눈치를 봤다. 다들 저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의외로 같은 조가 된 민규는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고,  또 다른 조원인 유라 선배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민규에게 말을 거느라 바빠 보였다. 아, 이거 망했네. 석민은 직감했다. 





"유라 너는 나랑 석민이가 보낸 자료 취합해서 보내줄래? 민규는 공강때 나 같이 보고서 쓰는 거 도와줘. 최종 발표는 내가 할게."

"네. 주말 말고는 시간 있으니까. 필요할 때 불러요."

"나 저거 하기 싫어. 원우야 나도 민규랑 같은 거 할래!"

"유라 너 공강 시간에 알바한다며."

"그렇긴한데..."

"민규 집도 먼데 주말에 여기 오라고 하는것도 그렇잖아. 그냥 둘이서 할게. 괜찮지?"





최근 민규가 솔로라는 소식을 듣고 민규를 노리던 유라는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때마침 같이 듣는 수업에 조별과제가 있었고 목숨을 걸고 민규를 따라 같은 조에 들어오는 것에게 성공했지만 그녀의 알콩달콩 조별과제 로맨스는 원우의 철벽 방어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민규네 집 근처로 우연인 척 이사라도 가야 하나? 전원우 도움이 안 된다. 정말.









*









정한은 공강이라며 자취방에서 온수 매트를 켜놓고 그 속에 폭 파묻혀있던 원우를 끌고 나왔다. 저번에 순댓국 사건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해 죽어가던 걸 죽을 사다 나르며 살려놨으니 어서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겠다는 거였다. 





"형네 동아리 일을 왜 저한테 시켜요?"

"딱 한 시간만 서 있으면 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시간. 내가 이게 수업이랑 겹칠 줄 어떻게 알았니. 나 출결 간당간당해."

"형, 그러니까 평소에 수업을 잘 들어갔으면 됐잖아요."





대학 내 길고양이 보호 동아리에 속해있는 정한은 암묵적으로 성금 모금 활동을 위한 홍보를 담당하고 있었다. 딱히 홍보를 위해 뭘 하지 않아도 매번 정한이 서 있는 성금 함에는 돈이 한 아름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을 대신하기에 원우가 안성맞춤이라 생각한 정한은 다짜고짜 원우를 끌고 나왔다. 응응. 내가 잘못했어. 정한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사과하며 원우의 귀에 고양이 머리띠를 씌워줬다. 이건 또 뭐야. 길고양이 보호 동아리잖아. 고양이 귀 정도는 해줘야지. 원우야. 근데  이 수업 또 에프 받으면 승철이한테 진짜로 죽어. 





"형은 그 전에 저한테 죽을지도 몰라요."

"그럼 영광이지. 수고해."





어쩌자고 저 인간을 만나서. 총총 사라지는 정한을 보며 원우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은 적이 많으니 원우는 이번 한 번은 눈감아 주기로 했다. 이 시간에 권순영과 이석민이 수업 중이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두 사람이 이 꼴을 본다면 그 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사이 훌륭한 입간판 덕에 모금함에는 돈이 착착 쌓여갔지만 쌀쌀한 날씨에 원우의 인내심은 점점 떨어져 갔다. 이쯤 하면 된 거 아니야? 제법 두둑해진 모금함을 힐끗 본 원우가 제 머리 위의 고양이 귀를 잡아채려는 순간 저 멀리서 민규와 유라가 원우 앞으로 다가왔다. 





"어? 원우형 여기서 뭐 해요?"

"엥? 전원우? 머리 위에 뭐야. 너 은근 잘 어울린다."





대충 훌륭한 윤정한 선배를 둔 덕이라고 사정을 설명한 원우는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하필 이 꼴을 민규가 봐서! 안절부절못하는 원우와 달리 민규는 원우의 고양이 귀를 신기한듯 만지작 거렸다. 이거 진짜 같아요. 잘 어울려. 민규가 원우의 고양이 귀에 관심을 가지자 유라가 저도 써보겠다며 원우에게 떼를 쓰기 시작했다. 





"에이. 원우형 귀찮게 하지 말고 가요. 누나 알바간다면서요."

"민규야. 나 아직 알바 시간 남았는데."

"형 가볼게요. 조별과제 할 때 봐요."

"그럼 우리 커피 마시자! 응?"





원우는 붕붕 손을 흔들며 유라를 끌고 사라지는 민규를 멍하니 쳐다봤다. 두 사람은 대체 언제 친해진 걸까. 원우는 제 맘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유라가 부러웠고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오늘 같은 수업도 아니었을 텐데 어디서 만난거야. 원우는 저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석민이 떠올랐다. 석민의 말이 맞았다. 민규는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 사람이 가만히 두지 않을 외모에다 성격은 또 은근히 외로움이 많아 옆자리를 비워두질 않는다고. 원우가 상처받을까 조심스레 말했던 석민이었다. 그래 나도 알아. 근데 알아도 좋은데 어떡하라고. 25년 인생 처음으로 만난 해답을 구 할 수 없는 문제에 원우는 울고 싶어졌다. 





한편. 오늘도 출석 체크 후 바로 책장 위에 얼굴을 박고 늘어져 있던 정한은 교수가 나가자마자 벌떡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나름의 미안한 마음을 담아 따뜻한 아메리카노도 한잔 사 들고 원우가 있을 곳으로 향한 정한은 의외의 상황을 목격했다. 이미 원우의 한 손에는 커피가 다른 한 손에는 핫팩이 쥐어져 있었다. 심지어 목에는 못 보던 목도리까지 칭칭 감겨 있었다. 





"그 커피랑 핫팩은 뭐야?"

"방금 민규가 사다 주고 갔어. 추워 보인다고." 

"좋냐? 아주 광대가 터질 것 같은데?"

"몰라."





정한이 오자 원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다. 한 손에는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핫팩을 소중하게 쥐고 걸어가는 모습에 정한은 머리가 아팠다. 저걸 어쩌냐진짜. 정한은 얼마 전 민규와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그 날은 학식 메뉴가 반계탕이라며 오늘은 꼭 학식을 먹겠다는 석민을 무시하고 그를 파스타 집에 끌고 온 날이었다. 식당에 들어섰을 때 정한이 본 것은 민규와 그 앞에 수줍게 마주 앉은 유라였다. 헉 저 두 사람 뭐에요? 원우형 안 데려오길 잘했네. 호들갑 떠는 석민을 세워두고 정한은 민규 앞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 뭐야?"

"정한 오빠. 민규가 밥사주겠다고해서 온거에요. 저희 그런사이 아니에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은 건 아니고? 에이 오빠도 참. 유라가 혼자 손사래를 치는 동안 민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정한은 그런 민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우의 마음을 저 김민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이거 뭐, 어장도 아니고. 어장에 갇혔는지 모르고 열심히 팔딱거리는 제 사랑스러운 후배를 대신에 정한이 웃으며 경고했다.





"민규야. 적당히 해. 줬다 뺏는 게 더 악질인 거 알지? 반응이 재밌어서 그런 거면 그만둬."

"형, 그건 제가 알아서 해요."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먹고 몇 일간 토악질하던 원우가 떠올라 이를 바득 갈았다. 제가 싫은 건 절대 안 하고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던 사람들은 여태 잘 쳐낸 주제에 민규 앞에서는 싫어도 싫은 티도 안내고, 제 것도 있는 대로 다 퍼주고 있으니 정한은 속이 답답했다. 정한은 그대로 석민을 끌고 가게를 나섰다. 석민아. 오늘은 그냥 학식 먹자.









*









원우는 카페에 앉아 조별과제에 열을 올렸다. 사실 원우에게 석민과 유라의 도움은 의미가 없었다. 혼자 하는 게 편한 원우에게 이번 조별과제는 그저 민규 조금이라도 더 마주치기 위한 핑계였다. 이럴 거면 유라랑 다를 게 뭐야. 그래도 이렇게라도 안 하면 얼굴 마주칠 시간도 별로 없는걸. 원우가 카페에 앉아 집중하는 사이 도착한 민규는 원우의 옆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집중하느라 민규가 온 것도 몰랐던 원우는 민규가 노트북을 꺼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어? 거의 다 끝났어. 커피 시키고 있어."

"네. 천천히 하세요."





민규는 노트북을 켜놓은 채 커피를 주문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규의 켜진 노트북에서 메신저가 자동으로 연동되었는지 조용한 카페에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라도 될까 봐 소리를 줄이려 민규의 노트북에 가까이 다가간 원우는 화면에 올라온 메시지를 보고 표정이 굳었다. 





[유라누나 : 민규야, 너 언제 올 거야? 나 너 기다리고 있는데. ]

[유라누나 : 그리고 주말에 시간 있어? 그때 밥 사준 거 고마워서 내가 술 살까 하는데. ]





커피를 주문하고 제 자리로 돌아오는 민규에 원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제 자리로 돌아온 원우였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오늘 둘이 만나기로 한 걸까? 내가 막차시간까지 민규를 붙잡고 있으면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할까? 원우는 초조함에 제 손톱을 만지작 거렸다. 



처음에는 마냥 민규가 좋아했다. 차가운 외모와 다르게 동기들 앞에서 밝게 웃는 모습도 좋았고 선배들 앞에서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도 좋았다. 가끔 징징거리며 불만을 표하는 모습도 귀여웠고 툴툴거리지만 남을 챙기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그냥 그 모습이 좋았던 것 뿐인데 이제는 민규의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게 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초조했다. 모두에게 다정한 민규가 불안했다. 원우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행복한 일보다 괴로운 일이 더 많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저를 뒤흔드는 이 서툴기만 한 첫사랑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다시 제 앞의 노트북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민규야. 메일 보낸 거 확인해줄래?"





석민과 유라가 자료조사를 했다지만 예상했던 그대로 형편없는 자료라 결국에는 원우가 다시 자료조사를 해 민규에게 보냈다. 누가 봐도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를 정리해달라고 보낸 원우에 민규는 난감했다. 여기서 건들면 안 될 것 같은데.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고뇌하는 민규에게 원우가 물었다. 왜, 이상한 부분 있어? 아니요. 반대로 고칠 게 없어서요.





"확인해달라고 보낸 거였어. 이상 없으면 그걸로 제출할게. 끝."

"그럼. 결국 형이 혼자 다 한 거잖아요?"

"너도 도와줬잖아."

"저 별로 한 거 없는 데요."





민규의 말에 원우는 말없이 웃으며 늘어놓은 짐들을 챙겼다. 어차피 혼자 할거였고 그냥 너는 보고 싶어서 부른 거야. 원우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과제를 마치니 시간은 벌써 9시를 넘었다. 그래도 민규의 막차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 이제 민규는 유라를 만나러 가겠지. 보내기 싫지만 이대로 민규를 잡아둘 수도 없었다. 가자. 너도 금요일인데, 약속 있을 거 아니야. 원우는 민규를 보내고 그대로 순영의 집에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우울할 틈도 없는 곳에 가면 되는 거겠지 뭐. 평소라면 갈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제 자취방으로 돌아갔다가는 주말 내내 우울한 감정을 달고 지내야 할 것 같은 원우의 결정이었다.





"형도 같이 가요."

"응? 어디를?"

"오늘 대현이 제대했다고 해서 다들 모여있거든요. 저도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고 얼굴만 보고 올 건데, 어떠세요?"





원우는 유라와 단둘이 만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제 우울했던 마음이 괜히 멋쩍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절대 가지 않을 곳에 속하는 과 내 술자리에 참석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규가 도착하자 민규의 옆자리를 차지한 유라는 찰싹 붙어 혀짧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유라는 이내 취했다며 은근슬쩍 어깨에 기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에게 얌전히 어깨를 내어준 민규의 모습에 마주앉은 원우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었다. 바보같이 좋아하지도 않는 술자리에 괜히 따라와서는. 결국 원우는 참지 못하고 피하는 걸 선택했다. 더 이상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싶지 않았다. 연거푸 제 잔만 홀짝홀짝 비우던 원우는 제가 몰래 빠져도 모를 만큼 달아올라 있는 분위기를 확인하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원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민규와 눈이 마주쳤지만 원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하게 술집을 나섰다.







"저기, 수지누나. 유라누나 취한 것 같은데.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저 지금 급하게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어? 송유라가? 저 말술이 무슨 일이래. 야! 일어나봐."





유라를 그의 동기에게 맡긴 민규는 재빨리 제 짐을 챙기고 원우를 따라나섰다. 느릿느릿 걷는 원우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은 민규는 원우의 옆에서 같이 걷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원우 형.





"넌 왜 나왔어? 아직 막차시간 멀었잖아."

"저도 슬슬 들어가 보려고요. 내일 아르바이트도 있고."

"근데 너 역 가려면 반대쪽으로 가야 하는데?"





역과는 반대쪽인 제 자취방을 향해 같이 걸어가는 민규에게 원우가 물었다. 형 데려다주고 가려고요. 뭘 데려다줘. 그냥요. 술도 깰 겸. 그렇게 학교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 원우의 자취방을 향해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원우가 사는 맨션이 보이기 시작할 때 민규가 대뜸 물었다.





"형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 믿어요?"

"응. 처음이 니까 좋아하는 방법도 서투를 거 아니야. 그래서 이루어지기 힘든 게 아닐까."





민규가 걸음을 멈췄다. 서툰 게 꼭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원우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민규를 바라봤다. 민규 너 알고있었구나. 그럼 이제 너는 나에게 어떤 말을 할까. 좋아하지 말아 달라고 정중히 부탁할까? 아니면 자기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회유할까? 머릿속이 새하얘진 와중에도 원우는 이제 윤정한을 자퇴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잘 가요. 정한이형. 민규는 열심히 현실 도피 중이던 원우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래서 형은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하실 거에요?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저기, 민규야. 나는."

"저는 서툰 것도 좋아요. 그게 뭐 어때서요.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거 너무 아깝잖아요. 저는 다 괜찮아요. 그리고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거 다 거짓말이래요. 그러니까, 원우형. 저랑 한번 만나볼래요?"









*









두 사람의 소식에 정한은 원우를 붙잡고 늘어졌다. 김민규가 제 입맛대로 원우를 홀랑 잡아먹어 버리기 전에 정한은 원우를 세뇌 시킬 생각이었다. 카페에 앉아 삼분에 한 번꼴로 정한은 원우에게 물었다.





"원우야. 몸도 마음도 한 번에 주면 된다 안 된다?"

"안될 거는 뭔데요."

"어? 민규 언제 왔어?"

"방금요. 원우형, 밥 먹으러 가요."





저를 두고 망설임 없이 일어나는 원우에게 정한이 말했다. 원우야, 나는 너를 이렇게 발랑까지게 키운 적이 없어요. 자 어서 말해봐. 된다 안 된다? 진짜. 누가 누굴 키워요. 원우는 샐쭉하니 대답하곤 트레이를 들고 카운터로 가버렸다. 그런 원우를 허망하게 지켜보던 정한에게 민규가 웃으며 말했다. 





"형, 제가 알아서 한다고 했죠?"

"너 장난이면 지금이라도 그만둬."

"형은 장난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쳐요?"

"뭐?"

"저는 아닌데. 저도 원우형 마음에 들려고 노력 많이 했는데. 형이 그걸 장난이라고 하시면 서운하죠. 그리고 이제 저희 문제에 신경끄시죠?"





정한은 제 할 말만 하고는 뒤돌아 카페를 나서며 제 목도리를 풀어 원우의 목에 감아주는 민규의 등을 오랫동안 노려봤다. 저 싸가지 없는 놈. 조만간 저 늑대의 탈을 쓴 여우의 본 모습을 원우에게 까발려버리라. 정한은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