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d THEME PARK/글

[코코아] Last Carnival

Monthly MW 2021. 1. 14. 00:07

 

 

 

2017
 
 
화려한 폭죽이 터지는 밤, 형형색색의 옷을 걸친 여자들과 인형탈을 쓴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걸어간다. 하지만 모두가 의욕이 있지는 않았다. 사람이 몇 없어 축 쳐진 분위기는 밝은 음악으로도 바꿀 수 없었다.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은 몇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잠시 구경하다 자리를 뜨기 일쑤였다. 나는 탈에 난 작은 구멍 사이로 바깥을 보았다. 즐거운 음악이 흘러나옴에도 시큰둥한 사람들, 애써 열심히 춤을 추는 행렬, 그리고...
 
 
“아.”
 
 
너다. 정말 예상치도 못하게, 네가 있었다.
 
 
 
 
 
 
 
[어서오세요! 이 곳은 꿈과 희망의 나라-,로티랜드!]
 
“꿈과 희망의 나라는 개뿔이, 이 좆같은 곳도 이제는 끝이야!”
 
 
바깥에서 의미없이 흘러나오는 로고송을 듣고 이곳에서 가장 인기많은 캐릭터인 ‘로티’의 탈을 쓰는 황씨 아저씨의 푸념이었다. ‘로티랜드’. 유명 모 대기업에서 만들고 나름의 대도시에 위치해 과거에는 하루에도 수천명이 몰릴 정도의 인기 테마파크였다. 나 역시 그 즈음에 입사해 꿈과 희망을 담당한다는 캐릭터 ‘호피’를 맡아 어린 아이들에게 꽤나 인기를 얻었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의 도시 이전 정책에 의거해 모든 공공시설들이 빠져나가는 동시에 인구가 대량으로 축소되고 이곳을 후원하던 대기업 역시 비리사건에 휘말려 파산선고를 받으며 꿈과 희망의 나라는 절망과 좌절만이 남은 암울한 공간으로 남게되었다. 예산이 없어지기 시작하니 당연히 화려한 퍼포먼스와 행사들을 자랑하는 타 테마파크에 밀리게 되고, 마땅히 매입하려는 사람도 없었기에 결국 ‘로티랜드’는 매각 및 폐업의 수순이 확정되었다. 오늘은 그 수순의 끝자락 이었고.
 
 
“그나저나, 너 아까 사람들 속에 김민규 있는거 봤냐?”
“네?”
“아니, 앞에서 가고 있는데 손 한번 흔들어 주려다가 옆을 보니까 김민규가 떡!하니 서있는거야.”
“...”
“그놈,참...갑자기 때려칠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여길 와,오기는.”
 
 
황씨 아저씨가 들고 있던 탈을 내려놓고 담배를 꼬나물며 바깥으로 나갔다. 김민규. 그래, 이 이름을 어떻게 잊을까.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 관계인데.
 
 
 
 
 
 
 
 
Last Carnival
김민규,그리고 전원우
 
 
 
 
 
2015
 
 
 
“어서오세요! 이 곳은 꿈과 희망의 나라!”
“로티랜드!”
 
 
신이 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구호를 외치는 아이들을 시작으로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점심 무렵의 행군이라 폭죽은 터지지 않았지만 행렬 양 옆을 빼곡하게 매운 아이들과 부모들은 그 이상의 기폭제가 되어 덩달아 신이 나게 만들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꿈과 희망의 캐릭터 ‘호피’ 였다. 탈에 난 작은 구멍으로 옆을 보니 ‘로티’가 덩실거리며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여튼, 김민규가 신이 나면 주체 못하는건 알아줘야 했다.
 
 
 
“야,김민규. 너 오늘 텐션 좀 받는거 같다?”
“에이, 저 원래 이 텐션 이거든요?”
 
 
행렬 뒤쪽에서 동물탈을 쓰는 황씨 아저씨가 민규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민규는 유독 어린 아이들의 함성에 약했다. 퍼레이드에서 평범하게 걸어가다가도 아이들의 신이 난 목소리가 들리면 갑자기 과장된 제스쳐를 취하는 등 숨김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나와 황씨 아저씨, 다른 직원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그 모습이 가장 테마파크의 모토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던지라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야, 나는 언제 앞줄에 서보냐. 맨날 뒷꽁무늬만 졸졸 따라다니는데 앞에서 좀 놀고 싶다.”
“황씨 아저씨는 요게 좀...”
 
 
민규가 장난스럽게 얼굴을 가리키자 황씨 아저씨가 과장스럽게 헤드락을 거는 것으로 맞받아쳤다. 땀에 절은 머리칼이 흔들리는 모습, 구릿빛 피부와 웃을때마다 드러나는 송곳니까지. 모든 모션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맞다. 선배, 식사 뭐 하실래요?”
“...”
“...선배?”
“응?아,나는 아무거나.”
 
 
다행이었다. 탈을 장시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벌개진 것이 들키지 않으니까.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민규가 눈치채지 못하니까.
 
 
 
 
 
사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민규에게 불순하다면 불순한 마음을 품은 것이 어느 시점에서 시작된 것 인지는, 나 조차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단지 이러한 떨림이 싫지 않지만 지금은 묻어두는 것이 좋다는 것은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민규를 좋아하지만 민규는 나를 선배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이 사실이 조금 절망적이었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다 조용히 지우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되는 것이었다.
 
 
 
“오늘 무슨 키스데인가,하여튼 무슨 행사 한다고 중간에 불 꺼진다는 얘기 들었지?”
 
 
직원식당에서 국을 퍼먹던 황씨 아저씨가 귀찮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하여간, 여기서 돈만 많이 안 줬어도 진작에 때려쳤지!”
“언제는 적성에 맞으시다면서요.”
“내...내가 언제!”
 
 
당황하는 황씨 아저씨를 뒤로 한 채 나는 밥을 한수저 떠서 입 안에 넣었다. 약간은 설익은 쌀밥의 식감이 혀와 입의 내벽을 훑고 지나갔다. 영 퍽퍽해서 국물을 한수저 떠먹고서 황씨 아저씨를 조금 더 난감하게 만들기 위해, 입을 열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민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은 우연히 마주친 것도 아니었고, 아주 노골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아, 순간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힐 뻔 했다. 입 안의 음식물들을 모두 삼킨 뒤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왜?”
“네?아뇨,그냥...선배, 이따 저 좀 잠시만 볼 수 있으세요?”
“응?뭐...그래.”
“뭐야,너희 둘이 뭐 맛있는 거라도 사먹게?”
 
 
 
순간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흐르다 민규가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렸다. 분위기가 아무렇지 않게 본래대로 돌아갔다. 나 역시 장단에 맞춰 웃어주면서 다시금 밥을 떠먹었다. 민규가 무슨 이야기를 할 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생각보다 별건 아닐 것 이라는 확신에 안도하며 태연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확신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나 조차도 알지 못했다.
 
 
 
 
 
 
 
 
 
 
“...뭐?”
“말 그대로에요, 선배.”
 
 
...확신을 가졌던건 취소. 갑자기 먹었던 밥이 위로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전에도, 그리고 방금 전까지도 이러한 상황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 머릿 속이 하얘졌다. 말이 꼬이고, 무슨 단어를 어떻게 조합해서 꺼내야 될지 감이 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좋아해요. 예전부터 쭉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거지?
 
 
 
 
 
 
 
 
“너네 둘 싸우고 들어왔냐? 아까는 잘만 놀더만 왜 그래?”
 
 
황씨 아저씨의 장난 섞인 물음에도 차마 답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도망쳤다. 도망이라 해봐야 곧바로 퍼레이드를 준비해야 하는 덕에 곧 탈의실에서 만났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민규의 눈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전에는 볼때마다 얼굴이 빨개졌다면 이번에는 다른 이유에서. 대체 왜? 나 역시 민규를 좋아하고 민규 역시 나를 좋아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가서 미안하다 사과한 뒤 나도 너를 좋아한다, 라는 말을 꺼낸다면 모든 상황이 마무리 될 일이었다. 그래서, 대체 왜? 나는 도망을 친거지? 황씨 아저씨가 이내 몇마디를 더 꺼내다 띄워지지 않는 분위기에 포기하고 자리로 돌아가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문득 뒤를 돌아봤을때 보인 민규는 나를 등진 자세였다. 무슨 표정을 짓는건지, 보이지 않았다.
 
 
 
 
 
 
“어서오세요! 이 곳은 꿈과 희망의 나라!”
“로티랜드!”
 
 
그래도 시간은 흘렀다. 어두운 밤, 화려한 형형색색의 폭죽이 터지면서 남색으로 물든 하늘을 장식했다. 어린이들이 많았던 오전과는 달리 어른들, 특히 야간개장 타임에 들어온 연인들이 행렬의 좌우를 장식했다. 퍼레이드의 맨 앞에 섰다. ‘로티’ 탈을 쓴 민규가 내 앞에 섰다. 나와 민규가 올라탄 퍼레이드 카가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문득, 민규가 탈을 위로 올려들었다. 머리에 탈을 얹은 모양새로, 얼굴만 살짝 드러낸 민규의 시선이 탈 안의 내 머리속까지 울려버리는 기분이었다.
 
 
“선배...아니,형. 제 고백이 조금 갑작스러운 건 알겠는데요. 제가 조금 과도한 부탁일 수도 있지만....”
 
 
민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탈을 다시 쓴 민규가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기 시작했다. 꿈과 희망의 나라, 나는 지금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김민규가 고백을 해서 그것을 피한 내가 아닌, 호피가 되어서. 시끄러운 장조계열의 음악이 테마파크 곳곳에 울려퍼졌다.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들, 나 같이 인형탈을 쓴 사람들의 춤에 맞춰 사람들은 손을 흔들고 환호를 보냈다. 그러다 문득, 차가 멈춰섰다. 그제서야 황씨 아저씨가 오전 즈음에 말해준 내용이 기억났다. 내 뒤에서부터 천천히 불이 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일대가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였다. 어두웠지만 그렇다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간간히 입술이라도 부딫히는 듯 쪽쪽거리는 소리 역시 희미하게 들려왔다. 인형탈을 얼굴만 살짝 드러날 정도로 올렸다. 습기가 차 땀이 가득 난 덕에 꽤나 체감온도는 올라가있었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민규 역시 탈을 잠시 약간이나마 벗은 듯 싶었다.
 
 
“선배.”
“...”
“제가...조금 서두른거 알아요. 선배도 생각해야 될 시간 있는거 알고 있어요.”
 
 
 
여기서 내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될까. 나는 확실히 김민규를 볼 때 마다 내가 아는 한 전형적인 짝사랑의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김민규는 나를 좋아한다.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선배가 저 싫다면, 그냥 마음 접을게요.”
 
 
그런데 왜 나는 ‘나 역시 너를 좋아해’ 라는 짧은 한마디를 못 내뱉어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가? 사실은 나의 착각이 빚어낸 작은 소동이었나? 아니면 두려움? 그래, 차라리 두려움에 가까웠다. 나는 김민규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 고백을 받아줄 자신은 없다.
 
 
“그러니까, 제발 대답을...거절만 하지 말아주세요. 쥐죽은 듯이 묻으라면 묻을테니까,”
“민규야.”
“...네,선배.”
“...미안.”
 
 
 
탈을 다시 뒤집어썼다. 테마파크에 빛이 돌아왔지만 내 눈 앞은 여전히 어두웠다.
 
 
 
 
 
 
 
 
 
 
2017
 
 
오늘의 마지막 카니발이자 ‘로티랜드’의 마지막 퍼레이드였다. 사람이 한산해 대충 넘어가자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그래도, 나름 마지막이니 최대한 화려하게 장식해보자는 의견 하에 모두가 이제는 걸칠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카니발 의상을 끼워넣었다. 속이 영 안 좋았다. 밥을 잘못 먹은건지, 울렁거리는 속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씨 아저씨가 소화제를 건내기에 그것을 마셔보았지만 효과는 미비했다. 결국 퍼레이드 시작 전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기로 했다. 옷을 걸치기 전, 간단한 티와 바지를 입은 채 탈의실 근처의 화장실로 향했다. 억지로라도 게워낼 생각이었다. 그러다 순간, 내 앞을 갑자기 가로막은 한 사람 덕분에 발이 꼬여버리고야 말았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안 그래도 속이 영 좋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 일은 영 좋지않은 징조였다.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
“...”
 
 
...괜히 확인했다. 속이 이전과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울렁거렸다. 정적이 흘렀다. 그 사람, 내 앞에 서있던 민규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보이지는 않지만 내 표정 역시 비슷할 것이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그날 이후 내가 일방적으로 무시하다 그만둔 것이니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아도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되는걸까. 사실 나는 너를 좋아했었다? 내가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미안하다? 아니,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 정상인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위기에 눌린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나 처럼 아직도 용기가 없는 것일까.
 
 
 
“...가볼게요.”
“저기,”
“네?”
“...미안.”
 
 
다시 정적이 흘렀다.
 
 
“...선배가 미안해 하실건 없어요. 다 제 잘못인데.”
 
 
 
가볼게요. 민규는 나를 등진 방향으로 걸어갔다. 잡지 않았다. 아니, 잡지 못했다. 내가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접점이 없는데 어떻게 잡아야 되는건지. 너무 허무했다. 내 마음이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얇팍한 용기 때문에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났으니. 이럴거면 대체 왜, 이런 마음을 먹은건지.
 
 
 
자리에 멍하니 서있다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모든 것을 게워냈다.
 
 
[어서오세요! 이 곳은 꿈과 희망의 나라-,로티랜드!]
 
 
 
그래, 이 퍼레이드도, 꿈과 희망의 나라도, 나와 민규의 관계도, 오늘이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