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d THEME PARK/글

[루시어]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Monthly MW 2021. 1. 14. 00:02

주제: 솜사탕

 


3월의 끝자락, 아직 바람이 조금 매서웠다, 봄노래가 실시간 차트에 슬금슬금 고개를 내보이곤 있지만, 아직 봄이라하기엔 일렀다. 항공점퍼만 입기엔 날이 많이 차서 꼭 감기를 일으킬 것 같았다. 허나 원우에겐 추위 따윈 느껴지지 않는 건지 발목까지 오는 까만 슬랙스에 까만색 줄무늬 셔츠, 그리고 그 위에 걸친 항공점퍼까지. 아직 줄지 않은 바람에 당당히 맞서는 원우였다. 아니, 어쩌면 원우의 마음은 이미 봄인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한국 땅을 밟았으니. 원우가 갑작스럽게 유학을 가고 다섯 달이 채 안되었다. 유학길에 오르기 전 고작 3개월 사귀고 생이별을 하게 된 민규와는 저번 달부터 연락이 뜸했다. 민규가 그 사이 원우를 이미 정리한 걸 수도, 민규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허나 연애 따윈 이번이 처음이고, 서툰 원우에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민규가 보고 싶어서 솜사탕이 그립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까지 대가면서 예정되어 있었던 1년의 반도 채 채우지 못하고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두 손 가득 1년을 예상하고 싼 집이 무거웠지만 원우의 발걸음은 솜사탕처럼 가벼웠다. 원우가 탄 택시가 민규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원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 서울냄새-, 서울냄새, 그딴게 맡아질 리도, 그런 게 존재할리도 없었다. 허나 원우의 코끝에서 뭉쳐진 기분 좋은 설렘과 짜릿하고 달콤한 향이 솜사탕처럼 달게 느껴졌다.

공원 옆 주차장, 택시에서 내린 원우가 트렁크에 가득 실어놨던 짐을 하나 둘씩 꺼내들었다. 양 손 가득히 짐을 들면서도 눈으로는 누군가를 계속 찾는 듯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민규를 찾는 것이었다.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단 한 번도 연애경험이 없던 원우에게 민규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5개월 동안 저의 애인을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려온 것으로도 모자라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유학의 꿈마저 접고 한국 땅을 다시 밟은 원우의 가슴이 쉽게 진정될 리가 없었다.

허나 당장이라도 민규의 집 앞에 가서 초인종을 눌러도 모자를 판에 원우의 발걸음이 공원 한쪽에 위치한 솜사탕 가판대 쪽으로 향했다. 솜사탕, 원우가 제일 좋아하는, 즉 원우의 최애음식이자 원우와 민규가 만나게 된 이유였다.

 

 

“2000원입니다-”

 

무더운 여름, 정확하게는 8월의 초였다. 민규가 솜사탕 판매원으로 일하는 놀이공원은 방학을 즐기러 온 어린아이들로 붐볐다. 민규가 이마에서부터 시작해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슥 닦고는 건너편 핫바 판매대 앞에서 뜨거운 불의 열기와 한 판 씨름을 벌이고 있는 친구 석민을 보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솜사탕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민규는 이미 SNS상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안다는 일명 솜사탕 존잘남으로 유명했다. 시험이 끝나는 시즌이 되면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민규를 보기위해 일부로 놀이공원을 찾을 만큼 민규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녀들을 상대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다고 민규는 늘 생각해왔다. 솜사탕을 건네면서 한 번 싱긋 웃으면 까르르-, 하고 좋아라하며 손에 든 핸드폰으로 민규의 사진을 찍었다. 가끔씩 받는 셀카 요청도 민규에겐 쉽기 만한 일이었다. 허나 8월의 상황은 좀 다르다. 손님의 대부분이 어린 아이들이고, 그들의 뒤에는 언제나 지독해도 너무 지독한 그들의 부모가 자리하고 있었다. 가끔씩 있는 실랑이에서 늘 머리가 아픈 쪽은 민규였다. 2000원이라고 크게, 엄청 크게 종이와 잉크를 낭비해 가면서 떡하니 붙여놓았지만 꼬마들의 부모는 늘 아이들에게 천 원짜리 한 장만을 건넨다. 치밀하고 대단한 계략이 아닐 수 없었다. 속이 다 보이는 계략에 늘 안절부절 못하는 건 민규였다.

 

“솜사탕 사려면 이거 두 개 있어야 되는데..”

“하나밖에 없는데..”

“엄마한테 가서 하나 더 주세요- 하고 다시..”

“으앙-”

 

여학생들이 분명 뻑간다, 라고 표현했던 달콤한 목소리와 젠틀함은 아이들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다. 최대한 착하게 말해도 잘만 터지는 울음보에 내가 울고 싶다, 라는 생각을 매번 하는 민규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심한 건,

 

“왜 남의 애를 울리고 그래요?”

“죄송합니다.”

“못 배운 티내기는..”

 

혀를 끌끌 차며 민규를 거침없이 까 내려가는 그들의 부모들이었다. 충분히 멘탈이 와르르 무너지고도 남았을 말들이었지만 이미 민규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끝도 없이 계속 몰려오던 어린애들을 상대하느냐고 지칠 대로 지친 민규가 멍하게 앉아 분홍색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통에 담긴 분홍색 설탕을 휘휘 저었다. 아무런 의미도, 결과도 없는 일이었다. 곧 자신의 운명의 상대가 찾아올 거라는 건 꿈에도 모른 채.

 

 

“혹시 장사 끝났어요..?”

“아, 아니요! 솜사탕 드릴까요?”

“분홍색으로 하나만 주세요.”

“네-”

 

이것이 바로 원우와 민규의 우연 같기도 하고 운명 같기도 한 첫 만남이었다. 하루 온종일 꼬마 손님들과 그들의 부모들 때문에 지쳐있던 민규에게 원우는 사막의 오아시스보다 더 달콤하게 다가왔다. 천 원짜리 두 장을 민규에게 건네고 분홍색 솜사탕을 건네받는 원우의 손이 희고 고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이 끝이 났다. 서로가 서로의 운명의 상대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둘은 각자의 길로 향해갔다. 이렇게 짧은 만남이 끝이었다면 지금쯤 두 사람은 생판 모르는 남이었겠지만, 하늘은 두 사람을 위해 한 번의 운명 같은 만남을 내려주었다.

 

“어? 여기 사세요?”

“아 네.. 그저께 이사 왔어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연인인데, 아니지 연인이란다. 인연! 인연인데 밥 한 끼 하실래요?”

“아 네.. 그러죠”

 

만약, 정말 만약에 저 당시의 원우가 민규의 당돌한 제안을 부담스러워 하여 하늘이 내려준 또 한 번의 운명이 물거품이 되었다면 하늘은 원우를 벌했을 것이고, 지금 원우의 발걸음이 솜사탕 쪽이 아닌 자신의 집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허나 저 당시 원우가 당돌한 민규를 호감으로 생각하고 그런 그의 제안을 수락했기 때문에 지금 원우의 발걸음이 솜사탕 쪽을 향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분홍색 솜사탕 하나만 주세요.”

“네!”

 

솜사탕 가판대 앞에 다다른 원우가 늘 그래왔듯이 솜사탕, 그 중에서도 분홍색 솜사탕을 주문했다. 양손에 가득 들었던 짐을 잠시 옆에 놓아두고 원우가 솜사탕 기계 안을 들여다보았다. 막대기에 설탕이 엉겨 붙어 솜사탕이 되는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예뻐 보였다.

 

“여기 주문하신 분홍색 솜사탕 하나랑, 김민규입니다.”

“보고 싶었어. 너도, 솜사탕도.”

 

민규, 민규다. 공원에서 솜사탕을 팔고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민규였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지만, 원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담담했다. 하나뿐인 저의 연인을 바라보는 서로의 눈빛이 솜사탕보다 달콤했다.

 

“되게 빨리 왔네요.”

“보고 싶어서 죽는줄 알았어.”

“나도.”

“그래서 배우던 거 다 접어버리고 여기로 온 거야. 너 빨리 보고 싶어서.”

“솜사탕이 먹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거야.. 네가 더 보고 싶었지.”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요. 아주 많이-”

 

솜사탕 가판대 옆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워내는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서로가 하는 말 하나하나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해보이며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아주 예쁜 한 쌍의 연인이었다. 서로가 좋아서 죽으려고 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수줍은 연인이었다.

 

 

“솜사탕 아저씨, 왜 내꺼는 작아요?”

“네꺼가 작은 게 아니라 수영이꺼가 큰 거야.”

“그러니까 왜요?”

“그야- 수영이가 예쁘니까-”

“권수영이요? 에이-”

“진짠데-”

 

민규네 솜사탕 가게의 단골 중의 단골인 7살 먹은 찬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 옆엔 원우의 오랜 친구이자 민규와도 친한 사이인 순영의 여동생 수영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원우의 말에 의하면 순영의 어린 시절을 보듯이 장난기가 가득한 찬이가 순영의 여동생인 수영을 자꾸 괴롭혀서 순영이 어쩔 도리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찬이와 수영이를 민규가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 같았다.

 

“너가 수영이 잘 놀아주면 너도 크게 해줄께! 약속!”

“체- 치사해..”

“뭐가?”

“아 됐어요! 얘 놀리지 말라는 거잖아요.”

“똑똑하네!”

“그럼 내꺼도 크게 해줘야되요. 알겠죠?”

“당연하지-”

 

능글맞음, 민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었다. 수영과 잘 지내라는 말을 저런 식으로 돌려 말하는 민규에게 항상 꼬리를 내리는 쪽은 상대방이었다. 언제 사이가 나빴냐는 듯이 손을 꼭 잡고 뛰어가는 꼬마 둘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민규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원우 쪽으로 다가갔다.

 

 

“솜사탕 줄까요?”

“아니-”

“웬일이에요? 솜사탕을 마다하고..”

“내일 치과가..”

 

원우의 말에 민규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원우 비로 옆에 바싹 붙어 앉은 민규가 원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글거리는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진짜 예쁘다.”

“아 왜 이래-! 갑자기-”

“아- 너무 예쁘다-!”

“뭐야-”

“좋아해요.”

“나도.”

“사랑해요.”

“나도”

 

예쁜 연인이었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말을 주고 받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