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봄과 여름, 그 사이/글

[루나] 블랭크 서브마린 1

Monthly MW 2021. 1. 13. 23:42

  

 

 

 

우리의 집 바로 앞에는 아주 작고 좁은 횡단보도가 있다. 그 횡단보도는 너무 짧았기 때문에 아무도 왜 굳이 세금을 들여 그 신호등을 세워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여태껏 그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지키는 사람을 나를 빼고는 본 적이 없다. 고작 내 무릎 높이만한 아이들과 허리가 굽은 노인네들도 그 신호등만큼은 새까맣게 무시하고 길을 건넜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무단횡단을 일삼는 사람들 중에는 미미도 포함되어있다. 나는 빨간불이 켜져 있으면 노란 선 안에 우뚝 멈춰 서서 신호를 기다렸고, 미미는 신호등이 어디 있는지도 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간다.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으니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민규도 발이 묶였다. 미미의 걸음으로도 네 발이면 충분히 건널 만큼 좁은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멀뚱히 서로를 바라봤다. 굳이 저기에서 날 기다릴 거면 왜 먼저 건너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한 번은 핀잔을 준 적이 있다.
 
 
「너 그러다가 차에 치여서 죽어.」
「여기는 괜찮아.」
「무단횡단하다 교통사고 나서 죽은 사람들도 다 죽기 전엔 그렇게 말했을걸.」
「그런 사람들은 8차선 같은 데에서나 무단횡단해서 그래.」
「여기도 잘못 치이면 죽을 수 있어. 봐봐. 저런 트럭에 치이면 죽는다니까.」
 
 
  미미는 오늘도 역시나 억지를 쓴다. 의미 없는 논쟁을 하는 도중 택배사 트럭이 그 횡단보도를 가로지른다. 초록색 사람이 깜빡이고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아무도 신호를 지키지 않는 바람에 여기서 잘못하다간 초록불에 길을 건너도 죽을 판이었다.
 
「저런 트럭에 치여도 안 죽지 않을까?」
「너 그거 안전 불감증이야.」
「그런 사람들은 몇 톤짜리 덤프트럭 같은 데에 치여서 죽은 거야. 연쇄 추돌 이런 거 있잖아.」
「여기에 몇 톤짜리 트럭이 올 것 같지는 않긴 한데…」
「그니까. 안 죽는다니까. 운 나빠 봤자 어디 한 군데 병신 되겠지.」
 
 
  덤프트럭이 과연 이 구질구질한 주택가에 들어설 이유가 뭐가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지는 바람에 미미의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왠지 휘말려버렸다. 내가 자신의 설득력 없는 논리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건지 미미는 대찬 표정을 지어보이며 당차게 발걸음을 뻗었다. 민규는 한 쪽 손목에는 맥주 사탕이 든 검정 비닐봉지를 매고 한 쪽 손으로는 폴라포를 먹으며 아무 생각 없이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미미는 불과 삼주 후에 죽었다. 이 좁은 횡단보도에서, 덤프트럭도 아니고 고작 모닝에 치여서.
 
 
 
 
                        블랭크 서브마린
                      Blank Submarine

 
 
  아버지가 내게 빚을 떠맡기고 튄 것보다도 미미의 죽음은 내게 충격적이었다. 그 장면은 그리 드라마 같지도 않아서, 미미의 깜짝 놀란 표정이 클로즈 업 되고 자동차의 전조등이 크게 터지며 아주 느리게 장면이 흘러가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확인한 것은 눈앞에서 미미의 몸이 앞 유리에 받쳐 붕 떠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미미의 몸뚱아리가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를 듣고도 움직이지 못했고, 그런 나보다야 침착하게 민규가 119에 신고를 했으나 미미는 산소 호흡기를 달고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대로 죽었다. 사인은 과다출혈이었다.
 
 
  장례를 치루는 내내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민규와 지친 상태로 집에 돌아오자 그제야 감정이 물 밀려오듯 터졌다.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 갔고 불안감이 나를 잠식해갔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른다는 걱정에 매일 안절부절못했다. 내 주변에 남은 사람이라곤 이제 민규 뿐이었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이 망가지는 건 한 순간이다. 글쎄.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가 단호하게 미미의 안전 불감증에 대해 경고했다면 미미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상대의 모든 걸 품어주기에는 너무 작은 사람이었다.
  미미의 이름을 묻는 간호사에게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민규가 나대신 대답을 할 때부터 미치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미미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지? 미미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는 차마 답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미미와 나는 무슨 관계지. 범죄자 페어? 룸메이트? 아니면, 핏줄이 섞인 남매?
 
 
  불안은 증폭되고 검은 얼룩은 번져나간다. ‘형 요즘 왜 그래요. 미미 누나 때문에 그래요?’ 내 첫 자해를 보고 주저앉아 울먹이는 민규에게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너를 잃어버릴까봐 그래. 요즘 자꾸 네가 날 떠날 것 같아. 내가 그걸 입으로 소리 내어 말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래도 민규는 그 말을 못 들은 것 같다.
 
 
  아직도 꿈을 꾸면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민규의 입술이 생생하고, 올해의 첫 날 빤히 들여다보며 나에게 제 우주를 쏟아내던 민규의 눈동자가 눈에 선하다. 그래서 더 밀어내야 했다.
 
 
 
 
 
  원래 매일 같이 나오는 바퀴벌레를 잡는 역할은 가장 용감한 미미의 담당이었는데, 미미가 죽고 나서는 꼼짝 없이 내 담당이 되었다. 민규는 미미의 속옷이나 벽에 물든 곰팡이 자국 같은 데에는 익숙해져도 바퀴벌레에는 결코 적응이 되지 않는 모양새였다. 바퀴벌레만 나오면 사색이 되어 도망가는 탓에 나는 바퀴벌레 전용 살충제를 몇 통씩 사 두었다. 분사되는 약품이 기관지에만 닿으면 온갖 기침이 터지는 탓에 약을 칠 때마다 마스크를 꼭 착용해야 했음에도, 민규가 저렇게까지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볼 때면 고작 마스크 끼는 게 귀찮다고 바퀴벌레를 못 잡을 게 또 뭔가 싶다.
 
 
  확실히 나는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 미미가 죽은 게 올 겨울의 끝자락이었으니, 미미에 대한 그리움이나 죄책감 등은 많이 흐려진 상태였다. 다만 나는 이미 민규에게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는 내 자신이 무섭다. 정신을 차려보면 티비에서 민규 부모님의 얼굴이 번쩍였다. 저렇게 빛날 운명인 민규를, 지금 내가.
 
 
“민규야. 이 집에서 언제 나갈 생각이야.”
“안 간다니까요.”
“그러다 내가 폐암으로 죽는 꼴 보고 싶지?”
“아 진짜.”
“이젠 피 토하는 거 보고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네.”
“내가 하지 말란다고 언제는 안 했어요?”
 
 
  민규는 매일 지친 상태로 내 말에 일일이 반박했고 나는 아무렇게나 민규의 마음에 비수들을 메다꽂았다. 나도 이런 말 수백 번 하다 보니 지겹고 지치기는 매한가지다. 민규의 겁먹은 목소리 하나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매번 바퀴벌레를 잡아주는 주제에. 꼬박꼬박 나쁜 말을 던지는 건 잊지 않는다.
 
 
“안 가면 네가 위험해.”
“왜요.”
“내가 언제 어떻게 널 죽일 줄 알고.”
“형이 절 어떻게 죽여요.”
“저기 밧줄 보이지. 저 밧줄로 네 목을 매버릴 거야.”
“형은 가끔씩 형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까먹는 것 같아요.”
 
 
  이런 말까지 해 가며 민규를 내쫓으려던 내 노력이 무색하게 민규는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민규는 내가 차마 부인할 수 없는 것들만 골라 공격했다. 거짓말로라도 민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못 하는 나를 알기 때문이다. 민규는 아주 똑똑했고 내가 어떤 부분에 약한 지도 나만큼이나 너무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지친 민규가 촉촉한 눈을 내리깔고 이렇게 뇌까린다면.
 
 
“그리고 만약에 형이 절 죽인다 해도.”
 
 
  저는 이미 형을 너무 사랑해서 형을 못 떠나요.
 
 
  민규는 그렇게 말하고 내게로 달려들었다. 눈은 빨갛게 충혈되고 표정은 여태 본 것들 중 가장 단단하게 굳은 채로. 내 옷을 찢듯 거칠게 벗겨내며 내 목에 박아대는 입술이 악에 차 있어서 나는 민규의 머리를 두 팔로 안았다.
 
 
  콘돔을 낄 여유조차 없이 빠듯하게 섹스가 흘러간다. 민규는 섹스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도 손목으로 눈을 가리고 신음을 애써 눌러참았다. 오늘따라 삽입 행위가 아프고 잔혹하게 느껴졌다.
 
 
 
  -
 
 
 
  21세의 정신박약자 남성을 너무 사랑해버린 갓 스물의 청년 김민규의 시점이다.
 
 
  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은 건 다 가질 수 있었다. 원하면 차를 살 수도 있었고 수표로 탑을 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들이 못 누린 것은 다 누릴 수 있었으니 딱히 욕구랄 게 없었다. 말 한 마디면 바로 내 손 안에 쥘 수 있었고 굳이 무언가를 갈망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나중에서야 깨달은 내 속의 결핍은 딱 하나다.
  내 자체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
 
 
  그룹의 후계자 김민규, 도련님 김민규, 돈이 많은 김민규나 재벌 3세 김민규 혹은 외모가 준수한 김민규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은 다 제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훌륭한 기업인이 되어주길, 수업에 빠지지 않길, 제 앞길에 도움되는 무언가를 제공해주길, 혹은 내 몸과 입술과 성기를, 간절히.
 
 
  더러운 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아무리 하얀 솜들을 덧대어 흙탕물을 뽑아낸다 하더라도 완전히 하얘질 수는 없었다. 상대를 사랑하는 법보다 그 사람을 취하고 내 아래에 두는 법을 먼저 깨달았다. 어리고 권력 있으며 미래가 창창한 도련님 아래에 줄을 서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세계가 내 아래에 있는 줄 알았고, 내 마음 가는대로 행동했다. 그게 잘못된 삶이란 걸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의 자아가 형성되면서 내 속이 많이 무뎌지는 게 느껴졌다. 어른들은 안달냈다. 오히려 더 뾰족하고 단단해져야만 할 도련님이 자꾸만 물렁거리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해 하루하루 나를 들볶았다. 그럴수록 지루한 예절 교육과 경영 수업을 벗어나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즐기게 됐던 것 같다.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손을 맞잡고 온기를 나누고,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단 걸 깨달은 거다. 그제서야 나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가 원하는 건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게 아니라, 평범한 삶이라는 것.
 
 
  그래서 도망쳤다. 아버지가 던진 나이프를 기회로. 평범한 삶을 내 손에 쥐기 위해.
 
 
  원우 형은 살면서 처음 보는 류의 사람이었다. 그간 나름대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봤다고 자부했다. 파티에 가면 널린 최상위층 자제들부터, 주기적으로 봉사를 갔던 고아원의 아이들과 가끔씩 벌어지는 총격전과 혈투 속의 범죄자들, 학교에서 마주쳤던 평범하고 행복해보이는 아이들과도 달랐다. 어디가 그렇게 달랐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나는 깨닫지 못했었다. 미미 누나가 던진 말에 화들짝 놀라 내 모습을 돌이켜보니 사랑, 그래, 내 마음이 그런 것도 같았다. 사랑을 받은 적이 없으니 사랑을 하는 법도 잘 몰라서 일단은 마음 내키는 대로 굴었다. 형은 내 마음을 알고도 놀라지 않았다. 사실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거듭 내 마음을 토로해도 돌아오는 건 부정의 답이다. 형이 내 마음을 부인할 때마다 낙담했다면 지금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치지 않고 고백했고 형은 지치지 않고 밀어냈다.
  언젠가 미미 누나가 왜 형을 좋아하냐고 물었었다. 그래서 생각을 해 봤다. 왜 이렇게까지 형을 좋아하는지.
 
 
「형은, 그렇잖아요. 좀, 손에 잘 안 잡히는.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없을 것처럼…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내 손에 쥐어지지 않아서 더 매달리고 간절히 바랐다. 아무리 애정공세를 하고 수백 번을 고백해도 형의 철옹성은 허물어질 틈조차 주지 않았다. 형이 내게 보였던 틈은 처음 마주쳤을 때 보였던 연민이 전부였던 거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사랑받기 위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아주 간절해질 수 있는 사람이고, 형도 끝까지 날 밀어내진 못할 거다.
 
 
「아니요. 사랑하게 될 거예요.」
  제 눈을 일 분만 쳐다보고 있으면요.
 
 
  내 속에 담긴 사랑을 모두 쏟아줌으로써 끝내 형의 사랑을 받아냈고,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한 날들만 내리 이어질 줄만 알았다.
  그런데, 사랑이 원래 이렇게도 힘든 거였나?
 
 
 
  -
 
 
 
  형 맥주 사탕 사 올게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여는 뒷통수에 대고 나는 또 말하려고 했다. -그래, 잘 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 그런데 오늘은 ‘그래, 잘 가고…’까지 말한 다음에 본능적으로 말을 멈췄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퍼지자마자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바퀴벌레처럼 내 몸을 타고 기어오른다. 왠지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했다가는 정말 그럴 것 같아서.
 
 
  그리고 민규는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지 말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혹은 죽여버릴 거라고 협박을 해서 벌을 받은 건가. 나는 민규가 없는 옆자리를 더듬대며 눈을 껌뻑였다. 그 날 꿈에서는 미미가 차에 치이는 모습을 연속해서 열다섯 번을 보았고 결국 나는 새벽녘에 잠자리를 박차고 나가 변기통을 붙잡았다.
 
 
  민규가 없는 7월을 맞았다. 처음에는 원망을 했다. 거봐, 이럴 거면서 왜 영원한 사랑이니 뭐니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했어. 그 다음에는 슬퍼했다. 민규의 흔적이 남은 모든 것들을 내리 쳐다봤다. 너무 슬프면 원래 눈물도 안 나나?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체념이었다.
 
 
  흡입기를 잃어버렸다. 어디 구석에 놔 뒀던 것 같은데 소파 뒤로 넘어갔는지 옷장 밑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흡입기를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천장에 바퀴벌레가 달라붙어있는 게 보이지만 그저 방치한다. 바퀴벌레의 다리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이대로 잠들면 바퀴벌레 떼에 깔려 죽을 수 있을까?
 
 
  민규가 매일 돌려보던 다큐멘터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돌려봤다. 민규가 저 다큐멘터리를 왜 그렇게까지 봤을까? 나는 여전히 저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저 잠수함처럼 가라앉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심해의 저 아래로, 바닥으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네가 없는 여름은 너무 더운 것 같아. 바다 속으로 침잠하며 나는 생각한다.
 
 
  7월 17일. 생일이 며칠 남았는지 센다. 분명 몇 번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일주일이나 남아있던 생일이 고작 하루 뒤로 다가와있었다. 티비 속에서는 여전히 심해를 탐험하는 잠수함이 가득 차 있다. 나는 달력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민규의 삐뚤빼뚤한 글씨로 별표가 크게 쳐져 있었다. ‘형을 만난지 일년 째 되는 날이에요.’ 웃으며 말하던 얼굴이 당장 옆에 있는 것처럼 선해서, 나는 번쩍 몸을 일으켰다.
 
 
  담배갑도 이젠 텅 비었고, 몇 주 째 밖에 나가지 않아 피부는 하얗게 떴으며 맥주 사탕도 다 떨어진 지 오래였다. 나는 생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일전에 민규에게 협박한 적 있던 하얀 밧줄을 집어들었고 천천히 밧줄을 내 목에 감아본다. 까슬한 감촉이 목의 피부에 닿아 따가웠다. 이 곳에 민규가 남겨두었던 키스마크는 이미 노랗게 빠져 흔적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눈을 감고 밧줄의 무게를 그대로 느낀다.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누군가가 설치해둔 고리에 밧줄을 걸었다. 아마 자살했다던 미미의 엄마가 설치해둔 게 아닐까 혼자 추측을 해 보면서. 의자가 삐걱대는게 잘못하다간 이대로 넘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밧줄을 목에 감고 매듭을 지었다. 심호흡을 하고 그대로 의자를 치우려니까 자꾸만 매듭이 맥없이 풀려버린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네. 짜증이 났지만 나는 다시 매듭을 지었다.
 
 
  그 때, 도어락이 눌리는 소리가 난다. 나는 튼튼하게 매듭지은 밧줄을 목에 감고 한 쪽 발을 의자에서 뗀 상태였다. 비밀번호는 틀리지 않고 한 번에 들어맞았다. 나는 멍하니 열리는 문을 쳐다봤다.
 
 
“형 죄송해요. 제가 그 날 나갔다가 본가에 잡히는 바람에…”
 
 
  머리를 깔끔하게 손질하고 정장을 빼 입은 민규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한 쪽 손에는 케이크를 들고, 한 쪽에는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를 든 채. 민규는 말을 하며 문을 닫다가, 밧줄을 붙들고 얼이 빠진 날 발견하고는 손에 든 걸 몽땅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빠르게 내게로 달려와 밧줄을 풀어낸다. 내가 힘들게 묶었던 매듭인데 민규의 손 안에서는 너무 단조롭게 풀려버린다.
 
  힘들게 묶은 매듭인데.
 
 
  민규는 밧줄을 다 풀어내고 나서야 다리에 힘이 풀린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나는 처음 보았다. 민규가 그토록 서럽게 우는 모습을. 커다란 눈물 방울을 소리 없이 뚝, 뚝 떨어뜨리며…, 우주가 무너진 듯이 운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얼굴을 하고서, 고급 정장을 빼입은 도련님이 고작 소매치기 한 명의 자살 기도를 목격하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나는 바닥을 적시는 민규의 눈물을 쳐다보다가, 현관 앞에 거꾸로 처박힌 생일 케이크와 그 옆에 흩뿌려진 수백 개의 맥주 사탕 더미를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내 시야도 뿌얘진다.
 
  힘들게 밀어냈는데.
 
 
 
- 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