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d THEME PARK/글

[Lune] 어른의 연애

Monthly MW 2021. 1. 14. 00:18

썩 괜찮은 오후였다. 밤을 새긴 했지만 리뷰에 들어간 기획서는 괜찮은 평가를 받았고 일부 워딩을 수정한 후 최종 제출되었다. 이틀쯤 밤을 샜던 것 같은데, 뻑뻑한 눈을 꾹꾹 문지르고 뻐근한 뒷목을 꾹꾹 주무르고 앉았더니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퇴근을 허락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을 나온 시간은 오후 세시였고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수요일쯤 PT가 있을 예정이니 월요일부터 준비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우선은 PT다 뭐다, 그냥 눈을 붙이고 싶었다.
 
금요일은 금요일이었는지, 시내 도로는 꽉 막혀있었다. 차를 가져오지 않기를 잘 했다, 생각하며 화양사거리요, 행선지를 불러주고는 시트에 푹 몸을 기댄다. 세차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시트에서는 깨끗한 냄새가 났다. 창문을 조금 열자 늦은 듯 이른 듯한 봄냄새가 난다. 계절 같은 거 하나도 실감도 못하는데, 신기하게도. 청담대교를 건너는데 차가 조금 막힌다. 머리가 아파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겉옷을 벗는 둥 마는 둥, 침대에 쓰러졌다. 날씨가 좋아서 피어 오르는 먼지가 반짝반짝 빛났다. 두어 번 눈을 껌뻑거렸다. 잠이 오는 듯, 마는 듯, 날씨가 좋은 듯, 좋지 못한 듯.
 
문득 스치는 잔상과 함께 잠이 들었다.
이렇게 가끔, 혹은 매 순간 너를 생각한다.
 
 
 
어른의 연애
-Romantic Illumination
 
w. lune
 
 
 
너무 밝은 탓이었는지, 혹은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랬는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깐 선잠이 들었다가 깬 탓에 머리가 울렸다. 머리맡에 꽂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어, 하고 전화를 받자 퇴근 했어? 하고 묻는다. 어어, 짧게 답하자 자는데 깨웠나? 묻는다. 아니, 일어나려고. 그랬더니 목이 갔네, 갔어. 하더니 쯧쯧 혀를 찬다. 아냐, 잠깐 자서 그래. 그 말에 말이나 못 하면, 하고 덧붙인다. 그러더니,
 
- 저녁 먹을까?
 
묻길래 어딘데? 하고 되물었다. 나 외근 나와서 잠실인데, 여기서 바로 퇴근하려고. 집 근처로 갈까? 아님 올래? 그 말에 그제야 시계를 쳐다보는데, 다섯시 반쯤. 야, 근데 나 지금 꼴이 말이 아닌데.
 
- 알아. 이석민이 줄줄 불고 갔어. 전과장 이틀 혼자 밤샜다며.
 
어어, 야, 그래도 우리 회사에 수면실 있어.
 
- 내가 수면실 있는 회사 가지 말랬지, 뭐 좀 사서 형 집으로 갈 테니까 좀 더 자.
 
안돼, 집 더러운데.
 
- 언제는 깨끗했던 것처럼 얘기하네, 괜찮아. 형 먹을만한 거 좀 사서 갈 테니까 자고 있어. 끊는다.
 
그리고는 제멋대로 끊어지는 전화, 잠깐 한숨이 났다. 다시 이불을 덮고, 알람을 맞추고, 그리고는 슬쩍 눈을 감았다. 조금 어두워진 탓인지, 금방 잠이 들었다.
 
 
 
__
 
 
 
꿈을 꿨다. 놀이공원이었을까, 어딘가 반짝반짝 빛나는 뭔가의 앞에 우리가 서 있다. 우리가 맞나, 그냥 실루엣만 봐도 아는 너니까 그냥 우리라고 쳤다. 뭔가, 즐거운 기분이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 즈음인지 반짝반짝 빛나는 빛들 틈으로 하얗게 눈송이가 내리고, 나를 보며. 웃는 얼굴이 좋아서 마냥 따라 웃어버리는데, 어디선가 시계종소리가 울렸다. 뎅-뎅- 한참을 그러다가, 손을 뻗어 네 손을 잡는데,  
 
- 어.
 
문득 눈을 떴다. 꿈인 걸 알면서도 이상해서 손을 좀 더 꽉 쥐었는데,
 
- 일어나라, 이제 좀. 나 왔어.
 
신기하게도 네가 눈앞에 있었다. 두어 번 눈을 끔뻑거리자 잠이 덜 깼네, 이 양반이. 개구지게 웃는다. 여전히 어리둥절해서 눈만 끔뻑이고 있자니,
 
- 잠 좀 깨, 밥 먹어야지.
 
그리고는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안경을 찾아 낄 때까지 사실은 조금 멍했다. 잠이 덜 깬 채로 스르륵 식탁 의자에 앉았더니 눈 떠, 하고서는 뒷목을 꾹꾹 주무른다. 눈 떴어. 눈가를 슥슥 문질렀더니 어휴, 하고서는 물티슈를 건넨다. 응, 하고 멍하니 들고 있었더니 또 손을 가져가서는 슥슥 닦아내고, 정신 차려. 하고서는 맞은 편에 앉는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물을 따라주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고. 젓가락까지 까서 건네 준 뒤에야 식사를 시작한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더니 안 먹어? 하고서는 턱짓으로 도시락을 가리킨다.
 
- 어어, 피곤해.
- 그러게, 이틀 밤 샜다며.
- 그런가..
- 밥은 좀 챙겨 먹고 그랬어?
- 어어, 밥이야 뭐..
- 혼 나야지, 또 막 새벽에 전화 와서 응급실 싣고 가고 막 그래야 정신 차리지.
 
같이 살자니까? 나 진짜 형 불안해서라도 데리고 살고 싶어. 무안한 듯이 웃었더니 전원우 못됐어, 진짜. 그러고는 갈비 한 조각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그런다, 내 말만 절대로 안 듣고. 막 일만 하고. 놀아주지도 않고. 그래도 어? 내가 이렇게 이쁘다, 이쁘다 해주는데. 나 같은 놈이 어딨냐, 진짜. 그러고서는 씨익- 웃는데 그러게, 너 같은 놈이 어딨냐. 이렇게 잘 해주는데.
 
입이 영 깔깔해서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대충 국이나 끼적거리고 있었더니 안 넘어가지? 그러고서는 먼저 입가심을 하고는 슬쩍 도시락을 곁눈질한다. 이런 거에 서운해하는 걸 알아서 크게 한숟갈 떠서 우물우물 씹는데, 으이구. 전원우 진짜. 그러더니 천천히 먹어. 그러고는 젓가락을 놓는다. 딴에는 기다려주는 거다. 피식, 웃었더니 잘 먹네, 많이 먹어. 그러고서는 주섬주섬 젓가락으로 반찬도 올려주고, 국도 챙겨주고, 결국에는 먹여주기까지. 아- 해. 그러길래 냉큼 받아먹었더니 어구- 잘했어,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는다. 가끔씩 아주 형 같을 때가 있는데 지금 같은 때. 우물우물 밥을 씹고 있으니 그런다.
 
- 형, 아직도 트리 안 치웠냐?
 
아. 그랬나, 하고 버릇처럼 젓가락 끝을 꾹꾹 깨물면서 눈만 데록 굴렸더니 진짜 내가, 그러고서는 못 말려, 진짜. 하고는 웃어버린다. 그래서 헤헤, 웃으면서 바빴잖아, 그랬더니 그래도 그렇지, 그러고서는 혀를 쯧쯧 찬다. 왜, 여름에도 트리 켜고 놀게? 진짜, 내가 못 살아. 야, 넌 맨날 나땜에 못산다 그러냐, 괜히 서운한 듯 툴툴거렸더니 또 허, 하고 입을 삐죽- 내밀다가,
 
- 아니, 그럼 이렇게 해놓고 산다는데, 내가 어떻게 잘 살아?
- 그게 뭐.
 
전원우, 또 입 한 바가지 나왔다. 으이구. 진짜 내가 애를 키우는지, 어? 연애를 하는지, 가끔은 막 구분이 안 가요. 니가 이러면. 말이야 늘 그렇게 하지만 잘 안다. 밥을 깨작거리는 사이에 먼저 일어난 너는 너저분하게 널려져 있던 것들을 주섬주섬 거둬 모으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쌓인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바닥에 널려있던 수건을 모아 빨래바구니에 넣고, 그런 너를 눈으로 쫓다보면 밥 다 먹었어? 묻고.
 
- 애기야?
 
대답 대신 팔을 벌리면 품에 잔뜩 안겨오는 익숙한 온기. 품에 가득 끌어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왜 어리광이야, 졸려서 그러지. 말은 늘 툭툭 뱉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다정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었다. 너무 오래 해서, 이제는 좀 덜 설렐까, 싶은 시점이 되면 꼭 이렇게 너를 끌어안았다. 가득, 품에 가득 찬 너의 등을 이렇게 끌어안으면 마음이 봄마냥 떠올랐다.
 
- 치우기 전에 불 한 번만 더 켜보면 안되나?
- 그럴까? 근데 불 들어오긴 하냐?
- 몰라, 사실 설치할 때 한 번 켜고, 한 번도 안 켠 것 같은데.
 
처음 만났을 때는 겨울이었다. 당연히 훨씬 어렸다. 루미나리에가 유행이었다. 낮만큼이나 환하고 밝은 밤들은 번지듯이 온통 주황빛이었던 기억이 난다. 먼저 손을 잡았던 것도, 잔뜩 어색한 티를 내던 것도 너였다. 너무나 너다운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났었다. 그래서일까, 너는 나에게 늘 따뜻한 주황색 밤이고 어떤 겨울의 전부였다. 쿠션을 끌어안고 트리에 걸쳐둔 꼬마 전구의 스위치를 켜는 네 어깨에 기댔다.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끌어안아오는 팔이 든든하고, 따뜻하고. 이렇게 있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 불 잘 들어오네.
 
그 말에 픽, 웃었더니 코끝을 가볍게 꼬집는다. 눈에 잠이 한가득이야, 전원우씨. 그리고는 좀 더 편하게 기대도록 어깨를 내어준다. 사양하지 않고 기대서 스르르, 눈을 감자 못말린다는 듯 또 픽, 웃는다. 어떡하냐, 우리 형. 이렇게 졸려해서. 그리고는 슬슬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데 그 손길에 정말 나른해졌다. 꼬마전구가 깜빡, 깜빡였다. 언젠가 놀이공원에서 봤던 일루미네이션처럼.
 
- 우리 밖에서 만난 게 언제가 마지막이더라.
- 2월달인가?
- 그런가.
- 에버랜드 갔던 날이 마지막이지 않았나, 아닌가?
- 그랬나..
 
눈을 감았다, 뜨는데 꼬마 전구의 빛이 무겁게도 일렁였다. 뭐야, 잘 거야? 네가 묻는데,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리광이 늘었네, 우리 다 큰 애기가. 툭툭 던지는 말투가 조금쯤 소심한 마음을 건드리던 때도 있었는데, 다 지나간 모양이었다. 대답 대신에 좀 더 어리광을 부렸다. 꼬마 전구가 깜, 빡 일렁였다. 볼을 가볍게 쓰다듬는 손에 조금 더 얼굴을 부비자 또 픽, 하고 웃는다. 그 때 좋았는데, 덧붙이면서.
 
그러고 나서 형 제안서 들어가는 바람에 맨날 회사 앞에서만 봤지, 뭐. 덧붙이는 말이 조금 흐릿하다가, 누워서 자-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그리고는 가지 말고 있어, 나랑 자. 하고는 네 손을 잡았던 것 같다. 네가 없는 밤이 추웠던 것도 같아서, 더는 추운 겨울이 싫어서. 그리고는 금방 잠이 들었는지,
 
꿈 속이었다. 놀이공원 한 복판에서 트리처럼 일루미네이션들이 반짝였다. 어두운 허공을 가득 메우는 주황색 불빛들이 잔뜩 별처럼 내리고 있었다. 시계탑이 뎅- 뎅- 밤 열 시를 알리고, 저 끝에서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그냥 새끼손가락만 걸고 있다가, 문득 손을 꼭 잡고 싶어졌다. 춥다, 그치? 하고 올려다보는데 아- 멋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네게 말을 걸었다,
 
- 멋있다.
 
너는 어, 멋있어. 대답했고 나는 조금쯤 웃었던 것 같다. 멋있었으니까. 나보다 조금 더 높이 있는 너를 올려다볼 때면 늘 멋있다-고 생각하던 나를, 너는 알까. 알아줬으면 좋겠다. 남들보다 서투른 게 있다면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그런 나에게 조금쯤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 문득 너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 멋있다, 하고 말하곤 했다. 너에게 속삭이는 말이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걸고 있던 새끼손가락을 놓는 대신,
 
- 민규, 멋있어.
 
하고서는 손을 쥐었다. 늘 나보다 체온이 높은 네 손을 잡으면 온 몸에 따뜻하게 온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온통 따뜻한 색으로 물든 밤에 너와 내가 있다. 트리 앞에 멈춰선 퍼레이드는 결혼식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따뜻하게 포옹하는 연인에게 보내는 축하처럼, 형형색깔의 폭죽이 터지고 온통 화려한 색으로 물든다. 꽤 로맨틱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네 손을 좀 더 꼭 잡고, 한 번 더 말해주고 싶었던 그 말 대신,
 
너를 꼭 끌어안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밤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만한 밤이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__
 
 
 
문득, 몸이 답답해서 눈을 떴다. 코앞에 보이는 네 얼굴에 웃음이 난다. 꿈에서 껴안은 네가 정말 눈앞에 있었다. 응, 깼어? 더 자. 잠깐 뒤척이는 걸 알아챘는지 등을 토닥이며 제 품으로 더 끌어안는 네가 좋아서, 허리를 더 꼭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꿈에서, 내가 너 멋있다구 했어. 그랬더니 그런다, 어어, 나도 알어어. 그리고는 등을 토닥, 토닥, 어린 애기라도 재우듯이 그런다. 네 어깨 너머로 끄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 꼬마전구가 파스스하게 밝아오는 흐린 새벽을 따뜻한 색으로 가득 메운다. 꿈에서 본 그 장면처럼, 깜빡- 깜빡-
 
꽤 로맨틱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품에 가득 찬 너를 좀 더 꼭 끌어안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밤이었다.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