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 애정
원우는 다정하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여덟 살 꼬맹이가 모래놀이를 하다가도 문방구에서 100원짜리 불량식품을 사와서는 친구들에게 노나 주기 일쑤였다. 여차하면 애들 몰래 나에게 200원짜리 아이스크림 바도 사준 기억도 난다.
지금도 여전히 꼬물대는 손끝으로 소매를 잡고 열심히 쏘다닌다. 내가 굳이 도와달라고 안 하는데도 쉬는 시간에 쪼르르 다가와 물었다.
필요한 거 있어? 학습지 필기한 거 보여줄까. 5교시 수행평가 잊지 말구. 타박도 덤으로 얹었다. 좋게 표현하면 친절하고 나쁘게 표현한다면 오지랖이 넓다고 해야 하나. 원우는 원우 자신을 돌보는 일에 가장 서툴러 했다.
옆에서 털럭이는 가방이 속을 훤히 내비친다. 정갈히 세워진 교과서 하며 가죽 재질의 원형 필통을 보란 듯이. 나 참. 가방을 메기 전에 확인도 안 하고 메는가 보다. 내 속도 모르고 원우는 그저 싱글벙글 웃었다. 손을 뻗어 내 목뒤를 감싼 카라를 다듬어주었다.
"민규야. 셔츠 깃 뒤집어졌다."
"너부터 챙겨. 가방 열려있잖아."
그런 원우를 챙겨주다가, 반해버렸는지도.
애정.
저 멀리 원우가 서 있다.
"민규야."
동그란 안경을 쓰고 회색 후드티를 입은 채로 팔을 벌렸다. 코를 찡그리는 특유의 미소를 짓는다. 나는 달려가서 안기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렀다.
가끔은 밉다. 꿈에서도 찾아와 날 괴롭게 하는 원우가.
"..."
어차피 나랑 사귀지 않을 거면서.
잠이 덜 깬 눈을 비벼대며 나른하게 걸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인 아침 6시쯤. 손바닥 크기의 머그컵을 꺼내어 핫초코 가루를 부었다. 미처 담기지 못한 잔여가 흩날린다.
원우의 모든 처음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애인이 되고, 시답잖은 데이트를 하면서 손깍지도 끼고, 입술을 부비고, 마침내는 몸의 은밀한 곳을 어루만질 수 있다면.
헛된 바람이란 건 알고 있다. 원우는 이미 짝사랑하는 애가 있었고 더럽다는 소리를 들어도 힘없이 웃으며 넘겼다. 하여간 미련하기 짝이 없다. 어깨가 좀 넓으면 뭐해. 매번 움츠려드느라 좁아 보이는데. 만일 원우가 그놈한테 잘해주려 했었다면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돌아버렸을 거다.
그새 포트에 끓여진 물을 컵에 따랐다.
"후-."
너무 데웠나. 젓가락 한 짝으로 휘휘 저으며 입김을 불었다. 향이 물씬 풍긴다.
빈 잔을 싱크대 위에 놔두고 휴대폰 갤러리 속 원우와 찍었던 사진들을 넘겨보다가 시간이 다 됐다. 교복 마이 위에 패딩을 걸치고 백팩을 메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외쳐도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맞벌이를 하시는 탓에 거의 자취였다. 해외 출장을 몇 달 동안 나갔다 오셔서 통화로 주고받는 대화도 어색함이 묻어났다. 마지막으로 사담을 나눈지도 한두 달이 넘었을 터다.
도보로 약 십오분. 평지와 오르막길을 지나면 교정이 내비쳤다. 원형의 잔디 바닥을 둘러싼 붉은색의 카펫 형 트랙이 스프링클러가 뿜어내는 물줄기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학교 건물 입구 쪽 출결체크기에 학생증을 찍고 교실로 올라갔다.
애초에 공부는 손 뗀지 오래라. 수업종이 치고 책상에 엎드려 멍 때리는 데에, 꾸벅 조는 데에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어느새 12시 20분이 다 됐다. 나는 선생님이 나가시자마자 6반으로 향했다. 교탁 바로 앞자리에서 원우는 과묵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제법 시끄러운 분위기 안에서도.
"뭐 읽냐."
표지를 보려고 몸을 기울이자 원우가 손바닥으로 가린다. 맞춰 봐. 로맨스 소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찍는 실력 하난 기가 막히잖아.
실력은 개뿔. 제목만 바뀌고서 연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 늘어놓은 글들이 몇 권째인지 모르겠다. 원우 딴에는 조금이나마 도움을 얻고자 했겠지만 분명 돈 낭비였다. 내 경험상 책으로는 연애사정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티끌만큼도.
"얘들아 가자."
반장의 지시에 다들 복도로 나갔다. 원우도 책을 접고서 일어났다. 우린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채 급식실로 향했다. 오늘 메뉴가 무엇이었더라. 원우가 좋아하는 쪽갈비였나. 식판과 수저를 집었다.
갖가지 반찬들과 계란국을 담은 후 자리를 물색했다. 기둥 옆에 자리 비어있는데. 내 말에 원우도 쳐다본다. 저기 앉자. 그래. 혹여나 국물을 쏟을까 조심히 발을 옮기고 나서 테이블 밑 원형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또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
계란국에 떠있는 둥근 쪽파 채를 골라내려 젓가락질 하자 원우가 타일렀다.
"맛없어."
"몸에 좋잖아."
"그래도."
"아-."
원우는 식판 구석에 모아둔 쪽파들을 숟가락으로 약간 떠서 내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자잘한 걸 거른다고 건강이 상하는 것도 아닌데. 머뭇대다 떠먹여주는 손길에 결국 받아먹었다.
"잘 먹네."
전원우라서 져준다. 웃는 얼굴을 보며 손가락으로는 홧홧해진 귓바퀴를 문질렀다.
서로 다른 반에서 지내는 만큼 할 얘기도 많다. 들려주고 싶어서 모아두다가 만나면 털어놓으니까. 그래봤자 나는 보고 싶었다는 한마디로 정리되길래 늘 원우의 일화를 듣기만 했다. 이동 수업인데 필통을 까먹었다는 둥 발표할 때 말을 더듬었다는 둥.
잘 대화하다가도.
"체육시간에 다쳤나 봐. 보건실에 누워있대."
내가 곁에 있는데 그놈 얘기를 하는 원우에 속이 확 상한다.
"걔가 그렇게 좋아?"
"응. 좋아."
뻔한 확답에 역시나 했지만. 씹던 감마저 덜 익었는지 떫어서 뱉어냈다.
"잠시만. 입 헹구고 올게."
내 기분을 알긴 하는지. 원우는 고개를 주억거리곤 열심히 허기를 채웠다.
소화시킬 겸 운동장을 돌았다. 가을인데 반팔, 반바지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축구하는 무리를 구경하니 내가 다 추울 지경이다. 원우는 손을 재킷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민규야 나 응원해줘."
"무슨 응원?"
"성공할 수 있다고."
갑작스럽지만 원우는 등수도 높았고 목표로 삼은 대학도 명문대였으니. 아마 내신 쌓기용으로 교내 대회라도 나가려는 듯했다. 근데 보통 1등할 수 있다고 표현할 텐데. 영 미심쩍다.
"파이팅, 잘하고 와."
별거 아니겠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니 헤실거린다.
석식 시간, 매점에서 빵을 사 먹고 음료수 캔을 따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학원에 갔어야 할 원우가 운동장에 서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캔을 찌그러뜨리고 쓰레기통에 던졌다. 무슨 상황인지는 곧잘 알 것 같다. 고백했다. 숙맥 전원우가. 그리고 차였다.
원우는 역겹다 지껄이며 떠난 뒷모습을 가만 눈으로 좇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손은 저절로 주먹을 쥐게 됐다.
"상처받지 마. 그럴 가치도 없어."
돌아보는 원우의 눈망울이 일렁였다.
저 새끼가 뭐가 좋다고 고백했던 건지 따지고픈 걸 꾹 눌러 참았다.
"너에게 험담만 늘어놓고. 늘 애인 갈아끼워서 빈속 메우려고 아등바등하는 꼴 안 보여?"
"내가 챙겨주면 돼."
"그럼 너는."
이 와중에도 정말, 답답하게 굴었다.
"원우 너는 누가 챙겨주는데."
"..."
"넌 항상 너만 못 챙기더라."
항상 옆에서 원우가 힘겨워하면 위로해주는 게 익숙했다. 한낱 이기심에 난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냐고 싫증도 난지 오래였고. 제발, 내가 안 챙겨줘도 되었으면 했다.
늦겠다, 나 갈게. 고개를 푹 숙인 원우는 가방끈을 추스르곤 걸음을 재촉했다.
"잘 가."
축 처진 뒷모습이 교문 너머로 사라졌다. 한동안 서있다가 종소리에 발을 떼어냈다.
잠을 설친 다음날, 원우가 병가를 냈단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6반 친구에게 전해 들었다. 학교에서는 휴대폰도 압수당했기에 연락도 할 수 없고 초조해졌다. 남몰래 울고 있다면, 감기 몸살과 겹쳐서 끙끙 앓는다면.
원체 듣지도 않는 수업. 부모님을 뵌다는 핑계로 조퇴증을 끊었다.
[원우야 어디 있어]
휴대폰을 돌려받고 바로 문자를 보냈다.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다 거두기를 반복했다. 단잠이라도 잤으면 하는 마음에.
문자 창을 연거푸 살펴본지 사흘째, 드디어 연락이 닿았다. 밤 열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처음 우리가 만났던 곳에]
답장을 보자마자 이불을 걷어 젖히고 급히 파카 잠바를 맨투맨 위에 껴입었다. 신발을 꺾어신고서 원우가 있을 장소로 뛰쳐나갔다.
길목을 지나 조그마한 달동네에 다다랐다. 가로등마저 드문드문 놓여있는지라 어둑했다. 넓적한 계단을 한참 오르다 길 끄트머리에서 연보라색의 카디건을 걸치고 앉아있는 옆모습을 찾았다.
"원우야."
내 부름에 돌아본 원우는 제 옆을 손바닥으로 쳤다. 절벽처럼 끊어진 길이라 위험하겠다 싶으면서도 나는 순순히 붙어 앉았다. 발밑에는 주황빛 맴도는 거리의 풍경이 자리 잡았다. 낙후된 집들이 가득하다는 현실 사정과는 동떨어지게 운치도 있고 감미롭다.
옆에서 원우는 고개를 숙인 채로 손을 꼼지락댔다.
"손 이리 줘. 데인 거야?"
"으응. 반찬 만들다가 살짝."
물집 잡힌 손바닥을 펴서 내 무릎 위에 두었다. 혼자서 요리한답시고 허둥지둥 댔을 모습이 훤하다. 채소를 썰다가 칼에 베이면 몰라, 뜨거운 물건에 데이기는 어려울 텐데 말이다. 마스크에 반절 이상 가려진 원우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오랜만에 보는데 얼굴 좀 보자. 살며시 원우의 마스크를 잡아 내렸다. 그새 얼굴이 수척해져 있다. 굶기라도 했는지. 잘 챙겨 먹고 다니라고 누누이 얘기해도 여전하다. 이러다가는 내가 식모라도 해줘야 할 판이다.
빤히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원우는 나의 눈길을 피했다. 찬바람이 피부를 흝었다.
"춥겠다."
카디건만 입고 오면 어떡해.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원우에게 덮어줬다. 그래도 추울까 봐 끌어안자 얄따란 몸이 붙어왔다. 원우도 내 허리에 살며시 손을 얹는다.
뭐라 말을 건네야 할지 망설여진다. 괜찮냐고, 힘들었냐고 묻기는 싫었다. 그 일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셈이니까. 차라리.
"걱정했어. 많이."
차라리 전해주고 싶다. 사흘을 어떤 마음으로 지냈었는지. 원우는 내 목덜미에 잘게 떠는 숨결을 내었다.
"미안해."
사과하란 뜻이 아니었는데. 안던 팔에 더 힘을 주고서 원우의 머리칼에 고개를 파묻었다. 은은한 샴푸 향이 배어 나왔다.
원우가 품 안에서 작게 바스락거렸다.
"민규야, 나 집에서 머무는 사이에 생각했어."
원우가 내 팔을 살짝 풀고는 얼굴을 마주했다.
"지금 네 모습이, 내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 같다고."
챙김을 받는다는 게 애정 어린 행동처럼 느껴져서. 원우는 배시시 웃어 보이면서도 눈물을 글썽였다. 불빛이 눈가를 따라 일렁인다.
왜 울려고 그래.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원우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그런 착각도 들고."
분명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원우가 코를 훌쩍이자 왠지 귀여워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원우의 손을 잡으니 차가웠다. 온기가 전해지도록 내 두 손으로 포개었다.
"좋아해 원우야."
"... 어?"
"좋아해."
첫마디도 꺼내지 못해서 끙끙대던 걸 이제서야 건네고 나니 후련하다. 거절당할까 봐 조금은 두렵긴 하지만 진작에 털어놓을 걸 그랬다. 원우는 꽤 놀랐는지 눈이 커져서는 나직하게 되묻는다.
"고백하는 거야?"
"응, 사귀어줄래?"
오랫동안 얽히는 시선. 끝에 원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 지긋이 눈을 감고 조심스레 입술을 맞대었다.
나의 처음을 너에게.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