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치] 트윙클 벨 C
호기심이란 게 사람을 이토록 치졸하게 만드는 건가 싶다. 하지만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모르는 게 있으면 반드시 질문을 해야 하고, 모름지기 의문이 생기면 알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다. 민규는 엄마의 오래된 가르침을 원우의 방문을 열기 전 다시 한 번 입속으로 되뇌었는데, 이는 말이 좋아 가르침이지 사실상 민규 자신의 합리화에 불과했다.
그 분이랑 연락하는 중이냐고 원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건 제 자존심 상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그래, 몰래 알아내자. 지금처럼 원우가 샤워하러 들어간 사이, 휴대폰이 무방비한 사이에. 민규는 사실 편지에 쓰여진 번호의 뒷자리 네 개를 외우고 있었다. 공사일칠…. 원우 휴대폰의 최근 통화목록에 이 공사일칠의 유무를 확인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다. 그러다 무슨 내용을 주고받는지, 어쩌다 보게 될 수도 있는 거고….
물소리가 쏴아아 퍼지는 욕실 앞을 최대한 인기척 없이 살금살금 지나 원우의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별 거 아닌 소리에도 혼자 찔려서 화들짝 놀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어느새 발밑까지 따라 붙은 웅이가 똘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얜 꼭 이럴 때…. 웅아, 쉿, 저리 가. 왕! 쉬잇! 결국 간식 하나를 입에 물고 나서야 만족한 듯 유유히 엉덩이를 흔들며 방을 빠져나간다. 평소에는 아무리 불러도 고개만 흥흥 돌리던 애가 왜 저러나 했더니….
"뭔 휴대폰에 잠금이 하나도 없냐…."
잠금이 걸려있을 것을 대비해 0717부터 시작한 예상 비밀번호 후보 리스트를 몇 개 생각해왔던 터라, 잠금 하나 없이 그대로 홈 화면을 내보이는 휴대폰에 민규는 오히려 김이 팍 샐 정도로 허무해졌다. 이거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데. 그렇게 생각하자 혹시 들킬까, 하는 걱정으로 부풀었던 긴장에 푸시시, 바람이 빠졌고. 민규는 이제 작정한 듯 원우의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 채다.
공사일칠, 어, 있다. 있다…. 미친 그럼 형이 먼저 연락한 거야? 어디서 샘솟은 자신감인지 내심 원우가 연락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백 번 양보해서 연락을 했더라도 정중히 거절하는 문자라든지. 그런 걸 보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야, 너 내방에서 뭐 해?"
"악!"
아 형은 무슨 사람이 그렇게 깜빡이가 없어요….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문 쪽을 쳐다보니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원우가 문 앞에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다. 샤워를 방금 끝냈는지 머리 위에 하얀 수건을 얹어놓고, 품에는 간식을 질겅이는 웅이와 함께. 민규는 그제야 침대에 다리를 쩍 벌린 채로 앉아서 원우의 휴대폰을 쥐고 있는 제 현 모습에 대한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했는데, 머리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이는 건 행동이었다. 정확히는 휴대폰을 침대 구석으로 던져버리는 손의 움직임이,
"야씨 미쳤냐?"
왜 남의 폰을 던지고 그래! 느닷없이 상황을 맞이한 방주인이자 휴대폰 주인인 원우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어처구니없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방으로 들어갔더니 침대 위에 앉아서 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룸메라니. 심지어 도둑질하다 들킨 애 마냥 온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더니 대뜸 휴대폰부터 집어던지고 본다. 얘가 왜 이래?
"아, 아니이. 방에서 알람이 계속 울리길래, 그래서 들어온 거예요! 형 샤워하느라 알람 소리 못 들었잖아요."
"알람? 나 맞춘 적 없는데?"
나 일어날 때 빼고 알람 안 맞추고 자. 민규는 등 뒤로 진땀이 삐질삐질 새는 착각에 빠진다. 동시에 머릿속엔 어떻게든 이 쥐구멍을 현명하게 빠져 나가야겠다는 다짐뿐이었고.
"뭔 소리래. 열두 시 사십 분에 맞춰져 있는 거 하도 울리길래 시끄러워서 껐다니까요."
잘 하는 거라곤 임기응변과 구라밖에 없다. 민규는 뻔뻔해지기로 한다.
"진짜? 야, 근데 왜 폰을 집어던져. 집어 던지길."
"그야 형이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니까 그러죠. 형 자꾸 이렇게 사람 깜짝 놀라게 하면 진심 나 심장에 무리 온다니까."
"뻥 치시네. 야야. 오버 하지 마, 됐고. 볼 일 다 봤으면 나가지? 나 옷 갈아입을 거야."
알겠어요, 알겠어. 같은 남자끼리 뭐 특별히 가릴 거 있다고. 악! 왜 때려욧, 나가요 나가. 민규는 부러 과장된 목소리로 원우를 지나쳐 거실로 나간다. 터덜터덜 걸어서 소파 위에 앉더니 곧 머리를 마구 헝클이는데, 그 표정이 꽤나 복잡해 보인다. 결과가 영 찝찝한 탓이었다. 연락을 한 건 확인을 했는데 어떤 연락을 한 건지는 보지 못했다. 원우가 중간에 들어오는 바람에….
"근데 내가 왜 그걸 궁금해 하는데…."
둘이 연락을 하든 말든…. 머릿속에 꾸불꾸불 잔뜩 엉킨 실뭉치 수십 개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다. 민규는 실타래의 앞에 앉아 그 끝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려다, 얼마 못가 그것을 던져버리고 마는데. 다시 살펴보니 잘 풀어나갔다 생각했던 것들도 전부 처음 상태 그대로 엉망진창 엉켜있었다. 끝없는 수렁에 빠지는 순간이다. 대체….
내가 왜, 원우에게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 건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TWINKLE BELL : C
김민규 전원우
세상의 이치라는 게 원래 그렇다. 마음먹은 대로 상황이 순탄히 전개되는 법은 없고, 기억해야 할 것들은 기억이 안 나고, 기억하기도 싫은 것들은 어째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뜻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민규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는 입장이다. 흠뻑 쏟아지는 햇빛에 눈을 뜬 민규가 제일 먼저 떠올린 기억 또한, 동일한 종류의 것이다. 누가 삭제해준다면 돈이라도 손수 쥐여주고 싶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미쳤다고 너는 그걸 말해…. 죽어라 자책해도 이미 일은 일어났고, 민규는 엎지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민규가 기억하는 당시 원우의 얼굴은 온통 흐리고 부옇다.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원우를 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규는 원우가 제 말을 듣고 어떤 얼굴이 되었는지, 무슨 눈을 하고 저를 응시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게 그거였는데. 다만 민규가 기억하는 건, 급히 제 방을 빠져나가는 원우의 뒷모습, 기척 없이 스르르 닫히던 문소리 같은. 모두 미안함의 무게만 증가시키는 것들이어서,
겁이 났다. 원우의 얼굴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마주 볼 수가 없어서.
답답한 기분에 연습 시작 전 담배라도 한 대 태우고 들어갈까 싶었다. 상가 건물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으려니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원우가 보인다. 평일 오전의 길거리는 한산했고, 때문에 좁은 골목엔 원우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건 곧 민규가 원우와 상당히 오랜만에 일대일 대면을 하게 되었다는 걸 뜻했는데, 이제와 피하기도 애매할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냥 좋게 연습실에만 박혀있을걸. 웬 담배를 피우겠다고 나와선. 민규는 불안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더군다나 연습실에 휴대폰도 두고 나온 터라 통화하는 척 마저도 할 수가 없다. 민규는 생각한다. 아, 하늘 쳐다보고 있을까…, 곧 고개를 젓는다. 병신같이 하늘은 무슨….
"……."
"……."
짧은 시간 동안의 수많은 고민이 무색하게, 원우는 옆을 본 체도 하지 않고 빠르게 민규 곁을 훑고 지나간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술 새에 물고 있던 민규는 예상치 못한 외면에 그대로 몸을 굳혔다. 당황스러웠다. 원우가 저를 무시하는 것까진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생판 남 보듯 대할 줄은 몰라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아? 뒤이어 드는 생각은 그랬다. 괜히 울컥한 감정이 솟았다. 민규는 발밑에 채는 돌멩이 하나를 세게 걷어찼다. 타닥. 돌멩이 튀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원우 형이랑 싸웠어?"
혼자서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민규를 보며 석민이 물었다. 비밀이야기인 양 속살거리며. 민규는 태연한 낯으로 아니, 왜? 싸운 것 같아? 했다.
"아니, 형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요즘 연습도 따로 오고, 예전보다 말도 별로 안 하는 것 같길래."
"어차피 집에서 매일 얼굴 보는데 뭘."
어색하기 짝이 없는 대꾸에 석민의 눈이 가늘어진다. 야,
"솔직히 말해봐. 너 형이랑 싸웠지?"
"뭐래 진짜. 안 싸웠거든."
정확히 말하면 싸운 건 아니었다. 냉전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싸운 게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그건 화해라도 하지. 이건 뭐 화해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사과하는 건 더 우스운 상황이라.
그냥 서로 최대한 피해가는 중이다. 민규도, 원우도. 혼자 밥 먹는 것만큼 쓸쓸한 게 없다며 점심 같은 경우엔 늘 한 식탁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먹었는데. 이젠 집에서 밥을 먹는지 나가서 먹는지도 잘 몰랐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 껴서 애먼 피해를 보는 건 웅이었다. 서로 안 부딪치려고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라, 웅이 산책을 시켰는지 안 시켰는지, 밥을 먹였는지 아닌지를 몰라서. 그저께는 산책을 두 번이나 했다. 그날은 녹초가 된 웅이가 바닥에 엎드려 도로롱도로롱 코를 고는 소리만 거실을 메웠다.
화해하는 거 영 어려우면 나한테 말해. 내가 또 오작교 역할 같은 건 끝내주게 잘 하잖아. 저를 믿으라는 듯 석민은 제 가슴께를 두어 번 주먹으로 쿵쿵 내리치더니, 나 알지? 그런다. 퍽이나. 원우 형이 사실 나 좋아하는데 나는 그거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었어, 하고 말하면 셋 중에 제일 아연한 표정이 되어 말까지 더듬을 거면서. 원래 개인적인 일에는 제 삼자가 끼는 게 아니야. 민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둘이 진짜 싸운 것 같죠. 석민이 쑥덕였다. 응, 둘이 싸웠다에 오늘 노래방 값 건다. 오천 원. 정한이 오천 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김민규가 일방적으로 잘못했다에 삼천 원. 지수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삼천 원을 꺼냈다. 어, 저도요. 딱 봐도 김민규가 잘못한 것 같아. 다시 석민이 거들었다.
세 사람은 한 덩어리처럼 서로 팔짱을 끼고서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꼭 작당한 악당들처럼 수상한 눈초리로 앞서 걸어가는 민규와 원우를 관찰한다. 저것들 보게, 무슨 남남이냐? 안 그래도 좁아터진 골목길에서 양 벽에 딱 붙은 채로 갈라져 걷고 있는 둘을 보며 정한은 어이없어한다. 저래놓고 안 싸웠대요, 민규가. 말도 안 되죠? 내가 원우한테도 물어봤는데 둘이 별 일 없다고 그랬어. 별 일 없기는 무슨. 고깃집으로 향하는 내내 세 사람은 김민규와 전원우의 화해를 주제로 입을 한데 모았다.
발단은 연습실에서부터였다. 평소 비둘기 급의 평화적인 마인드로 오죽하면 술자리 개인기마저 비둘기 흉내인 석민은, 연습 시작 전 정한에게 살짝 귀띔했다. 민규랑 원우 형이랑 둘이 존나 싸운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정한과 지수도 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단다. 왜 나만 빼놓고 둘이 말해! 소외감에 서운해하는 석민의 앞에 대고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 셋이 하려고, 말하는 정한은 확실히 한수 위였다. 단순한 석민은 금세 풀려선, 아 그래? 하하핫. 호탕하게 웃었고.
우리 밴드의 팀워크를 위해 김민규 전원우 이 둘을 어떻게 화해시키느냐. 세 사람이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 답은 하나, 술이었는데. 둘이 술 먹고 알아서 하라고 해. 주먹 한 대씩 오가고 너는 이걸 잘못했네 저걸 잘못했네 말하다가 화해할 수도 있는 거고…. 정한이 말을 얼버무렸다. 뒤이어 지수가 물었다. 아니면?
"미안, 나는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어."
설마 둘이 연이라도 끊겠냐./끊으면?/거기까진 내가 생각을 안 해봤다니깐….
그리고,
"오늘 회식 할 거야. 다들 약속이나 알바 없는 거 내가 다 아니까. 모두 올 거지?"
정한은 마치 생일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하는 초등학생처럼 평소엔 묻지도 않던 멤버들의 동의를 구했다. 올 거지? 민규는 귀를 후비적대며 언제부터 형이 제 의사를 물었다고 그래요, 했다가 악! 정한에게 이마를 한 대 얻어맞았고. 원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세 사람이 나름 큰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회식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이 났다. 불판 위의 삼겹살이 가운데에서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고,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보는 자리였던 민규와 원우는 자리의 부담스러움을 이유로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세 사람만 본 목적을 잊은 채 신나게 먹고 짠하고 놀고, 하는 분위기였다. 정작 이 회식의 주인공들은 불청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민규는 어쩌다 원우와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크흠흠,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고개를 외로 팩 돌렸다. 연습실 앞에서 원우가 저를 투명인간 취급했던 것에 대한 서운함이 남아있어서였다. 지금 화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적반하장 식으로 나오는 민규의 태도에 원우도 지지 않고 내내 눈을 홉떴다. 교차한 시선의 중간에서 스파크가 파바박, 하고 튀었다.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몇 주 전 공연 뒤풀이 끝난 뒤에 함께 집에 가던 때와 상황이 같다. 하필 오늘따라 버스가 만원인 탓에 영락없이 둘이 딱 붙어 앉아 가는 꼴이 됐다. 자리가 많으면 아예 떨어져 앉는 건데. 바깥쪽에 앉은 민규는 다리를 쭉 뻗지 못해 불편한 듯 계속해서 몸을 뒤척였는데, 그 바람에 민규의 어깨며 팔 같은 게 자꾸만 원우 쪽으로 기울었다. 원우는 그런 민규의 상체를 티 나게 힘을 실어 옆으로 툭 밀쳤다. 허. 옆으로 몸이 밀린 민규가 헛웃음을 짓다가 이번엔 아예 두 무릎을 모으고선 원우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돌린다. 딱딱한 무릎 뼈끼리 콩 하고 부딪혔다. 결국, 원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하냐?"
"자리가 너무 좁아서요."
거의 1주일 만에 제대로 나누는 대화다. 민규는 여전히 휴대폰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다. 어깨가 닿고 무릎이 닿아도 원우 쪽으론 시선 하나 주지 않는다. 덕분에 원우는 철저히 유리벽이 된 것 같은 존나 기분 나쁜 경험을 하게 됐고.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민규는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누가 보면 나만 나쁜 놈에 쪼잔한 새끼 된 것 같다. 뭐 잘했다고 지가 더 화난 티를 내냐 이거다. 생각해보면 내가 지 좋아하는 거 알고도 시침 뚝 떼고 모른 척 한 게 더 나쁜 거 아닌가. 대놓고 차인 것보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거절당하는 게 훨씬 더 비참했다.
원우는 몸을 틀었다. 빈틈없이 맞닿은 무릎 새로 다시 공간이 생긴다. 원우는 상체를 최대한 유리창 가까이에 밀착시킨다. 만원버스의 눅눅한 공기에 김이 서린 창문 밖을 바라보며 점퍼 주머니 속의 이어폰을 꺼낸다. 꼬일 대로 꼬인 선을 풀지 않고 짧은 선 그대로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휴대폰 속 가장 소란스러운 음악을 재생시킨다. 이윽고 원우는 외부로부터 완벽한 차단 상태가 된다. 주변의 소음으로부터도 그리고 민규의 존재로부터도.
뒷모습을 쫓으며 집까지 걸어왔다. 정류장에서부터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먼저 가버리는데, 이제는 정말 궁금할 정도다. 왜 대체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왜 화가 난 건지. 원우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서.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에 혼자 청승맞게 질질 짜면서 골목길을 걸었다. 서러운 숨을 들이쉬는 어깨가 잘게 떨렸다. 골목에 몇 없는 사람들이 그런 제 모습을 흘끗거리며 지나가는 게 너무 창피해서, 질질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벅벅 닦아내며 원우는 계속 걸었다.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해보고 이렇게 된 거면 적어도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 알고 있었다면서. 알면서도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체 했으면서. 이제 와서 저를 외면하는 민규가 미웠다. 모두 민규가 말하지 않았으면 됐을 일이었다. 원우는 한 번도 제가 먼저 민규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늘 나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정함의 대상이 오로지 나뿐이라고 착각하지 않으면, 어쩌다 분위기에 휩쓸려 실수 같은 고백을 흘리지 않으면. 그럼 될 줄 알았다.
"근데 그거 아니잖아……."
내가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었다는데…. 얼굴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샜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민규는 그날 뒤이어 집에 들어온 원우의 눈이 부어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리고 인정해야 했다. 나의 고집 때문에, 나의 자존심 때문에 원우를 울렸다는 것을.
언제나 민규는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의 중심축에 서 있었고. 그런 민규에게 쏟아지는 애정이나 관심의 깊이는 종이 한 장처럼 얄팍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깊은 것까지. 웬만한 것엔 민규가 무딘 반응을 보이게 할 만큼 다양했다.
그렇게 애정을 받는 것에만 익숙해진 몸은 반대로 주는 것이 낯설다. 늘 그랬다. 민규는 받은 만큼 상대에게 되돌려주는 것들에 서툴렀다. 때문에 지금과 같이 누군가에게 결핍처럼 애정을 갈구하는 제 모습이 어색했다. 얄팍한 자존심을 손에 쥐고 놓지 않는 제 모습이 싫으면서도 자꾸 제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런 감정들이 싫었다. 민규는 원우가 미웠다.
그래서 매번 엇나가는 건가 싶다. 새벽이었고, 원우가 일하는 호프집을 향해 민규는 걸었다. 완연한 충동에서 시작한 발걸음이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 문득, 원우 생각이 났다. 한 번 떠오른 얼굴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민규의 머릿속에서 부풀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것이 빈틈없이 가득 찼을 때, 민규는 홀린 듯 자리를 빠져나와 발걸음을 옮겼다.
파트 타임을 바꾸지 않는 한 원우는 지금쯤 가게에 있을 것이다.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설렘 탓인지 긴장 탓인지 아니면 많이 마시지도 않은 술기운 때문인지. 민규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모두 게워내고 싶었다. 그게 설령 어떤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어도, 아무렴 상관없었다.
마감까지 마치고 가게를 나오니 벌써 네 시반이았다. 한바탕 비라도 쏟아진 듯 습기 찬 거리의 공기가 눅눅했다. 가게에서 집까진 걸어서 십 분 정도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라, 집에 가기 전에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들어갈까 싶어 원우는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거린다. 분명 주머니에 넣고 나온 것 같은데. 혹시나 싶어 입고 있는 후드티의 작은 주머니까지 뒤적거려도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꼭 존나 피우고 싶을 때만 없더라. 짜증이 확 솟은 원우가 건물 외벽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가, 아야야…. 깽깽이 발이 되어 괴로워한다. 요즘은 어째 맘먹고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울적한 마음으로 이제 막 걸음을 떼려는데,
"……?"
…쟤가 왜. 맞은편 전봇대 아래에 큰 검정색 덩어리 같은 게.. 자세히 보니 덩어리가 아니라 사람이 앉아 있는 거였다. 원우는 원체 남의 일엔 관심 갖지 말자 주의를 가진 20대였지만, 저건 아는 사람이라 외면할 수도 없다. 저 미친놈 왜 저래….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원우는 전봇대에 기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민규에게로 다가간다. 지가 무슨 집 없는 떠돌이 개도 아니고…. 멀쩡한 집 놔두고 길거리 노숙을 하는 민규의 젖은 머리칼이 곱슬곱슬한 게, 이제 보니 웅이 털의 그 구불거림을 닮았다. 내가 개를 두 마리나 키우고 있었네. 원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혹시 얘가 우리 가게 와서 마신 건가 싶어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 기억 속에 민규는 없다. 앞에 쭈그려 앉아 얼굴 가까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데 딱히 술냄새가 심한 것 같지도 않고. 그럼 멀쩡한 정신에 이런 멀쩡하지 않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건데. 야, 야. 검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쿡쿡 밀었더니 억, 전봇대에 뒤통수를 콩 박은 민규가 그제야 눈을 끔뻑끔뻑 뜨고는 상황파악을 하기 시작한다. 네 시에 마치는 원우를 기다리며 전봇대 앞에 서 있다가 십 분이 지나도 이십 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것에 다리가 아파서 쭈그려 앉았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러다 순간 술이 확 올라와서 눈이 절로 감길 정도로 졸렸고… 그리고 정말로 잤다.
어이없는 건 당사자 또한 마찬가지다. 취객과 이를 지켜보는 선량한 시민 같은 그림은 연출하기 싫어 민규는 일단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굳어 있던 몸이 우두둑, 비명을 지른다. 쭈그려 앉아 있던 원우도 민규를 따라서 무릎을 폈다. 앉아서 볼 때 수평선을 이루던 시선이 비스듬해졌다.
왜 이러고 있어? 기가 찬 듯 헛헛 거리던 원우가 당연한 질문을 했다. 형이랑 집에 같이 가려고요. 민규는 정직하게 답했다. 답을 듣고 원우는 지금 우리가 사이좋게 같이 집에 갈 사이냐,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아닌 체 한다. 그럼 폰으로 연락하지 그랬어.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멍청이. 형도요.
"나한테 할 말 있음 해."
나랑 집에 같이 가려고 온 거 아니잖아, 너. 집 앞 공원에 다다랐을 때, 원우가 말했다. 원우는 처음부터 모른 체하고 태연하게 굴었을 뿐 민규가 다른 목적으로 저를 찾아온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정곡을 찔린 민규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 티 났어요? 그런다. 눈치 못 채는 게 병신이지. 원우가 덤덤히 대꾸했다.
아…. 민규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형, 그…"
"……."
"분이랑, 지금 연락해요?"
"……."
그때 형한테 편지로 번호 줬던 분 있잖아요. 생각해보니까 형 편지 받은 이후에 소식 같은 걸 못 들은 것 같아서요, 뭐, 궁금하기도 하고…. 아니아니 궁금하다기보다는 그냥…,
"…그거 물어보려고 왔어?"
울컥한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디까지 비참해야 되는 건가 싶다. 왜 그럴까, 그간 혼자 고민하면서 꼽았던 이유 중에서도 제일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게, 동정이었다. 형이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요, 같이. 전혀 위로도 감동도 없이 오로지 제게 비참함만 안겨주는 말을 민규가 하는 것. 원우가 알고 있는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 뒤엔 언제나 나는 받아줄 수 없으니까, 와 같은 거절이 숨어있었으니까.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잘 되어가는 중이라고 하면 분명 잘됐다는 말을 하겠지. 부담감을 모두 덜어낸 표정은 아주 밝을 것이다. 처리하지 못해서 계속 떠안고 있던 짐을 덜어내기라도 한 듯 그렇게. 그리고 민규는 진심으로 축하해 줄 것이다. 형 잘해 봐요. 모두에게 해프닝으로 여겨질 만큼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엔 스쳐가듯 이야기를 꺼내겠지. 그때 형이 정말 좋은 사람 만났으면 했어요.
……
제가 형을 받아줄 수 없었으니까요.
……
"연락 안 해."
그러긴 싫었다. 동정 어린 눈빛을 받는 것도, 그 상대가 민규인 것도, 억지로 괜찮은 체하는 것도, 감춰야 되는 것도. 전부 다. 원우는 싫었다.
당황함으로 물드는 얼굴. 예상했던 반응이다. 뒤이어 연락 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하는 민규의 말에 억지로 쥐고 있던 끈이 툭, 힘없이 끊겼다. 눈물이 핑 도는 바람에 원우는 시선을 황급히 발끝으로 내린다. 처음에 문자 몇 번 하고 이후론 연락 안 했어. 얼굴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지막이 말하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리고,"
"……."
"너한테는 쉬울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그때 그랬잖아, 네가. 다 알고 있다고.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을 땐, 비스듬히 저를 내려다보는 민규와 눈이 마주친다. 원우는 울지 않는다. 고백의 순간에 눈물로 호소하는 건 싫었다. 대신에 억지로 웃고 있는 것까진 조금 힘들어서. 꼭 우는 사람처럼 얼굴을 잔뜩 구겼다.
울기 직전의 눈가가 붉었다. 새벽의 찬바람을 쐰 볼도 붉었다. 너 나 배려한다고 눈치 보고 신경 쓰는 거 안 해도 돼, 내가 너보고 같이 좋아해 달란 것도 아니고 나 혼자 너 좋아한 건데 뭐…. 부끄러워하는 둥근 귓바퀴도, 그냥… 그전처럼 모른 척해. 이제 와서 모른 척해달라는 것도 웃긴데, 그래도 우리 앞으로 얼굴도 계속 봐야 하고…. 내가 알아서 마음 정리할 테니까…중얼거리는 입술까지.
"그러니까, 나 무시하고 그러지 마…. 나도 당장은 힘드니까……."
온통 붉었다.
여태 왜 원우를 궁금해했는지, 관심이 갔는지, 불안감을 느꼈는지.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 왜 바로 안도했는지에 대해,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민규는 찰나의 순간들을 느낀다. 무색의 감정이 색을 입고 무명의 감정이 이름을 갖는, 그런 순간들을.
형 있잖아요,
한참을 침묵하던 민규가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 형한테 형 저랑 키스해요,"
"……."
"하면 저 완전 이상한 놈 되는 거예요?"
허, 기가 차다는 듯 원우가 헛웃음을 지었다. 겨우 이상한 놈 정도로만 될 것 같아?
"씨발 완전 개새끼지."
결국엔 짝, 하고 시원하게 뺨까지 얻어맞았다. 으하하. 속도 모르고 웃는 게 미치도록 얄미워 이번엔 반대편 뺨도 똑같이 때려주었다. 짝. 사이좋게 한 대씩 나눠 맞은 민규의 양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야야…. 눈물이 찔끔 새어 나올 정도로 따끔한 볼을 문지르며, 형 저도 이제 붉은색이에요, 따위의 헛소리만 늘어놓는 민규를 바라보는 원우의 눈 역시 붉었고.
민규는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마침내
"아무래도 제가,"
"……."
"형을,"
깨닫는다.fin
*팅커벨 증후군: 짝사랑하는 상대의 관심을 받기 위해 도리어 어긋난 행동을 하는 심리적 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