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 처음의 관계
분명 김민규는 자원봉사자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딴에는 선행을 베풀고 있다고 착각하는 복지센터의 수많은 봉사자 중 한 명. 그중에서도 봉사동아리 때문인지 이 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봉사를 나오던, 대학생. 별 관심없던, 그저 기사에 올라갈 사진을 위해 눈웃음 한 번 쳐주러 갔던 곳에서 만났던 사람 중 하나.
"아, 김민,규, 민규야 천천히……"
어쩌면, 그곳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널 봤으니 '-뿐이었다'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을 수도.
처음의 관계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원우야 오늘은 끝나고 푸른복지센터로 와야겠구나.' 메시지를 읽고 '네'라는 짧은 답을 보냈다.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에 처박고 카페를 나왔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푸른복지센터로 오라는 건, 그 허영 가득한 사람을 보러가야한다는 얘기였으니까. 손에 들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괜히 아이스로 시켰나. 손 끝이 시렸다. 컵홀더를 챙겼어야 했는데. 천천히 손끝부터 손가락을 타고 찬 기운이 전해졌다. 커피를 손에 들고 차에 탔다. 운전석에 앉아 커피부터 내려놓고 시동을 걸었다. 히터를 켜고 곧바로 출발했다. 야근하려 했었는데, 일정이 달라졌으니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어제 하다 만 일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잔뜩 띄워진 글자와 숫자들이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커피 옆에 결재할 서류가 두 개 정도 놓여 있었다. 일단 이건 금방 끝날테니까, 오늘 꼭 해야하는 건 다 끝낼 수 있겠다. 한동안 계속 모니터만 바라봤더니 눈이 시큰거렸다. 서랍을 뒤적거려 일회용 인공눈물을 꺼냈다. 요새 들어 눈이 너무 건조하다. 히터를 너무 세게 틀었나? 다 쓴 인공눈물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눈을 깜빡였다. 스며들지 못한 인공눈물이 주욱 흘러내렸다. 휴지를 뽑아 대충 닦아내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커피에 들어있던 얼음은 녹은 지 오래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크고 조용한 방을 울렸다. 들어오세요. 부드럽게 열린 문 사이로 이비서가 들어왔다. 이비서 손에는 결재해야 할 서류도, 일정이 적힌 패드도 아닌 샌드위치가 들려있었다. 또각거리지만 굽이 낮아 날카롭기보단 낮게 울리는 굽 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점심 시간인데도 나오시질 않길래 또 식사 거르시는 것 같아 사왔습니다."
"굳이 챙기지 않아도 된다니까, 이비서는 점심 드셨어요?"
"저도 간단하게 샌드위치 먹었습니다. 음료는 우유로 사왔는데, 괜찮으시죠?"
"그럼요. 고맙게 잘 먹을게요."
간단한 대화를 마치자 이비서가 걸음을 돌렸다. 최근에 몇 번 밥을 먹지 않았더니 이비서가 눈치 채고 가끔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줬다. 처음에는 본인 사비로 음식을 사오길래 고맙기는 했으나 마음이 쓰여 법인 카드를 따로 챙겨줬다. 어차피 저는 회식같은 것도 참여 안 하니까요, 그걸로 자유롭게 쓰세요.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금세 밖이 어둑해졌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벌써 6시가 다 되었다. 벌써 퇴근 시간이네. 컴퓨터를 끄고 책상 위를 정리했다. 겉옷만 챙겨입으면 바로 나가도 되는데 나가고 싶지 않아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가기 싫다, 진짜. 눈을 감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한참이라 해봤자 채 오 분도 안 되는 시간이긴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려있던 코트를 챙겼다. 불을 끄고 방을 나왔다. 방금 있던 이사실과 다르게 밖은 너무 환했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이비서에게 먼저 간다는 말을 남기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다가 사고가 나면 거길 가지 않아도 될까. 같잖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오늘은 또 무슨 기사를 쓰려고 나까지 부르는 건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아버지가 머리에 들어왔다.
회사에서 푸른복지센터까지 거리가 그닥 멀지 않아 금방 갈 줄 알았는데, 퇴근 시간이라 생각보다 차가 많이 막혔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십 분 정도 늦게 도착했지만, 딱히 죄송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령 들었다고 해도 입 밖으로 꺼낼 생각조차 없지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아버지가 있을 원장실로 향했다. 복지센터라고 어르신들이 주를 이루는데, 4층이나 되는 건물엔 엘레베이터라곤 고작 하나뿐이고 어르신들보단 젊은 원장이 있는 곳은 낮고 조용한 1층이라니. 복지센터를 골라도 참 아버지같은 곳을 골랐다. 원장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작게 기침하여 가라앉은 목을 풀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관리 잘 된 가죽 소파에 앉아있는 어머니와 원장, 그리고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한껏 멋내고 오셨네.
"왔구나. 와서 앉거라."
아버지의 앞에 마주 앉았다. 사진 찍을 때 보여주기 용으로 부른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버지와 원장은 둘이서만 얘기를 나눴다. 아버지 옆에 앉은 어머니는 찻잔 손잡이만 건드리며 가끔 차를 홀짝였다. 내 앞에 놓여있는 찻잔은, 김이 나기는 커녕 언제 탔는지 벌써 다 식은 것 같고. 할 게 없어 괜히 손만 꼼질거렸다. 아, 오늘 진짜 기분 안 좋은데. 초점 없이 찻잔을 바라보다가 오랜만에 게이바나 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피곤하기도 하고 저번에 웬 좆같은 놈한테 걸려서 핸드폰 번호를 바꾼 이후로 간 적이 없는데. 설마 그 새끼가 아직도 거기 있겠어. 이내 갈까? 했던 생각이 가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걸로 하고, 저희 사진 하나 찍웁시다. 제가 미리 불러둔 기자가 도착해서 앞에 있다는데, 들어오라 할까요?"
"그러죠. 마침 오늘 원우도 있고, 집사람까지 있으니 좋네요. 하하."
사람 좋은 웃음을 날리며 하하 거리는 꼴이 참 보기 싫다. 원장이 눈짓을 하니 문 앞에 서있던 아주머니가 문을 열었다. 두 세명의 카메라를 든 사람이 들어왔다. 기사도 하나로는 부족한가보지. 속으로는 실컷 씹어대면서도 옆으로 오라는 아버지의 말에 나도 똑같이 웃으면서 옆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생각해보면 나도 저 사람하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사진 찍겠습니다, 하는 소리에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원우 너도 집으로 가는 거면 같이 타고 가지 그러냐. 네 차는 다른 기사한테 연락 넣을테니."
"아뇨. 들릴 곳이 있어서요. 조심히 가세요."
원장이 따라 나와서 배웅을 했다. 독립해서 따로 나와 산 지가 언젠데 집에 같이 가자는 얘기를 꺼내는지, 친한 척 구는 꼴이 이젠 대단해보이기까지 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복지센터 건물 바로 앞에 주차해둔 차에 타 시동을 걸었다. 핸들을 잡았고, 엑셀을 밟았다. 차가 부드럽게 복지센터를 빠져 나왔다.
평소 가던 게이바에 도착해 자주 앉던 자리로 향했다. 바텐더에게 주문하고 가게 안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딱히 취향인 사람이 없었다. 오랜만에 들렸는데 기대 이하라 실망이 컸다. 기분 좋아지려 온 거였는데 그닥이네. 바텐더가 내 앞에 술을 내려놨다. 시킨 술만 마시고 나가야겠다. 앞에 놓인 유리잔에 든 양주를 한 모금 마셨다. 으, 쓰다. 오랜만에 마신 탓인지 전보다 세게 다가오는 술 맛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날이 아니다 싶어 그냥 가려는데 누군가 옆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어, 얼굴 괜찮네.
"서준우예요. 길게 얘기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쪽은요?"
자리에 앉자마자 작업 멘트 하나 없이 원나잇을 제안하네. 혹시 얘도 저번처럼 그런 새끼는 아닐까 싶어 잠시 고민했지만, 원나잇 하려고 왔는데 허탕치고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어 고민은 접었다.
"나가요."
서준우가 먼저 일어났다. 나도 곧바로 따라 일어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양주는 반 이상이 남아있었다. 앞서 걷는 서준우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 보니까 키도 큰 거 같고, 탑 같은데 설마 바텀은 아니겠지. 오랜만에 하는 원나잇이라 별 생각을 다 하네. 딴 생각을 하며 걷다가 앞에서 뛰어오던 사람을 보지 못했다.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나를 쳤고 넘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균형을 잃어 옆에 있던 빈 테이블에 허벅지를 부딪혔다. 작게 신음을 흘리자 부딪힌 사람이 안절부절 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괜찮으세요? 제가 늦어서 뛰어오다가……"
목소리 좋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부딪힌 허벅지가 살짝 욱씬거렸다. 그래도 별 문제는 없을 거 같아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목소리만 좋은 게 아닌 거 같다. 취향을 때려박은 거 같은 얼굴에 순간 말이 없자 남자가 내 팔을 살짝 건드렸다.
"아, 괜찮아요."
"진짜 죄송해요. 제가 조심성이 없어서……"
이 남자랑 자고 싶은데. 겉과 속이 따로 놀았다. 죄송하면 나랑 한 번 자자고 할까. 잠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까 같이 나가던 서준우가 내가 없는 걸 눈치챘는지 옆으로 다가왔다. 상황 파악을 못한 서준우가 나와 남자를 번갈아보는데, 갑자기 또 허벅지가 욱씬거렸다. 별로 세게 부딪힌 거 같지도 않은데 왜 이래. 살짝 표정을 찡그리자 남자가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잠시만요!"
남자는 아까 내가 앉아있던 바로 뛰어가 바텐더와 짧게 얘기를 나누는 듯 했다. 바텐더가 내쪽을 잠깐 쳐다봤고, 이내 남자에게 작은 종이와 볼펜을 건넸다. 서준우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무슨 일 있어요? 하고 말을 걸었다. 잠시만요. 어깨 위에 올려진 서준우의 팔을 내렸다. 남자가 다시 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제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혹시 계속 아프시거나 그러시면 연락 주세요! 따로 명함은 없고 제 번호 남겨드릴게요. 여기, 제 이름하고 번호예요."
"저 진짜 괜찮아요."
"아프신 거 같은데…… 아무튼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제가 지금 가봐야 해서, 진짜 죄송해요!"
남자는 나한테 종이 한 장을 건네주곤 먼저 자리를 떠났다. 잠깐 욱씬거리긴 했지만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아 괜찮다고 넘어가도 될 일이었지만 굴러들어 온 떡을 굳이 발로 밟을 필요는 없었다. 남자가 건네준 종이를 만지작 거리다 적혀있는 글씨를 바라봤다. 김민규. 010-1997-0406. 이름이 김민규구나. 이름이 얼굴하고 잘 어울리네. 종이를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아까 안절부절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까만 피부에 곧고 진한 눈썹, 그리 두껍지 않던 입술. 키는 나보다는 좀 더 크고. 움직이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서 있었더니 서준우가 다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 가요?"
"죄송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서준우랑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충 괜찮다 싶어서 원나잇 하려 했던 건데, 더 좋은 상대가 나타나버렸다. 게다가 괜찮다는데 기어코 제 발로 와 주기까지 했는데. 어깨 위에 올려진 서준우의 팔을 쳐내듯 내려놓았다. 서준우를 뒤로 하고 걷는데 뒤에서 기가 찬 듯 바람빠진 웃음소리가 들린 거 같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고 게이바를 나왔다. 손에 들린 종이를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라곤 김민규의 얼굴과 연락할 구실뿐이었다. 아, 섹스하자고 언제 말하지. 그 생각도.
게이바에 다녀온 이후로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연락해야지 했으면서도 마땅히 연락할 구실을 찾지 못했다. 솔직하게 허벅지가 아팠던 건 그 때 잠시뿐이었고, 괜찮다고 몇 번이나 사양했으면서 연락하는 것도 좀 웃기지 않나. 아프다는 핑계가 제일 좋은 연락 방법이긴 했지만, 다른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일주일이나 흘렀다. 뭐, 바쁘기도 했고. 그래도 김민규가 날 잊기 전에 빨리 연락해야 하는데. 그냥 갑자기 아프다고 할까? 괜찮은 줄 알았더니 좀 아프네요.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 이제와서. 아무래도 좀 웃긴 것 같아서 그냥 내 방식대로 가기로 했다. 오늘 일 끝나면 연락 해봐야지.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말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본능적으로 이비서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걸 눈치 챘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일단 먼저 앉자."
아버지였다. 평소에 회장실에서 나오지도 않으면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행차하셨대. 딱히 좋지 않은 표정으로 아버지의 맞은 편에 앉았다. 공기가 무거웠다. 회사 일은 좀 어떠냐. 답답했던 공기가 더 텁텁해진 기분이었다. 갑자기 와서 저런 말을 왜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직원들이 낙하산이라고 수군대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군대를 다녀와 대학 졸업 이후 혈연으로 바로 이사 자리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그 소리가 듣기 싫어 회사 일이라면 눈엣가시가 안 될 정도로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는데. 잠잠한가 싶더니 최근에 또 낙하산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건가?
"괜찮습니다."
어중띈 대답을 내놨다.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 도대체 대화 사이에 무슨 간극을 이렇게 두는 건지, 아버지랑 대화할 때마다 생기는 이 침묵은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다.
"푸른복지센터 후원 일을 네게 맡기려고 하는데, 할 수 있겠지."
아버지의 시선이 정확하게 내게 꽂혔다.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쳤다. 3년이나 하시던 일을 갑자기 저한테요. 하고싶지 않았다. 회사 일로도 할애되는 시간이 많았다. 마음에 두고 있지 않는 복지센터 후원까지 손을 뻗고 싶지 않았다. 도움의 손길에 진심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굳이 차가운 손을 내밀어서 좋을 게 뭐가 있어서. 아버지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했으니, 너도 사회적으로 좋은 인식을 남겨야지. 그렇게 가끔 얼굴만 비추는 정도 말고."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장담이 없습니다. 해오시던 대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게 나을 듯……"
"나는 네게 거절하는 걸 가르친 적이 없는 듯 싶은데."
이미 다 정해져 있는 거였다. 내 의사따윈 중요하지 않았고, 전부 자기 뜻대로 결정을 내리고 와서 권유의 이름으로 하는 강요. 한 두번이 아니었으니, 지금 거절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건 분명 알고 있었다. 예전에도 원하지 않는 대학을 가라고 해서 거절했다가 어머니만 중간에 껴서 한참 고생했는데, 이번에도 그럴테지. 어머니한테 피해를 줄 순 없었다. 죄송합니다. 결국 또 꼬리를 내리는 건 내 쪽이었다.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 내로 얼굴 한 번 비추고 오거라. 원장하고 얘기는 저번에 끝냈으니."
저번과 비슷한 패턴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게이바가 떠올랐고, 원나잇을 떠올렸다. 동시에 김민규도 함께 생각했다. 어차피 이렇게 연락 안 하다간 영영 못할텐데, 그냥 지금 하자고. 침묵으로 긍정을 대답하니 아버지가 먼저 이사실을 나갔다.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옆에 놓아 두었던 종이를 펼쳐 수신인 창에 번호를 적었다.
'저번에 바에서 연락처 받았던 사람입니다.'
짧고 간결한 문자. 답장은 한 시간 내로는 오겠지, 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짧게 끝나는 진동이 아니었다. 전화가 올 줄이야.
"여보세요."
-김민규입니다. 문자가 왔길래, 혹시 계속 아프세요?
"아, 아프지는 않아요.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저녁에 시간이 비기는 하는데……
"술 한 잔 하실래요? 같이 마실 사람이 필요해서."
답이 없었다. 아까와 똑같은 공백인데, 그닥 싫지 않았다. 누군가의 대화에서 생기는 공백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감정이 들다니. 짧았지만 체감으로 길었던 침묵이 끝났다. 좋아요. 상대의 긍정적인 대답.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약속 장소와 시간은 따로 정해서 연락 드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밖이 빨리 어두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약속 장소엔 김민규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저번과 다른 복장. 그 때는 검은색 코트였던 거 같은데, 오늘은 연갈색의 코트였다. 나를 알아본 건지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드는 모습에 웃음이 났지만 티내지 않았다. 김민규의 앞자리에 앉아 음식과 술부터 주문했다. 저는 화이트 와인이 더 좋은데, 민규씨는? 김민규는 상관없다며 나를 바라보고 웃었다. 지금보니까 송곳니가 있었네. 아니, 덧닌가. 웨이터가 주문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치즈와 와인이 나왔다. 와인잔에 반 정도 담긴 와인을 먼저 한 모금 마셨다. 김민규도 따라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잔을 내려놨다.
"술 친구는 왜 필요하세요?"
"그냥, 구실이 필요해서?"
살짝 웃으며 대답하자 김민규도 따라 웃었다. 그게 무슨 구실인지 알고 따라 웃는 건가.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불렀는지 알고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하긴 게이바에서 마주쳤으니까 저쪽도 그런 목적으로 온 거 였겠지. 대충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같은 목적으로 한 공간에서 마주쳤으니까, 진도를 느리게 뺄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잔에 담긴 와인이 세 번 정도 비워졌을 때, 우리는 바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원래 원나잇할 때는 모텔로 가는데, 나도 왜 김민규를 오피스텔로 데리고 온 건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와인을 마시면서 나눈 얘기는 별 거 없었다. 이름 알려달라고 해서 전원우라고 알려주고, 서로 나이를 오픈하고. 몇 살이라고 했더라. 내가 먼저 서른이라고 얘기했던 거 같은데. 김민규가 뭐라고 그랬지. 자기는 스물 여덟이라고 그랬었나. 아, 그리고 자기는 거기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다고도 얘기했던 거 같은데.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김민규의 입술이 피부에 닿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느낌. 가볍게 입술로 훑는 게 아니라 가슴팍을 진득하게 핥아오는 혀. 가슴보다 내 혀랑 닿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김민규의 뺨을 두 손으로 잡아 급하게 입술을 찾았다. 말캉한 혀가 닿았다. 숨이 가쁠 정도로 엮인 혀가 더 달아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민규는 생각보다 잘 했고, 생각만큼 크고 마음에 들었다. 강하게 치고 올라오다가 손으로 살짝 밀어내면 잠깐 쉬는 틈을 가지며 부드럽게 골반을 쓰다듬어 주는 다정함. 나보다 두 살 어리면서 낯간지러운 형따위의 애칭을 쓰지 않고 원우라고 부르며 앞을 자극하는 야릇함도. 하나같이 이전에 원나잇을 했던 사람들과 달랐다. 처음으로 이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민규야……, 흐응, 좋아, 더어……"
"딴 생각하지 말고 집중해, 원우야."
원나잇은 하루로 끝내야 하는 건데. 어차피 이 틀도 내가 만든 거니까 한 번쯤은 깨도 되지 않을까.
김민규랑 섹스를 하고 나서 사흘 정도가 지났다. 김민규도 원나잇으로 그치고 싶지는 않았던 건지 그 이후로도 연락을 이어왔다. 자주 연락하는 건 아니었지만 몇 시간에 한 번은 서로의 메시지에 답을 해주는, 연인 이하의 정도. 저는 일이 있어서 어디 좀 왔어요. 섹스할 때는 그렇게 반말을 해대더니, 다시 존댓말로 돌아왔다. 오늘 바빠ㅇ? 김민규에게 답장을 보내놓고 차에서 내렸다. 눈 앞에 푸른복지센터의 간판이 보였다. 작은 시그널을 보내놓았으니, 알아서 잘 캐치하겠지. 오늘은 외부 미팅이 있어 일이 일찍 끝났다. 김민규랑 바로 만날까 했지만 얼굴 비추고 오라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먼저 들리기로 했다. 예전보다 이 곳에 오는 게 싫지 않았다. 그냥, 이후에 만날 수도 있는 사람이 생겨서 그런가. 애인도 아닌데 김민규 하나에 별 걸 다 의지한다. 복지센터로 발을 들이자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자원 봉사를 나온 사람들이 몇명 있었다. 원장실만 바로 들렸다가 나와야지 싶었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김민규?"
휠체어에 앉아있는 할머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수건으로 할머니의 입가를 닦아주고 있는 사람, 분명 김민규였다. 쟤가 여기 왜 있어? 당황스러움에 마음 속으로 외쳐야 할 이름이 밖으로 튀어나왔고, 김민규와 눈이 마주쳤다. 전원우……? 김민규도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웠는지 손수건을 든 채 굳어있었다.
김민규는 할머니를 방으로 모셔놓고 왔고, 나는 원장과 짧은 인사를 나눴다. 복지센터 밖에 있는 작은 나무 벤치에 앉으려다가 날씨가 쌀쌀해 차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먼저 말을 건 건 나였다.
“자원봉사 하러 온 거야?”
“……네. 봉사 동아리를 하고 있어서요.”
“봉사 동아리?”
“대학교에서 하는 거예요.”
“대학……?”
김민규가 아차 싶은 듯 말을 줄였다. 스물 여덟에 아직 재학 중인건가? 하긴, 군대 다녀오고 사정상 이것저것 휴학하고, 공대생이거나 하면 가능하긴 하지. 혼자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굴리고 있는데 김민규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답을 내놓았다.
“저 실은 스물 둘이에요.”
스물 두울? 스물 여덟이 아니고?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물론 스물 둘이든 여덟이든 어차피 성인이니까 아무런 상관없는 거지만, 두 살 차이가 아니라 여덟 살 차이였다는 게, 놀라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잠깐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럼 웨이터는? 하고 되물었다. 김민규는 아까보다는 덜 어색한 얼굴로 그건 아르바이트로 하고 있는 거예요, 하고 얘기했다.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크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저번에 섹스할 때 그냥 작은 회사 다니고 있다고 구라쳤는데, 그게 그거지 뭐. 무릎 위에 곱게 올려져 있는 김민규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꺾어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달뜬 소리가 차 안을 울렸고, 내가 먼저 입술을 떼자 소리는 바로 멈췄다.
“봉사 언제 끝나.”
김민규가 짧게 입을 맞췄다.
“지금 정리하고 나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