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먼] Summer dream
아, 덥다. 옷을 잡고 펄럭이니, 옷 사이로 올라오는 시원한 느낌에 웃음이 났다. 삼십 분이나 걸었지만 약속 장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먼 곳으로 잡은 걸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어디지. 결국 핸드폰에 장소를 검색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되겠다. 하고 조금만 더 걸으니 장소가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나를 반기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푹푹 찌는 열대야 날씨를 벗어나 에어컨 밑에 있으니, 이게 천국인가 싶기도 했다. 문 앞에 서자 북적이는 소리에 또 시작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와, 전원우! 하는 소리도 들리고, 전원우 맞아? 하는 소리도 들렸다. 나를 반기는 여러 목소리가 날 부끄럽게 만들었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만 하고 시간이 될 때는 독서를 하는 조용한 애였다.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비어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자, 내 앞으로 잔 하나와 숟가락 젓가락이 왔다. 얼마나 마신 건지, 상 위에는 술병이 여럿 뒹굴고 있었고, 붉어진 얼굴을 하고 마시자, 마시자. 하며 분위기 띄우는 애들도 있고…. 뭐 여러가지 있었다. 채워진 잔을 한 잔, 두 잔 계속 비우자,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그때, 귀에 들어오는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김민규, 그 세 글자에 정신이 들고, 술이 깨는 것 같았다. 여전히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지만, 정신은 깨어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글쎄, 김민규 오늘 온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김민규가? 하는 소리가 들린다. 대화 내용은 들리지도 않고, 오직 김민규의 이름만 내 귀에 꽂히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절정에 닿을 즈음에 문이 열리더니 김민규가 들어왔다. 안녕, 오랜만이야. 짧은 말이지만 생글생글 웃는 민규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일이 끝나고 온 건지, 민규는 정장 그대로 왔었다. 정장을 입고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니 문득, 고등학교 때가 떠올랐다.
말도 안 하고 공부만 하던 나와는 달리, 민규는 항상 반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다 잘하는 민규를 어느 순간부터 다른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면 열심히 공을 굴리는 민규를 눈으로 쫓다 공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리고 또 수업 시간에 당당하게 나가 문제를 푸는 그 뒷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난 가끔 이런 생각도 했다. 아, 내가 저 등을 꼭 안는다면, 내가 민규에게 안긴다면. 내가 생각했지만 참, 이상한 생각이었다. 뭐, 내 첫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나 지금은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민규가 유학을 가고 8 년도 넘은 시간인데, 티비에서 민규를 봤을 때도 지금처럼 떨리지 않았는데. 왜 그때처럼 떨리는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남은 자리가 내 앞이라 민규가 빈 내 앞자리를 채웠다. 원우야, 오랜만이다. 하는 낮은 목소리에 몸이 떨렸다. 그저 친구일 뿐인데, 왜 이렇게 떨릴까. 아직 내가 미련을 못 버린 걸까. 아직도 떨리는 나와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민규를 보니, 조금은 서러워졌다. 민규는, 김민규는 날 그냥 친구로 생각할 텐데. 말을 거는 민규의 눈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넘겼다. 민규는 아, 오랜만이라서 그렇구나. 하고 손을 거두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는 민규를 보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민규로 돌아갔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미국은 어땠는지, 일은 어떤지. 내가 직접 물을 수 없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까지. 친구들 사이에서 밝은 대화가 이어질 동안, 나는 입 한 번 열지 못하고 술잔만 입에 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묘하게 불편했다.
*
얘들아, 나중에 또 보자! 혀가 꼬인 발음으로 휘청휘청 걸어가는 친구들을 뒤로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 민규가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모든 사고회로가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를 본 민규가 갑자기 내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큰 키며, 전보다 더 남자다워진 얼굴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가자, 짧게 말을 한 민규가 내 팔을 이끌었다. 얼떨결에 민규와 같이 걷게 되었다. 민규에게 잡힌 손목을 조심스럽게 뺐다. 민규는 아, 미안.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집까지 걷는데 나와 민규 사이에는 오가는 말 한 마디 없었다. 민규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잘 지냈어? 라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변한 거 하나도 없구나, 조용한 것도 그대로네."
"그런가, 나름 바뀐 건 많는데…"
"요즘에도 책 읽어?"
"책도 읽고, 내가 직접 쓰기도 하고."
그렇구나,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정적, 어색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아, 저… 입을 떼자마자 돌아가는 고개에 시선을 피했다.
"아, 난 집이 이쪽이라서…"
"반대구나, 아, 원우야. 핸드폰 좀 줘 봐."
민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 잠금을 하지 않은 핸드폰은 금방 풀렸고, 몇 번의 터치음이 들리더니 민규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민규는 핸드폰을 흔들다 저장할게, 라는 말을 남기고 나와는 반대인 길로 걸어갔다. 주소록을 보자 바로 위에 김민규라는 이름 석자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술에 호선을 띄우고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집까지 걷느라 지친 몸을 힘겹게 이끌어 겨우 침실까지 왔다. 옷도 벗지 않은 상태로 침대에 누웠다. 띠링,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한숨을 푹 내쉬고 핸드폰을 꺼냈다. 밝게 켜진 화면에는 김민규라는 이름이 떠있었고 그 옆으로는 '집은 잘 들어갔어?' 푸스스 웃었다. 팔을 쭉 뻗고 하나하나 힘겹게 적었다. '응, 너는?' 보내자마자 바로 사라진 1에 답장을 기다린 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꿈뻑꿈뻑, 눈이 계속 감겼다. 잠깐 졸았다가 카톡 알림음에 깨기도 하고, 그렇게 세 시까지 연락을 했다. 얘는 졸리지도 않은가? 하품을 쩌억, 하고 잠에 들 준비를 했다. 지금 자도 얼마 못 자겠지만…
*
아침을 알리는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아으으, 이상한 소리를 내며 눈을 감은 상태로 침대를 뒤적였다. 손을 뻗어 휘적여도 이 좁은 침대에서 핸드폰이 어디로 빠졌는지 잡히지 않았다.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떠 이불을 걷어도 보이지 않았다. 아, 씨이… 침대와 벽 사이로 떨어진 것 같아 들어가지도 않는 팔을 억지로 그 사이에 끼웠다. 손끝에 걸리는 핸드폰을 집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상단바를 내리자 보이는 건 김민규의 이름 뿐이었다.
글쎄, 해외라고 다 좋은 건 아니더라고... AM 2:58
전원우, 자? AM 3:20
아, 벌써 시간이... 잘 시간이네 AM 3:25
내가 너무 늦게 재운 것 같다. AM 3:25
푹 자고 일어나. 늦은 시간까지 잡아서 미안해. AM 3:26
아, 정말…
₁ AM 11:53 아, 미안... 말도 못하고 잤네.
₁ AM 11:53 출근은 했겠다. 일 열심히 하고, 나중에 시간 될 때 만나자.
글자 틀린 건 없는지, 말이 이상하지는 않은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백 번은 본 것 같다. 내가 한 말에 기분 상하지는 않았겠지? 나는 손톱을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물었다. 한숨을 푹 쉬고 핸드폰을 다시 봤을 땐 옆에 잘만 붙어있던 1이 사라져있었다. 어, 어? 당황해서 급하게 뒤로가기를 눌렀다. 다행인지 뭔지, 홈이 보일 때 민규에게 메신저 답장이 왔다. 잠은 잘 잤는지, 일어나서 밥은 먹었는지… 연애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얘가 원래 이랬나, 학교 다닐 땐 몰랐는데. 나랑 접점이 없었던 것도 있고, 내가 볼 수 없었던 부분들도 있으니까… 나는 항상 민규를 뒤에서만 보고 말 한 번 걸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민규만 알고 있었을 뿐이고 민규의 속은 전혀 알지 못했다. 속까지 아는 것도 나름 좋은 것 같기도…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주먹을 꼭 쥐고 머리를 통통 쳤다.
오늘은 야근 안 하는데. PM 1:24
만날래? PM 1:24
아, 너 시간 괜찮으면... PM 1:25
띠링, 띠링 울리는 핸드폰에 머리를 긁적이고 잠깐 쉴까,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 소파에 앉았다. 휴우, 몸을 소파에 기대고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봤다. 홀드로 잠궈진 화면에는 민규의 이름만 보였다. 어, 어? 민규의 만나자는 말에 놀라 편하게 있었던 몸을 정자세로 고쳤다. 이, 이걸 눌러? 누를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아, 몰라, 모르겠다. 하고 누르고 답장을 보냈다.
PM 1:30 응, 만나자. 나도 금방 끝날 것 같아.
사실, 금방 끝날 것 같다는 건 거짓말이다. 아직 반도 못 쓴 상태고, 당장 내일이라도 누군가 와서 원고를 가지고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막 들이닥치는 건 아니고… 하지만 민규와 만날 수 있을 때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내 일은 다 뒤로 미루고 만나자는 말을 했다. 하루는 괜찮겠지. 일곱 시에 그때 헤어졌던 그 공원으로 간다고 했고, 나도 알겠다고 했다.
원고를 대충 끝내고 시계를 봤을 땐 다섯 시였다. 끄으응,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몸을 일으켰다. 장시간 앉아서 글만 쓰니,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팠다. 목을 조금 돌리자 뚜둑, 소리가 나며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확인하자 보이는 건 초췌한 몰골이었다. 아, 이 얼굴로 어떻게 나가… 울상을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지금 내 몰골은 나가면 당장 차일 것 같은 몰골이었다. 제대로 씻으면 괜찮지 않을까… 시간도 많이 있으니까 괜찮겠다 싶어 옷을 다 벗고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에 움찔했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 차가운 물이라고 씻는 걸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부터 끝까지 다 젖어들었다. 제발 씻으면 괜찮았음 좋겠다… 제발, 제발.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하고 머리까지 털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나은 모습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를 탈탈 털면서 옷장 안을 봤다. 평소 즐겨 입는 맨투맨과 맨투맨, 맨투맨… 그리고 비슷한 디자인의 반팔들까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게 옷 좀 사라고 할 때 사는 건데, 나갈 곳도 없어서 괜찮다고 안 산 내가 미워졌다. 결국 하얀 티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가방 하나 들고 나왔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여섯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아, 시간이 빠르긴 빠르구나… 커피 사서 가도 안 늦을 것 같아 근처에 바로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아, 뭐 좋아할까… 메뉴판을 한참 보다 무난하게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볼에 대기도 하고 부채질도 하고 더위를 피하기 위해 뭐든 다 한 것 같았다. 그늘진 벤치에 앉아 발을 흔들흔들 거리기를 십 분, 저 멀리서 깔끔한 정장을 입은 민규가 다가왔다. 검은 정장을 입은 민규가 더운지 넥타이를 살짝 풀면서 다가왔다.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던 민규와 눈이 마주쳤다. 민규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원우야!"
긴 다리로 쭉쭉 내 앞까지 온 민규에 놀라기도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얼음이 반이나 녹은 아메리카노를 민규에게 내밀었다. 아, 나 아메리카노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하며 받아든 민규의 표정이 밝았다. 어제와는 또 다르게 얘기를 하는데 어색한 것은 싹 사라지고 좀 더 편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걸음이 느려, 항상 애들보다 몇 걸음 더 뒤에 있었다. 어떤 일에서든 그랬다. 느릿느릿한 행동 때문에 답답하다는 소리도 들었고…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뭐, 별다를 건 없었다. 그에 비해 민규는 긴 다리를 자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민규와 내 사이는 금세 멀어졌다. 민규는 해사하게 웃다 옆을 보았을 때, 내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뒤를 돌아봤다. 내가 자신의 옆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민규는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내가 겨우겨우 민규의 옆으로 오자 민규가 아, 미안해. 내가 너무 빨리 걸었지. 하며 먼저 사과했다. 아,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 하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자 민규가 아니야, 내가 맞추면 돼. 하며 내 손을 잡았다. 다 큰 남자 둘이, 두, 둘이…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건 학교 다닐 때 꿈에서나 나올 장면인데…
민규는 손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다가, 영화관에 와서야 겨우 손을 놓아 줬다. 붉어진 귀를 애써 손으로 가리려고 노력했다. 소, 손은 왜 잡았어? 하는 내 질문에 민규는 아, 놓으면 도망이라도 갈 것 같아서. 하면서 웃었다. 그게 뭐야아… 목소리가 동굴 속까지 기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민규는 웃으며 무인 티켓박스로 갔다. 민규의 뒷모습을 보는 것도 떨렸다. 아, 멋있다… 작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주위를 둘러보다 입을 꾹 닫았다.
티켓 두 장을 들고 해맑게 웃는 민규가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민규의 옆에 섰다. 민규는 티켓 두 장을 들고 이거 되게 재밌대. 자리도 없다고 해서 미리 끊었어. 하며 웃었다. 마치 칭찬을 해 달라고 조르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안아 주고 싶지만, 그럴 사이는 아니라 그럴 수 없었다. 괜히 그랬다가 오해만 잔뜩 받으면 어떡해… 올라가려는 손을 겨우 막고 민규를 보며 웃었다. 민규는 더운지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아,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러, 이러지 말자… 열이 오르는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민규는 더워? 하며 손으로 같이 부채질을 해 주었다. 얜 왜 이렇게 다정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 같은 행동 하나하나가, 내 감정을 전부 바꿔놓는 것 같다.
겨우겨우 열이 식자, 민규가 이제 들어갈까? 라고 물었다. 시간도 거의 다 된 것 같고, 비록 손에 아무것도 없지만, 민규랑 같이 있다는 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상영관 안에 들어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 편하다. 집에서 작업할 때 쓰는 의자보다 영화관 의자가 더 편한 것 같았다. 추욱 늘어지는 내 모습을 보던 민규가 편해? 하고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응, 편해. 며칠 제대로 잠을 못 자서일까, 편해서일까,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 같았다.
몇 편의 광고가 지나가고 상영관 안이 깜깜해졌다. 쿵, 소리와 함께 영화가 시작됐다. 액션 영화라서 그런가,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평소 액션 영화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막상 보니 그럭저럭 재밌는 것 같다. 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봤을 때, 민규의 표정이 밝았다. 가끔 와, 우와. 하는 작은 감탄사도 함께 하면서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상영관에서 나올 때도 너무 떨렸다, 긴장하고 보니까 더 재밌던 것 같다. 하며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을 하나하나 말하는데, 그것도 내 눈에는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민규는 건물 안에서 나와, 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아쉬우니 술을 마시자고 했다. 마다할 이유는 없어 민규를 졸졸 따라갔다.
내가 생각한 술집인 초록색 병을 까는 그런 곳이 아닌, 고급스러운 펍으로 들어갔다. 어, 어…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생각하는 초록색 병도 없을뿐더러, 친근한 이모님 대신 젊은 직원들이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어버버, 주변을 둘러보다 민규가 이끌고 간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인디 밴드가 바로 앞에 보이는 자리였다. 잔잔한 밴드의 노래와, 지금 바로 앞에 있는 보드카 한 잔. 그 외에도 쌓이고 쌓이는 음식들까지.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았다.
민규는 이거 먹어 봐, 여기서 제일 맛있는 거야. 하며 작게 잘라서 입에 넣어 주었다. 우물우물 씹는 나를 보며 어때, 맛있어?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이다. 하며 밝게 웃는다.
술이 들어가고 취기가 돌았다. 머리가 핑핑 돌아 어디에 기대지 않으면 움직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으으,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의자에 머리를 기대었다. 내가 이렇게 술이 약했었나… 민규는 괜찮아? 이제 들어갈까? 하며 나를 일으켰다. 휘청, 휘청. 딱 봐도 위태롭게 걸어가는 나를 보고 민규가 옆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림 이상한데, 이거… 무겁지도 않은지 잘도 걸어가는 민규였다.
으음, 여기 우리 집 아닌데…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보았을 때 집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낯선 벽지, 높은 천장, 그리고 씻고 나온 김민, 김민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오는 민규의 모습이 보였다.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위잉, 드라이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민규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아, 어… 거울로 눈이 마주쳤다. 민규는 돌아보며 일어났어? 라고 물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머리를 다 말린 민규가 드라이기를 끄고 내 옆으로 왔다. 침대가 넓어 몸이 붙지는 않았지만, 아까부터 손이 맞닿았다. 닿았다가 떨어지고, 닿았다가 떨어지고… 금세 어색해진 공기에 헛기침이 절로 나왔다. 민규도 나와 다를 거 없는지 티비 채널만 돌리고 있었다.
야시시한 소리가 들리고 내 눈에 바로 보이는 건 살색 투성이의 화면이었다. 볼이 붉어지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첫 시작은 야릇한 영상이었다. 두 사람은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고 있던 반면 우리를 감싸던 공기는 어색하게 흘러갔다. 민규와 눈이 마주치자 민규는 내 위로 올라타 내 손목을 쥐었고 그에 반항할 생각은 없었다. 짙은 입맞춤, 깊게, 깊게, 더 깊게… 서로를 옭아맸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내 입에서는 조금만 더, 거기, 하는 이상하고 야릇한 소리가 났다. 이게 정말 내 입에서 나온 말일까?
으응, 아, 민, 규야… 민규가 내 몸을 핥았다. 꼼꼼하게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내 몸을 탐했다. 민규의 것이 나에게로 들어오고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민규의 허리가 조금씩 움직였을 때, 내 입에선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헉, 헉. 내 위에서 움직이는 민규의 턱에서 땀이 뚝 흘렀다.
민규가 내 안을 휘저을 때마다 내 입에서는 야릇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민규는 그게 좋다며 더 내라고 나를 붙들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민규가 사정할 때가 되었는지 몸을 잘게 떠는 게 느껴졌다. 따뜻한 것이 내 몸 안으로 밀려왔고 민규는 나에게 키스를 했다.
그렇게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에 들었다.
*
호텔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내 눈을 밝게 비추었다. 으응,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민규랑 술을 마시고… 미, 민규? 내 옆에는 내 허리를 감고 곤히 잠들어있는 민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어제 내가 민규랑 술을 마시고 호텔에 들어와서… 잤다는 거야?
아, 으으, 민규가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어, 원…우야. 어색하게 웃은 민규가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나오려고 하자 서로의 눈에 보인 건 나체였다. 부끄러운 마음에 눈을 가렸다. 민규도 머리를 긁적이며 이불을 다시 덮었다. 저, 저어… 우리 옷 입을까? 내 말에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고 등을 돌린 상태로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옷을 입고서도 어색한 기운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한참을 이불을 끌어올린 상태로 있다 퇴실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왔었다. 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민규와 나는 앞만 보고 걸었다. 정말, 딱 앞만 보고 걸었다. 서로 말 한마디 안 하고 걸었지만, 민규는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쏙 집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어제 일을 생각하려 노력했다. 키스를 했고, 민규가 내 안에 들어왔… 하아. 생각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졌다. 대체 무슨 용기였지? 이불이 뚫어지도록 팡팡 찼다. 부끄러웠다. 내가 좋아하던 애랑 잠을 잤다는 게 부끄러웠고, 그 이후로 민규와 나는 조금 어색한 대화를 이었고, 지금은 또 괜찮아져 전보다는 조금 더 애정이 있는 말로 하나하나 변하고 있었다. 연인 아닌 연인이 된 우리는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느꼈다.
*
민규와 연락도 힘들 정도로 일이 너무 바빴다. 하루에 연락 한 번 하는 것도 힘들었다. 내 사정을 아는 민규도 나를 이해했고 연락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 않았다.
띠링, 띠링.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에 잔뜩 예민해진 상태로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단체 대화에서 나온 말인지 여러 명의 이름이 떠 있었고 그사이에 단연 돋보이는 이름은 민규였다. 채팅방 안으로 들어가자 뉴스 기사를 캡처한 사진이 있었다. 그 속에는 여자 배우와 민규의 사진이 있었고, 그 기사 제목은 민규의 약혼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었으면서 왜 나를 만났을까, 나랑 왜 자고… 더는 집중이 안 되어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여름 공기가 나를 뜨겁게 감쌌다. 마른세수를 하고 건물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얼른 그런 생각을 떨치고 싶었고, 잊고 싶었다.
맑은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오늘은 비가 오려나, 습한 날씨에 집도 눅눅했다. 발이 닿는 곳마다 끈적한 기분 나쁜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 내 하루는 무료했다. 연락하는 민규도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사실, 민규한테서 연락이 오기는 했었다. 만나고 싶다며 연락을 했지만 나는 그에 답을 하지 않았고, 여러 번 연락이 와도 나는 무시하기만 했다. 아니, 피한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그 기사에 대해서는 진위여부 확인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냥 민규가 보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난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도망 다니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민규에게 직접 들으면 더 상처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민규를 피했고 민규는 피하는 나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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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희 집 앞에서 기다릴게, 나올 때까지 안 갈 거야.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문자를 확인하니 저런 내용의 문자가 있었다. 수신자는 보나 마나 민규일 것이 뻔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민규의 성격을 생각하면 정말 내가 나갈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설마 왔겠어, 하고 밖을 빼꼼 내려봤다. 내 눈에는 민규의 정수리가 보였고 차에 걸터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금방 가겠지, 내일 일도 있으니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변명으로 들리겠지, 집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생각을 하려 티비를 켰다. 티비에선 웃음소리와 여러 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티비의 즐거운 소리와는 상반되게 나에게서는 한숨만 나왔다.
쏴아, 비가 내렸다. 처음에는 빗방울만 조금씩 떨어지는 것 같더니 점점 거세게 내렸다. 비도 오는데 집에 갔겠지 싶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복도로 나갔다. 머리만 빼꼼 내밀어도 머리가 촉촉하게 내릴 정도였다. 제발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하는 내 바람과는 다르게 민규는 꿋꿋하게 비를 맞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련해, 진짜 미련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급하게 눌러도 엘리베이터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 시간도 버틸 수 없어 비상구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슬리퍼가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몸을 제대로 일으키고 겨우 일 층으로 내려왔다.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가자 보이는 건 젖은 생쥐 꼴이 된 민규의 모습이었다. 춥지도 않은지, 민규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비에 가려졌다. 머리카락에서부터 턱까지 비가 뚝뚝 떨어졌다. 민규는 비에 젖은 내 몸을 끌어안았다. 민규의 따뜻한 품에 나는 목놓아 울었다.
겨우 진정이 된 나는 헛기침을 하며 민규를 떼어냈다. 민규의 몸은 쉽게 떨어졌다. 후드 가드에 걸터앉았다. 민규는 한숨을 푹 쉬고 입술을 뗐다. 이번에 그 기사는 루머고 자기는 이미 본가에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아두었다. 그저 여배우 언플에 자기가 쓰인 것이라며 다를 달랬다. 민규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과거가 후회스럽기만 했다.
민규는 그간 나를 못 본 게 한이 되었는지 내 손을 잡으려고 하고 원우야, 원우야, 하며 나를 계속 부르기도 했다. 처음에는 삐친 척을 하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으며 민규는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처음 민규와 섹스할 때와는 다르게 조금 더 부드러운 키스에 아이스크림이라도 된 것처럼 녹아내릴 것 같았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아쉬운 느낌에 민규의 입술에 소리가 나도록 버드키스를 몇 번이고 했다.
비에 젖은 걸 보고 그냥 보낼 수 없어 집으로 같이 들어왔다. 바닥에 남은 물기는 우리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려 주는 것 같았다. 몸을 덜덜 떠는 민규를 그냥 둘 수 없어 욕실에서 같이 씻었고 같이 머리를 털며 나왔다. 옷장을 보다 내 사이즈보다 조금 더 큰 티셔츠와 바지를 민규에게 주고 마르지 않은 머리를 털며 소파에 앉았다.
"내가 안 내려왔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감기 걸리면 어쩌게…"
"그래도 내려왔잖아, 네가 올 거 알고 있었어."
"약았어."
"그래도 어떻게 해, 잡고 싶은데."
"말은…"
뾰로통한 내 표정을 캐치한 민규가 억지로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었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하는지…
"민규야, 정말 결혼할 생각 없어?"
"음, 글쎄."
"글쎄가 뭐야"
"너라면 다시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럼 다시 생각해 봐."
민규는 내 몸 위로 몸을 포개었다. 오늘은 밤이 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