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봄과 여름, 그 사이/글

[chock] 여름소년 구출 대작전

Monthly MW 2021. 1. 13. 23:37

      

 



장마가 시작되었다. 때 이른 장마에 이미 민규의 불쾌지수는 오를 때로 오른 상태였다. 이번 방학은 집 안에만 처박혀 있어야겠다. 뉴스에서는 6월 초부터 시작된 장마가 길게는 8월까지도 이어질 전망이라고 했다. 민규의 소원은 비가 하루라도 빨리 멈추는 것이었다.

버스 안의 공기, 이런 저런 사람들의 들숨과 날숨들로 민규는 제대로된 호흡을 하기가 힘들었다. 사람들과 단 1cm라도 부딪히지 않으려 꽉 쥔 버스 손잡이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또 반대 쪽 손목에 걸쳐 둔 우산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이 민규의 교복 바지를 흠뻑 적시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부터 해야겠다. 벌써 몇 주 동안 변화가 없는 똑같은 바깥 풍경에 지루할대로 지루해졌다. 비가 좀 멈췄으면 좋겠다.

버스가 정류장에 잠시 멈추자 민규와 같은 교복을 입은 많은 인파가 문을 통해 빠져 나갔고 자리가 났다. 민규가 빈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유리창 밖 민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버스를 향해 뛰어오는 사람의 형체였다.
아, 쟤 몇 반이었더라- 이름만 대충 들어보고 얼굴만 대충 아는 아이였다. 온 몸이 비에 젖어가고 있었고 버스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엑셀을 더 깊게 밟았다. 그제서야 민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민규가 앉은 의자에 걸려있는 하얀색 우산이었다.

전원우. 우산 손잡이에 바른 글씨체로 적힌 이름이 빗물에 아주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름을 급하게 적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우산. 민규가 원우와 눈이 마주쳤던 그 짧았던 순간, 원우는 분명 울고 있었다.



여름 소년 구출 대작전
written by, chock



"야, 그 전..원우... 좀 불러주라."

"원우 오늘 학교 안 왔는데?"

원우가 속한 3반은 민규의 반과 정 반대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3반 앞에서 지나가는 아이 아무나를 붙잡았다. 자기들도 왜 안 왔는 지 모른다고 했다.

"너 전원우랑 아는 사이야?"

민규가 알았다며 제 반으로 돌아가려 몸을 틀자 뒷문 쪽 자리에 앉아 친구들과 떠들던 승관이 뒤돌아 민규를 붙잡았다.

"아니, 전혀."

"걔 이상해."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데 따발총 마냥 계속 되는 승관의 말이 끝이 안 날 것 같아 손바닥으로 승관의 이마를 한 대 치고 시끄럽다며 3반을 빠져 나왔다.

1학년 때는 안 그랬는데 요샌 학교도 자주 빠지고 맨날 멍 때리고 말 시켜도 이상하게 쳐다 봐. 아무튼 이상하니까 그냥 가까이 하지 마.



원우를 만나기 실패했던 다음 날, 그 날 따라 늦게 일어난 민규는 급하게 나오느라 제 우산을 까먹었다. 그렇게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원우의 우산을 쓰기 시작했고 우산에 쓰인 이름이 손 때를 타 거의 지워져 갈 무렵 원우가 민규의 앞에 나타났다.

민규가 원우의 우산을 가지고 있게 된 날로부터 6일 뒤였다. 여전히 비가 내렸다.
원우를 한 번에 알아본 것은 민규였다. 맨 뒷 좌석 가장 끝자리에 앉아있던 민규는 처음부터 원우를 보았다. 이미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우연처럼 원우는 민규의 옆 빈 자리로 올라와 앉았다. 버스 안 공기는 언제나 답답했는데 원우의 끈적끈적한 빗물들이 민규를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무의식 속에서 민규는 자기도 모르게 원우의 우산 손잡이를 쥐어 원우의 이름을 감추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우산이라면 금방 알아볼 게 뻔했다. 훔쳐갔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버스가 5분 쯤 달렸을까, 민규에겐 그 5분이 50분 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자꾸만 원우에게 눈길이 가는데 함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원우는 민규가 눈치를 보며 잡고 있는 우산에는 추호의 관심도 없었다. 그저 또 울고 있을 뿐이었다.

비에 젖은 상태로 찬 바람 쐬면 감기 걸릴 텐데. 민규는 최대한 몸이 원우에게 닿지 않게끔 팔을 들어 에어컨 방향을 조절했다. 거의 같은 타이밍에 원우가 일어나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번에는 놓칠 수 없었다.

"전원우!"

용기가 엄청 났다. 입에 제대로 담아본 적도 없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원우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민규가 우산을 펼쳐 원우에게 건넸다. 얼떨 결에 우산을 건네 받은 원우는 눈물이 채 다 마르지 못한 부은 눈을 가지고 멍하니 민규를 쳐다보았다.

"그, 그 우산 네 껀데. 내가 요 며칠 우산 깜빡하고 놓고 다녀서 좀 쓰긴 했거든? 근데 내가 그렇게 많이 쓰진 않았는데 너 돌려주려고 들고 다녔었어."

아, 내가 뭐라는 거야.
민규는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있음을 느꼈는데 빗물이 따가워서 인지 무엇 때문이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고마워. 근데 미안한데 내가 기억을 잘 못 해서-"

말꼬리를 흐리며 원우의 부은 눈은 잠시 민규를 거쳐 우산을 향했다. 긴 눈꼬리가 스윽하고 휘어졌다.
이상했다. 민규는 100톤 짜리 망치로 뒷통수를 가격 당한 느낌이었다. 비를 맞아서 그런 걸꺼야.

방금 전 원우보다 더 바보같은 표정으로 원우를 바라보던 민규는 아차, 하는 생각에 매고 있던 가방 안에서 체육복 상의를 꺼냈다.

"이거, 이게 빨려고 집에 가져가는 거라 냄새가 좀 날 수도 있긴 한데. 근데 매번 비 맞고 그러면 진짜 감기 잘 걸리잖아.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리는데 걸리면 쪽팔리고. 그니까 그냥 냄새는 좀 참고 일단 입고 가."

"응?"

"어... 그니까 그냥 일단 입고 나중에 돌려줘. 안 빨아도 되고, 나는 10반이야."

이번에도 원우가 얼떨결에 체육복을 건네받는데 민규의 손가락이 원우의 팔을 살짝 스쳤다.
그 순간, 전기가 오른 것처럼 서로 살아 생전 처음 느끼는 스파크가 일어났다.

"아-"

체육복을 손에 쥔 원우는 갑자기 엄청난 생각들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듯 초점 없는 눈으로 민규를 빤히 쳐다 보았고, 민규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원우는 민규가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봤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예쁘다.

"너 그 때, 나 봤지?"

그 때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고 있던 민규를 참 빨리도 발견한 원우가 급히 우산을 기울였다. 원우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민규는 엉거주춤 우산 속으로 들어와 원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기억이 났어."



원우는 며칠 째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날 번호라도 물어볼 걸. 매일 같이 퍼붓는 비로 인해 어차피 체육 수업은 실내에서 진행되었고 체육복을 입을 일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유라도 있었으면 어떻게든 원우를 닥달했을 텐데, 민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풀어질대로 풀어진 마음. 민규는 어느 것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여름방학을 이틀 앞 둔 상황에서 마음만 급해질 뿐이었다.
체육복 때문일까, 원우 때문일까.


요 며칠 간 민규의 머릿 속은 원우로 가득 찼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아이였다. 페이스북 검색창에 전원우 세 글자를 아무리 쳐봐도 나오는 인물들은 민규가 찾던 이가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영어 스펠링을 생각하며 검색해보았지만 결과는 당연했다.

승관에게 찾아가 원우의 행방을 물었지만 당연히 알 수 없다고 했다. 마치 전원우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1분단 맨 끝 자리는 비어 있었다. 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못한 책걸상엔 먼지가 낀 것처럼 보였다.


"교무실 청소 당번들은 검사맡고 가.”

전원우는 뭘까, 심각한 문제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어보였다. 문제아라기엔 원우라는 이름 자체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일이 거의 드물었다.

그 날 갑자기 기억이 났다는 말을 끝으로 원우는 어디론가 뛰어가버렸다. 다시금 빗물에 촉촉히 젖어가는 민규는 연기처럼 멀어져 가는 원우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불쾌하기 보다는 안쓰러웠고 다시 보고 싶었다. 비에 온 몸이 젖어드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냥 원우를 다시 보고 싶었다.

자퇴서. 3반 담임 선생님의 책상 주변을 쓸던 민규는 자신의 눈으로 보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성명, 전원우. 사유는...

"저, 선생님."

"어, 민규야. 네가 10반이지? 안 그래도 내가 너 먼저 부르려고 했었는데. 너 원우 알지? 전원우."

혼자만 가지고 있던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줄 알고 민규는 흠칫 놀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원우가 자퇴를 하게 되었는데 너한테 전해줄 물건이 있다고 가지고 왔었어. 네 이름은 기억하는데 반을 모르겠다고 해서 선생님이 찾고 있었거든. 근데 마침 네가 왔네."

선생님은 책상 밑에서 민규의 체육복 상의가 들어있는 쇼핑백을 건넸다. 쇼핑백 겉 표면에 물방울들이 몽글몽글 맺혀있었다. 원우가 나간지 얼마되지 않았다.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았다. 민규가 그를 찾으면 찾을수록 사라져버리는게 원우는 마치 손아귀에서 떨어져내리는 모래알과 같았다. 분명 이 곳에 있다고 느껴지는데 손을 펼쳐보면 존재하지 않는다.

"원우 언제 갔어요?"

"얼마 안 됐어. 종례 시간에 반 친구들이랑 인사하고 갔는데...”

이미 선생님의 목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빨리 쫓아가야 했다. 이번이 아니면 정말 안 될 것 같아서. 민규는 체육복이 담긴 쇼핑백 안 쪽에서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민규야, 체육복 안 입었는데 그냥 빨래했어. 고마워. 나중에 꼭 다시 보면 좋을 것 같아.

"전원우, 왜 자퇴하는 거에요?"



신발도 갈아신지 못한 민규는 슬리퍼 바람으로 한 손에는 원우의 쪽지를 쥔 채 교문 밖으로 내달렸다. 원우를 만나야 한다.

물론 민규가 정신이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민규에겐 선생님의 말씀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들렸다. 알츠하이머 병이라는 엄청난 해일이 원우를 집어 삼킨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기억을 점점 더 잃어가는 원우 본인이 선택한 결정이라고 했다.

남은 5년, 10년이라도 온전히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어요.

상상 속 원우의 낮은 목소리가 민규의 귀를 뚫고 마음을 후벼파는 것만 같았다. 상처가 난 곳에 딱지가 지면 가만히 아물게 냅둬야하는데 지난 몇 주간의 기억, 원우는 민규를 자꾸만 자극했다.
민규는 앞으로의 5년, 10년동안 원우를 홀로 기억할 자신이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정류장에 버스가 한 대 서 있었고 수많은 우산 무리 속에서 곧 출발하기 일보직전으로 보였다. 민규는 전속력으로 내달렸지만 버스를 이길 수는 없었다.
거의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류장 의자에 앉은 민규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 갑자기 기억이 났다고 했는데, 잊어버리지 말지.
민규는 정말 오랜만에 소리내어 울었다. 다행히도 빗소리가 민규의 울음 소리를 가려주었다.



민규를 제외하곤 아무도 원우의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가 없는 학교는 여느 날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원우의 전화번호를 아는 이도 없었다. 선생님을 통해 알아낸 번호도 이미 사용자가 바뀐 번호였다. 그냥 그렇게 원우는 사라져 버렸다.
이미 원우가 준비해놓은 과정이었을까, 민규는 한 달 간의 속앓이가 아무 의미없이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방학은 시작되었고 민규는 보충 수업이 있는 날을 제외하곤 집에 처박혀 공부를 하거나, 시간을 떼우거나,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높은 위치에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는데 하얀색 우산을 쓴 사람은 언제나, 늘 민규의 레이더망 속에 갇혔다. 그렇지만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 전원우라는 사람이 존재하긴 했던 걸까?



허무했던 민규의 방학은 끝났다. 민규는 학교에 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뭐 했다고 벌써 개학이야. 하루하루 흘러가는대로 지낸 자신이 한심하고 그제서야 시간의 아까움을 느꼈다.
개학 날 아침은 민규를 울렁이게 만들었다. 벌써 두 달 째 계속된 궂은 날씨에 민규는 신께서 죄를 저지른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시려고 다 회색으로 칠해버리신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타박타박 빗물이 잠긴 보도 블럭을 걷는 민규의 발소리는 거리의 소음에 묻힌 지 오래였다. 집 앞 정류장에 다다른 민규는 이어폰으로부터 귓 속까지 울리는 노래 소리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리움이 너무 짙어, 오늘은 그려내야겠어. 너의 말들, 너의 작은 체온도 그 모든 걸 벗어버려야겠어.

무심코 쳐다 본 건너 편 정류장엔 낯익은 하얀색 우산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매번 이럴 때마다 기대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민규는 자신의 속마음에게 거짓을 고한다. 원우일까, 아닐까?

“전원우!"

또 한 번의 용기, 이 정도라면 널 찾을 수 있을까? 민규의 외침 또한 이내 공기를 가득 메우는 소리들 속에 사라져 공중으로 흩날릴 뿐이었다.

나는 네가 두려워, 이제 겨우 잠잠해진 나인데. 너의 작은 눈빛 하나도 나를, 나를 흔들어.

민규의 간절함에 신이 감동 받으셨는지 아니면 공중으로 뿌려진 민규의 외침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그의 귀에 도달했는지 놀랍게도 비는 멈추었다. 민규는 멀리서 가만히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원우를 발견했다. 너의 작은 눈빛 하나도 나를, 나를 흔들어.

길고 길었던 장마는 결국 끝이났다.


언젠가 봄 소년도 찾아오기를 바라며,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