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하나, 내쉬면서 둘.
마지막으로 어두웠던 공연장의 조명이 환하게 밝혀진다. 공연장 내부는 그다지 볼 게 없고, 무대를 밝히기 위한 조명과 스피커 몇 개 정도만 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춤에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 공연 주제와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이는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사내 한 명이 나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저 사람이야, 저 사람.’
‘진짜?’
‘응, 이번 공연 메인 댄서기도 하면서 이런 걸 매년 한다는 사람이.’
영어 프린팅만 작게 새겨진 하얀색 티, 검은색 바지, 운동화. 언뜻 보면 고등학생 같기도 한 얼굴이다 ─과장된 말이긴 했지만 그 정도로 본인의 나이보단 훨씬 어리게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는 스태프에게 마이크를 요청하더니,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늘 이 공연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고 나서는 저와 제 친구들이 만드는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라는 말과 함께 다시 뒤편으로 들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겁게 울리는 음악 소리가 나오면서 환한 웃음과 함께 화려한 몸놀림이 시작됐다.
Rhythm After Summer
김민규 전원우
새벽
‘스트릿 댄서 전원우, 뉴욕 공연 성황리에 마치고 귀국…’
‘신의 몸짓, 과연 한계점은 어디까지인가’
‘콜라보레이션 제의 끊이질 않아…’
“헤드라인 잘 나왔네.”
“실상은 어제 귀국했어야 됐는데, 술 마시고 취해가지고 바에서 아주…”
“그만.”
나는 아마도 내 인생을 바꿔놓은 날을 묻는다면, 전원우의 공연을 처음 봤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트릿댄스를 좋아하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서 우연찮게 본 공연이었는데, 그날 메인 댄서였다던 사람의 모습을 보고 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은 그것이었다. 반했다. 저 사람과 함께 무대에서 춤을 춰 보고 싶다. 그래서 그날부터 그의 춤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공연 DVD를 구해서 보고, 전원우라는 이름이 적혀져 있는 공연은 어떻게서든 표를 구해서 보러 다녔다. 말 그대로 현장에서의 그를 알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에. DVD에서는 최고의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한 것이겠지만 무대에서는 그게 또 다르다.
호흡을 맞추려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것도, 때로는 강력한 힘을 보여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내가 실제로 보는 것을 더 좋아했던 이유는 그곳에서의 그의 기분, 말하고자 했던 것들을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형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그게 왜?”
“어떤 때는 온갖 사고를 다 치다가, 어떤 날은 또 얌전하고.”
“그게 고양이 같아서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무대 위랑 밑이랑 똑같아서 좋다고요.”
그래서 무작정 따라다녔다. 정말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그 결과로는 전원우의 소속사에 입사, 콜라보까진 아니어도 전원우와 비슷한 분량의 공연까지 따내는, 나한테는 매우 큰 수확을 얻어냈었다.
“한국 도착하면 뭐부터 제일 먼저 할 거예요?”
“집에서 쉬고 싶은데, 잡힌 일들이 너무 많아서 쉬지도 못해.”
“그래도 이거 끝났으니까 별 다른 건 없잖아요.”
“그렇지.”
“그럼 나랑 놀이공원 갈래요?”
공연을 짠다는 핑계로 전화번호를 얻어내고, 숙소도 비슷한 곳으로 쓰면서 알게 된 것은 첫째, 전원우는 나보다 약 다섯 살 정도가 많다. 둘째, 술을 안 좋아한다고 하면서 매번 바에서 한두 잔씩 마시다가 취해서 온다. ─매니저에게 취해서 업혀온 적도 있다─ 셋째, 생긴 건 사자를 닮았는데 하는 건 고양이다. 사자도 고양이과 동물이라면 동물일까. 사실 그것까지는 관심 없다.
“아니, 별로.”
“아, 왜요. 나 시간 많은데 직접 먼저 쓰겠다고 한 사람은 형뿐인데?”
“놀이기구를 못 탄단 말야.”
“그게 뭐 어때서요, 아니면 퍼레이드 구경이나 가면 되지. 아까 찾아봤는데 이번 시즌 퍼레이드에 디즈니 캐릭터들 잔뜩 나온다던데요?”
마지막으로, 매우 소녀 감성이라는 것 정도.
예술을 하는 사람치고는 이성적이라는 평을 듣는 나와 달리 전원우는 알고 보면 매우 감성적인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책도 좋아하고, 영화도 자주 보며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했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물었더니 나온 답은, 주X피아의 여우×토끼 커플. 그 말을 했더니 정말 제대로 먹혔다. 움찔했다.
“진짜야?”
“그렇다니까. 이거 봐요.”
거짓말은 아니다. 이번 봄 시즌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퍼레이드 캐릭터를 추가한다고 한 기사가 인터넷에 크게 떠 있었다. 마침 첫 콜라보레이션이 디즈니 캐릭터였고, 내가 그 정보를 먼저 알아왔다는 거에 약간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언제까지 해?”
“딱 제 생일 다음 날에 끝나요.”
“갈까…”
“가요, 가요. 생일이라고 하면 할인도 해 주는데?”
“그럼 너 생일 다음 날로 해.”
“아, 전원우!!!!!!!!!!!!”
***
그렇게 해서 전원우를 끌고 놀이공원에 오기는 왔는데,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모자를 쓰고 마스크까지 썼는데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도 걸림돌이었는데 막상 본인은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눈치라는 것도, 참…
“사람 진짜 많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날짜 당겨서 올 걸 그랬어요.”
“아니, 괜찮아. 사람 구경도 하고 좋은데?”
“되게 할아버지…”
“뭐?”
“모자 삐뚤어졌어요.”
오랜만에 온 놀이공원은 재미있었다.
대기시간이 꽤나 긴 편이었지만 우리가 보기로 했던 퍼레이드는 야간에도 하는 거라 밤까지 놀기로 해서, 크게 신경은 안 썼다. 가자마자 제일 먼저 바이킹을 타고, 롤러코스터를 타고 난 후에는 그새 지친 것 같아 보이는 전원우를 위해 회전목마를 타고 나왔다.
“진짜 죽을 것 같았네.”
“놀이기구 못 탄다고 하더니 잘 타던데요?”
“야, 김민규 너…”
“츄러스 좋아하죠? 무슨 맛?”
“초코.”
그렇게 츄러스까지 입에 물고 계속 돌아다녔다. 나중에는 기념품 가게에도 들어가서 머리도 사고 나왔는데, 전원우가 여우 머리띠를 쓰려는 것을 내가 토끼 머리띠를 씌워버렸더니 입을 쭉 내밀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건 여우지, 토끼가 아니라면서 투덜대면서도 씌워주니까 안 벗는다.
“머리띠 잘 어울리네, 나중에도 쓰고 나오는 건 어때요?”
“공연 때 그거 쓰고 하다가 사람들 다 웃으라고?”
“잘 어울리는데.”
“그리고 내가 주로 하는 안무는 벗겨지기 십상이야.”
“아님 내가 쓰고 할까? 파트너 구해서?”
“집 안 들어오고 싶으면 그렇게 해.”
***
야간 퍼레이드는 인터넷에서 광고하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시작됐다. 처음에는 신데렐라 공주가 나오더니, 요즘 다시 인기를 끌고 있는 미녀와 야수도 나왔으며 한창 열풍이었다던 눈사람 캐릭터까지 나와서 퍼레이드를 이끌어갔다. 그 와중에 전원우는 여우와 토끼 캐릭터를 보자마자 입이 벌어질 대로 벌어졌고. 마침 저 캐릭터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지만, 그 사람은 저 캐릭터의 두 특징을 모두 닮았다고 생각했다. 무대 위에서는 온갖 여우같은 끼를 다 부리면서 놀고, 밑에서는 토끼같은 생활을 하고.
“형.”
“아, 왜. 말 시키지마. 쟤네가 내 손 안 잡고 갔단 말야.”
“그게 서운해요?”
“당연하지! 언제 또 볼 수 있을 줄 알고 온 건데…”
“그때는 디즈니랜드 가요.”
“진짜?”
그럼, 약속해요. 라니까 정말 신났다. 토끼 맞다니까.
“그거 알아요?”
“뭐가?”
“형, 저 캐릭터들이랑 닮았어.”
“안 닮았는데…”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는 밤에 보면 알겠지~”
“혼나.”
+
“김민규, 전원우! 너네 둘 다 작정했어?”
그냥 놀자고 놀러간 놀이공원 때문에 결국 사단이 났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갔었는데 나중에는 답답하다면서 벗어버린 형과, 나 덕분에 마스크를 썼음에도 알아볼 사람들은 다 알아봤다면서 목격담이 떴단다. 심지어 사진까지 찍어서 올린 사람들 때문에 ‘스트릿 댄서 전원우, 무용수 김민규 전격 열애?’ 뭐 이런 기사까지 떴다면서 호출을 당했다. 아, 대체 뭔 관심이 그렇게도 많은 거지… 그리고 우리 아직 사귄다는 말도 안 했는데.
“기사 많이 떴어요?”
“내가 아침부터 기자들 전화를 스무 통 이상이나 받았거든?”
“근데 우리 직접적으로 사귄다는 말 안 했는데요.”
“야, 너네 진짜야?”
“보면 몰라요?”
그 말을 꺼낸 건 전원우였고, 일단 대표인 승철 형 1차 뒷목 잡은 건 확실하다.
“김민규, 너는.”
“저는 딱히 대답 안 할래요~”
“아니, 대답을 해야 내가 뭔 기사를 내서 막던가 인정을 하던가 하지. 그렇지, 민규야?”
“저렇게 기사가 났는데 뭐 어떡해요. 진짜 연애해야지.”
마지막으로 내 말에 2차 크리티컬 완료.
“이렇게 연애 알리는 거 진짜 멋없긴 하다.”
“조용히들 하고, 좀. 당분간 집에서들 살어! 아주!”
“형, 데이트 하러 가요.”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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