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다시 너를,봄
"오늘부터 우리 학교에 새롭게 오게 된 친구를 한 명 소개한다. 여기, 모두 주목."
새 학년이 시작되고 한 달 즈음이 지난 4월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학기 초가 아니고서는 누군가 새롭게 들어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중간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만두는 학생은 있었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날이 바짝 선 제복을 차려입은 선생의 부름에 문밖에 서있던 소년이 느린 걸음으로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얀 피부를 지닌 소년이었다. 이미 교실 안에서는 저마다 웅성이며 들어오는 소년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석민이 몸을 돌려 아직까지 책상에 엎드려 있던 민규를 흔들어 깨웠다.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드는 민규의 머리카락을 쭉 잡아당기자, 마지못해 민규가 몸을 일으켰다.
"왜 벌써 깨워."
"저기 일본놈 하나 전학 왔다."
"일본? 일본인 맞아?"
그제야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민규였다.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있는 폼이 영 어색한 눈치였다. 빳빳하게 각이 잡힌 모자와 꽤나 품이 남아도는 교복마저 소년과 어울리지 않게 어색했다. 초점을 잃은 듯 갈 곳 없는 눈동자만 이리 저리 굴리며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게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아 보였다. 민규가 그걸 보며 한마디 내뱉었다. 전혀 일본인 같지는 않은데?
"인사해야지."
"이케다 아스카입니다."
"이케다는 조선인인지만, 소학교 시절부터 동경에서 유학을 하고 넘어온 인재다. 아버님이 총독부 수사과 과장이시라고 했지?"
선생의 말에 소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지켜보던 석민이 말을 이었다.
"거봐. 쪽바리라고 했잖아. 이케다 아들이네."
"일본인은 아니네. 조선인이라잖아."
"그게 어떻게 조선인이냐. 변절자 매국노 새끼지."
선생이 지정해준 자리는 창가 뒤에서 세 번째, 민규의 뒷자리였다. 그 자리까지 걸어가는 동안 자신을 쏘아보는 눈빛에 더욱 고개를 숙이고 느릿하게 지나쳤다. 매국노 새끼라는 또렷한 말이 들려왔지만 이내 못 들은척하고 자리에 앉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한참 책상 모서리만 쳐다보았다. 여전히 모두의 시선이 소년을 향해있자 선생이 교탁을 내리치고 모두 원래대로 몸을 돌렸다.
수업을 시작한다는 말이 있고서야 소년이 긴장했던 어깨를 풀며 한숨을 길게 내쉬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모두가 앞을 보고 있는 와중에 앞에 앉은 민규가 몸을 반쯤 돌려 흥미로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아, 안녕."
"우리말 쓸 줄 아네."
"응."
"이름이 뭐야?"
"이케다 아스카."
"그거 말고, 진짜 이름."
처음으로 이케다 아스카라는 이름을 가진 게 아홉 살 무렵이었다. 일본어라고는 민망할 만큼 간단한 인사말이 전부였던 시절부터 우리말만큼 일본말을 능숙하게 할 때까지 줄곧 제 이름 대신 이케다라고 불렸다. 동경에서 만난 일본인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이 유학을 온 조선인도 이케다라고 불렀다.
동경으로 떠날 때만 해도 집이 작았다. 소학교도 못 가던 유년시절의 집보다는 컸지만 작은 집이었다. 이런 집에서 동경으로 공부를 하러 가는 게 가능이나 하냐고 생각을 했다. 동경에 가서도 부족하지 않게 생활하면서 늘 경성의 부모님을 떠올리던 소년이었다.
그리고 동경에 터를 잡은지 한 달 무렵 되었을 때야 소년은 비로소 알았다. 종로서 순사로 있던 제 아비가 총독부에 테러를 감행하던 애국지사 유중현을 붙잡아 그 노고를 크게 샀었다는 것을. 그 이후 새끼꼬듯 그의 딸인 유목란을 비롯해 유중현이 수장으로 있던 의국단의 단원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여 단상 위에 세웠다고 했다. 그즈음 제 아비는 순사부장이 되었다고 동경으로 연통해왔다.
그렇게 가끔 조선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동경에서 살아온 게 꼬박 9년이었다. 처음 경성을 떠날 때 북촌 끝에 머리에 붙어있던 낡은 집은 어느덧 청계천 아래 남촌의 일본인 거주 지역 중심가에 자리해있었다. 지붕 위에 멋들어진 기와를 얹었고 그 위로 한 층을 더 올려 짙은 회색의 기와를 덮고 있었다. 2층까지 어마어마해진 집 크기만큼이나 그동안 제 아비가 행했을 것들이 명명백백했다. 애써 들으려 하지는 않았지만, 귀에 들리는 소리들은 충분히 차고 넘칠 정도였다.
제 아비인 이케다 수사과장이 집어넣은 조선인의 숫자가 광장을 가득 채울 정도였고, 광장의 단상 위에서 독립투사들이 흘린 피가 청계천을 굽이굽이 흐를 만큼 많다는 것을. 그렇게 아비는 같은 나라의 사람들을 팔아먹으면서 점점 위로 올라갔다고 했다. 자신과 같은 이케다라는 이름을 달고.
이케다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이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것을 누리는 것과 동시에 꽤나 무거운 일임을 소년은 진작 알았다. 자신도 모르게 소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관찰하듯 소년의 얼굴 곳곳을 살피던 민규가 뒤늦게 입을 뗐다.
"미안, 불편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 내 이름."
"어?"
"원우야, 전원우. 내 이름."
두 번이나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걸 듣고 민규가 힘주어 한자씩 따라서 불렀다. 전 원 우. 생긴 것 답지 않게 이름이 동글동글했다. 투박한 전이라는 성씨가 원우라는 이름을 만나며 입안에서 발음이 뭉개졌다. 조금 전보다 더 작게 입안에서 이름을 내뱉었다. 전원우.
"이름 예쁘다. 이케다 말고 원우라고 부를게."
"……."
"반갑다, 원우야."
다시 너를, 봄.
취한
처음 학교에 발을 들이던 날 교문 앞에 우뚝 서있던 목련나무를 기억한다. 늠름하기까지 한 줄기와 촘촘하게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꽃송이가 피어올라 있었다. 꽃잎을 말아 쥐어 동그랗게 피어있는 꽃의 자태에 빠져 잠시 발길을 멈추어 염씨에게 물어서 그것이 목련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오래도록 한자리를 지키고 섰는지 가늠이 안될 만큼 목련나무의 기둥이 굵었다. 가지마다 사방으로 고르게 갈라져서는 꽃을 주렁주렁 그 위에 얹고 있었다.
봄이 빠르게 흘러가던 것처럼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빗방울이 추적추적 내릴 때마다 꽃잎들이 한 움큼씩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어느덧 목련 꽃이 모두 떨어진 자리는 녹색 이파리로 가득 채워졌다. 교문을 지날 때마다 한 번씩 발길을 멈추어 목련나무를 바라보던 원우는 오늘도 제자리였다.
바람 한점 불지 않고, 머리 위로 따가운 햇볕이 가득 내리쬐었다. 나무 위로 시선을 둘 때마다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이며 빛이 새어 들어와서 눈을 간지럽혔다. 원우는 그럴 때면 뭉그적거리며 발을 한 걸음씩 움직여 나무 아래 그늘을 찾아들었다. 그렇게 그늘 아래에서 나뭇가지 하나하나 구경하느라 염씨가 늦는 줄도 몰랐다.
염씨는 원우가 동경에 살던 시절부터 줄곧 붙어있던 사람이었다. 막 동경 유학을 준비하던 시절, 원우의 아비가 근처 일본인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총각을 하나 붙여주었는데 그게 바로 염씨였다. 낯을 가리는 원우의 성격과 달리 붙임성이 좋았고 일본어를 곧잘 해서 원우의 동경 유학생활을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었다. 동경에서 돌아오는 원우에게는 더 이상 필요한 보호자는 아니었지만, 아재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원우의 간청에 경성으로 함께 돌아왔다. 더 이상 보호자가 필요치 않을 원우의 곁에서 할만한 일거리를 찾아 쥐여준 것이 운전기사였다.
염씨는 배움이 짧아서 지식은 많지 않았지만 생각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수룩한 생김 만큼이나 행동거지가 느릿했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가끔 제멋대로 행동해 아비에게 꾸중을 듣는 일이 많았지만, 몇 번의 실수에도 원우의 아비는 염씨를 내치지 않고 원우의 옆에 두었다. 그만큼 원우가 염씨를 따랐고 염씨 또한 제 새끼처럼 원우를 챙겼다.
우두커니 서있던 다리 한쪽이 저려오기 시작하자 원우는 그제야 오늘따라 염씨가 유난히 늦는다고 생각했다. 문득 아침에 한껏 차려입고 자기를 태워다 준게 생각났고, 분명 어떤 처자를 꼬시러 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몇 차례 늦을 때마다 염씨는 커피 먹으러 다녀왔다고 둘러댔는데, 굳이 묻지도 않는 원우에게 제발 저려서는 늘 맡 끝마다 이런 말을 해왔었다. 도련님,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는데 이제 장가가야죠.
염씨를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교문을 나서는 사람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우르르 떼거지로 몰려나온 뒤로는 드문드문 몇몇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나오더니 이제는 거의 교문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반쯤 열린 채 고정된 교문에 살짝 몸을 기대섰다. 딱딱한 쇠창살의 감촉이 닿는 곳마다 차가워져 한결 나았다. 원우는 가만히 섰던 다리들이 아파오자 번갈아가며 다리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원우야."
등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살짝 뭉개진 발음으로 부르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원우라는 이름 또한 낯설었다. 가만히 누구일까 생각하는 원우를 향해 한번 더 원우야-하고 불러왔다. 방금 전보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교문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돌아보니 손에 잡힐만한 거리에 민규가 서있었다. 그리고 좀 더 멀찍이 민규와 늘 붙어 다니던 석민과 승관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
"아, 누구 좀 기다리느라고."
"원우야, 심심하면 같이 책방에 가지 않을래?"
"어느 책방?"
"책방에 종류가 따로 있나. 그냥 책방. 이런저런 책으로 가득한 곳."
"……."
"인사동에 근사한 책방이 있어서 보여주고 싶은데,"
"김민규! 잠깐 이리 와봐."
어느새 민규의 뒤로 따라붙은 석민이 싸늘한 얼굴을 하고는 민규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고 승관까지 셋이서 원우를 등지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남의 얘기에 깊은 관심을 갖는 성미는 아니지만 오늘따라 원우는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해 석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각별히 조심하는 듯한 말투에 석민의 모든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 말만큼은 또렷이 들려왔다. 총독부 이케다 과장 아들놈이라고.
명백히 선을 긋고 있었다. 자신을 위아래로 흘겨보는 승관의 눈빛까지 더해지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굳이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선을 긋는 쪽 또한 일방적이지 않았다. 하나의 교실에서 같은 선생 아래에서 같은 학문을 배우지만 흑과 백, 물과 기름처럼 나뉘어있었다. 민규가 흑이라면 원우는 백, 민규가 물이라면 원우는 기름. 조선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는 민규같은 무리와 일본인이거나 조선인이지만 일본인처럼 살아가는 원우같은 무리들이 한 교실 안에서 섞이지 못하고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전학 오던 첫날 꽤나 살갑게 인사를 건네온 민규였지만, 그 이후로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원우야-라고 불러주는 그 음성 또한 계절이 한차례 바뀌었던 이번까지 딱 두 번째였다.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또한 두 번째였다.
승관까지 가세해서는 민규를 향해 절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난감해하는 민규의 옆얼굴이 보였다. 옆에서 석민 또한 고개를 저으며 민규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더니 승관이 반대편 민규의 팔을 붙들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양옆에서 민규를 붙들고 빠르게 원우를 지나쳐가며 석민이 냉랭한 말투로 인사를 해왔다. 이케다 잘 가라.
가운데 붙잡혀가는 민규가 아쉬운 얼굴을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쳐버렸다. 그 순간 원우 자신도 모르게 무슨 용기가 났는지 뒤로 따라붙어서는 민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기, 민규야."
"응?"
"괜찮다면, 가보고 싶어. 그 책방."
"이케다 네가 감히 어딘 줄 알고!"
석민이 원우의 멱살을 세게 움켜쥐려는 순간, 민규가 그 앞을 막아섰다. 옆에서 그걸 지켜본 승관이 소리쳤다. 김민규, 지금 제정신이야? 분에 찬 승관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민규가 지그시 원우를 바라보았다.
"원우야 데려가 줄까?"
"내가 가도 괜찮다면."
"물론이지. 나와 함께 갈래?"
"꼭 가고 싶어. 그리고."
"……."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해."
인사동 거리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낡은 책방이었다. 몇 개의 골목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서야 발견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얼굴을 힐끔거리는 석민과 승관을 보며 원우는 생각했다. 어쩌면 일부러 내가 다시는 이 책방을 찾지 못하도록 빙빙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군소리 없이 민규와 나란히 서서 석민과 승관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걷다가 민규가 이쯤 하면 됐다며 발길을 우뚝 멈춰 섰고 민규가 멈춰 선 뒤로 낡은 책방이 보였다. 승관과 석민이 먼저 재빠르게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민규가 삐걱거리는 문을 열어 잡고는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부터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벽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책들은 책을 많이 보는 원우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책 들이었다. 원우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책 냄새를 재차 맡고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못 보던 친구랑 같이 왔네."
"새로 사귄 동무에요."
"새 얼굴이 오는 건 오랜만이네. 이름이 뭐야?"
"제 이름은 이케…."
"전원우요. 전원우. 지난봄에 전학 왔어요."
"그래. 위에 애들 기다린다, 올라가 봐라."
민규가 오늘 조금 늦었다며 머리를 긁적이고는 앞장섰다. 원우는 책방 주인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민규의 뒤를 따랐다. 책장 몇 개를 지나치고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민규가 책 몇 개를 밟고 올라서더니 천장에 튀어나와있는 손잡이를 당겼다. 이내 잡아당긴 손잡이를 따라 나무로 짜인 사다리가 쭉 내려왔다. 놀라운 광경에 원우의 눈이 동그래지자, 민규가 사다리를 오르다 말고 우리만의 아지트라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렇게 민규가 하는 대로 사다리를 어렵사리 오르니 꽤나 널찍한 다락방이 눈에 들어왔다. 다락방을 오르자마자 눈앞으로는 태극기가 붙어있었다. 사다리를 다 올라서니 천장이 아슬하게 머리를 스쳐갔다. 허리를 곧추세울 수는 없는 높이였지만 꽤나 넓은 공간이었다. 다락방의 구석에는 장막으로 가린 작은방이 있었고, 방까지 가는 벽면마다 책이 수북하게 놓여있었다. 눈으로 빠르게 책 제목들을 읽어내는데 원우가 지금껏 못 본 책뿐이었다. 하지만 들어본 기억은 있었다. 학교에서 대일본제국에 반하는 내용의 불온서적이라 불리던 책들이었다.
"어때 신기하지?"
"응. 처음 보는 책이라서. 나도 읽어보고 싶어."
"가져가서 봐도 돼. 단, 네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하고."
원우는 손에 든 책을 품에 안아들고 방을 향하는 민규의 뒤를 조심스레 따랐다. 장막이 걷히자 그 안으로 열댓 명의 또래들이 모여 앉아있는 게 보였다. 처음 민규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하던 얼굴들이 원우를 발견하자마자 굳어버렸다.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누구냐고 묻는 물음에 민규가 뭐라 소개를 하기도 전에 승관이 선수를 쳤다. 총독부 이케다 수사과장 아들 이케다 아스카.
그 말에 굳어있던 얼굴들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것 마냥 경멸하는 듯한 눈빛들에 원우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에 이제는 숨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가운데서 머뭇거리던 민규를 향해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김민규 어쩌자고 저런 놈을!"
"잠깐만 우리끼리 얘기하자. 원우야 잠깐 자리 좀."
"아래에서 책 읽고 있을게."
그리고 원우는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방을 벗어나고는 사다리를 하나하나 밟았다. 누구 하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불안한 속내는 숨기고 담담한 얼굴을 하고 사다리를 내려갔다. 잘못하면 발을 헛디뎌 마지막 사다리에서 떨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바닥에 발을 딛고 서자 언제 왔는지 아까 본 책방 주인장이 양손에 찻잔을 들고 서있었다.
마치 자기가 내려오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찻잔 하나를 건네왔다. 방금 막 끓인 듯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호-하고 김을 불어내니 찻잔 속을 떠다니는 꽃잎들이 보였다. 찻잔 위로 코를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마시자 향기로운 향이 가득 퍼졌다. 봄에 목련나무 아래에서 맡았던 그 향이 다시금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말린 목련 꽃을 넣어 끓였다. 머리 아플 때는 이만한 게 없지."
"아, 감사합니다."
"애들이 경계심이 좀 많단다. 그래도 나쁜 애들은 아니니 미워하지는 말거라."
"갑자기 불청객이 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석민이를 통해서 얘기는 들었다. 이케다 수사과장의 아들이라고."
"어떻게."
"내 소개가 늦었구나. 석민이 애비 이동화라고 한다. 보다시피 책방 주인이기도 하지."
어쩐지 얼굴이 낯익는다 싶더니 석민의 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석민이 성격이 모나서 처음엔 까칠하게 굴어도 친해지면 그렇지 않다며 꽤나 아비다운 말을 해왔다. 고개를 끄덕이는 원우에게 그 이후로도 석민의 애비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원우는 자신이 모르던 세계에 대해 차츰차츰 알아갔다.
원우에게는 책방에 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처음엔 꽤나 사나운 눈빛을 하던 석민과 승관도 이제는 원우가 책방에 오는 것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조용히 와서 책만 읽다가 가는 원우를 한번씩 이상하게 보기는 했지만, 경계심 가득했던 첫날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민규와 책방을 찾았다. 늘 학교가 끝나면 어디를 가냐는 염씨의 물음에도 비밀이라며 꼭꼭 숨기고 책방을 향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책방을 가기 위해 민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벌써 전차가 세대나 지나갔다. 첫 번째 전차를 탔더라면 이미 책방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자기 집에 같이 놀러 가자는 니시하라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원우는 교실을 박차고 달려 나왔다. 선생의 부름에 민규가 따라나가면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 게 벌써 한참 전이었다. 떠나는 네 번째 전차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원우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만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에 서있었더니 모자 안으로도 땀이 차기 시작했다.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책방에 가져갈 책으로 가방이 가득 차서 무게감이 상당했다. 그럴수록 김민규 이름 석자만 속으로 곱씹는 원우였다.
그 순간, 갑자기 원우의 모자가 벗겨졌다. 뒤늦게 모자를 잡아보려 했지만 이미 머리 위로 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경쾌한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민규가 원우의 모자를 들고 서있었다.
"이 더위에 모자는 왜 그리 푹 눌러쓰고 있어."
"이리 내놔."
"이런 칙칙한 모자는 학교 안에서만 써도 돼. 모자 안 쓰는 게 훨씬 낫다."
자기보다 조금 큰 키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민규가 손을 위로 쭉 뻗어서 원우에게 쉽사리 모자를 주지 않았다. 어서 달라는 원우의 책망 어린 말투에도 민규는 까치발까지 해가며 제게 달려드는 원우를 어린애 보듯 웃으며 보기만 할 뿐이었다. 히죽거리는 민규의 얼굴에 심통이 난 원우가 포기한 듯 가만히 숨을 고르며 서더니, 손을 뻗어 민규의 머리 위에 삐딱하게 쓰여있던 모자를 벗겨버렸다.
"어쭈 전원우 제법이네."
"지금까지 전차가 몇 대나 지나갔는 줄 알아."
"어차피 금방 또 올 텐데 뭘."
"왜 이렇게 늦었어."
"스즈키 선생이 안 놔주는데 어떡해. 지금도 겨우겨우 나온 거다. 원우야, 몇 분 내 얼굴 못 봤다고 서운해?"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면 책방에 늦게 가서 책 많이 못 볼까 봐 서운한 거야?"
굳이 짓궂게 장난치는 민규의 물음에 원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한 원우의 표정에 민규가 살짝 뾰로통한 얼굴을 해 보였다.
"책방만도 못한 내 신세. 너 요즘 책방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아저씨가 주시는 차도 좋고, 흥미로운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어 좋고. 나한테는 그곳이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나는."
"응?"
"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네. 이거 좀 섭섭하다, 전원우."
"너 같은 동무가 있어서 그 또한 나쁘지는 않고."
"나쁘지는 않다고? 자존심 상해서 못 들은 걸로 쳐야겠다."
어째 나보다 동화 아저씨랑 더 가까워진 것 같다며 민규가 약간의 심술을 담아서 원우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이내 원우가 동화 아저씨는 이렇게 유치한 짓은 하지 않는다며 묵직한 가방으로 민규의 엉덩이를 쳤다. 받아치듯 민규가 모자를 쥔 손으로 원우의 엉덩이를 쳤고, 원우가 흠칫 놀라더니 민규의 가슴팍을 세게 밀쳤다.
퍽-소리에 민규가 살짝 아픈 표정을 짓더니 힘을 주어 원우의 손목을 잡았다. 한 손에 손목이 쏙 잡히고도 남을 만큼 가늘었다. 움켜쥔 손아귀 안으로 가느다란 뼈대와 옅은 맥박이 그대로 느껴졌다.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민규의 손길이 꽤나 낯간지러웠다. 원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빼내자, 이번에는 민규가 원우의 다른 손에 들린 가방을 뺏어 들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사내 손이 이래서야."
"가방 이리 줘."
"책방까지만 내가 들게. 오늘은 내가 늦었으니까 한 번만이다."
가방 하나로 생색낸다며 뒤늦게 원우가 가방을 뺏어오려 했지만 민규가 가방 쥔 손을 저만치 빼버렸다. 가방을 뺏겠다고 좀 전처럼 또 실랑이를 벌였다가는 더위에 제가 먼저 쓰러질게 불 보듯 뻔했다. 원우는 금방 체념한 듯 책방 안에서도 계속 가방 들고 다니라며 한마디 던지고는 민규의 옆에 나란히 섰다.
"원우야."
"왜."
"동경에서 얼마나 살았다고 했지?"
"한 9년쯤 됐나 보다. 아홉 살 때 건너갔으니."
"그런데 왜 갑자기 경성으로 돌아왔어?"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든."
"아, 미안. 괜한 걸 물었네."
"괜찮아. 벌써 몇 달이나 지난 일인데. 그날 테러가 있었대, 어머니가 계시던 곳에."
미안해하는 민규와 달리 원우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고작 몇 개월 전의 일이지만 원우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하던 날을 떠올리며 아주 침착하게 풀어냈다.
동경의 신문에까지 실릴 정도로 경성 일본인 거리 한복판에서 큰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고 했다. 테러가 일어난 곳은 어머니가 자주 들르던 양장점이었고, 폭탄이 폭발하면서 양장점 주변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사라져버렸다는 내용도 있었다. 하필 그때 원우의 어머니가 양장점 안에 있었고, 아버지는 양장점에서 나와서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고 했다. 그 덕분에 아버지는 간단한 타박상만 입고 목숨을 구했다고 했고, 어머니는 제대로 된 유해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를 포함한 사망자가 넷이나 되었고, 아버지를 포함한 부상자가 열 명을 넘을 만큼 이례적으로 큰 폭탄 테러였다고 신문마다 일제히 보도를 했었다. 제 기억으로는 신문의 머리말이 이러했다. 과격한 조선의 무력집단들이 일본인뿐만 아니라 같은 핏줄의 조선인들까지 무차별하게 해하며 대일본제국에 도전을 하고 있다고.
"원우야, 누군가 네 어머니를 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건 아니었을 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말 미안하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게 해서 그리고."
"운이 나빴던 거지. 그날은 어머니가 운이 나빴던 거야."
운이 나빴던 상황임을 이야기하며 원우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그때 마침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전차가 멈춰 섰다. 원우는 눈물이라도 흘릴세라 눈가를 다급하게 훔쳐내고는 먼저 달려서 전차에 올라탔다. 여전히 멍하니 서있는 민규를 향해 어서 타라며 소리를 치자 그제야 민규가 허겁지겁 전차 안으로 뛰어올랐다. 여느 때보다 전차가 텅텅 비어있어서 둘은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두 개의 가방을 손에 꼭 쥔 민규는 웬일인지 책방을 향해 가는 내내 입을 뗄 줄 몰랐다.
교실 내에서 싸움이 있었다. 이번 싸움이 비단 처음은 아니었다. 조선인 무리와 일본인 무리의 미묘한 마찰은 그전에도 줄곧 이어져왔었다. 서로 암암리에 조센징새끼, 쪽바리새끼 하며 으르렁거리던 것을 애써 모른척하며 넘겨오던 게 오늘은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오늘은 누가 봐도 일본인 무리를 이끌고 다니는 니시하라의 잘못이었다.
모여서 도시락을 먹고 있던 민규와 석민, 그리고 승관을 보고 니시하라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더럽다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일본어를 중얼거렸다. 조선인들은 더럽고 천박해서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걸 잘 먹는다고. 그 말을 온전하게 알아들은 건 일본인 무리와 근처에 앉아있던 원우뿐이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비아냥대는 말투에 석민이 가만히 참고 듣지 못하고 니시하라를 몰아붙였다. 조선에 왔으면 조선말로 지껄이라고.
석민의 말에도 눌린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롭게 웃어 보이던 니시하라가 기어코 석민의 도시락 위로 침을 뱉어버렸다. 그 이후는 안 봐도 뻔했다. 서로 멱살을 잡고 몇 바퀴 돌더니 바닥에 꼬꾸라져서는 상대방의 얼굴을 가격하려 쉬지도 않고 주먹을 휘둘러댔다. 이미 책상과 의자들이 저만치 밀려 교실은 아수라장이었다.
뒤늦게 원우가 니시하라를, 민규가 석민을 말려보려 그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오히려 진정될 기미는 더욱 보이지 않았다. 니시하라가 책상 밑으로 처박혀서는 바닥을 휘젓더니 손에 잡히는 것을 무차별로 휘둘렀다. 그 때문에 니시하라의 앞을 가로막던 민규의 오른쪽 눈가 아래가 뾰족한 만년필에 긁혀 상처를 보고 말았다.
결국 민규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고서야 모두가 놀라서 일제히 멈춰 섰고, 누군가 불러온 선생이 다급하게 들어와서는 소리를 질러댔다. 이 사단의 책임을 묻겠다며 원우와 민규까지 쪼르르 세워놓고는 한참을 노려보더니 결국은 석민만 홀로 선생에게 붙들려가고 말았다. 민규가 나서서 설명을 해보려 했지만 선생은 들어주지 않았고, 그렇게 오후 수업이 다 끝나가도록 석민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민규가 석민을 데리러 가겠다며 교무실을 향했고, 원우는 오랜만에 홀로 쓸쓸하게 교문을 나서야만 했다.
원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부터 상세하게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염씨에게 쭉 늘어놓았다. 마지막에 선생에게 붙들려가는 석민의 암담한 표정까지도 상세하게 이야기를 했다. 평소답지 않게 흥분해가며 이야기하는 자신과 달리 염씨의 당연하다는 반응에 원우는 더욱 분을 토해냈다.
"일본에서도 그랬지만 여기 학교도 부조리한 것 투성이야."
"도련님 그건 부조리한 게 아니죠. 계급사회에 맞춘 거죠. 보이지 않는 일종의 계급."
"다 같은 사람인데 계급이 어디 있어."
"아이고 우리 도련님 아직도 이렇게 답답한 소리를 하시네."
오늘따라 허허 웃으며 제 맘도 모르고 재잘재잘 잘도 말하는 염씨가 이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뒤늦게 염씨가 원우의 눈치를 살피고는 그 붙들려간 학생 입장이야 안타깝지만 학교라는 게 작은 계급사회와도 같다며 말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학교 입장에서 첫 번째로 중시하는 게 누구냐, 바로 일본인이에요. 도련님 친구분 니시하라 같은."
"내 친구 아니야."
"그런 사람들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바로 도련님 같은 조선인이지만 일본인처럼 살아온 사람들이죠."
"그 말도 틀렸어. 나는 누가 봐도 조선인이야."
"주인 어르신은 일본에 충성하는 조선인이잖아요, 도련님은 그 아들이고요. 떼려야 뗄 수가 없죠. 그다음 세 번째가 조선인 중에서도 돈 많고 배경이 빵빵한 사람들이죠. 요즘 도련님과 같이 다니는 화선백화점 아드님처럼."
"화선백화점?"
"저기. 저기 옆에 보이시죠? 저게 그 집 백화점이잖아요."
그러더니 염씨가 설명을 덧붙여왔다. 그 집이 한양대대로 내려오는 유지였다는 말을 시작으로 민규의 아버지에 대한 사소한 것까지 줄줄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팔아 방직공장을 차려 돈을 벌었고 이후에는 점점 사업체를 확장 해오다가 세운 것이 바로 저 백화점이라고 했다. 처음 듣는 민규의 사적인 이야기에 원우는 더 이야기해보라며 염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기가 바로 꿈의 직장 아니겠어요. 조선인이라면 꼭 가고 싶은 곳."
경성 안의 수많은 백화점 중에서도 화선백화점은 유일하게 조선인이 세운 백화점이었다. 경성의 일본인거리를 수놓는 백화점들과 비교하자면 규모도 작고 물건들도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매출도 얼마 되지 않는 곳이었지만, 조선인이 세운 백화점이라는 정통성으로 인해 일부러 더 애용하는 조선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다른 이름으로 사람들은 그곳을 민족 백화점이라고도 불렀다.
"그만큼 친구분 아버님이 아주 심지도 올곧고 바른 분이셔요."
"전혀 모르고 있었어. 민규네 집이 부잣집인 것도 몰랐고."
"그래서 그 집에서 교육에도 많이 지원하고 힘쓰고 있잖아요."
"교육?"
"그 덕에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고 있는 조선인들이 바로 그 마지막 네 번째에요,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교육에 대한 열의로 학교를 다니는 조선인. 계급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죠."
그게 바로 석민과 같은 부류였다. 오늘 학교에서 석민만 홀로 불려간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거 없는 조선인일 뿐이라는 것. 무어라 반박하려 해도 염씨의 말이 그릇된 게 없어 원우는 입술만 달싹거리다 말았다. 힐끗 원우의 얼굴을 살핀 염씨가 그래도 그 학생에게 큰일은 없을 것이라며 원우를 안심시켰다.
"아재, 내가 뭐라도 할 걸 그랬나? 내가 도움이 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
"불려간 학생이 도련님 도움을 바라지는 않을 거예요."
"왜? 내가 아버지한테 얘기해서…."
"오늘 있던 일은 절대 어르신한테 얘기 마세요. 그리고 니시하라 같은 친구 분만 가까이하세요. 조선인은 안돼요."
"아재까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네."
차에 탈 때만 해도 자신의 얘기에 염씨가 맞장구치길 바라고 있었다. 염씨라면 학교에서 있던 일들에 대해 걸쭉하게 욕을 섞어가면서 자신의 편이 되어줄 거라고 믿었다. 지금 원우는 괜히 염씨에게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동경에서부터 9년을 줄곧 붙어있던 염씨였지만 오늘따라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통해 뒤를 살피는 염씨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창밖으로만 시선을 두는 원우였다.
전차가 경적소리를 내며 다가오자 차가 멈춰 섰다. 염씨가 뒤를 돌아 자신을 빤히 보는 게 느껴졌지만 원우는 일부러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도련님을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아재는 아무것도 몰라."
"모르긴요, 저도 다 알아요. 저 역시 아무것도 가진 거 없는 조선인이잖아요."
순간 쳐다본 염씨의 얼굴 위로 선생에게 붙들려가던 석민의 얼굴이 겹쳐졌다. 어여 집으로 모시겠다며 희미하게 웃는 입가가 왠지 석민을 생각나게 했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 원우는 운전석 염씨의 축 처진 어깨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서른하나, 서른둘, 서른셋…."
"어차피 정해져있는 계단 숫자는 뭣하러 세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숫자라도 세면서 올라가야 앞으로 몇 개 남았는지 알잖아."
"그걸 꼭 입 밖으로 소리를 내야 아는 것도 아니고."
"이석민 조용히 안 해?"
계단을 오르는 승관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옆에서는 석민이 잔소리를 하면서도 은근 승관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앞서 계단을 오르던 민규가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계단을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 둘을 쳐다보았다. 맨날 싸우면서도 저 둘은 왜 저리 붙어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원우도 가만히 멈춰 서서는 둘을 보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저 두 사람은 보고만 있어도 유쾌해지는 것 같다고. 그 한마디에 승관과 석민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원우를 째려봤다. 동시에 째려보는 폼이 어찌나 웃기던지 원우가 입을 가리고는 입술 새로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아, 미안.
"이석민 너 때문에 몇까지 셌는지 까먹었잖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이제 좀 조용하게 올라가자."
"숫자 서른셋까지 셌어. 이제 서른넷 할 차례."
"어? 어. 고맙다 전원우. 서른넷, 서른다섯 …."
승관이 다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승관의 숫자 소리에 맞춰 다들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석민도 겉으로는 툴툴거렸지만 속으로 계단 숫자를 세면서 오르고 있었다. 몇 번씩이나 올랐던 계단이지만 오늘따라 신사 앞까지 뻗어있는 이 계단이 유독 지치고 멀게만 느껴졌다.
경성고등보통학교와 가장 가까이에 자리한 신사였다. 남산의 남서쪽 기슭을 따라 108개의 계단을 올라야만 마주할 수 있는 곳. 경성 호국 신사가 새로 생기고부터는 늘 신사참배를 할 때면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이끌고 이곳을 오르고는 했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계절마다 한 번씩 올랐고, 경성 안에서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지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신사참배를 강요당해야 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경성 내에서 작은 테러 사건이 벌어진지 채 며칠도 되지 않아 정신교육의 일환이라는 명목으로 다 같이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일흔 가까이 열심히 숫자를 세던 승관이 숨이 차는지 어느새 숫자 세는 것도 잊고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오늘 학교에 나오지 말걸 그랬다.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후들 거려."
"언제쯤 엄살 부리나 했다. 오늘은 좀 많이 버텼네."
"전원우 너는 뭐가 그리 좋아서 실실 거려. 좋은 거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그냥. 꼭 동무들하고 소풍 가는 것 같아서."
"실없는 소리는."
승관의 핀잔에도 원우는 헤실 거리며 웃었다. 원우에게는 정말 그러했다. 신사참배를 가는 것 따위는 원우에게 중한 게 아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날씨와 나란히 서서 걷는 동무들. 그것이 마냥 좋았다.
계단의 끝머리가 가까워올수록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느려졌다. 대열에 맞춰 쉬지도 않고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게 버거웠는지 원우가 중간중간 숨을 골랐다. 그나마 계단 위로 드리운 나무 그늘과 한 번씩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멈춰 땀을 식힐 수 있었다.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원우를 보고는 민규가 계단을 도로 내려와 나란히 섰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조금만 오르면 돼."
"요즘 통 안 걸어 다녔더니 다리가 못 따라가네."
"자, 손잡아."
"됐다. 조금 쉬다 오르면 돼."
"늦게 오르면 스즈키 선생이 뭐라 할지 몰라. 얼른 손 이리 줘."
이미 반 아이들 여럿이 둘을 지나쳐 갔고 어느덧 대열의 가장 꽁무니에 선 상태였다. 못 이기는 척 무릎에 얹었던 손을 들어 보이자마자 민규가 꼭 잡아왔다. 꽤나 큼직한 손이었다. 이 더위에도 땀 하나 없이 보송보송했다. 깍지를 껴오는 손가락 마디가 살짝 거칠거칠하기는 했지만 마주 닿은 손바닥이 너무도 따듯해서 원우도 모르게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어 잡았다. 그제야 민규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원우에게 맞춰 한발 한발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도 손을 꼭 잡았다. 신사에 다다르고 앞서가던 승관과 석민이 둘을 보고 놀릴 때까지 마주 잡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어느덧 여름의 중턱이었다. 일주일 전쯤 원우의 생일을 알게 된 민규가 선물을 하고 싶다며 일찍이 약속을 잡았다. 생일날까지도 책방에서 책 한 권 사주는 것으로도 족하다는 원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한사코 제 아버지의 백화점으로 끌고 간 민규였다.
화선백화점은 경성의 백화점 중에서도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었다. 얼마 전에 아비를 따라다녀온 근방의 백화점과 비교하면 6층 규모의 매우 작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원우는 처음 백화점을 구경 온 학생처럼 설레여했다. 그 표정에 민규는 내심 안심하며 원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남학생 둘이서 백화점 구경이라는 게 처음에는 꽤나 어색한 일이었지만 민규와 원우는 한 곳도 빠짐없이 곳곳을 돌며 구경하기 바빴다. 오늘 하루 종일 같이 붙어있자는 어린애 같은 민규의 말에 원우 역시 들떠서는 민규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녔다.
1층부터 6층까지 샅샅이 돌아다닐 동안 원우는 제 선물을 고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고작 산 것은 식료품을 파는 매장에서 구매한 고기만두와 곰보빵이 전부였다. 그렇게 요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들렀던 4층 책방에서 원우는 갖고 싶은 것을 골랐다며 시집 한 권을 꺼내들었다. 그렇게 시집 한 권을 들고는 옥상 정원에 오른 원우와 민규였다.
옥상정원은 꽤나 잘 꾸며져있었다. 가운데에 우뚝 솟은 분수와 곳곳에 수목이 놓여 마치 잘 꾸며놓은 정원에 와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민규와 원우는 분수가 잘 보이는 의자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고작 백화점에 와서 고른 게 책이라니."
"왜. 나는 책이 정말로 좋은데."
"적어도 이런 시계라도 하나 사주려고 했는데."
"그게 뭐야."
"지난 생일에 아버지한테 받은거야. 매사에 늦지말라고."
"뜻은 좋은 선물인데 민규 너하고는 안 어울린다."
원우의 핀잔에 민규가 멋쩍어했다. 민규 손에 들린 회중시계는 고급스러웠지만 제법 손때가 묻은 시계였다. 원우가 만지작거리자 이래 봬도 할아버지가 쓰시던 시계라며 꽤나 자랑스러워했다. 민규가 줄을 감아 회중시계를 제 품에 넣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선물 사주려고 모아온 용돈이 쓸데 없어졌다."
"이듬해에 열아홉이 되면 그때 쓰면 되지."
"그때도 또 책 고르려고?"
민규의 뾰로통한 물음에 원우가 웃음으로 화답하며 시집을 한 장 넘겼다. 시집을 읽어내려가는 원우의 눈이 매우 평온해 보였다. 몇 구절 되지 않는 시 한편도 쉬이 넘기는 법 없이 몇 번씩 읽는지 한자 한자 공들여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민규는 그런 원우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주변의 시간이 모두 다 멈춘 듯했고, 이 넓은 옥상 위에 단둘만 있는 기분이었다.
시집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던 원우가 살포시 고개를 드니 민규가 처음 보았던 날처럼 빤히 보고 있었다. 다시 시집으로 눈을 돌렸다가 눈을 힐끔거리니 여전히 민규가 쳐다보고 있었다. 원우가 한숨을 푹 내쉬고 손을 들어 민규의 눈앞을 가리자 민규가 손을 잡아 내렸다.
"너 때문에 책을 못 보겠다."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렇게 빤히 보는데 어떻게 책을 봐. 나머지는 집에 가서 읽어야겠다."
"벌써 가려고?"
"늦기전에 가봐야지. 늦으면 또 아버지한테 꾸지람 들을지 몰라."
"원우야 조금만 더 있다가 가. 나랑 조금 더 있자. 조금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원우의 손을 민규가 놓아주지 않았다. 교문을 나서면서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민규가 붙잡아 섰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도 민규는 원우를 붙잡았다. 이제는 아예 자신의 집에 가서 저녁을 먹자는 말까지 나왔다. 오늘따라 수상하다는 원우의 말에 민규는 그냥 같이 있고 싶다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렇게 민규와 천천히 1층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백화점 1층이 꽤나 소란스러웠다. 하얀 제복을 입은 순사들이 맞은편 에스컬레이터를 다급하게 뛰어오르고 매장 곳곳을 들쑤시고 있었다. 순사들이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진열장의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소란을 더했다. 그 중심에는 화선백화점 사장이 서 있었다. 1층에 다다르자마자 민규는 제 아비에게 달려갔고, 원우도 뒤를 따랐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총독부에서 들이닥쳤다는구나."
"총독부요?"
그때였다. 백화점의 정문이 열리고 순사 여럿을 뒤에 달고 이케다 수사과장이 들이닥쳤다. 원우도 제 아비를 발견하고는 놀라 민규의 뒤로 뒷걸음질 쳤다. 민규가 원우의 손을 꾹 잡으며 힘을 주었다. 어느덧 민규 아비 앞까지 걸어온 이케다가 원우를 한번 보고는 미간 사이를 찡그리더니 코끝의 안경을 밀어올리며 원우에게 시선을 거뒀다. 거둔 시선은 그 앞의 화선백화점 사장에게로 향했고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나랏일 하느라 바쁘실 텐데 이런 데서 만나게 되는군요."
"긴밀한 제보가 있어서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제보요?"
"요즘 참 경성 바닥이 뒤숭숭하지요? 테러집단에 소속된 놈들이 이 백화점에서 자주 목격되었다 하더군요."
"그들도 백화점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나 봅니다."
"아니면 이곳 어딘가에 근거지가 있다는 얘기겠지요."
"근거지라. 백화점을 조사하는 것은 제가 막지 않겠습니다. 나랏일을 막을 생각도 없고. 다만 이곳 손님들은 제 고객이시니 무례한 행동은 용납지 않을 것입니다."
얼굴에 미소를 띠며 또박또박 제 할 말을 하는 화선백화점 사장의 태도에 이케다가 꽤나 불편한 표정을 드러냈다. 원우도 재빠르게 제 아비의 표정을 읽어내렸다.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에서 최대한 제 감정을 절제하려 했지만, 바지선 옆에 딱 붙은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분노에 차오른 제 아비의 모습에 원우 역시 겁에 질려 손을 바르르 떨었다.
화선백화점 사장은 여전히 꼿꼿하게 서서 이케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하더니 이내 이케다가 손을 들어 보이며 멈추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말에 순사들이 일제히 멈춰 서고는 이케다 수사과장의 주변으로 결집했다.
"사장님도 언제 한번 총독부에 들르셔야지요."
"저도 수사할게 있으시답니까."
"그건 또 모르는 일이죠. 혹시라도 제가 사장님을 부르기 전에 대일본제국을 위해 총독부 재정에 도움을 줄 의향이 있다면야 언제든 찾아오시지요."
"총독부 사정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저 같은 일개 조선인에게도 도움을 달라 하는 걸 보면. 꼭 그 테러단의 근거지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이케다 수사과장이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여전히 민규의 뒤에 서있던 원우가 머뭇거렸다. 원우의 손을 잡은 민규가 더욱 힘을 꼭 쥐었다. 그러더니 이케다 수사과장이 백화점 정문을 향해 걸어나가다가 뒤를 돌아 소리쳤다.
"이케다 어서 따라오지 못해!"
"네, 아버지."
이케다의 호통에 원우가 발을 뗐다. 마지막까지 원우의 손을 잡고는 민규가 작게 얘기했다. 가지 마. 아직은 가지 마. 원우가 머뭇거리며 제 아비와 민규를 한 번씩 쳐다봤다. 그때 좀 전보다 더 날카롭게 아비가 외쳤다. 이케다 데려와! 그리고 뒤에 있던 순사 하나가 원우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원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미안해. 그말에 민규가 어쩔수 없이 원우를 잡은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원우는 제 아비 뒤에 바짝 붙어 백화점을 나섰다.
"망할 조센징."
"아버지."
"너에게 실망이 크다. 나머지는 집에 가서 얘기하자."
정문앞에 준비된 차로 향하며 원우는 한 번씩 뒤를 돌아봤다. 당장에라도 민규가 뛰어나올것만 같아서 걸음을 늦추어 뒤를 한 번씩 확인했다. 투명한 유리문 안에서 민규가 달려나오려는걸 민규의 아버지가 꼭 붙잡고 있는게 보였다. 그 모습에 원우가 머뭇거렸다.
그 순간 어디선간 큰 외침이 들려왔다.
"대한 독립 만세!"
선명하게 들려오는 외침에 원우를 포함한 모두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이케다 역시 차에 오르다 말고 내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순사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원우와 이케다 사이로 수통이 하나 날아 들었다. 날아드는 수통을 확인하자마자 이케다가 원우에게 몸을 날려 함께 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렸다.
바닥에 떨어진 수통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바닥에 드러누운 원우가 고개를 빼꼼히들었다. 수통에서 일어난 불꽃은 살짝 피어나더니 이내 수그러들었다. 의아한 얼굴로 아비와 수통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분명 그것은 폭탄이었다. 이케다 역시도 독립군들이 사용하는 소형 폭탄으로 많이 봐온 것이었다. 수통이 불발임을 확인하자마자 이케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총탄이 빗발쳤다. 그리고 놀랄새도 없이 백화점 앞에 서있던 순사 두어명이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원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차 문짝에 몸을 최대한 밀착하고는 쭈그려 앉았다. 정신을 차릴새도 없이 온몸을 덜덜 떨기만 했다. 이내 이케다가 원우의 팔을 잡더니 열린 차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자신도 차에 올라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사이 총탄이 날아들었다. 순간이었다. 그대로 왼쪽 정강이에 날아든 총탄에 이케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총탄이 지나간 자리에서 피가 뿜어져나왔다. 그 상황에서도 이케다는 이를 악물고 몸을 질질 끌어 차에 몸을 싣었다.
"아...아..아버지...!"
"머리 숙여! 고개 들지마!"
"아버지 다리...다리가.."
"어서 출발해! 어서!"
머리를 숙인채 원우는 벌벌 떨었다. 피가 마구 치솟는 제 아비의 다리를 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은채 벌벌 떨었다. 이내 좀전까지 빗발치던 총탄소리가 어느새 잦아들었다. 원우가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어 창밖을 살폈다. 순사들이 몇몇 사람들을 붙잡아 제압하자 사람들이 그대로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그때 저 멀리 순사에게 붙잡힌 학생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제 또래로 보이는 학생이었다. 키가 작지만 다부진 체구를 한 학생이었다. 검은교복에 모자를 꾹 눌러 쓰고 있는게 꽤나 익숙한 모양새였다.
순사들에게 붙잡힌 학생의 몸이 그대로 땅으로 쳐박혔다. 순사들의 거침없는 손길에 모자가 벗겨져 바닥에 뒹굴었다. 모래바닥에 얼굴을 쳐박혀 울부짖는 학생의 얼굴이 드러났다.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커다란 눈망울 가득 투지가 불타 오르고 있었다. 순사가 쥔 총부리에 머리가 눌린 상태에서도 다 쉰 목소리로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를 연이어 외쳐댔다. 그렇게 멍하니 학생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차가 급히 현장을 떠났다. 차가 현장을 빠져나올동안 원우는 그 학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란이 있고 다음날, 여느때처럼 원우는 학교에 등교했다.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 있겠다는 원우의 바람과 달리 이케다는 굳은 얼굴로 학교를 가도록 지시했다. 다만 전날과는 다르게 학교까지 향하는 원우의 옆으로 순사 두명이 붙어있었다. 평소에는 아침마다 교실안이 시끌시끌했지만 오늘따라 잠잠했다. 전날의 소란을 신경썼는지 아침부터 제복을 반듯하게 차려입고 들어온 선생이 황국신민의 자세를 강조하며 교육을 시작했다.
책가방을 내려둔 원우는 교실안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정확하게 교실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덩그러니 비어있었다.긴 수업시간이 끝이나고 원우가 순사들과 함께 교실을 빠져나올 때까지도 여전히 빈채로 남겨져있었다. 그때까지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날도, 그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며칠이 지나고는 처음부터 없었던 자리처럼 의자와 책상이 사라졌다.
그 이후로 학교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승관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처음부터 이곳에 없던 것처럼 승관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지루하고 긴 장마의 시작이었다.
예년보다 비가 오는 날이 많았고, 더위도 금세 꺾였다. 동경만큼이나 경성의 더위 또한 어마 무시하다는 염씨의 말과 다르게 경성의 여름은 눅눅하고 흐린 잿빛이었다.
여름이 다 가도록 일본군의 횡포는 심했다. 잦은 테러 사건으로 위태로워진 경성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잡아들였다. 제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광장에 사람들을 모아두고 없던 죄목까지 만들어가며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특히 화선백화점에서의 테러 사건이 있고부터는 그 대상이 조선인 학생으로까지 번졌다.
테러를 일으킨 주동자로 학생으로 구성된 독립단체인 대한 학생단, 즉 대학단이 지목되면서 학생들이 취조를 받고 고문을 당하는 일이 흔해졌다.
이케다 수사과장은 더욱 적극적으로 수사에 매달렸다.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왼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편한 왼발을 대신해 지팡이를 꼭 쥐고는 현장마다 빠지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다. 다리를 하나 잃은 대신 훈장을 얻었고, 훈장에 걸맞게 더욱 표독스러워졌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다리 하나 잃고 나니 미친개가 되었다고.
일본의 이런 강압적인 술수가 먹혔는지 경성의 소란은 여름 더위가 수그러들듯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원우의 곁을 지키던 순사들도 다시 제 본래의 근무지를 향했고, 원우는 오랜만에 홀로 등하교를 할 수 있었다. 원우가 바라던 날이었다.
학교밖에서는 제 곁을 떠나지 않는 순사들 탓에, 학교안에서는 수많은 눈초리 탓에 소란이 있은 후 단한번도 민규와 이야기를 나눠본적이 없었다. 승관을 포함한 대학단의 손에 죽임을 당할뻔했지만 누구에게도 그에 대한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승관이 붙잡혀 간것에 대해 석민을 포함한 같은반 조선인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민규와도 서로를 향해 시선 한번 주지 않고 긴 여름을 보내야 했다.
학교 담장을 따라 세워진 나무들이 저마다 울긋불긋하게 가을색을 입어갔다. 바람은 더욱 선선해졌고, 햇볕 아래 서있어도 따가운 줄 몰랐다. 밖에서 기다리던 염씨에게 알아서 집에 가겠다며 둘러대고는 한참을 담장부터 교문까지 오가며 하염없이 학교 건물 입구만 바라봤다. 이윽고 그토록이나 기다리던 민규와 석민이 입구를 빠져나왔다.
원우가 빠른 걸음으로 교문을 향해갔다. 소란이 있은 후 단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급작스럽게 가까워진 만큼 급작스럽게 멀어졌다. 원우는 오늘을 무척이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민규가 걸어오는 것에 맞춰 지나는 길목에 섰다. 원우를 발견한 민규와 석민 역시 걸음을 멈춰 섰다. 반가운 기색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민규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고, 석민의 눈빛은 처음 자신을 이케다라고 부르던 날처럼 차갑기만 했다.
"민규야."
"무슨 일이야."
"우리 같이 책방 가지 않을래? 오랜만에 다 같이."
"책방 안 간지 오래야. 그리고 지금은 좀 바빠서."
"아, 미안."
원우가 뭐라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석민과 민규가 발길을 재촉했다. 저만치 멀어지는 민규의 뒷모습을 보면서 원우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혼자만 너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나 후회를 했다. 차갑기만 한 민규의 얼굴에 후회가 물밀듯 몰려왔다. 가만히 서서 멀리 사라지는 민규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원우는 민규가 간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걸었다. 머릿속으로 집까지 가는 길을 떠올리고 나니 속으로 괜히 염씨를 돌려보냈나 싶어지는 원우였다. 큰길까지 걷는 내내 머릿속에서 민규의 서늘한 눈빛이 떠나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기다릴 것을 조급하게 군 자신이 미련스러워졌다. 모퉁이를 돌며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고 민규가 걸어가던 쪽을 바라봤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원우는 걸음에 조금 더 속도를 붙였다. 큰길로 나가자 금방 전찻길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전차를 보며 원우가 막 뛰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 원우의 손목이 붙잡혔다. 뜀박질하려던 발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돌아본 자리에는 민규가 서있었다. 줄곧 달려왔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민규가 잡은 손에 힘을 싣었다.
"너 이미 갔을까 봐 쉬지도 않고 달려왔다."
"민규야."
"이제야 말할 수 있겠다, 우리. 너랑 말하고 싶은 거 참느라 혼났다."
"……."
"설마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원우야?"
손을 잡고 해맑게 웃어오는 민규의 얼굴을 보며 원우가 고개를 떨궜다. 눈물이 막 떨어지려는 걸 교복 소매로 훔쳐냈다. 원우의 머리통만 내려다보던 민규가 몸을 숙여 원우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을 바짝 들이댈 때마다 원우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피하자, 민규가 원우의 양 뺨을 잡고는 억지로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목에 힘을 주어 고개를 숙이려는데도 민규의 힘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원우야."
"나는, 나는 혹시나 하고"
"왜 그래."
"승관이 일 때문에 나를."
"네 잘못이 아니잖아.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 마."
"이렇게 민규 너랑 이야기 나누고 싶었어. 몇 번이나 말 걸고 싶었는데."
"그럼 됐어. 아니라고 했음 섭섭할뻔했는데 다행이다."
민규가 원우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자 원우가 따라서 민규의 볼을 꼬집었다. 민규가 꼬집는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며 원우의 손을 잡아 끌어내리는데, 원우가 아까의 복수라며 더 힘을 주어 꼬집었다. 아프다며 엄살을 떠는 민규를 보며 뒤늦게 원우가 손을 떼자 민규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잡고는 꼭 깍지를 꼈다.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디? 책방?"
"책방만큼 재미있는 곳."
경성에 도착한 첫날, 염씨가 경성 구경을 시켜주며 보여주었던 극장 우미관이었다. 민규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는 내내 연유를 물었지만 민규는 대답도 없이 끝끝내 원우를 제 옆자리에 앉혔다. 입구에 걸려있던 포스터 속의 우스꽝스러운 수염 달린 서양 남자가 나오는 영화였다. 빠르게 지나가는 화면에서 눈 한번 떼지 않았지만 내용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원우였다.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영화가 끝이났다. 극장 안이 환해지자 민규가 만족한 얼굴로 웃어 보이며 원우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원우야 재미 있었어?"
"응. 너는?"
"너만 쳐다보느라 못봤어."
"어?"
"너 보고 있었다고. 너 웃는 거랑 찡그리는 거랑 다."
"그럼 극장에 왜 데리고 왔어."
"그냥 너 웃는 거 보고 싶어서. 오랜만에 웃는 거 봤으니 됐다."
민규의 말에 원우가 멍하니 바라보고 섰다. 가만히 선 원우를 보더니 민규가 손가락으로 원우의 입꼬리를 잡아 올리며 그런다. 평소에도 이렇게 좀 웃으라고. 원우가 얼굴을 뒤로 쭉 빼고는 하나도 재미없다며 극장을 먼저 빠져나가자 냉큼 민규가 원우 뒤를 쫓았다.
어느덧 극장 밖은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저녁이 되자 살짝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원우가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자마자 민규가 빼서 손을 꼭 잡았다. 간지럽다며 원우가 손을 빼내려니 민규가 더 힘을 줘서 꼭 잡고는 걸음에 맞춰 앞뒤로 흔들기까지 했다.
"집까지만 이러고 가자."
"우리집 어디인줄은 알고?"
"너 따라 가다보면 나오겠지. 집 가기 싫으면 계속 걷자."
"그래 천천히 가자."
민규의 손에 이끌려 청계천 변을 따라 걸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원우의 집이 위치한 남촌의 일본인거리였다. 제 집을 근방에 두고도 원우는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져 민규의 손을 잡고 한참을 주변만 맴돌았다. 한 계절이 지나도록 말을 못하던 사이였음에도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말은 별로 없었다. 찬 바람이 불면 날씨에 대해 한마디씩 하고, 청계천의 탁한 물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하는게 전부였다.
그렇게 청계천가를 따라 오가다 보니 점점 밤이 깊어졌다. 관수교를 건너 남촌을 한참 걷다보니 어느덧 원우의 집이 코앞이었다. 민규의 집도 북촌에서 꽤나 크고 으리으리한 집이었지만 원우의 집 또한 그에 만만치 않았다. 집앞에 선 원우가 먼저 내일 학교에서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발을 떼려했지만, 못내 아쉬운지 우두커니 선 민규가 마음에 걸려 결국 제자리였다.
"민규야 무슨 할말이라도 있어?"
"너 지난번 생일에 사준 책은 다 읽었어?"
"언제적 이야기야. 열번도 더 읽었다."
"다행이네. 그리고. 생일날 있던 일들은 잊어버려."
"그래야지."
문득 원우의 머릿속으로 승관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머리속이 깜깜해졌다. 잊으라고 말하는 민규가 애써 담담한 표정을 해보였지만 한 구석엔 꽤나 애석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원우에게도 그 일은 제 아비가 다리를 다친것처럼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승관의 손에 자신이 죽었을 수도 있었으니. 비록 지금은 그 반대로 자신이 살아있지만.
잊겠다고 얘기했지만 아마 평생토록 그 일은 원우 머릿속에서 잊을 수 없는 악몽과도 같은 날일 수 밖에 없었다. 민규에게도 제 친한 친구가 순사들에게 붙잡혀 가는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날이었으니 똑같은 악몽일 수 밖에 없던 날이었고. 선뜻 누가 먼저 다음말을 하지 못하고 마주보고 서있었다. 어색한 기류가 이어지자 원우가 먼저 말을 돌렸다.
"민규야,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너는 태어난 날이 언제야?"
"4월 6일."
"4월이면 사쿠라가 피는 계절이구나."
"동경에서는 그렇지? 내가 태어난 곳은 커다란 목련나무가 사방에 가득했어."
민규의 말에 처음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오던 날 교문에서 본 목련나무를 떠올렸다. 큼직큼직한 꽃송이들이 가득 피어있던 나무를 떠올리자 절로 기분이 좋아져 원우가 웃어보였다. 목련나무 하나만 보아도 그렇게 예뻤는데 목련나무가 가득 자라있는 곳은 어떤 느낌일지 도저히 상상이 안되었다.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목련이 만발했다 하셨어. 하얀 꽃봉오리를 터트리며 목련 꽃이 활짝 피었다고. 그래서 내가 딸이었으면 김민규가 아니라 김목련이라 이름 지으려고 했었다고 하셨는데. 생각해보면 아들이라 참 다행이지?"
"어머님이 꽃을 좋아하시나보다."
"어머니 이름이 목란이였어. 목련의 다른 이름인데, 그래서 일부러 목련꽃이 많은 동네에서 사셨대. 어렸을때는 매년 어머니 손잡고 목련꽃 보러 집 뒷산에 오르고 했었지. 봄마다."
"요즘은?"
"돌아가셨어. 소학교 들어갈 무렵에."
"미안. 어머님이 안 계신줄 몰랐어."
"괜찮아. 원우야 그러고보면 우린 참 많이 닮은것 같다."
민규의 말에 원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참 닮은게 많지만 서로 가까이 있는것은 녹록지않은 사이였다. 그리고 이정도 거리에서 더 이상은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이기도 했다.
"원우야 혹 내가 너를 학교에서 모른척 해도 이해해줬음 좋겠다."
"응.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으니 그래야겠지?"
"대신 학교 밖에서는 오늘처럼 같이 어울리는거다. 알았지?"
"너 밖에서도 모른척 하면 내 주먹이 가만있지 않을거야."
"네 주먹이라면 백대도 맞을 자신 있다."
놀리는 민규의 말투에 원우가 주먹을 꽉 쥐고 민규의 가슴팍을 세게 치자 민규가 아프지도 않은지 간지럽다며 마냥 웃기만 했다. 원우가 한번 더 주먹에 힘을 주어 치는데 민규가 주먹을 낚아채고는 손등을 제 입에 가져다대고는 호호 따듯한 입김을 불었다.
"간지러워."
"들어갈때까지만 이러고 있자. 네 손 차갑다."
"가끔 보면 널 도통 모르겠다. 철부지 장난꾸러기 같다가도 다큰 어른같고."
"지금은 내가 어른 같아? 그거 칭찬으로 생각해야겠다. 원우야 우리 내일은 뭐 할까? 다음날은 또 뭐하지?"
"천천히 하자. 하루에 하나씩. 남산도 가보고 싶고 전차타고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구경하고 싶어."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
원우가 경성에 온지도 어느덧 반년이 훌쩍 넘었다. 경성에서 아홉살까지의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그 이후 줄곧 동경에서 보낸 원우에게 경성은 아직 낯선 곳이었다. 가끔 염씨의 안내를 받거나 아버지와 함께 경성의 유명한 명소 몇곳을 둘러보는게 전부였다. 민규의 물음에 원우는 재잘재잘 제가 가보고 싶던 곳들을 쭉 이야기했다. 우미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 또한 하고 싶던 것중에 하나였는데 오늘 민규와 해봤으니 제외시켰다. 염씨가 늘 이야기 하던 혜화동의 멋진 카페도 꼭 한번은 가고 싶다며 말하자 민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은지 원우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하나를 더 이야기 했다.
"봄되면 꽃구경도 하고 싶다."
"꽃구경?"
"경성에 꽃 많이 피는 곳에 가서 하루종일 꽃만 보다 오고 싶어."
"그럼, 내 생일 되면 목련 보러 같이가자."
"정말? 어디로?"
"내가 태어난 북촌마을 뒷산에. 봄되면 꼭 같이 보러가자."
민규의 말이 끝나자마자 원우가 제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가느다란 새끼손가락 하나를 세우는 걸 보며 민규가 웃음을 터트리자 원우가 재촉했다. 웃기만 하더니 새삼 진지한 원우의 얼굴에 못 이긴다는듯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어주었다. 다른 곳은 못 가더라도 목련꽃은 꼭 보러가자는 원우의 말에 민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 사이 원우의 집 앞으로 자동차 한대가 멈춰섰다. 자동차 불빛에 고개를 돌리자 멈춰선 자동차 뒷자리에서 이케다 수사과장이 내려섰다. 여직 손가락을 걸고 있던 민규와 원우가 그제야 손가락을 급히 풀었다. 제 아비를 본 순간부터 원우는 초조한 얼굴을 했다. 민규 역시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걸어오는 이케다를 향해 가볍게 고개숙여 인사를 했다.
또각거리는 지팡이 소리가 점점 민규와 원우쪽으로 다가왔다. 원우의 눈매와 쏙 빼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눈이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의 눈이라며 경성 사람들이 이야기 하던 그 눈이었다. 이케다는 콧등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민규와 원우를 한번씩 쳐다보고는 아무말도 않고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섰다. 제 아비의 뒷모습을 보던 원우가 민규에게 가만히 눈짓을 하고는 다급히 집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원우는 한참동안 서재 문앞에서 머뭇거렸다. 이미 안에서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염씨가 어서 주인어르신께 인사를 하라고 했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가만히 서있었다. 손톱끝을 잇새로 잘근잘근 물으면 초조해하고 있던 찰나 방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케다라고. 그 소리에 원우가 용기내어 서재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학교에서 꽤 늦었구나."
"친구와 영화를 보고 왔어요. 제가 보고 싶다고 졸라서."
"친구라. 친구 좋지. 그런데 함부로 친구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면 쓰나."
책상 앞에 앉은 이케다의 눈이 번뜩였다.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힘을 주어 말하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췄다. 이케다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뒤이어 책상 서랍을 열어 상자를 꺼내더니 그 속에서 귀하게 다루던 총을 하나 꺼내들었다. 원우도 일전에 몇번 본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총독각하가 직접 하사했다며 이케다 가문의 가보로 삼겠다고 이야기 했던 총이었다. 총자루에 둘러진 금테부터 상자에 함께 들어있는 금빛의 총탄까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총이었다. 총을 손에 쥔 이케다가 책상 구석의 마른수건 하나를 쥐고는 총부리를 조심히 닦아냈다.
"총독각하께 받은 물건이다. 왜? 조선인을 죽인 공로로. 앞으로 더 많은 조선인을 잡아죽이라는 채찍과도 같은것이지."
"……."
"우리 가문은 그런 집안이다. 조선인을 잡아죽일수록 명예를 드높이 살 수 있는 집안. 그런데 고작 그런 조선인에게 친구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되겠지."
"하지만 저에게는."
"그쪽과 연관되는 일은 없도록해. 여태 가만 두고만 보았다만 이 이상은 용납치 않는다."
"아버지."
"너에게 어울리는 친구를 만들어. 더 위험해지는 일이 없도록."
원우는 철저하게 제 아비의 말을 무시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예전같았으면 두려움에 떨며 당장에라도 민규의 손을 놓았겠지만 원우는 학교가 끝날때면 늘 민규와의 약속을 기다렸다. 원우가 얘기했던 장소들을 하나도 까먹지 않았는지 민규는 매일마다 경성의 색다른 곳들을 보여주었다. 노을이 예쁘게 지는 남산에도 올랐고, 원우가 이야기 하던 카페에 가서 어울리지 않게 커피도 한모금씩 하며 다큰 어른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전차를 타고 경성의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일도 해보았다. 갈 곳이 없는 날에는 청계천 관수교 위에 서서 흘러가는 개울물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풀기라도 하려는듯 가을이 끝나가도록 학교가 끝난후 둘만의 시간이 이어졌다.
겨울이 찾아오고 민규와 함께 있기만을 기다리던 하교길에는 어느날 부터 순사들이 자리했다. 아침에 집을 나설때도 마찬가지였다. 민규와 인사를 나눌 틈조차 없을만큼 원우가 혼자있는 시간이 없게 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순사들과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숨통을 조일만큼 답답한 감시가 시작되었다.
그 즈음부터 경성바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연달아 터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경성에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일본인 관료 한명이 죽을때마다 조선이 십여명이 죽어나갔다. 그일의 정점이 바로 백화점 테러사건이었다. 겨울에 막 접어든 날이었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백화점 행사장에서 어마어마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일본의 고위관료들이 자리하는 행사이니만큼 그 여파가 상당했다.
그 일이 있고부터 학교에 순사들이 들락거리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꽉 차있던 교실의 책상들이 하나씩 비워져갔다. 어느덧 빈자리가 다섯개나 되었다. 원우는 불안했다. 누구와도 그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없었지만 주인없이 방치된 빈 책상들을 보며 불안에 떨었다. 불안을 떨쳐낼 곳이 필요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민규와 석민이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섰다. 원우도 그 뒤를 약간의 간격을 두고 따라나섰다. 순사들이 지키고 서있는 교문까지 가기전에 민규와 이야기를 나누려 뒤를 조심히 밟았다. 민규와 석민이 긴 복도를 걸어나갔다. 가만히 기둥뒤에 서서 그걸 보던 원우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덧 복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민규가 멈춰서더니 석민에게 뭐라 얘기를 하고는 그 옆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석민이 먼저 복도를 나서는것을 확인하고는 원우가 화장실까지 단번에 내달렸다. 지금이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까 쉬지도 않고 화장실에 들어섰다.
화장실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어깨가 턱 붙잡혔다. 제 어깨를 붙잡은 것은 다름아닌 민규였다. 이미 자기가 올것을 알고 있었는지 화장실 문옆에 기대 서있었다.
"민규야."
"이러다 눈에 띄면 어쩌려고."
"너와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감시가 심해서 이럴수 밖에 없었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거야. 조금만 더 참자."
"민규야, 너무 불안하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아."
"뭐가 그리도 불안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아니겠지?"
원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규에게 무슨 답을 듣고자 던진 질문은 아니었지만 제 불안함을 민규가 말끔히 해소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원우의 물음에 민규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재차 묻는 원우의 물음에 민규가 원우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불안해 하지마. 다 괜찮을거야."
"그러겠지? 아무일도 없겠지?"
"원우야 너는 위험한 일 없을 거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
"……."
"누구 오기전에 나가봐야 겠다."
이상한 말이었다. 원우가 불안해 하는 건 자기 자신이 아니었는데, 민규의 답은 엉뚱하게도 원우의 안위에 대한 것이었다. 어깨에서 손을 떼고 화장실 문을 당기는 민규의 행동이 자신을 피하기라도 하는듯 매우 다급해 보였다. 원우가 손을 뻗어 급히 나서는 민규의 손끝을 잡았다. 손가락을 붙들린 민규가 나가다말고 뒤를 돌아봤다. 가만히 원우를 보던 민규가 누군가의 걸음소리에 다음에 보자며 손을 떨쳐내자, 그 뒤로 원우가 나지막히 말을 했다.
"민규야 너도. 너도 위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이 내렸다. 앙상하게 메마른 나뭇가지들을 하얗게 수놓는 눈이 내렸다. 경성에 오고 처음으로 보는 눈이었다. 순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학교에 들어섰다. 교실안은 어제보다 더 조용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원우는 빈 책상 수를 헤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섯개 였던 빈책상이 일곱개로 늘어났다. 한 자리는 석민의 자리였고, 또 한자리는 제 앞인 민규의 자리였다.
제 자리에 앉고 교실문이 열릴 때마다 원우는 습관적으로 문쪽을 힐끔거렸지만, 수업이 시작하도록 끝끝내 민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안이 시끌시끌해졌다. 학교와 가까운 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창문을 꽁꽁 닫고 있었음에도 느낄만큼 큰 진동과 함께 굉장한 소리를 낸 아주 큰 폭발이었다. 일제히 소리가 나자마자 놀라서 창쪽으로 향했다. 검은 연기가 머지않은 곳에서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저곳이 어디쯤인가 모두 수군거렸다.
수업에 집중하라는 선생의 말에 모두 황급히 제 자리를 찾았지만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선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후가 되고 수업의 막바지가 되어서는 순사들이 교실에 들이닥쳤다. 선생과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교실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모든 상황이 이상했고 원우는 불안에 떨었다.
그렇게 폭발음이 있고 한참이 지나서야 원우는 그 원인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학교를 나서고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원우가 말을 떼기도 전부터 염씨가 상세하게 알려왔다.
"경성방송국 앞에서 난리가 났대요. 말도 못해요."
"무슨 일이야?"
"방송국 입구에서 폭탄이 터졌는데 친일파 민병환이랑 총독부 취조국장이 그 자리에서 죽었대요."
민병환이라면 원우도 책방을 오가며 몇 차례 이름을 들었던 인물이었다. 조선인의 땅을 모조리 몰수해 일본에 가져다 바치고 작위를 얻은 파렴치한 민족반열자라며 예전에 책방에서 석민이 이야기하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취조국장 또한 몇 차례 원우의 집에서 본 인물이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순수 일본인이었다. 그리고 니시하라의 아버지였고. 문득 제 아비를 향해 폭탄이 날아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불발탄이었지만 이번에는 폭탄이 제대로 터진 모양이었다.
"주인어르신도 다급히 가셨어요. 비상인 거 같은데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가 않아요."
"살벌하겠다."
"당분간은요. 우선은 집으로 모실게요."
"아재, 나 화선백화점에 내려줘. 누구 찾아야되는데."
"도련님. 당분간 그곳은 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도련님 자주가시던 책방도요."
원우가 뭐라 더 이야기 하기전에 염씨가 먼저 선수를 쳤다. 심지어 알리가 없는 책방 얘기를 꺼냈다. 염씨에게는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누구와도 책방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기에 원우는 염씨가 어떻게 알았는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문제는 백화점과 책방에 가서는 안된다는 염씨의 당부 섞인 말이었다.
"책방주인이 잡혀갔대요."
"동화아저씨가? 아저씨가 왜."
"일전에 의국단이라고 주인어르신이 일망타진한 독립단체가 있었어요. 그런데 남은 조직원들이 그동안 숨어서 활동을 한 모양이에요."
"그럼 동화아저씨가."
"네. 책방주인이 남은 의국단의 한 명이래요."
염씨에게 재차 확인을 받으면서도 원우는 의외로 침착했다. 석민 아비의 정체를 알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의에 찬 눈빛 하며 늘 정도를 벗어나는 법이 없던 모습까지 가볍게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화선백화점 사장도 붙잡혀 들어갔어요."
"민규 아버지?"
"화선백화점 사장이 의국단과 대학단 뒤에 자금을 지원했대요. 그 외에 지금까지 독립군들 지원했던 게 계속 나오는 모양이에요."
"그럼 어떻게 되는거야?"
"아마 살기는 힘들 거예요."
꽤나 착잡한 표정으로 염씨가 말을 이었다. 최근들어 붙잡혀들어간 독립군들의 행보는 누구보다 원우가 잘 알았다. 독립군들도 재판을 받을 권리는 있었지만 그 결과는 불보듯 뻔히 모두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평범히살던 사람도 독립군으로 잡아들이는 판국이었다. 명성이 자자한 의국단과 대학단에 관여되었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심지어 독립군과 같은 핏줄의 가족까지도.
그 와중에도 원우의 머릿속으로는 민규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민규는?"
"도련님 다른 생각 말고 몸 사리세요. 지금은 도련님만 생각하세요."
"민규는 어떻게 됐냐니까."
"보아하니 순사들이 경성 바닥을 샅샅이 훑는 모양인데 아직은."
"괜찮은거지?"
"머지않아 잡힐 거예요. 잡히면 목숨 부지하기는 힘들 거고. 대학단 수장이니까요."
돌덩어리로 머리를 세게 내려친 것만 같았다. 제 아비가 이를 갈며 얘기했던 독립단체의 수장이 민규라는 사실에 원우는 굳어버렸다. 제 어미가 죽은 테러 사건도 대학단의 짓이라고 했다. 백화점 앞에서 자신과 아비가 죽을뻔한 일 또한 대학단의 짓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민규가 있었다.
민규와 그 무리들이 평범치않다는 것은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책방을 드나들며 일본관료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금서로 지정된 책들을 꼼꼼히 읽는것을 보면서 나랏일과 독립에 관심이 많다고만 생각했다. 백화점에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승관이 대학단의 일원이었다는것을 진작 알고도 원우의 생각은 거기서 그쳤었다. 민규에 대해서는 그 이상을 생각지 않았었다.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바짝바짝 마르는 아랫입술을 아픈지도 모르고 이로 깨물었다. 눈물샘을 타고 눈물이 가득 차올라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마음을 굳게 먹으라는 염씨의 말이 귀에 박히기도 전에 그대로 흘러나갔다.
"아재. 민규는 살아있을까?"
"도련님!"
"살아있어야해. 민규는 어딘가 살아있을 거야.
자신이, 그리고 아버지가 민규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그와는 반대로 가슴이 미친 듯이 울어댔다. 심지어 이 와중에도 민규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진정이 안되었다.
원우는 재빠르게 눈물을 훔쳐내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때마침 화선백화점이 보이자 원우가 창문에 바짝 얼굴을 가져다 댔다. 백화점 입구부터 시작해서 순사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자신이 민규와 손잡고 거닐던 곳을 더 이상 볼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 또다시 절망에 빠지는 원우였다.
방송국 테러 사건이 있고 한달만에 재판이 있었다. 재판의 결과는 누구나 예상햇듯이 전원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원우는 그 소식을 염씨를 통해 접했다. 민규의 소식 또한 궁금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민규의 소식을 들을 곳은 없었다. 중간에 한번 혜화동에서 민규가 목격되어 순사들과 추격전을 벌였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이후로 겨울이 다가도록 민규를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민규가 눈에 보이지 않는것이 민규에게는 더 잘된 것이라 생각했다. 원우는 애써 민규를 찾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달이 지나 봄을 맞은 경성의 거리마다 벽보가 나붙었다. 대일본제국에 맞서는 악랄한 무리들에 대한 총살형이 진행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이것은 일종의 쇼였다. 최대한 잔인하게 독립군들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포심을 심어주는 것.
총살형이 진행되는 시간은 원우가 학교를 끝내고 돌아오는 오후였다. 이전에도 그 시간마다 광장에서 사형집행이 있는 날이면 원우는 염씨에게 광장 근처를 지나지 말고 빙 돌아서 집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원우가 꼭 광장앞을 지나가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간절한 원우의 눈빛에 염씨가 광장으로 빠르게 차를 몰았다. 이미 광장은 인산인해였다. 원우는 굳이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지 않고 멀리서 단상을 바라보았다. 단상 위에 오른 사람의 수가 평소보다 많았다. 원우는 한 명 한 명 얼굴을 주시했다.
그 자리에는 원우가 아는 얼굴이 셋이나 되었다. 책방 주인 이동화, 민규의 아비이자 화선백화점의 사장인 김석주, 그리고 또 한 명은 이석민이었다. 석민 또한 대학단 일원일 것이라 속으로 생각했다. 원우가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민규는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단상 위 어느 곳에도 민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석주, 대일본제국에 반하는 단체에 자금을 지원한 명목으로 총살형을 집행한다. 그리고 김석주 일가의 모든 재산을 대일본제국으로 환수한다."
단상 끝에 자리하고선 제 아비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씩 죄목을 읽어내리는 아비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망설임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미 단상 위에 일렬로 선 사람들의 모습이 처참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아는 체로 한달을 보냈을 것이다. 그 한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은 멀쩡히 서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늘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석민의 아버지는 얼굴 곳곳이 부어터진 상태였고, 그 옆에선 석민은 담담하게 웃고 있지만 감긴 한쪽 눈을 뜨지 못한 채로 피로 떡진 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선 민규의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본 기품 있던 모습과 얼굴만 같을 뿐 몸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전원 준비!"
이케다의 명령에 맞춰 일제히 발포 준비를 마친 총부리가 단상 위의 사람들을 향해 겨눠졌다. 원우의 주변으로 목소리를 낮춘 울음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제 옆에 버티고 서있던 여인이 단상 위 누군가의 가족인지 입을 틀어막고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단박에 발포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원우는 뒤로 몸을 돌렸다. 빗발치는듯한 총탄 소리가 광장 가득 울려 퍼졌다. 광장을 애워싼 순사들 때문에 누구 하나 마음 놓고 울지 못 했다. 옆에서 입을 막고 오열하던 여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꺽꺽거리며 제 가슴을 내려치고 울분을 삼키는 여인의 모습 속에서 원우는 자신을 보았다.
여인의 모습에 투영되는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속이 울렁거려왔다. 멍하니 여인을 바라보던 원우는 뒷걸음질 치다가 광장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달려가는 원우를 뒤늦게 발견한 염씨가 뒤에서 소리쳤지만 원우는 더욱 속력을 내어 인파 사이를 내달렸다.
찾아야한다. 정신없이 달리며 속으로 다짐했다. 반드시 민규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어야 한다고.
골목 모퉁이를 하나씩 돌 때마다 기억을 다시 상기시켰다. 책방을 오는 게 반년도 더 된 탓도 있지만 지금껏 민규와 함께 움직였기에 제대로 된 책방의 위치를 알아두지 않은 탓이었다. 촘촘하게 나있는 인사동 골목을 계속 가로질렀다. 똑같은 모양의 골목을 수차례 돌고 즐비한 낯선 간판들을 지나쳐갔다.
광장을 벗어나고부터 민규와 함께 갔던 모든곳을 찾아다녔다. 원우 혼자서 할 수 있는거라고는 최대한 많은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수많은 순사들을 동원해도 못찾는 민규를 손쉽게 찾을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원우는 혹시나 하는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혹시나 하는 생각의 마지막 종착지가 바로 책방이었다. 이미 붉은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은 금방이라도 태양을 감출 태세였다. 원우는 걸음에 더 속도를 붙여 골목을 드나들었다.
그렇게 미로처럼 굽이진 골목길을 돌고 돌아 결국 책방 앞에 이르렀다. 제대로 된 간판도 없는 곳이었다. 유리창에 써 붙여진 책이라는 글자만이 이곳이 책방임을 알게 하는 표시였지만, 이미 그마저도 엉망진창으로 깨진 후였다. 바닥에 깨진 유리조각들을 조심히 밟고 문을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누가 볼세라 원우는 다급하게 책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발밑으로 책이 밟혔다. 걸음을 옮기려 해도 온 바닥이 책으로 널려있어서 맨바닥을 밟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이미 순사들이 다녀갔는지 어수선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왔던 책방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책장이 이리저리 쓰러져있었고 바닥에 널린 책 위로는 진한 핏자국들이 떨어져 있었다. 책 위로 뚝 뚝 떨어져 있는 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핏방울이었다. 핏방울은 한쪽 방향으로 쭉 이어져있었다. 원우가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핏방울이 떨어진 자리는 사다리가 있는 곳이었다. 원우가 책 몇 개를 쌓아 올리고 천장의 사다리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지체할 틈 없이 주르륵 내려온 사다리를 밟고 올랐다. 책방의 아래와 다르게 다락방은 온전한 상태였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전과 똑같은 상태였다. 태극기부터 몰래 봐온 책들까지.
핏방울은 다락방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핏방울이 가운데 처진 장막까지 이어져있었다. 장막을 뚫고 빛이 새어 나왔다. 원우는 숨을 죽이고 장막까지 한 걸음씩 내디뎠다.
이제 막 장막을 걷기 위해 손을 가져가던 찰나였다. 원우의 손보다 빠르게 장막이 걷히더니 원우의 가슴팍을 퍽-하고 밀어 넘어트렸다. 뒤로 자빠지는 원우 위로 장막에서 나온 사람이 그대로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손에 든 권총은 원우를 향해 조준하고 있었다. 원우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자 캄캄한 다락방의 어둠 속에서 거친 장막 사이로 촛불이 환히 비췄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위로 쓰러진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민규였다. 민규 역시 원우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일어서고는 총을 거두고 원우의 손을 꼭 잡아 일으켰다.
"원우야."
"……."
"원우야.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너를 보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민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우가 손을 빼냈다. 민규가 다시 한번 잡으려 손을 내밀자 원우가 손을 허리 뒤춤으로 감춰버렸다. 그토록 찾던 민규였지만, 여러 감정이 뒤섞여 손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죽게 할 수도 있었던 민규에게 화가 났다. 민규를 찾으면 반가움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원우는 공허한 눈빛을 하고 민규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네 어머니의 일도, 너를 위험에 빠지게 한일도."
"아쉬웠겠지. 죽이지 못 해서.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나와 아버지를 죽이려고 접근한 거라면 꽤나 성공적이었네. 나도 깜빡 넘어갔으니까."
"원우야."
"나는 좋은 동무가 생겼다고 생각을 했어. 나에게도 이런 벗이 생기는구나 하고."
"……."
"경성에 오지 말걸 그랬다. 애초부터 동경에서 일본인처럼 살았어야 했는데."
"……."
"뭐라 변명이라도 해봐!"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원우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격해지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 하고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원우가 눈앞에 있다는 반가움도 잠시, 민규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겨우 말을 내뱉었다.
"조국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동무가 된 것까지는 의심하지 않아도 돼. 나에게 너는 둘도 없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이제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 너라는 사람 자체도."
"그럼 날 죽여. 이대로 죽여줘."
"……."
"일본놈들 손에 치욕스럽게 죽느니 차라리 네 손에 죽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끝까지 잔인하구나."
민규가 원우의 손에 권총을 들려주었다. 꽤나 묵직하고 차가운 권총이었다. 처음 잡아본 권총의 감촉에 원우의 손이 흠칫 놀라자, 민규가 다시 고쳐 잡아주었다. 총부리는 자신 쪽으로 향한 채 원우의 양손을 하나하나 고쳐잡아 총 자루를 쥐게 했다. 그리고는 모든 준비를 마친듯 민규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꾸 떨어지는 총부리를 민규가 고쳐잡아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이미 모든 걸 체념한 듯 긴장되어있던 민규의 입가가 느슨해지더니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원우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는 방아쇠에 검지를 껴 넣었다.
"셋만 셀게. 무슨 말이든 해봐."
"원우야."
"그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마지막 말은 들어줄게."
"……."
"하나, 둘…."
"너는 꼭 살아라. 살아서 그 두 눈으로 봐주어라. 조국을, 봄이 오는 조국을 나 대신 꼭 봐줘. 그거면 됐다."
"그게 끝이야?"
"……."
"너에게는 그것뿐이야? 조국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청춘을 다 바친 게 고작 이딴 조국이라고!"
민규의 이마에 닿던 총부리를 거두는 것과 동시에 원우가 바닥으로 총을 내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권총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바지단 옆으로 꼭 쥔 원우의 두 주먹이 격렬하게 떨렸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하는 말이 고작 조국 걱정뿐이라는 사실에 원우는 가슴이 저려왔다.
"이제 네가 죽든 살든 신경 쓰지 않겠어."
"원우야."
"끝이다. 부디 다시는 보지 말자."
짧고도 간결했다. 떨리는 음성을 애써 꾹꾹 눌러 담으며 원우는 제 할 말을 다 마쳤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숨기고 여전히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민규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사다리가 난 곳을 향해 걸었다. 금방이라도 다리가 풀릴 것 같았지만 힘을 실어 발을 디뎠다. 원우는 애초에 이곳을 오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했다. 차라리 마지막으로 본 민규의 모습이 학교에서 헤어지던 그것이었다면 좋았을뻔했다고 생각했다. 경성이 다시 조용해지면 어딘가에서 민규는 잘 살고 있겠지 하고 혼자 생각하며 살아가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스스로 비참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을 거라고.
사다리에 거의 다다를 즈음 민규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원우야. 그 목소리가 원우의 발걸음을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민규는 한번 더 힘을 줘 이름을 불렀다. 원우야.
"내 이름 부르지 마."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 있겠냐만은 후회 남지 않도록 이 말은 꼭 전하고 싶다."
"더 이상 네 말 따위는."
"사내로 태어나 처음으로 좋아한 게 사내놈이었어."
가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민규의 음성을 애써 듣지 않으려 두 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애절한 그 목소리가 깊이 파고들었다. 사내놈을 좋아한다는 그 말에 원우는 발을 뗄 줄 몰랐다.
"좋아했다, 처음 보았던 날부터. 마음에 처음으로 품은 게 너였다, 원우야."
"……."
"그냥 나의 마지막이 오기 전에 전하고 싶었다. 목숨을 내어놓고 나니 사람이 참 간사해지지. 무슨 용기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은 전하고 싶었어."
"민규야."
"진심을 다해 좋아했다."
기어코 마지막 그 말이 꿋꿋하게 버티던 원우를 울려버렸다. 뒤돌아선 곳에 여전히 민규가 속죄하듯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작은 흐느낌이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번지더니 이내 원우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버렸다. 원우가 눈물을 쏟으며 민규의 앞까지 걸어가서는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힘없이 앉아서는 목청껏 울었다. 어느덧 민규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 하고 우는 원우의 뺨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울지 마. 내가 다 잘못했다. 그러니 울지 마."
"…죽지마. 함께 살자. 부디 함께 살자."
"원우야."
"우리같이 북간도로 가자. 아니, 더 멀리 만주까지 가자. 아재가 그랬어. 만주로 도망친 조선인들은 그래도 굶어죽지는 않는다고. 그러니까 우리 그곳에서."
그다음 말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원우의 입술 위로 민규의 입술이 포개졌다. 살아오며 처음으로 해보는 입맞춤이었다. 질끈 감은 두 눈처럼 바짝 긴장한 입술들이 꼬옥 붙은 채로 미동도 없었다. 숨결이 닿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숨도 쉬지 못 한채 한참을 맞대고 있었다.
동시에 스르르 눈을 뜨고 물기가 촉촉한 서로의 눈을 확인했다. 민규가 먼저 고개를 뒤로 빼며 입술 사이에 약간의 틈이 벌어졌다. 그 벌어진 틈을 이번에는 원우가 먼저 다가서서 메꿨다. 두 손을 민규의 목뒤로 올려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조금 전보다 더 거세게 부딪혔다. 민규 역시 원우의 손길에 대답하듯 양손으로 원우의 얼굴을 거칠게 붙잡았다. 얼굴을 움켜쥐고 고개를 살짝 비틀어 조금 더 깊게 원우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한 입술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선홍빛 혀가 넘어들었다. 서투른 입맞춤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혀끝이 닿자마자 흠칫 놀라던 것도 잠시, 금세 서로의 혀를 찾아들었다. 뜨거운 혀끝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입술을 더욱 격렬하게 부딪혔다. 원우의 입술 새로 타액이 흘러나오려 하다가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민규에 의해 입술에 문대 사라져버렸다. 그동안 참아온 감정이 분출되듯 거침없는 입맞춤은 오래 지속되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입술이 떨어졌다. 눈물을 가득 흘리던 원우의 얼굴에도 눈물이 모두 마른 후였다. 민규는 원우의 젖은 입술을 제 손으로 문질러 닦아주고 달뜬 숨을 내뱉으며 꼭 껴안았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경성만 떠나면 우리 시간은 충분할 거야.
"하지만 원우야."
"같이 살자. 응? 어디든 같이 갈게. 제발."
"나흘 뒤 경성역에서 만나자."
민규와 약속한 날짜가 점점 다가왔다. 원우는 누구도 모르게끔 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큼직한 가방 하나에 제 옷과 당장에 필요한 몇 가지를 챙겨 침상 아래에 꼭꼭 숨겨두었다. 최대한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학교에서는 민규와 다시 만날 생각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 했지만, 늘 그렇듯 조용하게 시간을 보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보통의 나날이었다. 그렇게 민규와 약속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교문 앞에서 염씨를 보내고 학교 건물로 들어서던 중이었다. 입구에 모여있는 순사들을 보며 이상하다 생각하던 순간 양옆으로 순사들이 원우의 팔을 잡아챘다. 그렇게 학교에 발도 들이지 못 하고 붙잡혀 종로서까지 가는 내내 원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혼란도 잠시 취조실에 당도하고 모든 연유를 알게 되었다.
대학단의 손에 제 아비를 잃은 니시하라가 눈에 불을 켜고 민규를 찾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었다. 하지만 본인이 민규를 찾기 위한 타깃이 되었다는 것은 원우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언제부터 뒤를 밟혔는지 모르겠지만 민규와 함께 책방을 나서던 것을 니시하라가 모두 목격 한 모양이었다. 원우는 애써 모르는 척 일관했지만, 일급 범죄자로 분류된 민규를 잡는 일에 모두 혈안이 되어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해왔다.
취조실에 들어오자마자부터 가해진 폭력에 원우는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묵묵히 버텼다. 두드려맞다가 정신을 잃고 다시 정신을 차리면 맞는 일이 이어졌다. 창문도 없이 전등 불빛 하나 외로이 켜진 취조실에서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바닥을 나뒹굴며 얼굴과 배를 걷어차이고, 입술이 얻어터져서 피가 나도 원우는 이를 악물고 참을 뿐이었다. 그런 모습에 일본인 순사부장이 눈을 부라리며 더욱 달려들었다. 이미 바닥에 실신하듯 쓰러진 원우를 내려다보며 순사부장이 품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살기를 바란다면 당장 대답해!"
"……."
"이케다! 네 아비에게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지?"
"부끄럽게 산적 없습니다."
"네 아비는 대일본제국의 녹읍을 받아먹고 있는데 감히 테러집단의 수장인 놈을 잘도 숨겨줬겠다?"
"모르는 일입니다."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겠다? 내 그 정신력만은 높이사지. 더러운 조센징 핏줄 같으니."
순사부장이 구두굽으로 원우의 오른 손목을 짓밟았다. 으드득 소리를 내며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에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원우의 손가락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연신 긁어댔다. 그 모습에 잔인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순사부장이 총으로 원우의 오른 손등을 조준했다.
"어디 이것도 참을 수 있나 볼까."
"으으...윽..."
"지금은 손이지만, 이다음은 네 대갈빡이 될 것이다."
"이케다!"
그 순간 취조실 문이 열리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취조실을 울렸다.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사부장이 조준했던 총을 풀고 취조실 입구를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노여움에 가득 찬 얼굴을 한 이케다 수사과장이 서있었다. 이케다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원우를 보자마자 지팡이를 내던지고 순사부장 앞에 와서 섰다. 종로서 내에서도 피도 눈물도 없기로 유명한 순사부장이었지만 성난 범 같은 눈을 하고 있는 총독부의 이케다 수사과장 앞에 절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떤 새끼가 감히 내 아들을 고문해! 어떤 정신 빠진 새끼 짓이야!"
"제가 지시했습니다. 테러 용의자와 관련해서는 그 누구도 예외를 두지 말라는 상부 명입니다."
"나한테 보고도 없이 단독으로 이딴 짓을 벌여?"
"확실한 증인이 있습니다. 김민규와 함께 있는 걸 목격한 사람이."
"뭐? 이 새끼가 이 자리에서 죽고 싶어! 그럼 내 아들이 테러단 새끼를 숨겼다 이 말이야!"
분노가 극에 달한 이케다가 자기 허리춤에 차고있던 칼을 꺼내들어 순사부장 목에 들이댔다. 퍼렇게 선 날이 반짝이며 목 아래에 바짝 다가오자 순사부장이 겨우 침을 삼켰다.
"어디 더 떠들어보지. 왜, 내가 조센징이라 같은 조센징을 숨겨줬을 것 같은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나 같은 일개 조센징이 너 같은 일본인보다 위에라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겠지?"
"아닙니다. 단지 목격자 증언이 있어 조사가 필요했기에."
"이쯤 되면 그 조사는 끝난 것 같군. 아들놈은 내가 데려가지."
"하지만."
"한 마디만 더 했다가는 이 칼을 평생 목에 꽂고 살줄 알아."
당장에라도 목을 벨 기세에 눌려 순사부장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이케다가 취조실 입구에 선 염씨를 향해 손짓하자 염씨가 다급하게 들어와서는 원우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일으켰다. 몸을 일으켜 세우며 고통에 원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얻어맞은 곳이 욱신거려서 몸을 제 맘대로 펴지도 못하고 염씨에게 몸을 실었다.
이케다가 취조실을 먼저 빠져나가고 염씨와 원우가 그 뒤를 따랐다. 종로서 입구에 세워둔 자동차에 이케다가 올라탔다. 염씨는 조심이 원우를 뒷좌석에 앉혔다. 좌석 깊숙이 몸을 기대며 원우가 앓는 소리를 냈다. 여태 꾹 참았던 고통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운전석에 올라탄 염씨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이케다 과장에게 조심이 말을 건넸다.
"주인어르신 우선 병원으로 가야 될 것 같은데요."
"집으로 출발해."
"그래도 지금 도련님 몸 상태가."
"어서 집으로 가!"
끙끙거리는 아들을 제 옆에 두고도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원우가 옆에서 염씨를 보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머뭇거리던 염씨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종로서를 빠져나오자마자 차는 원우의 집이 있는 일본인 거리로 내달렸다. 무참하게 짓밟혔던 손목에 피멍이 진하게 들었다. 손가락이 힘없이 덜덜 떨리며 통증에 몸부림쳤지만 원우는 제 아비 앞에서 나약해 보이지 않으려 또다시 참아내는 과정을 반복했다.
"잘도 이케다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는구나. 내가 힘들게 쌓아올린 탑을 무너트리려고."
"아버지."
"동경으로 돌아가라. 동경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배편을 알아볼 테니 동경으로 떠나라"
"전 여기 남을 겁니다."
"내가 부를 때까지는 이 땅에 발들일 생각은 하지 마라."
"뭐라하셔도 저는."
"이케다! 네 아비로서가 아니라 총독부 수사과장으로 하는 말이다. 살고 싶거든 동경으로 떠나라."
이케다가 꽤나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끝냈다. 더 이상 아들의 목숨을 아비의 이름으로 지키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원우는 생각했다. 어쩌면 목숨을 못 지켜주는 것은 물론, 이 땅에서 계속 살다가는 광장에서 죽어간 조선인들처럼 제 아비 손에 자기가 죽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고. 그럼에도 자신은 떠날 수 없다고.
동이 트지 않아 어둑어둑한 새벽녘이었다. 불어오는 봄바람이 찼다. 어둑어둑한 방안에 찬 공기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
잠들기 전 부축을 받아 침상에 몸을 뉘면서, 염씨가 꼼꼼하게 제 팔에 약을 발라 붕대를 덧대어주고 주변을 정돈해 주었었다. 목이 마를까 물병과 잔을 침상 옆에 놓아주었고, 혹여나 찬 바람에 통증이 덧나기라도 할까 창문도 꼭 닫아주었고. 나가면서 푹 자라며 이불도 턱 끝까지 덮어주었었다.
바람결에 창문이 열렸는지 찬바람이 코끝을 시큰하게 했다. 잠들 때만 해도 이불이 답답하리만큼 몸을 눌러왔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휑하게 느껴졌다. 춥다. 몸이 아파서 그런지 곳곳이 춥게만 느껴졌다.
몸 아래쪽으로 느껴지는 이불을 잡으려 손을 뻗어보려 했지만 도통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원우는 그제야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몇 번을 눈을 깜빡이고나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넓은 창을 타고 들어오는 남은 달빛에 의지해 주변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제 손목에 따듯한 느낌이 들었다. 놀란 원우가 몸을 일으키려던 시도도 잠시 밀려오는 통증에 다시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고개만 살짝 들어 아래를 보니 침상 옆에 앉은 누군가가 제 손목을 붙잡고 고개를 파묻고 있는 게 보였다. 붕대를 천천히 풀고 따듯한 입김을 불다가 손목을 어루만졌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하루 하루 손꼽아 기다리며 몇 번이고 그리던 그 모습이었다.
"민규야."
"상처가 깊다.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괜찮아. 나는 정말로 괜찮아."
"당장에라도 네가 잡혀있는 곳에 뛰어들고 싶었는데, 비겁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잘 했어. 잘 참았다 민규야."
원우의 손등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놀란 원우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민규가 지그시 어깨를 눌러 다시 눕혔다. 가까이 다가온 민규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민규가 떨어지던 눈물을 훔쳐내고 아랫입술을 꾹 물었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의 긴장을 감추지 못 했다. 원우가 오른손을 들어 입술을 매만졌다. 못 본 새에 얼굴은 더 수척해지고 입술은 까슬까슬해져있었다.
"얼굴이 더 상했다. 어디서 지냈어. 밥은 먹고 있어?"
"원우야."
"그런 얼굴 하지 마. 나 정말 괜찮대도."
"나 때문에 미안하다. 정말."
"여기 위험하니까 우선 다른 곳으로 가. 그리고 두 밤 지나고 보자."
"원우야. 경성역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여기에 목숨을 바칠 거야."
민규의 얼굴을 쓸어내리던 원우의 손이 툭하고 떨어졌다. 이내 민규가 침상에 대고 깊게 머리를 숙였다. 방금까지 민규와 눈을 맞추고 있던 원우의 시선이 갈피 없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내 얼굴 봐."
"미안하다."
"내 얼굴 보고 다시 말해."
"욕심이었어. 너와 같이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김민규."
"내 욕심으로 너를 쥐고 흔들어서 미안하다. 네가 흔들리지 않았다 해도 미안하다.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결과가 이리 되어서 그 또한 미안하다."
서러웠다. 모든 걸 버리고 같이 떠나겠다는 이 마음을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잠깐의 흔들림으로 치부하는 그 말에 서러워졌다. 민규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못해 지나치게 차가웠다.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듯이 미안하다 말하는 목소리가 강직했다. 그게 더욱 원우를 서글프게 했다. 다시 저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아서.
"너를 보면서 잠깐이나마 살고 싶었다. 개처럼 목숨을 구걸하고 싶었어."
"……."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 내 옆에서 네가 죽어가는 걸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봄이 오는 걸 함께 보기로 했잖아."
"그 봄은 혼자 봐야 할 것 같다."
"하아, 이미 너의 봄날엔 내가 없구나."
북촌을 자주 오가던 염씨에게 날마다 물었다. 목련 꽃이 피었느냐고. 아직은 꽃봉오리만 가득하다고 했다. 다음날에도 목련 꽃이 피었느냐고 물었다. 아이의 주먹처럼 하얀 꽃이 올라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매일같이 물어오던 원우의 물음에 염씨는 바깥일을 보고 돌아올 때면 북촌의 작은 산등성이를 한 번씩 올려다보고 돌아왔다. 그제는 나무마다 하얀 솜뭉치처럼 목련 꽃이 가득 피었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왔다. 원우는 경성역에서 만나면 꼭 북촌에 들러 함께 목련 꽃을 보고 경성의 봄날을 마음에 새기고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돌이켜보면 혼자만의 덧없는 바람이었지만.
왜 하필 우리는 이런 난세에 만난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살아가기도 벅찬 이런 시절에 나온 것인가 하고. 마음 놓고 사랑하지도 못할 시절에.
"내일 거사가 실패하면 다시는 못 볼 것이다. 혹 거사에 성공해도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는 이 땅을 밟지 못할 테니 그 또한 너를 못 볼 것이다. 이게 마지막이겠지."
"끝을 알리는 방법도 이기적이구나."
"모든걸 내려놓으니 마음이 너무 편하다."
"너는 끝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마지막까지."
민규가 몸을 숙여 반듯하게 누운 원우의 가슴에 조심히 얼굴을 묻었다. 점점 빨라지는 심장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만히 침상 위에 놓여있던 손을 들어 민규의 등 뒤를 감싸 안았다.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원우의 손길에 민규가 가슴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원우의 얼굴과 가까이했다.
민규의 한쪽눈이 핏줄이 터져서 붉었다. 늘 단단하고 듬직하게만 보였던 민규의 눈가가 눈물범벅이 되어있었다. 울컥하고 나오는 눈물을 숨기지 못하고 원우의 이마 위로 눈물 몇방울이 떨궈졌다. 민규가 손을 들어 원우의 이마위로 떨어진 눈물들을 훔쳐냈지만 계속 흐르는 눈물에 소용이 없었다.
"죽는건 두렵지 않다. 아무렇지 않아. 단지, 널 볼 수 없다는게 자꾸 내 발을 잡아 끈다."
"……."
"원우야 조금 더 일찍 너에게 용기를 내어볼걸 그랬다. 오늘이 마지막인줄 알았다면, 조금 더 서두를 것을."
"……."
"한번만 안아봐도 될까. 마지막으로 한번만 안아보자."
원우는 아무런 말없이 눈을 꼭 감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까슬거리는 촉감이 원우의 입술위로 닿았다. 파르르 작은 경련을 일으키던 입술의 움직임이 점점 잦아들었다. 깊게 들이마셨던 숨을 내뱉으며 서로의 입술을 잠식해갔다. 민규의 손이 원우의 목덜미를 감싸쥐자, 그에 대답하듯 원우의 손이 민규의 뒷통수에 살며시 포개어졌다. 조심스럽던 둘의 움직임이 조금씩 속도를 붙였다.
쉽사리 잠들지 못할 것 같은 밤이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염씨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밤과 다르게 유달리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꽃내음도 진동하는 봄날의 바람이었다.
"도련님 잠은 잘 주무셨어요?"
"응."
"몸은 좀 어떠세요."
"어제보다는 나은거 같아."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간밤에 꿈을 꾼듯했다. 잠결에 본 민규의 모습이, 잠결에 들은 민규의 목소리가, 그리고 잠결에 안겼던 민규의 모든 게 모두 꿈같이 느껴졌다. 잘 정돈된 침상 위에는 혼자뿐이었고 이불도 잠들던 저녁때처럼 턱밑까지 끌어올려져있었다. 꿈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했고, 현실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잠들기 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상했다.
원우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염씨가 옆으로 와서 부축을 해주어 그나마 버티고 앉을 수 있었다. 목부터 축이라는 염씨의 말에 침상과 나란히 있는 탁자 위의 빈 잔을 집어 들었다. 물도 따르지 않은 잔이 묵직했다. 잔을 들여다보니 그 안으로 색 바랜 누런 빛의 회중시계 하나가 들어있다. 길게 달린 줄을 잡아들어보니 익숙한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받은 생일선물이라 자랑을 늘어놓던 그 회중시계였다. 회중시계를 꺼내고 나니 잔 바닥에 종이 하나가 접혀있다.
「 내 다하지 못한 시간까지 모두 네 시간이 되어 살아가기를 바란다 」
간결하고 짧은 문장이었다. 제 할 말을 다 담은 종이였다. 종이를 고이 접어 회중시계와 함께 한 손에 쥐었다.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 눈앞에 갑자기 민규의 마지막 모습이 아른거렸다. 손에 쥔 시계와 종이를 제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눈으로 핏기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당장에라도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지막이었구나. 정말 마지막이었어.
염씨가 방을 나가려다 원우를 살폈다. 얼굴에 시름이 가득한 걸 보고 염씨가 쉽사리 방을 나가지 못 했다.
"어디 불편하세요? 옆에 있어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아재, 아버지는?"
"아침 일찍 총독부에 들어가셨죠. 오늘 일본에서 새 총독이 온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새 총독이 와? 언제, 어디로?"
"경성역으로 온다던데요. 오후 한시인가 암튼 열차 타고 온다고 아주 경성역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대요."
염씨의 말에 원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곪아 터진 다리의 상처 때문에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휘청이는 걸 옆에서 염씨가 겨우 붙잡았다. 염씨의 손을 잡고 침상에 다시 걸터앉으면서도 원우는 생각했다. 필시 민규가 이야기한 거사가 이것이라고. 환영 인파들이 경성역으로 몰리는 틈을 타 거사를 치를 것이 분명했다. 손에 쥔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아재 나 부탁이 있는데."
"말씀만 하세요."
"경성역 근방에 다녀와줄 수 있어?"
"경성역에요? 뭐 그렇잖아도 그쪽 근처에 볼일이 있기는헌데, 뭔 일이세요?
"그냥 묻지 말고 가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만 봐줘. 부탁할게."
성하지 못한 몸을 이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여나 자신이 눈에 띄어 그 거사를 자기가 망치기라도 했다가는 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원우의 청에 염씨는 더 이상 묻지도 않고 나갈 채비를 했다. 멀리서 몸 조심히 있으라는 원우의 마지막 말에 대강 알아차릴 뿐이었다.
염씨가 집을 나선지 어느덧 한 시간 하고도 절반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미 예정된 시각을 넘은 시간이었다, 그저 염씨가 어서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원우는 염씨가 나간 직후부터 제 침상에 앉아 꼼짝도 않고 하염없이 시계만 자꾸 열어보았다.
민규가 목숨을 바치겠다 한순간 이미 모든 걸 놓아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다시는 못 보게 될지라도 거사에 성공해 먼 타지에서 민규가 살아줬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디 염씨가 그 소식을 들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때 1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나무 계단을 밟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염씨였다. 원우가 침상을 잡고 일어서고는 겨우 벽을 짚으며 한 발짝씩 떼서 방을 나섰다. 계단을 오르는 염씨와 마주했다. 원우는 아무 말도 없이 염씨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알아차렸다. 염씨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보는 순간, 거사는 실패했음을.
사이토 총독이 열차에서 내려서서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던 순간, 군중 사이에서 폭탄이 날아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이토 총독 가까이도 가지 못하고 폭탄이 터져버렸다고 했다. 총독 주변을 지키고 섰던 순사 몇몇이 폭탄이 폭발하면서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고 했다. 난리 통으로 변한 사이, 대학단의 일원들이 장전한 권총을 들고 그사이를 파고들어 사이토 총독을 노렸지만 금세 진압 당하고 총독은 유유히 경성역을 빠져나갔다고 했다. 염씨의 말을 들으면서 원우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리도 물거품이 될 것에 목숨을 바친 민규를 떠올리며.
그리고 염씨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것을 이야기했다.
어느 정도 진압되어가던 현장에서 마지막 총탄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정확하게 그 총탄은 사이토 총독을 호위하던 사람 중 한 명의 머리를 그대로 관통했다고 했다. 염씨가 본 그 자는 어제 보았던 종로서의 순사부장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저격범으로 마지막에 붙잡힌 사람이 화선백화점 아들이었다고 말을 전했다.
그 말이 원우가 기억하는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정신을 잃은 원우는 꼬박 하루가 지나 다음날이 되어서야 겨우 깨어났다.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염씨가 가져다주던 음식도 모두 그대로 내려보냈다.
하루종일 봄비가 내렸다. 봄에 걸맞지않는 세찬 바람과 함께 묵직한 빗방울이 밤늦게까지 내렸다. 민규와 같이 떠나자 약속했던 나흘때 날이었다. 하지만 날이 저물도록 원우는 홀로 제 방에 앉아 봄비를 견뎌야했다.
일주일 뒤, 경성 시내마다 벽보가 나붙었다. 경성역에서 총독을 노린 테러행위에 대한 벽보였다. 당시 경성역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학생들이 줄줄이 붙들려 가는 것을 보고는 경성 시내가 종일 시끌했다. 나라의 독립에 관심도 없고 서양 문물에 빠져있던 사람들조차 동요되어 경성 시내 곳곳에서 거센 움직임이 일어났다.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며 몇몇 중심지를 기점으로 학생운동도 벌어졌다. 그걸 잠재우기 위해 다급하게 붙인 벽보였다. 재판과정도 모두 생략된 채 이틀뒤 날이 밝으면 광장에서 붙잡힌 테러집단 대학단 전원을 총살형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단순히 알리는 목적뿐만 아니라 경고가 담긴 벽보였다. 누구든 대일본제국에 맞서는 자는 이렇게 처단될 것이라는.
시내에 나갔던 염씨가 벽보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원우의 방을 찾았다. 힘없이 침상 구석에 쪼그린 채 앉은 원우를 보며 염씨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리고 그런 염씨의 행동을 알아챈 원우가 제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으며 며칠 만에 입을 열었다.
"이제 진정 마지막인가 보다."
날이 밝자마자 원우는 오랜만에 교복을 꺼내입었다. 종로서에서 돌아온 날부터 방밖으로 단 한발도 나가지 못했기에 열흘만에 꺼내입는 교복이었다. 원래도 컸던 옷이 품이 더 넉넉해져서 헐렁거렸다. 거울을 앞에 두고 서니 거울속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어색했다. 핏기하나없는 얼굴을 하고 선 자신이 낯설엇다. 원우는 마지막으로 빳빳하게 각이 잡힌 검정색 모자까지 깊게 눌러쓰고 제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을거라 생각한 방문 앞에는 제 아비가 제복을 차려입고 서있었다.
"어디가는게야."
"학교요. 학교에 못간지 오래되었잖아요."
"학교에는 이미 다 말해두었다. 그리고 내일 동경가는 배도 다 마련해두었고."
"오늘은 학교에 갈게요. 마지막으로 친구들보고 오겠습니다."
"김민규 그 새끼가 죽는걸 두 눈으로 보러 가겠다고!"
"아버지."
"절대 이방 밖으로 한발짝도 못 나올것이다. 절대로!"
고함을 내지르며 이케다가 원우를 방안으로 밀쳤다. 잠시 뒤로 밀려 주춤하는 사이 방문이 닫기고 문밖으로 이질적인 쇳소리가 들려왔다. 철커덕 하는 소리에 놀라 원우가 얼른 제 방문을 열어보려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방문을 흔들어보아도 전혀 미동도 없었다.
"아버지!"
"김민규는 오늘 내 손에 죽는다. 대일본제국의 좀먹는 놈들이 죽어가는 것을 내 똑똑이 볼것이야. 그러니 조용히 내일 동경으로 떠날 준비나 마치고 있어."
"아버지 잠시만요 아버지! 아버지!"
방문을 사이에두고 울부짖는 원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듯이 이케다가 계단을 내려섰다. 점점 더 커지는 원우의 목소리에도 시선한번 주지않았다. 원우는 목이 타오를때까지 방문을 붙잡고 울었다. 목소리가 더이상 나오지않을만큼 울었다. 이게 제가 마지막으로 할수 있는 것이였기에 목이 터져나가라고 미친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문고리를 붙잡고 주저앉아서 쉰목소리로 몇번이고 불렀다.
점점 시각이 다가오고있었다. 창밖으로 자동차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원우가 황급히 창가로 가서 밖을 내려다보니 제 아비가 차에 올라타는게 보였다. 더이상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제 아비가 몸을 싣은 자동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자동차가 떠난것을 확인하자마자 원우는 다급하게 방안의 물건들을 잡아들었다. 탁자에 올려져있던 스탠드를 쥐자마자 문에 내리쳤다. 단단한 문에 스탠드가 튕겨지듯 떨어져나갔다. 다시 스탠드를 집어 내리쳤지만 제 맘대로 되지않자 원우는 동물처럼 울부짖으며 스탠드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포기하고 싶어지다가도 원우는 민규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도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원우는 묵직한 나무의자를 꼭 잡았다. 이미 며칠사이에 체력이 모두 바닥난 상태라 의자를 드는것도 버거웠지만 이를 악물고 의자를 머리위까지 잡아들었다. 의자와 몸에 힘을 실어 문을 힘껏 내리쳤다. 쿵 -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흔들거렸지만 그게 끝이었다. 문에서 튕겨져 나온 원우가 제 아픈 몸을 돌보지도 않고 다시 의자를 집어들었다.
다시 한번 있는힘을 다해 문을 내리치려던 순간, 문밖으로 달그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열리지 않을것 같던 문이 열리고 그 앞에 염씨가 서있었다. 원우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그제야 머리위로 들었던 의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도련님."
"아재."
"서두르셔요. 집행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아재 고마워."
긴말을 할 시간이 없었다. 원우는 곧장 방을 나서서 계단을 내려섰다. 휘청거리는 발목탓에 계단 몇개를 미끄러져 내려가면서도 그대로 주저앉지않고 다시 움직였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마자 1층 가장 안쪽에 자리한 제 아비의 서재에 들어갔다 나오고서는 달리기 시작했다. 광장이 보일때까지 쉬지도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경성에 찾아온 봄을 느낄새도없이 달려야만했다.
어느때보다 광장의 인파가 차고넘쳤다. 원우는 광장에 다다르자마자 몸을 추스를새도 없이 단상이 보이는 곳을 향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조금 지연이 된 모양인지 단상위로는 아무도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원우에게는 두번째로 가까이 보는 단상이었다. 원우가 애써 피해가던 그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사람이 많았다. 지난번에는 석민을 포함해 제가 아는 여럿이 죽어나갔고, 오늘은 그곳에서 민규가 죽어나갈 것이었다. 그 생각에 가슴이 꽉 막혀왔다. 차마 단상을 똑바로 볼수 없어 몸을 숙이려던 찰나 주변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고개를 들자 포송줄에 묶인 넷이 차례로 단상위를 오르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민규가 단상에 올라섰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의 셔츠자락은 도저히 원래의 색은 생각이 안날만큼 난잡하게 변해있었다. 군데 군데 찢긴 옷 사이로 곪아터진 상처들이 가득했다. 저리도 모질게 당했으면서도 여지껏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민규 뿐만이 아니었다. 민규를 포함한 네 학생들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광장을 빙 둘러 지키고 서있는 순사들탓에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는 것조차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차례로 세운 네 명 앞으로 순사들이 총을 들고 자리했다.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머리위에 천을 씌워 죽음의 공포를 줄여줄법도 했지만, 일부러 죽어가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만천하에 보여주기라도 하려는듯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한명은 두려움에 몸서리치기 시작했고, 한명은 눈물을 쉴새없이 흘리기도 했다. 이미 혼이 나간것처럼 한명은 멍하니 서있었다. 그 가장 마지막에 선 민규는 흔들림없이 아주 단단하게 곧은 몸가짐을 하고있었다.
이내 익숙한 지팡이 소리와 함께 이케다 수사과장이 단상 끝에머리로 올라왔다. 단상위에서 아주 당당한 얼굴을 하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이케다의 얼굴을 보며 원우는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이케다가 단상에 오르자마자 단상위에 선 학생들의 이름과 죄명을 하나씩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끝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원우는 민규에게 눈을 떼지못했다. 민규의 걸음을 절뚝거리게 만든 불편해보이는 다리부터 피딱지로 가득한 셔츠, 핏기가 싹 가신채 부어터진 입술. 오래된 피가 말라붙은 뺨의 상처까지. 조금의 두려움도 없다는듯 떨림하나 없는 민규의 표정도 놓치지 않고 담았다. 민규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담기위해 사람들 사이사이로 시선을 바삐 움직였다.
그리고 허공에서 마주쳐버렸다. 핏발이 선 붉은 눈동자를. 순간 모든것이 멈춰버린듯했고 자신을 둘러싼 군중들의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숨이 턱 막혀오고 울컥하며 가슴에서 응어리진게 올라왔지만 원우는 최대한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가만히 민규의 눈만 쳐다봤다. 입술새를 비집고 나오는 한숨도 혹여나 민규에게 들킬새라 옅게 내뱉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꼭 쥐고 몸 뒤로 숨긴채 두발에 힘을 주어 몸을 지탱했다.
일자로 굳게 다물었던 민규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방금까지 일본군을 향해 차갑게 빛내던 눈빛이 잠시나마 온기 가득한 애정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애써 참아오던 울음이 터져나오려하자 원우가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울지않으려 눈에 힘을 주었다. 희미하게 웃어주는 민규의 얼굴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에 민규가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충분하다고, 이정도면 괜찮다고. 뒷걸음질치던 원우가 누군가에 걸려 그대로 넘어졌다. 그때까지도 제게 시선을 거두지않는 민규를 보며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더이상은 민규를 두고 볼 자신이 없었다. 원우는 뒤돌아서 모여든 인파를 헤집고나가며 광장을 벗어나기위해 애썼다.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 악에받쳐 소리를 지르고 밀치며 겨우 인파의 가장 바깥쪽까지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이 달려왔던 곳을 향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푹 눌러썼던 모자가 벗겨진채 바람에 날아가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앞만보고 뛰기만했다. 촉촉하게 차오른 눈물에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한채로 뛰다가 얼마못가서 기어코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부딪힌 사람이 뭐라 소리를 지르는데도 개의치않고 원우는 다시 일어섰다. 그때 광장에서 제 아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부터 대일본제국에 대한 대테러행위를 저지른 죄인들의 총살형을 집행한다. 준비!"
귀를 틀어막아도 제 아비의 목소리가 깊숙한 곳까지 들려왔다.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곳으로 당장에라도 뛰어가야 한다. 하지만 원우의 마음과 다르게 발이 땅에 붙어서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원! 발포!"
그리고 날카로운 제 아비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수발의 총성이 시내를 울렸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전에 광장에서 본 여인마냥 눈물이 흘러내리다못해 목을 타고 뜨거운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주변 시선에 마음껏 목놓아 울지도 못하고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눈물을 닦아냈다. 비겁해서 울지도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듯 가슴을 내려치며 울음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그리고 원우는 우뚝 멈춰선 발걸음을 다시 떼기 시작했다.
광장 근처의 정미소에서 빌려나올때만해도 가벼워서 덜그럭 소리를 내던 수레가 묵직했다. 단상에서 끌어내린 시신들을 처리하는 이에게 돈 몇푼 쥐어주고 겨우 수레에 시신 한구를 수습할 수 있었다. 유난히 구름한점없이 화창하고 뙤약볕이 내려쬐는 날이었다. 따가운 봄볕에 수레를 끄는 염씨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흘렀다. 눈가에 흐르는 것은 어쩌면 땀과도 흡사한 눈물이었고.
얼마전까지만해도 북촌 작은 뒷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 목련나무마다 아름아름 목련꽃이 예쁘게도 피어있었다. 하지만 며칠전에 내린 봄비 탓에 이제는 나무마다 초록 이파리만 남았고 큼직했던 목련 꽃잎이 모두 떨어져 군데 군데 바닥을 덮고 있었다. 발아래를 수놓은 목련꽃잎을 보며 염씨는 더욱 발길을 재촉했다. 가파르지는 않아도 듬성듬성 돌덩이가 솟은 오르막길을 오르는게 고단할법 했지만 수레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한번쯤은 쉬었다가도 좋으련만, 염씨는 더욱 수레를 끄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원우가 제 시야에 들어오자 염씨는 수레를 있는 힘껏 당겼다.
북촌의 전망을 한번에 볼수 있는 뒷산의 중턱이었다. 산을 오르다 가장 큰 목련나무가 있는 곳에 원우는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발 아래로 북촌의 집 풍경들이 펼쳐졌다. 아마 저 곳중 어딘가에서 민규가 태어났겠지 하고 생각했다. 지금은 떨어지고 없지만 수많은 목련꽃들이 피어나던 날 태어났을 민규 생각에 원우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행복하고 기분좋은 상상이었다.
이내 꿈을꾸듯 눈을 감고 민규와 함께 목련꽃이 만발한 이곳에 서있는 상상을 했다. 상상만으로도 아름다웠다. 미소짓게 했다. 아마 목련꽃을 보며 예쁘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민규가 나무에 올라 목련꽃이 한아름 핀 가지 하나를 꺾어다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절로 웃음지어졌다. 꿈이라면 이대로 영원히 깨고싶지않은 꿈이었다.
어느덧 원우의 귓전에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깬듯 눈을 떴다. 수레소리가 점점 가까워올수록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쿵쾅거렸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염씨의 얼굴이 보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도 조금의 지친기색없이 수레를 제 앞까지 끌고올라왔다.
"아재 고생했지. 미안해."
"아니에요. 도련님 위해서 마땅히 할 일인데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도련님 저는 저쪽가서 연초 하나 피고올게요."
염씨가 자리를 피했다. 언덕아래쪽으로 걸어가는 염씨를 보며 원우의 손이 수레위를 서성거렸다. 수레위를 덮은 거적때기를 잡기까지 연초 하나를 다 태우고도 남을 시간이 걸렸지만 염씨는 한참을 원우 곁으로 오지 않았다.
원우가 거적때기 끝을 잡았다 놓기를 수차례 반복하다가 길게 숨을 내쉬고 거적때기를 들춰냈다. 단상위에서 마주한 그 모습과는 또 달랐다. 염씨가 오기전까지 상상하던 그 모습과도 많이 달랐고. 원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염씨가 민규와 함께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수차례 다짐했던 마음가짐을 다시 새겼다. 슬픔없이 맞이할 것이라고.
눈가가 촉촉하게 물들었지만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가슴 깊은곳에서부터 긴 숨을 내뱉었지만 소리치지 않았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왔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조심히 손을 뻗어 민규의 이마를 어지럽게 덮은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넘겨주었다. 당장에라도 눈을 뜨고 제 이름을 불러줄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뺨위에 갈기갈기난 상처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이 떨려 민규의 단잠을 깨울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꼭감은 두 눈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얼굴이 차갑다. 이미 온기가 식어버린 몸둥이까지 차갑기만 했다. 수레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손을 꼭 잡아 입김을 불었다. 피딱지가 내려앉은 손등에 한참동안 입김을 불어도 따듯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민규의 긴 손가락끝에 입을 가져다대었지만 입술에 느껴지는 촉감은 서늘하기만했다.
꼭 쥔 손을 쉽사리 놓지 못했다. 얼굴보다 더한 상처들이 가득한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기 위해 더욱 힘을 줘 민규의 손을 잡았다. 붙잡힌 날부터 오늘까지 고작 열흘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모진 고문을 견뎌냈는지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곳마다 굳어버린 검붉은 핏빛이 역력했다. 참담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것보다 훨씬 더 참담했다. 왼쪽가슴을 물들인 얼마되지않은 핏자국들을 보며 원우는 끝끝내 주저앉아 눈물을 터트렸다. 눈물이 차오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타고 흘렀다. 어금니를 세게 물고 버티던 것도 모두 놓고 소리내어 울분을 토해냈다.
원우의 울음소리가 언덕을 가득 메웠다. 멀리서 원우를 지켜보던 염씨가 뒤돌아서서 소매자락으로 눈을 벅벅 비볐다. 그리고 연초 하나를 더 빼서 입에 물었다. 원우에게 필요한 시간만큼 염씨의 발 아래로 연초꽁초가 쌓여만갔다.
마지막 남은 연초를 발로 비벼서 끄자 저 쪽에서 원우가 밝은 목소리로 염씨를 불렀다. 원우의 부름에 염씨가 한달음에 원우 앞까지 갔다. 민규의 목아래를 바치고는 염씨에게 눈짓했다. 원우의 의도를 알아챈 염씨가 가서 민규의 발 아래쪽을 잡고는 원우와 동시에 들었다. 민규를 들어 목련나무 아래로 옮기는과정이 원우에게는 꽤나 버거운 일이었지만, 힘든 내색 하나 하지않고 있는힘껏 민규를 꼭 안아들었다. 적당한 그늘이 있어 시원하기도하고 나뭇잎사이로 햇빛이 간간히 들어와 따듯하기도 한 자리였다. 민규의 다리를 안아든 염씨가 원우를 따라 조심히 땅위에 민규를 내려놓았다.
민규가 누운 자리 옆으로 원우가 철푸덕 앉았다. 자리에 앉아도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게 원우는 꽤나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옆에 서서 원우의 얼굴을 살피던 염씨는 그게 참으로 이상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원우의 얼굴은 한참을 울다 그치다는 반복한 통에 낯빛 가득 피곤함이 베어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분좋은 일이 생길때면 보았던 얼굴처럼 말갛게 웃고 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응. 조금 피곤하긴한데 괜찮아."
"피곤하시면 이제 그만 내려갈까요? 곧 주인어른께서 찾으실텐데."
"아재 고마웠어. 그동안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았다.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웃고있던 표정의 의미를.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초연해진 말투의 의미를.
"도련님."
"뻔뻔하겠지만 아재한테 부탁하나만 더 할게."
"그러지마세요 도련님."
"너무 늦지않게 우리를 찾으러 와줘."
"도련님 어찌 그런말을 하셔요."
"부디 온전할때 와주면 좋겠어. 이곳으로. 그리고 응당 자리는 서로의 옆자리여야해."
원우의 말을 듣는 염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하는 원우를 보며 차마 울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에 밀려난 눈물들이 떨어져내릴까 눈을 부릅뜨고 원우를 향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잠겨와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을 가슴에 새겼다. 도련님 청대로 이곳에 같이 있을수 있게 제 목숨바쳐서 약조하겠다고.
원우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염씨는 뒤돌아섰다. 뒤로 들리는 원우의 조심히 내려가라는 인사말에도 차마 눈물이 흐를새라 돌아보지 못하고 바삐 빈수레를 끌며 언덕을 내려섰다.
원우는 염씨가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지껏 제 인생의 반평생을 옆에서 함께 있어준 이에게 큰짐을 남기고 가게되는 미안함과 고마움에 그가 가는 길을 끝까지 쳐다보았다. 수레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어느덧 언덕주변이 조용해졌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소리만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목련나무 가지가 얼기설기 뻗어있었다. 조금 더 일찍 이곳에 왔으면 가지마자 목련 꽃이 피어있는것을 보았을텐데, 같이 보자했던 목련 꽃은 이미 모두땅에 떨어진지 오래였다. 그 어떤 꾸밈도 없이 순수하고 고귀하게 피어있던 백목련이 지는것은 왜 이다지도 지저분한지, 여기저기 밟혀 갈색잎으로 변한 목련 꽃잎이 바닥에 난자했다. 원우가 제가 앉은 자리 주변에 떨어진 목련 꽃잎을 한장씩 모았다. 최대한 밟히지 않아 깨끗한 하얀 목련꽃으로다가.
끌어모은 목련꽃잎을 민규의 왼쪽 가슴위로 올렸다. 흉한 것을 가릴수 있게 한장 한장 정성스레 왼쪽가슴위를 덮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소중히 넣어온 회중시계를 꺼내었다. 민규가 남기고 간 회중시계였다. 가슴을 덮은 목련꽃잎위로 회중시계를 올렸다.
모든 준비를 다 미치기라도 한듯 민규의 옆에 반듯이 누웠다. 그리고 품 속에 고이 품고온 총자루를 꺼내 손에 쥐었다. 총자루에 금테를 둘러 걸맞지않게 화려했다. 차가운 총자루를 쥔 손에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총구를 제 가슴팍에 가져다대는 순간까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미안하다, 나 또한 너를 마음에 깊이 품어서. 미안하다, 나 역시 너를 흔들어서. 미안하다, 네 시간까지 모두 짊어지고 살 자신이 없어 이렇게 떠나서…. 그래도 민규야 다행이다, 같은날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우리 여정이 길텐데 날씨가 좋아서. 만주보다 더 먼곳까지 가야하는데 날씨가 흐려 너를 놓치는 일은 없을테니까 참으로 다행이다. 다행이야."
고개를 돌려 제 옆의 누운 민규의 얼굴을 다시한번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았다.
돌부리를 하나씩 지날때마다 빈 수레소리가 요란했다. 수레는 가벼웠지만 발걸음이 무거워 염씨는 오를때보다 더 느린 속도로 언덕을 내려왔다. 언덕을 거의 다 내려서니 멀찍이 북촌마을의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수레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귀를 찢는듯한 단말마같은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성이 메아리치며 한참을 울려퍼지더니 공명과도같은 소리가 파도치듯 염씨의 귓전을 맴돌았다.
염씨가 멈춰섰다. 깊게 눌러쓰고있던 모자를 벗어 가슴에 쥐고 언덕 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꽤 오랜시간동안 고개를 깊게 숙여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요란한 수레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겼다.
"잠깐 멈춰봐. 여기 새로 소개할 연습생 하나 있다."
처음 오디션에 합격하던 날 내가 올해 들어 세번째로 뽑힌 연습생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연습실에 들어서는순간 연습생 또 왔다는 누군가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회사사람의 뒤를 따라 들어서자 한꺼번에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기획사 연습실에 들어가는 날이니만큼 최대한의 멋을 부렸다. 친구들과 노는 날이면 꼭 찾아쓰던 빨간 비니까지 꾹 눌러썼는데 왠지 프리한 복장에 춤을 추는 연습생들을 보며 살짝 후회가 들었다. 느린걸음으로 들어서자 연습실을 가득 채우던 노래가 멈추고 이내 사람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모든게 낯설었다. 더군다나 처음보는 얼굴들이 일제히 나를 빤히 보고있는게 도무지 적응 할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중에는 달갑지않아 못마땅해하는 얼굴도 있었고, 심하게는 적대시하는 눈빛까지 읽을수 있었다. 이런게 텃새구나.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색함에 그리 많은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오른편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어린연습생들이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는 봐주고있었다. 꽤나 귀엽게 생긴 얼굴로 생긋생긋 웃는 걸 보며 그래도 나를 반겨주는 사람이 한둘쯤은 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개를 돌리니 아직도 거울앞에 서있는 연습생 한명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큰 키에 나와 정반대의 까무잡잡한 피부를 한 연습생이었다. 누군가가 그쪽을 향해 소리쳤다.
"야 김민규! 여태 놀다가 연습하는 척이냐!"
"나 계속 연습했거든. 나 노는 거 본적있어?"
"너 빼고 여기 다 봤거든? 얼른 와. 앞에 기다리잖아."
자신을 놀리는 말투에 쪼르르 이쪽으로 달려오더니 방금까지 자신을 놀리던 연습생의 목에 친근하게 헤드락을 걸며 개구진 행동을 해보인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풉-하고 웃었더니 이내 그 연습생이 나를 빤히 봐왔다. 그런데 눈빛이 다른 이들처럼 낯설지않았다. 꽤나 친근하고 따듯해보이는 눈빛이었다. 마치 오래본 사람처럼 마주친 눈빛을 피하지도 않고 입가가 싱글거리고 있었다.
"인사해야지?"
"아, 안녕하세요."
"그런 인사말고 자기소개."
"아. 저는 올해 열일곱살이구요. 경남 창원에서 왔고, 중학교는 팔룡중학교를."
"거기까지는 소개안해도돼."
직원의 말 한마디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괜히 민망해져 비니를 더 끌어 눈썹 위까지 덮었다. 한쪽에서는 학교이름 골때린다며 웃는 소리도 들려왔고, 한쪽에서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어디 더 얘기해보라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때 좀전까지도 헤드락을 걸고있던 연습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어? 경남이면 승철형이랑 같은 쪽이네요?"
"야! 점마는 창원이라잖아. 나는 부산. 부산광역시!"
"그니까 아래쪽이면 다 거기서 거기아닌가."
"너 안양이랑 인천이랑 똑같냐? 말도 안되는 소릴 자꾸해. 누가 김민규 입좀 막아봐."
그 말에 방금까지 신나하던 얼굴이 입술을 삐죽삐죽내밀더니 금세 풀이 죽은 얼굴을 한다. 그걸 보며 생각했다. 꼭 하는짓이 똥오줌 못가리고 방방 뛰어다니는 커다란 개같다고. 방금까지 신나서 꼬리치다가 주인에게 혼나서 꼬리내리고 귀까지 바닥에 축 늘어트리고 드러눕는 개. 그나마 하는 행동을 보니 금방 친해질 수는 있겠다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름이 민규라고 한거 같은데. 아 맞다 자기소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기소개를 이어 했다.
"저는 오디션 보고 들어왔고, 특기는 춤입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잠깐. 우선은 이름 비공개로 할거니까 모두 그렇게 알고있어."
"그럼 뭐라고 불러요?"
"뭐 너희끼리 알아서 정해봐. 인사들 간단히 하고 바로 연습해라."
그러고는 나를 데리고 온 사람이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그 순간 새 학교에 전학 와서 혼자 남겨지면 이런 기분이구나 싶어졌다. 한쪽에서는 별 관심없다는듯이 거울앞으로 가서 춤을 맞춰보기 시작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나를 앞에 세워두고 이름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부르지?"
"창원이라고 부를까?"
"에이 그게 뭐냐. 차라리 팔룡이가 낫겠다."
"팔룡이 좀 웃겼다. 근데 이름이 중요해?"
"같이 연습할껀데 그래도 야라고 부르면 이상하잖아."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닌데 꽤나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게 웃겨서 나도 같이 이름대신 부를만한걸 생각해봐야하나 고민했다. 팔룡이라고 불리는건 썩 내키지않으니까. 그때 갑자기 누군가 내 목에 팔을 둘러왔다. 방방 뛰어다니던 그 연습생이었다. 목에 닿는 손길이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려 들었더니 해맑게 웃으며 모자 끝을 위로 쭉 잡아당겼다.
"비니라고 부르죠? 비니 쓰고 있으니까."
"야 비니가 뭐냐. 지 이름 아니라고 대충 정하네."
"비니 너무 여성스럽지 않아?"
"아, 좋아요. 비니. 괜찮은것 같아요."
"뭐 본인 마음에 들면 그렇게 해."
얼떨결에 괜찮다는 대답을 하자마자 그렇게 이름이 정해졌다. 비니라고. 자신들이 해야할 중요한 숙제같은걸 하나 끝낸건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아직도 목에 팔을 두르고 있는 한명을 제외하고. 목에 닿아있는 팔이 간지러워 어깨를 움찔움찔하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이제는 아예 몸을 기대오기까지 했다.
"비니형, 안녕하세요."
"음. 내가 형이에요?"
"전 97년생이요. 한살 동생이에요."
"아, 응. 반가워요."
"말 편하게 해도 돼요. 맨날 볼 사이인데."
그리고 뭐라 대답을 하기도전에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더니 한발짝씩 걷기 시작했다. 팔힘에 이끌려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무슨 목적이 있는것도 아니었고 그냥 꼭붙어서 연습실 안을 휘적휘적 걸어다니는게 전부였다. 도저히 처음 본 사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웠고, 지나치게 밀착되어있었다. 스킨쉽에 어색한 나에게는 꽤나 낯설었지만 그 팔에 이끌려 연습실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다보니 빳빳하게 긴장했던 몸이 조금은 풀어지는듯 했다. 연습실 곳곳을 누비던 발걸음은 한쪽 벽에 붙어서고는 멈춰섰다. 구석진 자리였지만 연습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제야 다 보지 못했던 연습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개인연습실도 붙어있는 제법 큰 규모였다. 연습실을 살펴보던 것도 잠시 옆에 있던 연습생의 얼굴이 앞으로 쓱 다가왔다. 얘는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구나.
"왜 그래?"
"저 궁금한거요. 형 이름이 뭐에요?"
"이름이 그러니까. 비니라고 아까 정해줬잖아. 비니."
"그거 말고, 진짜 이름이요. 진짜이름 알고싶어요."
"말해주면 안되는거 같은데."
당분간 비밀로 하라는 직원의 말이 생각나서 머뭇거리자 또 다시 입술을 앞으로 삐죽거렸다. 그리고 어깨가 축 늘어지는게 누가봐도 실망했다는 행동이었다. 자기 혼자만 알려고 했다며 말끝을 흐리자 괜히 미안해졌다.
"야야 다 모여봐. 아까 하던 거 마저 맞춰보자. 비니 너는 첫날이니까 일단 거기 앉아서 하는거 보고, 민규 너 이리와."
"형! 우리 쉰지 지금 5분밖에 안됐는데요."
"김민규 농땡이 시전하지말고 얼른와라."
제법 박력있어 보이는 사투리섞인 말투로 소리치자 옆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꽤나 날렵했던 눈매까지 축 처져보이는게 어지간히 가기싫은 얼굴이었다. 이내 내 목에서 제 팔을 풀어내고는 목줄을 채우고 끌려가는 개처럼 연습실 중앙으로 아주 느릿느릿 발을 떼었다. 한 두발짝 정도 떼더니 가다말고 돌아와서는 나를 보며 싱긋 웃는다.
"형, 곤란하면 지금말고 다음에 말해줘요."
"어?"
"이름이요. 대신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줘야돼요. 알겠죠?"
그러고는 대답하기도전에 뒤에서 쩌렁쩌렁 울려대는 김민규 이름 석자에 불려갔다. 시끄럽다며 귀를 한번 틀어막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어가는게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다. 결국 내가 먼저 움직였다. 바짝 그 뒤로 다가가서는 앞뒤로 흔들거리는 손가락 끝을 살짝 잡자, 휙 돌아보는데 놀라서 손을 다시 뗐다.
"저기, 내 이름말이야."
"네?"
"전원우. 내 이름 전원우야."
"아 전원우. 이름 예쁘다. 둘이 있을때는 원우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응. 원하는대로."
"반가워요, 원우형."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