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rd Meanie MAP/글

[라든] 내가 끝나고 당신이 시작된다

Monthly MW 2021. 1. 13. 23:43

주제: 리스본 로카곶

 

몇 번의 연애를 겪으면서 익숙해진 것은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별은 당연히 없었고, 서서히 식어간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였기에 남겨진 흔적들을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민규의 연애가 끝나는 이유는 모두 다른 말이었지만, 본질은 비슷했다. 선을 그어두고, 그 안으로 완곡하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 정신적으로도 그랬고, 물리적으로도 묘하게 정도가 있었다. 민규 스스로도 그러한 점을 알고 있었지만, 고칠 생각은 없다고 제법 단호하게 말하곤 했다. 너 그러다가 평생 연애 망친다, 라는 걱정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못 들은 척을 하는 민규에게 딱 하나, 자극을 줄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전원우였다.

김민규에게 전원우는, 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첫사랑’같은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첫사랑이 무덤까지 간다고 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처음이라는 의미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했지만 민규에게는 처음과 끝이 맞닿아있다고 생각했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둘은 연인 관계는 아니었다. 서로에게 안부 인사가 아닌 내용의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가끔은 데이트와 비슷한 시간도 보냈지만 둘은 서로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다른 누군가를 만나지는 않았지만 둘은 무언가 가벼운 사이라는 느낌을 씻어내지 못했고, 결국 원우의 한 발 빠른 졸업으로 둘의 관계는 어설프게 끝이 났다. 원우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누구에게도 연락을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여행을 다니면서 사는 것 같다고, 선배인 승철이 살짝 귀띔을 해 주긴 했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원우에게 민규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연락도 안 해? 의아함을 가진 질문들에 민규는 답을 하지 못했고, 최선의 방법은 자신도 원우를 잊은 것처럼 살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 이십 대의 절반을 같이 보낸 사람이었고, 어딜 가도 원우와 함께한 흔적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자주 깨닫게 되는 사실이었다. 차마 티를 내지는 못했지만 민규를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의 감정에 부응하듯, 민규는 조금씩 제 궤도를 설정했다. 늘상 오고 가던 집을 정리했고, 아예 처음인 것처럼 물건을 채워 넣었다. 행동반경을 한 번에 바꾸지는 못했지만 범위가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원우가 없는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질 즈음이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었고,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날씨 중에서도 유달리 서늘했던 것 정도가 기억에 남는 하루였다. 사실상 제 역할을 잃은 우편함에 무언가 꽂혀 있는 것은 그래서 더욱 눈에 띄는 일이었다. 밖으로 나올 듯 툭 꽂혀진 종이에는 외국의 어느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우편물을 받은 적도 손에 꼽을 정도인 데다가, 연락조차도 귀찮아서 하지 않는 민규에게 이렇게 애틋한 방법으로 연락을 할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다. 잘못 왔나, 싶은 마음에 살핀 수신인에는 제 이름과 집의 영문 주소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종이를 버리려던 손길은 그 글자를 확인하고서야 멈춰졌다. 김민규, 라고 적힌 한글은 하루에도 몇 번을 보고 쓰지만 유달리 낯설어 보였다. 아무렇지 않게 들고 온 것치고는 신경이 온통 그 종이 한 장에 갔다. 정리 좀 하고 읽어야지,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읽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이었다. 거실, 방, 부엌을 돌아다니면서도 시선은 늘 엽서를 올려둔 아일랜드 위였다. 이질적인 외국의 풍경을 몇 번을 본 후에야 민규는 비로소 엽서의 뒷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소를 제외하면 적힌 내용이 많지는 않았다. 날씨가 좋다! 라는 안부조차도 아닌 문장에 헛웃음이 샜다. 공을 들여서 보낸 것과 대비되는 내용은 허무할 정도여서, 괜히 기대했던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딱 한 번을 읽은 엽서를 들고 고민하던 민규가 향한 곳은 제 침대 옆의 서랍이었다. 텅 빈 서랍 한 구석에 얌전히 놓인 엽서는 그렇게 한 장씩 늘어가며 서랍을 채우기 시작했다.



잊을 만하면 날아오는 엽서는 매번 다른 종류였다. 소인은 여러 나라의 것들이 뒤섞인 것처럼 보였고, 어지럽게 찍힌 도장들을 빼면 읽을 것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스마일 표시와 인사 따위의 짤막한 내용이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파악하기에는 어려웠다. 처음에는 적당히 먼 나라도 아니고, 직항마저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렇게까지 엽서를 보내는 이유가 뭘까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 답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낸 곳의 주소는 명확하지 않았고, 설사 알아낸다고 해도 찾아가서 무슨 이유냐고 묻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런 식으로 보는 것도 꽤 나쁘지 않다고, 민규는 벽에 꽂아둔 몇 장의 엽서를 보며 생각했다. 엽서의 종류는 벌써 제법 다양해진 상태였다. 주로 산이나 바다 같은 풍경들이었고, 가끔은 조각상이나 유적지 같은 곳들이 담겨 있었다. 자연스레 여행에 관심이 생긴 민규의 변화를 눈치 챈 것은 승철이었다. 너 여행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가볍게 물은 질문에 그냥, 자꾸 보니까 계획은 세우게 되네. 아무렇지 않게 한 말에 승철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집에 뭐 오냐, 요새?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민규가 승철의 표정을 살폈을 때, 그 표정에서 민규는 답을 읽을 수 있었다.

“너 알지.”
“뭘.”
“저거 전원우가 보내는 거.”
“…안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이제.”
“받기 싫으면 말해. 보내지 말라고 할 테니까.”
“형.”
“너한테는 연락처 안 알려 줘.”

그게 둘 다한테 나아. 단호하게 맺어진 말은 조금의 여지도 없는 것처럼 들려왔다. 전원우, 라는 이름만으로도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것도 재주라고, 민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진짜로 돌아다니면서 사는구나, 하는 확신이 생기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렇게 살지. 하는 생각은 꼬리를 물고 자신의 환경이 바뀐 것까지 이어졌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니까, 형이 밖으로 나가는 걸 수도 있겠다. 확신은 아니었지만, 괜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둘이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 어느 날에, 장난처럼 넘겨 읽었던 말이 있었다. 어떤 가수가 컴백을 했고, 그에 따른 흔한 인터뷰였다. 질문들은 뻔했고, 뒤로 나가려던 찰나 질문의 끝은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이라면, 무엇을 할 건가요? 라는 말이었다. 그 사람은 바다를 보러 가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외칠 것이라는 답을 했다. 민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말이었지만, 원우는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났다. 형도 이런 거 듣고 싶어요? 라는 질문에 내가 하고 싶어서, 라는 답이 돌아왔던 것도 같았다. 그럼 기다릴게요, 하는 말에 원우는 어떻게 반응을 했더라. 아마도 가볍게 웃었거나, 아무 표정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전원우는 그랬으니까.

잊고 살았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었고, 오늘이 그랬다. 새삼스럽게 이런 일이 왜 떠오르나, 싶었지만 촉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 도착한 엽서에는 십자가상을 배경이었고, 그 아래에 적힌 말은 세상의 끝, 이라는 스페인어였다. 익숙한 글씨체가 제법 길게 적혀져 있었고, 민규는 그 내용을 읽기 전에 호흡을 정돈해야했다. 끝이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든 끊길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상 그 끝을 마주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안녕, 으로 시작하는 엽서는 원우의 목소리로 읽히는 것처럼 들려왔다.

안녕, 여기는 세상의 끝이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뭘 할 거냐고 한 적이 있었지. 나는 그때부터 생각했어. 나한테 마지막이라는 때가 온다면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한 번도 제대로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너무 늦었지만, 세상의 마지막에서 너한테 전해 주려고 이렇게 쓴다. 사랑해,

채 마무리가 지어지지 못한 문장 뒤로 무언가 더 적혀 있을 것 같은 기분에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눈으로 아프게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이제 끝인가, 하는 마음에 한숨이 연신 나왔다. 이대로 끝인 걸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결론은 그 누구도 대신 낼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선택할 일이었고, 원우가 이렇게까지 했으면, 다음 행동은 자신이 보일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민규가 먼저 한 일은 승철을 닦달해 원우의 연락처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

원우가 자신의 연락을 받았는지, 민규는 알 수 없었다. 통보와도 같은 문자에 답장은 오지 않았고, 읽었다는 표시 또한 뜨지 않는 상태인 것을 보면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승철은 민규를 보내면서 한껏 좋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둘 모두를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민규는 승철을 탓할 수 없었다. 몇 시간을 비행기에서 보내고, 공항에서 또 몇 시간을 보내면서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자각조차 할 수 없었다.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일을 처리하면서도, 이게 맞나, 하는 의구심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다. 이성은 그렇게 말해도, 본능이 보고 싶다고 하는 것을 이길 수는 없었다.

세상의 끝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칠레를 세상의 끝이라고 하기도 했지만, 원우가 엽서를 보낸 장소는 포르투갈의 로카곶이었다. 이름마저도 생소한 곳이었지만, 대서양의 끝을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원우의 선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 장소로 찾아가는 일이었지만, 꽤 유명한 곳이라 찾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한국과는 다른 여유로움이 비로소 외국에 나왔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는 정도였다. 다들 별다른 재촉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과 달리 민규는 제법 초조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몇 개의 연락이 깜빡거렸지만, 여전히 원우의 답은 없었다.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 동안에도 내내 핸드폰은 조용했고, 사람들은 가까워지는 바다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대충 내리라는 뉘앙스를 보이는 기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민규의 앞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저도 제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북극이나 남극은 아니잖아. 그런 데는 추워서 못 가겠더라. 실없는 소리를 하던 원우의 시야가 달라진 것은, 민규가 원우에게 가까워진 것과 동시였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조용히 속삭인 목소리가 같은 값으로 돌아왔을 때, 그제야 민규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멀리 갔네요.”
“그래도 아예 못 들어본 곳은 아니잖아.”

품에 안겨서 얼굴도 못 들고 있으면서, 한 마디도 빼먹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민규가 한 발짝 물러서자 손을 잡아오는 것은 원우였다. 이미 오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덕분에 해가 지기 시작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에 사람들은 연신 사진을 찍느라 바빴지만, 둘은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같은 곳을 바라봤다. 저 십자탑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 줄 알아? 원우의 조용한 질문에 민규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 낯선 발음을 쏟아내는 원우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자 천천히 뜻을 알려 주었다. 내가 끝나고, 당신이 시작된다.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다소 힘든 문장을 입 속으로 되뇌며 하던 생각을 끊은 것은 원우의 말이었다.

나는 그랬어. 세상의 끝이 어딜까, 생각을 해 봤는데. 여기도 끝은 아닌 것 같아. 그냥, 너랑 등을 돌린 거기서부터 내 세상의 끝이더라, 민규야.

그러니까, 내 끝이 곧 너의 시작이니까, 떨어지지 말자. 사랑해.










* 후기 *


좋은 날에 좋은 글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