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봄과 여름, 그 사이/글

[세균] 나의 계절

Monthly MW 2021. 1. 13. 23:28

1.
 
민규는 여름이 좋았다. 왠지 서늘해 보이는 등과는 대조되게 땀에 살짝 젖은 하복 상의에, 끝이 살짝 젖은 머리칼. 덥다고 찡찡대면서도 절대로 반바지는 입지 않는, 그렇게 숨겨도 보이는 발목이나 목언저리, 팔뚝은 새하얀데도 그 눈만은 새카맣고, 깊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만지고 싶어서 견딜 수 없고. 그런것들이 유독 여름에만 그런게 그가 여름에 태어나서 그런가, 내가 홀린 건가.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해답을 찾고 싶지 않은 걸지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2.
 
민규야.
 
창문에서는 덥게 내리쬐는 햇볕에 익숙해져 갈 즈음, 원우가 잠에서 깼는지 나른하게 민규를 불러왔다. 그 잠깐의 목소리의 취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 곧 뒤를 돌아 시선을 마주해왔고, 또, 또 그 눈동자에 취해가는 기분이었다. 온몸을 휘감아서 그대로 포로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원우가 그랬다. 항상 아무렇지 않은 척 원우의 젖은 머리칼을 만지면 덥다고 칭얼대는 목소리가 들렸고, 목덜미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민규의 손을 축축하게 만들었지만 모순적이게도 원우의 목이 시원했기 때문에 딱히 상관없었다. 그렇게 방금 전 까지만해도 별로 덥지 않았건만, 원우가 고개를 돌려 민규의 손에 원우의 숨결이 닿자, 닿은 손으로부터 시작해서 열이 올라오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됐고, 손길을 거두자 원우가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민규야 계속 만져줘.
 
민규는 거절 할 수가 없었다.
 
3.
 
원우는 더위를 잘 탔지만, 이상하게도 몸에 열이 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차가우면 차가웠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땀을 닦아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자고 일어나면 꼭 먼저 저의 이름을 불러왔다.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칭얼대며 원우가 먼저 반응을 보내왔고, 그런 원우에게 머리를 만져주는 것으로 원우는 만족했다. 민규는 그런게 좋았다. 묘한 정복감, 원우는 저가 없으면 안될거라는 지배욕, 정작 원우가 없으면 죽어나갈건 자신이였건만,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원우에 대한건 자신이 제일 처음이였으면 하는 욕구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 까만 눈을 보면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원우의 부탁을 전부 들어줄 것이 뻔하지만, 민규는 생각했다. 이 세상 누가 원우의 눈을 보고 원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4.
 
민규야 나 체육복.
 
민규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목을 한참 덮는 동복 체육복바지를 접어 올려주었다. 큰 키와는 다르게 마른 몸이 부각되듯, 얇고 새하얀 발목이 드러났고, 민규는 그 발목을 보며 묘한 패티시에 휩싸였다. 한번쯤은 부러트려 보고싶기도 한 그런 가학심을 일으키는. 곧 쓸데없는 생각이란 걸 안 민규는 생각을 접고 원우를 데리고 강당으로 가자, 바로 민규의 무릎에 누워오는 원우의 발목과 머리칼을 번갈아보고는 익숙하게 머리칼을 괜히 베베꼬면서 장난을 쳤고, 원우는 간지럽다며 갸르릉 거렸다. 민규는 그런 원우를 보며 기분좋게 원우를 쓰다듬었고, 원우도 눈을 뜨고는 드물게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원우의 그 미소는, 정말 정말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그런 미소였기 때문에 민규는 그런 원우가 좋다는 감정이 순간적으로 벅차오를 만큼 좋아서, 원우가 눈치재지 못하게 이 감정을 밑바닥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아직은 너무 소중해서 안 된다고 스스로 자제하고는.
 
5.
 
원우는 자신의 살갗이 드러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여름에 반팔은 입지만, 그마저도 싫을 때는 얇은 카디건을 입고있을때도 있었고, 그때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덥다고 민규에게 찡찡댈때는 민규만 고생이였다. 부채질을 해주고 있으면 원우는 이럴 때 에어컨도 안틀어주냐며 학교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지만, 민규는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기에 설렁설렁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그 덕분에 하얀 원우의 팔뚝을 조물조물 만져대며 원우야 그래도 에어컨 들면 내가 부채질도 할 필요도 없고, 원우는 민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싫어. 민규 부채질 받고 싶은뎅. 하고 말을 자르며 민규의 볼을 콕콕 찔렀다. 민규가 의아해하며 왜? 하고 물어보자 느릿하게 눈을 뜨며 시선을 마주하고는 말했다. 민규가 좋으니깐. 애매하게 말하고는 금방 또 느릿하게 눈을 감아버리는 원우의 말에 누군가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6.
 
원우야 나는 여름이 제일 좋아
 
니가 태어나서 그런가봐. 그 말에 원우가 눈을 떴고, 민규는 별 생각없이 한 말에 원우의 머리를 손가락에 평소와 같이 돌돌말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답을 바랬던게 아닌 듯, 의미없는 행동을 어쩌면 의무적인 행동을 계속하고 있을까, 원우는 손길을 받으며 곧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 초점없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곧 민규와 눈을 맞추며 천천히 입을 뗐다. 민규야 나는 봄이 좋아. 네가 태어나서 그런가봐. 민규와 똑같은 말을 하며 입을 뗐다. 그리고는 코를 찡긋거리며 어때? 하고 물었고, 민규는 그 보기 드문 웃음에 저도 같이 웃어버리며 저 감정 밑바닥 언저리에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을 풀어 헤치기로 했다. 원우는 그 감정을, 민규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
 
+7.
 
내가 원우를 언제 만났더라, 아마 중3때. 그때도 여름이였네. 내가 농구시합 끝나고 교실에 갔는데, 누가 혼자 자고있는거야. 그때가 방학전이였거든 그래서 야자도 안하고 매일 일찍 끝내줬었는데 6시에 혼자 자고 있는게 말이돼? 좀 당황해서 누구지? 하고 깨웠는데, 얼굴도 하얗고 땀이 흥건하길래 탈진한건줄 알고 놀라서 119 불러야하나 싶어서 휴대폰을 찾는데 그때 소란스러웠는지 깬거야. 그 특유의 몽롱한 눈으로 나를 딱 쳐다보는데, 다 상관없었어. 그때부터 구속됐나봐. 다음날부터 내가 머슴자처하고 쫓아다녔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