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르몽] Havana
①24, 25
“나 왔어.”
“으응, 늦었네.”
“마감이 슬슬 다가와서 은근히 쪼네, 먼저 자, 씻고 잘게.”
“잘 자.”
“형도.”
내가 24, 형이 25, 접점 하나 없던 우리는,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만나 2년의 연애 후 동거 4년째, 오래됐다면 꽤나 오래된 커플이었다, 애초에 뭐 그리 불타오르는 청춘의 사랑 같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심심한 내 인생 중 가장 굴곡 있었던 시기를 고르라면 단연 연애초기를 뽑을 것이다. 천성이 안전제일인 나와 원우형은, 우리에게는 상당히 큰 일탈이었던 3박4일 여행을 실행에 옮겼고, 당연히 첫 경험도 서로였으며, 혼자 사는 삶이 너무도 익숙했던 우리는 동거라는 굉장한 선택지를 고르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의 선생이자 존경하는 대상이었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를 과거형으로 썼다고 지금은 아닌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잘 모르겠다.’ 이다. 서운하다 느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어느새 각자의 일이 생기고, 자연히 서로가 좋아했던 서로의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다. 내가 사랑하고 동경했던 형의 첫 모습은 책에 푹 빠져 있던 모습이었다. 책을 읽을 때는 주변에 누가 있든 의식 자체를 못했다. 형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면, 살며시 옆에 앉아 그 모습을 지그시 쳐다보곤 했다.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형은 나를 의식하지 못한 채 책에만 집중했고, 나는 그 열정적인 표정을 감상하며 즐거워하곤 했다. 때문에 지금의 이유는 단순했다. 형의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꽤나 서러웠다. 물론 내가 바라는 형의 모습에 형을 맞추고자 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건 형도 마찬가지였다. 저를 쳐다보는 눈이 참 진정성 있다고 쉴 새 없이 말하곤 했던 형이었다. 다만 지금은 서로가 일에 치여 여유롭게 서로를 바라볼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가끔은 우리가 지금 사랑을 하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서로가 너무 지쳐서, 서로에게 애정을 쏟을 힘이 없어진 건 아닐까, 우리가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게 맞을까.
곧 최종 교정이 끝나면 지옥 같았던 [온 가족이 읽는 세계사] 5편은 인쇄소로 보내지고, 그에 맞춰 10일이라는 황금연휴가 주어진다. 입사 후 이렇게 긴 휴가는 처음이다. 들뜨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우형과 단 둘이 있을 연휴를 생각하면 들뜨는 감정 이면에 드는 답답함도 올라왔다. 그러고는 곧 자괴감에 빠진다. 나는 더 이상 형과 있는 게 즐겁지 않은가? 내가 가져야 하는 형을 대해야 할 마땅한 태도의 부재, 머리가 아파와 눈을 감았다.
형은 2주 전에 다니던 증권사를 그만 뒀다. 원래부터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어 했던 형은, 작가는 아니어도 문학 평론가나 잡지사, 출판사에 취직하는 걸 꿈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공부도 잘하고 싹싹한 형을 두고 형의 부모님이 가만히 계실 리 만무, 경영학과에 진학해 울며 겨자 먹기로 증권사에 취직한 형이었다. 당연히 적성에 맞을 리가 없었고, 그렇게 꾸역꾸역 다니다 결국에는 사표를 내고 말았다. 집에는 아직까지 비밀로 하고 있고, 왜 그만두었냐고 물으니 이젠 진짜 책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다며 푸념을 했다. 그 때마저도 나는 이렇다 할 위로한 마디도 제대로 못해준 듯하다. 형의 결정에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고 격려와 위로의 말을 해주지는 못할망정, 듣는 순간 떠오르는 월급 생각에 나 자신에게 환멸이 나 고개를 돌렸었다. 형의 책을 사랑하는 모습을 사랑했는데, 지금은 저렇게 이상적인 얘기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내가 격렬하게 모순적이었다.
“우리 쿠바 가자.”
“쿠바?”
“응, 쿠바.”
내 마감이 끝나면 쿠바를 가자고 한다. 이렇게 본인의 의사를 먼저 표출하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특정한 목적지를 정해 가자고 말하는 것도 처음이라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준비는 내가 할게, 나랑 같이 가기만 해주면 안 될까? 라고 물어오는 형의 지나치게 낯선 모습. 잘 그려지지 않는 형과의 긴 쿠바로의 여행.
“쿠바 어디를 가고 싶은데?”
“사실 쿠바 자체라기보다는,,, 아바나에 가고 싶어.”
“아바나? 쿠바 수도가 거기지 아마?”
“맞아, 그런 것도 알고, 역시 민규 똑똑하네.”
“참 나, 무슨,,,”
“진짜야, 민규 똑똑해.”
②<노인과 바다>
형을 처음 본 건 군대를 마치고 3학년으로 복학했던 24살의 학기 초였다. 몰려올 취업 부담에 기대보다는 걱정이 많았던 당시, 아침 일찍 레포트나 마무리할 작정으로 학교 도서관에 들렀고, 거기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원우 형을 보았다. 그 모습이 흡사 한 마리의 학 같이 고고하고 순수해서, 차마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했던 그 날. 나중에 물으니 그 때 읽고 있던 책은 <노인과 바다>라고 한다. 이미 족히 수백 번은 읽은 책이라서, 그 때 멍하니 서서 저를 쳐다보는 키 큰 누군가를 인지하지 못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다행이겠지, 형이 나의 존재를 알 수 있었던 건. 아무튼, 그 정도로 형은 <노인과 바다>를 좋아했다. 오죽하면 나 역시 10번은 넘게 읽어 책 내용을 술술 꿰뚫고 있겠냐는 말이다. 심지어는 부끄럽지만 형이 애가 닳도록 읽는 책에 질투 비슷한 감정도 들어 왜 그렇게 그 책이 좋아? 라고 물으면
“그냥, 외롭지 않았을 것 같아서.”
그 주체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책의 주인공인 산디아고가 그렇다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아이가 떠나고 외로울 법도 했던 그가 물고기와 상어와 싸우며 외롭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어쨌든 형의 생각이니까, 굳이 더 캐묻지도 않았다.
첫 눈에 반했다, 라는 표현과, 서서히 삶에 스며들었다, 라는 표현이 둘 다 성립되는 게 형을 만난 내 느낌이었다. 내 입학과 동시에 군대를 간 형은, 내가 군대를 감과 동시에 제대를 해 복학했다고 한다. 국어국문학과인 저와 경영학과인 형은, 건물도 다르고 겹치는 수업도 없었지만, 계속해서 도서관에서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형의 책을 읽는 모습이 참 좋았다. 차가운 듯 책에만 시선을 주는 내리깐 눈빛.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 오롯이 형만이 존재하는 우주를 보는 기분. 형의 그 미지의 눈빛을 볼 때면 가슴이 벅차올라 간질거렸다.
“출국까지 1시간 반 좀 덜 남았네, 서둘러야겠다.”
“그러게, 출근시간 겹치겠다.”
워낙 유명한 책이었기에, 그 뒤로도 많은 재판본이 나왔지만, 형은 본인이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사서 본 책을 고집했다. 양장본이어서 그나마 너덜너덜하지는 않아 망정이지, 어딜 가나 그 책을 꼭 가지고 다녔다. 나는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내용이었다. 도리어 비현실적인 물고기의 싸움이 심기를 건드리기나 하고. 하지만 형이 좋아하는 작품이라는 이유로 나도 참 열심히도 읽었었다. 이 책 읽으면 형이 조금이라도 내 생각해줄까, 하고.
그런 생각을 한 예전의 나도, 형도 귀여워져 피식, 웃음을 흘리는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금방 다시 운전에 집중하는 형이다. 무슨 좋은 생각 해? 그냥, 형이랑 어디 여행가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싶어서. 언제더라, 재작년에 제주도간 게 마지막 아니야? 맞아, 그 때도 겨우 월차 껴서 부랴부랴 갔다 왔지. 이제 형 일도 없으니까 주말에 놀러 다니기는 편하겠다. 그거 비꼬는 거지? 나 빨리 백수 청산하라고. 하하, 반쯤은 맞아.
“맞아, 왜 아바나에 가고 싶은지 내가 물어봤나?”
“그냥,,, 낭만적이잖아, 쿠바 자체가.”
“하긴, 거기는 그냥 걸으면서도 춤추고 노래 부른다며.”
“해변에서는 바람 불면 파도가 부서진대.”
“파도가 부서진다는 게 무슨 소리야?”
“진짜, 말 그대로, 파도가 바람에 밀려서 부서진다고 하더라.”
오오, 하는 소리를 내며 신기해했지만 의아함도 들었다. 형이 그런 낭만을 좋아했나? 춤추고 노래하는 걸 평생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런 점 또한 우리 둘의 공통점이었는데... 또 시작된 삽질에 한숨을 쉬고 창밖을 응시했다. 차들이 많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의문이 저 차들처럼 머릿속에 돌아다닌다. 붕붕.
“참 예쁠 거야, 그치?”
“그렇겠다.”
③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공항에서 아바나로 가는 택시 안에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가자는 형의 말에 그러자고 흔쾌히 동의했다. 광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어도 저도 감동적으로 봤던 영화였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추억이 될 것 같았다. 매주 수요일 8시에 정기공연을 한다며 조잘조잘, 조금은 들떠 보이는 형이었다. 칵테일과 주전부리를 시키고 연주에 집중했다. 영화에서 들었던 음악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다채로운 음악이 퍽 좋게 다가와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할 수 있겠다. 형을 쳐다보니 연주중인 그들을 집중해서 쳐다보는 게 마치, 아주 잠깐이지만, 24살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에 괜히 심란해졌다.
고개를 까딱 거리며 음악에 심취한 형을 보며 주문한 칵테일을 들이켰다. 다시금 형과의 관계를 생각했다. 우리, 이렇게 여행을 와도 괜찮은 사이인걸까? 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저를 따라다녔다. 그래도, 지금의 형은 참, 예뻤다. 살며시 손을 뻗어 식탁 위에 올라와 있던 형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저를 보고는 천천히 내 손가락을 움켜쥐는 형의 모습에,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래, 지금 이 순간이 좋으면 된 거 아니겠어. 형이나 나나, 어쩌면 이런 여유가 좀 필요했는지도.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구성원들의 과거를 찾아보니, 밀려나고 치이고, 참 힘든 삶을 살아왔구나, 싶었다. 그러자 또 궁금해졌다. 형이 이 영화를 좋아했었나? 혹은 이 음악을 좋아했을까? 영화는 몰라도 음악은 형의 취향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형에 한해서는. 음악 자체를 그다지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내가 아는 형은 어디까지지? 형이 변화하는 과정을 느낀 게 언제더라,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그 전환점에 싱숭생숭해지는 기분이었다.
체크인을 위해 거리로 나오니 정말 사람들이 춤을 추며 길을 걷고 있었다. 신기한 그 풍경에 사람들의 춤추는 뒷모습을 카메라로 찍었다. 낭만의 거리 어쩌구 하는 거, 정말 내 취향 아닌데, 막상 그 가운데에 들어오니 마음이 들뜨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형도 마찬가지인 듯, 방금 연주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듣는 형의 콧노래에 시원한 밤공기가 참, 뭐라고 표현할까, 뜬금없지만 아름다웠다. 가장 낯선 거리에서, 가장 익숙한 형과, 조금은 소원해진 서로지만, 그래도 아마, 아마도, 여전히 사랑하는 연인.
“형.”
“응?”
“우리 손잡자.”
“푸흐, 그래, 아는 사람도 없는데.”
24살의 가을,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고백에 성공했고, 도서관에서의 첫 만남을 기리기라도 하듯, 처음 손을 잡은 장소 역시 도서관이었다. 아무도 없던 새벽의 도서관. 가만히 손을 맞잡은 채 책상에 엎드린 채로 서로의 눈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무런 말없이 눈으로만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어린 날의 우리. 그 때 맞잡은 손이 얼마나 떨리던지,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황급히 손을 뗐고, 땀범벅이 된 손 탓에 웃음을 참으며 화장실로 갔던 그 때. 지금, 마치 그 때의 우리로 돌아간 듯, 어색해하며 겨우 손을 맞잡은 우리는, 왠지 모를 민망함에 서로 밤하늘을 쳐다보며 걸었다. 발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건드렸다.
“민규야.”
“응.”
“나 지금 되게 행복하다?”
“...뭐가?”
“그냥 다. 다 좋네, 여기는.”
“나도 그래. 진짜로.”
일단은, 행복하잖아.
④딸기와 초콜릿
우리가 묵기로 한 숙소는 아바나의 베다도. 굳이 이곳을 고른 이유가 있냐고 물으니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는 다소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코펠리아(copellia) 아이스크림이 베다도 지역에 있다는 이유였다. 참 형답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펠리아 아이스크림은 쿠바의 명물이라고 한다. 형의 말을 빌리자면 이해할 수 없는 인기를 끄는 아이스크림 가게라고 한다. 가운데 스탠드를 두고 호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이 들려고 할 때, 형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딸기와 초콜릿이라는 영화 알아?”
“아니,,, 처음 들어봐.”
“그게 쿠바 영화거든.”
“응.”
주인공은 이성애자야, 근데 걔가 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동성애자를 만난다? 응. 그 가게가 내일 갈 코펠리아 가게야. 아아. 그 때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사면 동성애자라고 그랬대. 굳이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있는데 딸기 아이스크림을 골랐다고. 그게 왜 동성애자라는 소리야? 나도 몰라, 그만큼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소리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네. 어차피 차별하면 안 된다고 백날 말만 하지,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에헤이, 또 거기로 샌다. 이제 진짜 자자, 응?
알겠어, 잘 자, 민규야.
형두, 좋은 꿈 꿔.
오전에 도착했음에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앉아서 먹지 못할 수도 있으니 빨리 자리를 잡으라는 형의 말에 줄을 빠져 나와 자리를 잡고 형을 기다렸다. 태양이 내리쬔다는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리는 날씨. 틈틈이 보이는 춤을 추며 걷는 사람들, 그 모습이 정말 신기해 미소가 지어지지만, 이 또한 이 곳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인데, 너무 웃는 건 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좋다, 이 여유로움이. 카라티의 단추를 하나 더 풀고 테이블에 털썩, 엎드려 금속의 시원함을 느꼈다. 숨 막히던 서울 구석을 벗어나 이렇게 늦은 오전 가만히 아이스크림을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바랐던 소소한 행복임을. 그리고 어쩌면,
“자, 바가지 씌운 거 같긴 한데, 좀 당해주지 뭐.”
“딸기 맛 사왔네? 그 영화 때문이야?”
“응, 우리 사귀는 거 티 좀 내려고.”
“어이구, 싱겁기는.”
전원우라는, 이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도. 그 행복의 하나였음을.
여기는 인사말이 뭐야? 올라. 올라? 응, 발랄하게 올라! 하면 안녕이라는 뜻이래. 방금 귀여웠다, 한 번만 더 해봐. 먹기나 해, 녹기 전에.
지금과 같이 햇살이 쨍쨍하던 한여름. 둘이 처음 놀이공원을 갔었다. 나도, 형도 놀이공원이라는 곳과는 전혀 상성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친구들과 억지로 한두 번 와보기나 했지, 이렇게 자의로 사람이 바글바글 거리는 곳에 온 건 처음이었다. 몇 개 타지도 않고 지쳐버린 우리는, 실내에 들어가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 때도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 자리를 잡았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이렇게 활동적인 곳에 나온 것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형과 함께 도서관이나 학교 밖으로 데이트를 하는 것 역시 처음이었기에 무척이나 긴장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 때도 형은 줄을 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 왔다. 자기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나는 초코 아이스크림.
“왜 나는 초코에요?”
“우리 피부 색.”
“...”
“왜, 까만 피부를 욕으로 생각하지 마, 그거 인종차별이야.”
“아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나는 네 피부가 어두워서 더 좋은데.”
그 발상이 너무 귀여워서요, 라고는, 끝내 말하지 못했던 그 때였다.
“근데 왜 더 좋아요?”
“섹시하잖아.”
오늘은 그냥 거리나 구경하려고, 괜찮아? 응, 나는 다 좋습니다. 아이스크림은 어때? 그냥 아이스크림 맛인데? 역시 그렇지? 하여튼 브랜드 네임이라는 게 참. 여기는 뭐 특산품 같은 거 없나? 아, 쿠바가 시가 본고장이잖아, 너 몇 개 사가라. 뭐야, 그렇게 끊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여기서는 봐줄게, 잠깐 골초 해도 괜찮아.
⑤Why
결국 손에 시가 몇 개비를 집어 들고 호텔 베란다고 나왔다. 직장을 다니며 자연히 시작하게 된 담배는, 담배를 혐오하는 형의 끈질긴 노력에 아주 가끔, 정말 힘들 때나 한 두 개비 정도를 피는 정도로 자제하게 됐다. 담배를 꼭 힘들 때만 펴야 하나, 이렇게 기분 좋은 순간에 피는 담배도 나쁘진 않지. 불을 붙여 입에 가져다 대니 훅, 들어오는 강함에 잠시 당황할 정도였다. 원산지 시가 자체의 독함과 더불어 담배 자체도 굉장히 오랜만에 피는 터라, 이 텁텁함이 익숙하지 않았다.
솔직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형과 함께 하는 여행이, 이렇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은 채로. 정적이고 차분한 형과 나의 성격과는 상반된 흥겨운 이 쿠바로 여행을 가자고 형이 먼저 제안을 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어쩌면 형도 느꼈을지 모른다. 우리의 관계에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어떻게 보면 위기일 수 있는 우리의 상황.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 지, 각자의 일상이 너무 힘들어 서로가 지쳐있던 것인지. 따지고 보면 6년 째 얼굴을 보며 사귀고 있는 사이다. 1, 2년 전부터는 사실 얼굴을 본다고 말하기도 뭣할 만큼 서로가 일이 바빴고, 서로를 챙길 기력도 없었다. 아니, 다 핑계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애정이 식었다는 두려운 명제에 대한 합리화일지도. 권태기란 늘 그랬다. 결국 사랑과 애정의 부재를 서로의 탓으로 돌리거나, 그게 아니라면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작업들의 반복. 물론 외부의 요인을 배제하지는 못하겠지만, 근원적으로는 각자의 탓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국문학도임에도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저는, 동성애자인 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사실 잘 그려지지 않았다. 결혼은 둘째 치고 누군가와 결혼을 생각할 만큼 사랑하는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에 대한 의문. 다행히 그 의문은 형과 만나는 과정에서 불식되었지만, 지금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그 연장선이 아닐까? 어쨌든 그만큼 형에 대한 나의 믿음은 확고했고 정말로 사랑했으며, 진심으로 존경했다. 형을 향한 나의 마음 역시 온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서로 그러자고 다짐했었다.
“형, 나중에 제가 지겨워져도, 그거 다 착각이니까 빨리 돌아와야 돼요?”
“너나 잘해, 나 싫다고 차지 말고.”
“아이, 그럴 리가.”
“참 나, 왜 그렇게 확신해? 사람 일 아무도 모른다?”
“몰라요, 저 원래 이런 거 확신 잘 안하는데...”
“...”
“그냥, 왠지 형이랑은 그럴 것 같아서, 확신이 들어요.”
그 당차고 어린 생각에 또 씁쓸해져 다 핀 시가를 구겨 밟았다. 형은 스탠드를 켜고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형은 책을 읽은 때는 꼭 안경을 썼다. 형을 닮은 은색의 동그란 안경. 책을 읽는 모습도 오랜만이었다. 형이 책을 보는 모습이 오랜만이라는 거, 지금까지 진짜로 형이 책을 읽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 그 정도로 형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은 마음에 옆 침대에 누워 형을 지그시 바라봤다. 형은 또 나를 의식 못하는 듯 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익숙해 입 꼬리가 올라갔다. 아, 책 표지를 보니 <노인과 바다>다. 에이, 그러면 내가 보는 거 다 알겠네. 싶어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가이드님, 내일은 어디를 가나요?”
“내일은,,, 꼬히마르라고, 좀만 가면 있는 어촌마을이야.”
“어촌마을? 형 해산물 못 먹잖아.”
“헤밍웨이가 거기서 이 책 썼거든.”
“<노인과 바다>를? 아, 형 그럼 그래서,,,”
“그게 쿠바 오자고 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고, 그래도 상당 부분은 그거 때문이긴 해.”
“대박, 열혈 팬이 드디어 작가 고향까지 오는구나. 헤밍웨이 덕질의 끝이군!”
근데 그럼 가서 형은 뭐 먹어? 나는 너 먹는 거 구경할 거야, 난 아직도 너보다 맛있게 밥 먹는 사람 못 봤어. 또 부모님 같은 소리, 형 진짜 어떡할 거야, 나 혼자는 못 먹어. 헤밍웨이가 이 책 쓴 술집이 있대, 거긴 뭐 먹을 거 있지 않을까 싶네. 하여튼,,, 잘 자, 헤밍웨이 덕후씨. 푸흐, 너도.
“형, 솔직히 말해줘요.”
“뭐를?”
“내가 좋아요, 그 책이 좋아요?”
“파하하, 진지하게 묻지 마, 웃기니깐.”
“진짜 진지해요, 나랑은 이제 겨우 1년 봤는데, 얘는 10년이나 같이 있었잖아요.”
“야, 무생물이랑 너랑 비교를 하고 싶어?”
“그러면,,, 헤밍웨이랑 나랑은!”
“아 진짜, 야, 이런 수준 낮은 대화를 지금 너랑 내가 이 나이 먹고 해야겠냐고.”
“아 왜 대답 안 해줘요, 내가 지금 자존심 다 내려놓고 묻는데.”
“지금 너 너무 귀여우니까 너로 할 게.”
“엥, 그러면 내가 안 귀여우면 헤밍웨이에요?”
“너 맨날 귀여워서 맨날 너다. 됐냐?”
“좋아! 바로 그거에요! 내가 원하던 대답!”
⑥Havana
차에서 내려 바닷가로 나오니, 정말 파도가 철썩,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람이 조금 세게 분다 싶으면, 철썩, 태양빛에 반사돼 반짝이는 물빛까지. 왜 파도가 부서진다고 하는 지 단박에 이해되는 끝내주는 경치였다. 형도 그 모습이 새로운 건지, 혹은 형이 그토록 사랑하는 헤밍웨이의 고향에, 그것도 <노인과 바다>를 쓴 장소에 온 것에 대한 감회가 남다른 건지, 방파제 위에 올라가 파도치는 걸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바람에 하늘색 와이셔츠가 날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카메라를 들어 한 장, 정성스레 조준해 찍었다. 셔터 소리에 나를 쳐다보는 형을 또 한 장. 냉큼 방파제에 내려와서 사진 찍기를 거부하는 형의 모습에, 사진 찍히는 거 싫어하는 건 25살의 그 때와 참 변함없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왜, 그림 좋았는데. 너나 찍어 줄게, 저기 서 봐.
“하나, 둘, 셋.”
“형은 못미더워서 내가 검사해야 돼. 보여줘.”
“야, 원래 모델이 잘나면 어디서 어떻게 찍어도 다 잘 나와.”
“그거 나 잘생겼단 소리야?”
“객관적으로 맞잖아, 너 잘생긴 거.”
“그건 맞지, 잘 찍었네!”
“푸흐, 무슨 말을 못해요.”
계속되는 파도와 춤추며 걷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조금 걸으니 헤밍웨이의 단골 레스토랑이자 술집이라고 하던 라 테레사(La Terraza)가 나왔다.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없어 놀란 나는, 형의 동태를 살폈지만 별다른 내색을 보이지는 않는 듯 했다. 오히려 사람이 없어 편하게 이 공간을 느끼는 듯, 입가에 완연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헤밍웨이가 앉았던 테라스를 따로 전시공간으로 설치해 놓았다. 형은 그 공간을 누구보다 진중하게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그 집중하는 모습이, 스물다섯의 형 같아 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 옆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형은, 정말로, 나를 의식하지 못한 채 전시된 테이블과 의자에 집중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형이 이토록 애정을 가지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본 건. 그 차가운 눈빛을 한 모습을 조용히, 셔터소리를 끄고 카메라에 담았다. 정말 집중한 듯 반응은 없었고, 녹슬어 고장이 난 듯 삐걱거리는 마음에 형을 뒤로 하고 자리를 잡아 앉았다.
무슨 기분일까, 형은. 형의 인생을 바꿔놓은 책을 쓴 작가의 단골 술집에 온 기분. 내가 형에게 헤밍웨이만큼의 영향을 준 사람인가? 주고 있는가? 줄 사람일까? 어느 것도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형에게 있어 어떤 존재였으며, 어떤 존재이고, 앞으로 어떤 존재로 형에게 남아 있을지. 아니, 남아 있기는 할지. 반대로 형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고,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로 남을지. 심란한 자문에 럼주를 두 잔 시켰다. 슬쩍 보니 가장 잘 팔리는 술이라고 하니, 형도 괜찮다고 해주겠거니, 하고.
“뭐 시켰어?”
“럼주 시켰어, 괜찮지?”
“응, 원래 그거 마셔보려고 했었어.”
“다행이네.”
“가만 보면 넌 맨날 내가 먹고 싶었던 거만 골라 시키더라, 하도 같이 있어서 그런가,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던 것도 다 맞추고.”
“,,,그래?”
“응, 나도 잘 맞추지 않아? 순댓국은 얼큰한 거, 부대찌개는 콩 많이.”
“,,,그러네, 형도 잘 아는구나,,,”
“뭐야, 반응이 다소 싱겁다?”
삶에 ‘익숙해진’ 관계, 혹은 삶에 ‘스며든’ 관계, 삶에 ‘지겨워진’ 관계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사실만 보자면 다를 것이 없는 상황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아 서로의 관심사도, 취향도, 습관도 아는 상황. 그 상황에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는 건, 결국, 나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내가 형과의 상황이 권태롭다고 느낀 건, 어쩌면 내가 그렇게 되고자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는 감동적이고 엄청난 축복을, 지겨운 관계로 치환해 지금의 관계를 만들어버린, 나의 생각.
“짠!”
“어, 어?”
“짠 하자고, 왜 계속 멍 때리냐.”
“어어, 나왔구나.”
챙, 소리가 유난히 달갑다.
헤밍웨이가 글 쓴 자리에 오니까 어때, 헤덕님? 헤덕이 뭐야, 설마 헤밍웨이 덕후? 응, 나 요즘 회사에서 아저씨 소리 들어서 연습하는 중이야. 그런 연습을 하는 것부터 넌 이미 늦었어. 역시 그렇지...어쨌든, 어떠냐구. 나? 좋지, 내 우상이 있던 곳에 온 거니까. 그렇구나. 무엇보다, 너랑 온 것도 좋고.
⑦Te amo
거기선 모두가 노랠 하고 산대요 부서지는 파도 앞에 살면서 가장 낯설은 도시, 가장 익숙한 그대와 어때요 멋질 것 같죠 여기선 다 못한 우리 비밀 얘기들 크게 나누면서 걸어 다닐래 이건 외워주세요, hola muchacha Hermosa(안녕 아름다운 아가씨) 아침마다 말해줘요 널 위해 한 잔, 날 위해 한 잔 늦은 저녁의 피냐 콜라다 웃어요 활짝, 예뻐요 찰칵 이 순간을 기억해Havana, you’re my Havana 그대의 미지의 그 눈빛 Havana, 언제나 설레는 그대의 존재는 날 꿈꾸게 해 너무 정신없이 바쁠수록 소중한 그대와 마주한 짧은 순간들 기다릴 누군가가 있는 하루는 행복해 반쯤은 들뜬 내 모습 햇살이 얼핏 달콤한 귤빛 오후가 떠날 마지막 순간 그대를 만날 준비할 시간 난 여행을 떠나요 그대는 나만의 휴식 고민과 걱정 사라지네 난 매일 저 멀리 떠나요 그대를 볼 때면
IU - Havana
골목 곳곳은 올드카들로 즐비했고,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활기찼다. 헤밍웨이 박물관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공식적인 일정은 모두 완료되었다. 저녁이 와 귤빛 하늘 아래로 탁 트인 바다가 아름다워 모래사장에 앉아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동네 구경 좀 더 하고 오겠다던 형은 츄러스 한 묶음을 손에 든 채 내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이게 500원도 안 한다? 짱이지.”
“여기서 살림살이 좀 사 가야겠네.”
26살의 나는, 운 좋게 꽤나 이름 있는 출판사에 취직을 성공했고, 형과 일본으로 3박 4일 여행을 떠났었다. 우리 연애의 2주년을 기념하는 의미, 내 취업을 축하하는 의미, 오랜만에 떠나는 둘 만의 여행에 더불어 그간 취업준비로 잔뜩 예민했었던 내 짜증을 다 받아준 형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떠난 여행이었고, 눈 내리는 삿포로 온천에서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회사생활에 대한 조언도 구하고, 지난 2년간의 우리의 추억을 곱씹어보며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던 다소 파격적인 제안을 했었다.
“형.”
“응.”
“우리 동거할래요?”
“동거?”
“응, 그냥 막 내뱉은 거 아니고, 되게 오래 생각했던 거.”
“...알지, 네가 그럴 성격 아닌 거.”
“굳이 안 받아줘도 돼요, 형이 싫은 동거면 그게 행복한 동거가 되지 못할 테니까, 동거가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서로 몰랐던 서로의 단점도 다 보일 거고, 형이 정말로, 정말로 나랑 동거하고 싶으면 하자고 해줘요.”
“으음...”
“...그치만, 맨날 생각했어요, 아침에 깨서 옆에 형이 있으며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리구 이제 나도 돈 버니까!”
“푸흐, 그래, 하자, 동거.”
“정말요? 조금이라도 억지로 하는 거면 진짜 그러지 말구.”
“나라고 그런 생각을 안 했겠냐. 나도 매일 생각했어, 너랑 같이 살면 어떨까, 하고.”
“...”
“네 말대로 동거가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십 몇 년을 떨어져 살다가 같이 살면 얼마나 서로 이해하기가 힘들까,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혀엉.”
“그래도, 그런 거 다 제치고 너랑 산다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
문득 떠오르는 그 때 생각에 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시 나를 한 번 흘긋, 쳐다보더니 츄러스 하나를 들어 내 입에 넣어준다. 설탕이 되게 많네...라며 중얼거리는 형을 빤히 바라보니 고개를 돌려 맞서 응시하는 형에, 하하, 너털웃음을 냈다. 동거, 서로에 대한 깊은 존중이 바탕으로 된 연인이어서 그런 지, 내 생각보다는 우리는 굉장히 순탄한 동거 생활을 이어갔다. 또 상상했던 동거에 대한 로망도 차근차근 하나씩 채워가며 말이다. 주말이면 오후가 돼서야 일어나 피자 한 판을 시켜 같이 거실에서 영화를 봤고, 일에 지쳐 집에 돌아가면 함께 욕해줄 누군가가 있었고, 서로 피곤에 찌든 날이면 서로 아무 말 없이 껴안고 잠들곤 했다. 형도, 지금 그 생각을 할까. 해가 점점 저무는 탓에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말없이 바다를 응시하는 형을 쳐다봤다. 오물오물 츄러스를 먹는 볼이 귀여워 손가락으로 볼을 쿡, 누르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곧 형도 내 볼을 손가락으로 조금 아프게 누르고는, 눈을 휘어가며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느꼈다. 결국 바뀐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존중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위해, 가장 중요한 애정을 잊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 여유가, 서로를 생각해볼 여유가, 우리를 돌아볼 시간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형을 사랑하고, 형은 나를 사랑한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여행 내내 계속된 질문의 대답을 얻은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에 다시 나에게 물었다. 김민규, 너는, 형을 사랑해?
응,
나는 형을 사랑해.
그 생각에 멍하니 형을 바라보는데, 내 볼에서 손가락을 떼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작은 선물상자 두 개. 아까 동네 둘러보면서 선물을 샀나보다, 싶어 내심 기대하며 무슨 귀여운 기념품일지 나름대로 추리를 시작했다. 바다를 보다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 손에 상자 하나를 쥐어주고는 단호하게 열지 말라며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민규야.”
“응.”
생각보다 진중한 형의 얼굴이 의아했다.
“너 우리 삿포로 갔던 거 기억나?”
“그럼, 온천에서 동거하기로 한 날인데, 기억해야지.”
“이제 와서 말 하는데, 나 그때 되게 감동받았었거든?”
“나야말로, 형이 받아줄지 사실 몰랐거든.”
“그래서 그 때 생각했었어, 다음번에 또 우리가 이렇게 여행 오면, 그 때는 내가 감동을 줘야겠다, 하고. 고백도 네가 하고, 같이 살자고 말하는 것도 네가 했으니까.”
“참, 무슨 그런 생각을, 내가 좋아서 한 제안인데 형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그래.”
“아냐, 생각해보면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 관계의 변화는 다 네가 만들어줬더라고.”
바닷바람에 형의 머리카락이 잔잔하게 휘날린다.
“형은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래서 이번엔 내가 먼저 우리 관계에 변화를 주려고.”
“그냥, 외롭지 않을 것 같아서.”
그때의 형의 말은, 어쩌면.
“그러니까, 민규야.”
형이, 형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응.”
‘hola muchacho hermosa’
“우리.”
‘te amo’
“결혼할래?”
fin.
* 후기 *
두 번째 합작 참여네요, 전작도 마찬가지고 이번 하바나도 마찬가지겠지만...나중에 보면 얼마나 부끄러울지... 아이유의 Havana를 듣다가, 그냥 막연히 민규가 하바나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생각이 났었어요. 너무 멋있지 않나요, 하얀 셔츠 팔 걷어 올리고 원두 내리는 카페 주인 민규.... 근데 그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카페는 나오지도 않는 이런 글이 되었고...(도대체 왜...)
제가 지금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그랬는지, 둘이 여행을 가는 내용을 쓰면서 제가 참 행복했어요, 민원이들이 어쨌든 어디로 여행을 간다니 너무 그림이 좋겠다... 싶어서 제가 실실 웃고... 마지막 프로포즈 이후에 추가로 내용을 더 쓰려다, 민원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고 싶었어요, 여전히 원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민규가 원우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프로포즈를 받는다면 어떨지, 물론 해피엔딩이겠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여러 가지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정말입니다...믿어주세요...ㅠㅠ)
어찌됐든, 이 후기를 쓰는 6월 말에도 이렇게 푹푹 찌는데, 원우 생일은 얼마나 더울지, 그 더위를 민원합작으로 불태워보아요 우리...! 냉 미남 원우야 생일 축하하고 앞으로도 쭉 쭉 민규랑 예쁜 연애해줘!! 이 글 읽어주신 민원러분들도 행복한 원우 생일 함께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민원아 아무쪼록 행복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