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원과 평행선 A
정신없이 잊고 살아가니 시간도 내게 맞춰 빠르게 흘러나가는 모양이다. 벌써 그 날 이후로 두 달이 지났다. 잠시 멍 때리기 무섭게 저 멀리서 불러오는 목소리가 들린다. 원우씨, 이것 좀 해줘. 회사는 정신없고 또 시끄럽다. 정교한 톱니바퀴 여러개가 모여 돌아가는 기계같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책임감을 느낄 때도 있지만, 몸보다 정신이 먼저 무너질 것 같은 날에는 고장난 톱니바퀴가 되고 싶었다. 이 거대한 사회에 비해서 한없이 작은 나로 인해 생길 혼란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일을 그만두면 돈은 어떻게 벌려고. 아직은 상상보다 현실이 앞서가고 있었다. 여유가 좀 생기면 좋을 것 같은데.
겨우 짬을 낸 시간에 손을 댄 핸드폰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핸드폰 보면서 쉬던게 언제더라. 몇 시간 동안은 시계를 볼 틈도 없이 정신없게 일했던 것 같다. 핸드폰을 키자 민규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로 알림창이 빼곡하게 차있다. 어지간히 심심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한 시간에 한 번씩, 아니면 두 번씩 문자를 보낸다. 문자 메시지엔 별 다른 내용은 없다. 그냥 지독히도 일상적인 이야기다. 오늘 병원 밥은 어땠는지, 오랜만에 나가서 강아지를 보고 싶다던지. 혹은 오늘 자기를 보러 올 거냐고 묻는. 너무 오랫동안 답장을 안 하면 또 삐질지도 모른다. 착한 아이가 삐뚤어지면 큰일난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민규가 토라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 눈 앞이 아찔하다. 일초라도 빨리 전화를 걸기 위해 단축번호 1번을 꾹 눌렀다. 내 1번은 늘 자기였음 좋겠다며 단축번호를 걸어두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랜만에 떠올려보니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통화음은 얼마 가지 않았다. 정말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던지 빨리도 받는다.
"민규야."-혀영. 뭐해?"나야 일하고 있지. 넌?"-난 심심해서 죽기 딱 1분 전에 형이 전화해 줬어.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랬지. 유독 이런 쪽으로 둔감한 민규에게 일부러 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더니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알겠어, 안 할게.. 목소리만 들어도 대답하는 표정이 상상이 간다. 강아지처럼 꼬리나 귀가 있었다면 아마 지금은 축 쳐져 있겠지. 그 상상을 하니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간다. 잠시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고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회사 끝나고 갈게. 심심해도 조금만 참아."-저번처럼 야근이라고 또 못오는 건 아니지?"아냐, 오늘은 진짜 갈게. 약속해. 형이 약속 어긴 적 없었잖아."-너무 늦게 오진 말기. 기다리고 있을게. 생각해보니 민규를 본 지도 꽤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본게 지난주 였으니까. 최근 회사 일이 바빠서 더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야근 때문에, 또는 내가 너무 피곤해서. 민규에겐 미안하지만 이런 저런 일들이 너무 많아 민규를 보러 갈 시간이 없었다. 가장 최근에 본 것 마저도 자는 민규를 몰래 보고 나왔던 것이니. 오늘은 꼭 갈게, 하는 약속도 야근 때문에 지키지 못할 뻔한 적도 많았다. 민규는 아마 오늘도 그렇게 될까 걱정하는 듯 싶었다.
"오늘 가면 한 8시 정도 될 것 같아. 그니까.."
원우씨, 바빠? 통화를 다 끝내지도 못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입에선 한숨이 새어나왔다. 잠시라도 제대로 쉴 틈이 없다. 조금이라도 통화를 더 이었다간 주변에서 주는 눈치에 그대로 질식할 것 같았다. 민규야, 좀 이따 봐. 속삭이듯 재빠르게 말하곤 서둘러 통화를 끝냈다.
원과 평행선A
8시까지 가겠다는 약속은 온전히 지켜지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몇 십분 늦게 끝난 일과, 도로 위 막혀대는 차들까지. 오늘따라 모든 게 왜이리 심술인지 모르겠다. 삼십분이나 늦은 채 병원에 도착하니 잔뜩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규가 있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전화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민규야, 늦어서 미안. 조심스레 사과하며 다가가자 됐어, 라며 말을 넘겨보인다. 김민규는 또 거짓말을 한다. 사실 화났으면서.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다 티가 나는데도.
"밥은. 먹었어?"
"먹었지. 형은? 먹었어?”
"난 아직."
내 말에 삐죽 튀어나와 있던 민규의 입술이 더 삐죽거리는 듯 했다. 밥 좀 챙겨먹으라니까. 형 또 살 빠졌지? 여기에 그렇다고 대답하면, 민규가 화낼 것 같아서. 하지만 민규에게 거짓말을 하긴 싫었다. 그냥 대화 주제를 다른 걸로 바꾸려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뭔가 대화를 꺼낼 소재가. "뭐해?" 두리번 거리는 네 모습에 궁금했는지 금세 개구진 표정으로 묻는다. 병원에 있어봤자 뭐가 있다고. 대화를 꺼낼 소재는 없었다. 가만히 민규를 바라보자 민규가 입은 환자복이 눈에 들어온다. 꽤 오랫동안 본 모습임에도, 오늘은 왠지 낯설다. 또, 그와 반대로 정장을 차려입은 제 모습과는 너무 느낌이 달라서. 그 이질감에 공기조차 낮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민규야. 너 수술 며칠 남았지?"
“일주일. 다음주 목요일에 수술해."
머뭇거리며 물은 저와는 달리 민규는 꽤나 덤덤히 말을 이었다. 수술 때 올 거야? 평소엔 그렇게 개구지더니, 지금은 또 진지하다. 나는 민규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견딜 수 없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어릴 때부터 본 민규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는데. 수술, 병, 그리고 심장.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져 민규에게 어른의 껍데기를 씌워버리는 것 같다. 나는 민규가, 조금 더 어린아이처럼 굴기를 바랐다. 이 모든 것들은 네가 감당 할 만한 것들이 아닌데. 웬만한 어른들도 힘들어 할 것들을, 너는 모조리 혼자 견뎌낸다. 그리고 그런 네 옆에 항상 같이 있지 못해 그게 늘 미안할 뿐이다. 형, 여기 앉아봐. 민규가 손을 들어 제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생각해보니 병실에 도착하고 나서 쭉 멍하니 서있었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민규에게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내 민규의 손이 내 손을 감싸온다. 따뜻한 민규의 체온이 조금씩 전해졌다. 그 작았던 손이, 어느 덧 제 손보다 훨씬 더 큰 손이 되고. 추울 땐 제 체온을 나눠줘야 했던 어린 아이가, 이젠 내게 체온을 나눠준다. 스쳐가는 기억에 낮게 웃음을 흘렸다. 새삼 네가 이렇게 컸나 싶어서. 민규는 내 웃음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내가 웃는다는 것이 좋아 또 따라 웃는다. 너무 깨끗하다 못해 순수하도록 착한 아이였다.
"형. 나 수술 끝나면, 형이랑 하고 싶었던 것 되게 많아."
"뭔데? 말해봐. 형이랑 다 하자."
내 말에 민규가 신난 듯 입을 열었다. 한창 나가서 놀 나이에, 이렇게 병실에만 있으니. 하고 싶은 게 많을 법도 했다. 나 일단, 놀이공원. 저번엔 잘 못 놀았잖아. 빠르게 재잘대는 민규의 모습은 꽤나 신나보였다. 하고 싶은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좋을까.
"형이랑 바다도 가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영화도 보고, 어디 구경도 가고. 또, 또.."
하나를 말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센다. 따로 내게 말하려 준비했었나 보다. 민규가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무슨 말 하려고. 민규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말하니 그제야 입을 연다. ..학교, 다시 다니고 싶어. 느릿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가 제 심장을 콕, 하고 찌르는 듯 했다. 민규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했다. 민규의 발목을 잡은 건, 다름아닌 건강 때문이었다.
민규는 아팠다. 그건 선천적인 병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던 민규는, 작은 일상생활 하나조차 무리를 겪었다. 학교에서 쓰러진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 때문에 바빠 온전히 민규를 책임질 수 없었던 민규의 어머니는 결국 민규의 자퇴와 홈스쿨링을 택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민규도 별 말 없이 받아들였다. 아마 이때부터였던 걸지도 모른다. 활발하던 민규의 성격이, 조금씩 변해갔던 것이. 민규는 점점 말하지 못하고 썩혀가는 것이 늘어갔다. 거짓말 하나조차 할 줄 몰랐던 애가, 이제는 내게 거짓을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거짓말에는 능숙하지 못해 표정에선 다 티가 났다. 마냥 어린아이기만 했던 민규가 어른과 아이의 문턱에 걸쳐있는 것 같았다. 민규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더욱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니 친한 친구라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것을, 민규는 특히나 싫어했다. 늘 일로 바쁜 민규의 어머니와, 집안일만 하러 오시는 도우미 아주머니. 그리고 민규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과외 선생님. 또, 민규의 건강을 주기적으로 살펴주시는 의사 선생님까지. 모두 사무적인 관계였다. 자신이 도련님이 아니라면, 학생이 아니라면, 혹은 환자가 아니라면. 그들 모두는 곧 멀어질 존재였다. 그랬기에 민규가 내게 더 의지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민규가 사귄 첫번째 친구이자 그 이상의 무언가였으니까. 혀엉. 잠시 옛날 생각에 멍하니 있던 나를 민규가 불러온다.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황급히 입을 열었다. 민규는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무표정으로 있는 것을. 형은, 왜 잘 안 웃어? 내게 묻던 민규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진다. 민규는 내가 많이 웃고, 많이 얘길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일방적으로 자기만 말 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나는 형 얘기도 많이 듣고 싶다고.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며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기에. 그래서 더 슬펐다. 민규에게 또 하나의 걱정거리를 준 것 같아서. 민규는 나와 같이 있는 것을 좋아했고, 또 싫어했다. 자기가 내 시간을 너무 많이 뺏는 것 같아서 싫단다. 그러면서 또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하고. 그런 민규를 챙기려 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해 버린 나를 보며, 민규는 죄책감을 느낀다. 안 그래도 되는데. 내가 다 좋아서 하는 건데. 민규는 아직 어렸고 순수했다. 그 백지를 내가 까맣게 물들이는 것 같았다. 좋은 것만 주고, 좋은 생각만 하게 해주고. 무엇보다 네 옆에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늘 네게 걱정만 주었다.
“..학교는 다시 다니면 되고. 놀이동산은, 왜? 저번에 갔을 때 재미 없었어?”
울컥하는 감정을 꾹꾹 눌러대며 말을 이었다. 그 모습에 민규는 한참이나 나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 잠깐의 공백이, 더 아팠다. 이내 들려오는 민규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기는 하지만, 민규와 함께 있을 때는 온전히 민규 그 자체에 집중하고 싶어서. 더 이상의 깊은 생각은 독이 될 뿐 이었다.
“저번에 갔을 때는, 주말이라 사람이 너무 많았잖아. 조금 조용할 때 다시 가고 싶어.”
두 달 전에, 민규와 같이 놀이동산에 갔었다. 하도 가고 싶다고 몇 날 며칠동안 떼를 쓰길래. 민규의 어머니와, 의사 선생님들도 모두 말렸지만 결국은 민규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민규에게 나중에 가자며 살살 달래봤지만 민규에게는 먹히지도 않는 말이었다. 벌써, 두달이 지났구나. 그 말에 작게 웃음 짓자 민규는 그게 또 좋은지 따라 웃는다. 내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그럼 수술 끝나고 퇴원하면, 제일 먼저 놀이동산 가자. 그리고 그 날 맛있는 것도 먹고.” 내 말에 민규가 더 활짝 웃는다. 그렇게 좋냐. 웃으면서 민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거의 헝클어뜨린 것에 가깝긴 했지만. 잔뜩 망가진 머리에 민규가 울상을 지었다. 아, 형 진짜! 결국 참지 못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웃음 소리가 터져버렸다. 역시 애들은 애들 답게 굴 때가 제일 귀여운 것 같다. 시선을 내려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이미 아홉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줄은 몰랐는데. 병원에서 집까지는 거리가 있어서, 더 늦게 나가자니 내일에 부담이 됐다. 제법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더니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또 귀신같이 말을 한다. 형, 빨리 가. 늦었어. 이럴 때 보면 정말 따로 독심술이라도 배우는 것 같다. 그래도 민규를 혼자 두고 가긴 미안해서, 잠시 머뭇거렸더니 오히려 내게 가라고 말한다. 아, 나 할 거 있어. 형 빨리 가! 병원에서 할 게 뭐가 있다고. 배려해주는 듯한 그 모습에 괜히 더 미안해진다. 알았어, 갈 거야. 앉아있던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웃으며 손을 흔든다. 집 도착하면 전화해. 생각해보면 날 챙겨주는 사람도 민규 말고는 없는 것 같다. 병실 문을 열고 나오자 피부에 느껴지는 공기가 차가웠다. 싸늘한 공기에 작게 몸을 떨며 서둘러 병원을 나섰다.
도로는 어김없이 막혔다.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소리. 정신없이 들려오는 소리들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인상을 찌푸리곤 아픈 머리를 지우기 위해 생각을 바꾸려 했다. 역시나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민규. 민규를 생각하니 아까 봤던 모습들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날 보며 웃던 민규,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며 말한 민규. 그 모습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이번에 민규와 놀이공원에 가면, 뭘 하지. 나름 제 딴에는 저번에 가서도 잘 놀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어린애들의 기준은 다른가보다. 이번에 놀이공원에 가면, 민규에게 츄러스나 솜사탕 같은 걸 사줄까. 아직 애니까 이런 걸 좋아하려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자연스레 생각은 또 지난 기억으로 흘러간다. 기간으로 따지면 아직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체감 상으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두 달 전의 우리. 하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도 두 달 전의 민규가 눈 앞에 생생하다. 날 보며 웃던, 오랜만의 외출이라고 좋아하던 모습이. 벌써 눈 앞에 새록새록 그려져 제 시야를 빼곡히 채웠다. 두 달 전의 너는, 아직 겨울이 채 다 가시지 않았음에도 화사했다. 마치 벌써 봄 날이 온 것 처럼. 너는 그렇게 화사했다.
지난 기억들이 네게서 불어온 꽃향기에 젖어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