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멍청해서 감정이 주체가 안 된다. 사랑을 받으며 사는 아이라고 주변에서 그렇게 말해댄다.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 살이 닿는 걸 좋아하고 사람과 얘기하는 걸 좋아하며 또, 인간관계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걔는 안 그런다. 걔는 사람을 어찌나 싫어하는지, 동아리도 안 나온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내가 걔의 영역을 넘으려고 하면 걔는 필사적으로 나를 막는다. 무 슨 내가 죽을 죄를 진 것도 아닌데. 나는 억울했다. 아무도 나를 내친적이 없었고 믿지 못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걔만그랬다. 걔만 나를 내쳤고 나를 못 믿었다. 가랑비처럼 내리던 네가 지금은 몇 개월 째 내리는 장마가 되어 나에게 내리고 있었다. 장마철에 태어나서 그런 가. 합리적 의심이라기엔 너무 개소리다. 교복은 짧아졌고 가방 끈은 늘어났다. 학년이 바뀌었다는 소리다. 여전히 걔는 사람을 싫어했고 나는 사람을 좋아했다. 꽃이 만개하는 봄에도, 초록 나무가 기지개를 펴는 여름에도, 단풍잎이 우리를 적시는 가을에도, 숨결이 새하얗게 터져 나오는 겨울에도 나는 여전히 걔 생각뿐이었다. 해가 뜨고 달이 질 때까지 네 생각만 하는 날 걔가 알아줬으면 했다.
그래. 이건 분명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짝사랑이었다.
짝사랑은 보통 가슴 아프게 끝났다. 그래서 도망친 사람도 있었다. 나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뭔데 나를 무식하게 만들었다. 주체가 안 되는 사랑은 넘치고 흘러나와 종국엔 바닥에 질질 셌다. 세상이 아름다웠고 힐링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걔한테 아직 말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정확히는 내 감정을 전한 적이 없다.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 까. 어떻게 하면 내 맘이 너에게 닿을까. 센치하게 새벽에 혼자 고민한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고 말할까. 아니 그러기엔 내가 너무 급했다. 1분 1초가 급해 걔에게 닿으려고 계속 달렸다. 그런데 계속 달리다가 보니까 뒤가 안 보였다. 지나온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떡해. 나는 길을 잃은 것이다. 그 사이에도 걔를 사랑하는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큰 풍선이 되어 나를 하늘 위로 두둥실 끌어 올렸다. 온 몸에 힘이 빠진다. 그리고 몽롱해진다. 몽롱해지는 와중에도 내 모든 신경은 온통 걔에게로 집중된다. 언젠가 읽었던 시의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라는 구절처럼 몸이 이상작동을 한다. 교과서를 넘기는 손짓도 집중하는 눈빛도 날렵한 턱 선도 그냥 다 좋다. 나는 걔가 내 맘을 몰라줘도 걔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교복이 꽤 많이 짧아질 동안 나는 그저 계속 고민만 하였다. 아직도 할 말은 많은데 어떻게 정리하고 꺼낼지 몰라서 계속 고백도 미루고 있다. 있잖아 사실 내가 널 많이 좋아해. 너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디 문과의 매운 맛 좀 한번 봐봤으면 좋겠다. 이과 감수성을 난 이해 못하겠는데 걔는 똑똑해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과 감성 한 스푼 얹어 천문학적으로 고백 해보려고 한다. 너는 고요하지만 끝없이 팽창하며 역동적인 우주고 나는 지구에서 그런 널 지켜보고 있어. 나는 네가 R136a1같다고 생각해. 뭔지 모른다고? 천문학에서 관측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별이야. 응. 그만큼 너는 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별이란 뜻이야. 사랑은 너무 어렵다. 모의고사보다 어렵다. 그래서 사랑 모의고사나 입문자를 위한 완벽하게 사랑하는 법이란 책이 있었음 좋겠다.
내가 이렇게까지 걔에게 목을 거는 이유는 없다. 그냥 좋아서다. 내가 걔를 이만큼 좋아하는 이유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다.
때는 201n년 3월 2일, 고등학교 입학식이었다.
나는 중학생 때까지 고백을 받으면 받았지 한 번도 해본 적도, 첫 눈에 반한 상대가 있는 적도 없었다. 그 상대가 내가 된 적은 있어도 내가 해본 적은 없다. 젠장 이래서 어려운가 보다. 아무튼 걔는 나랑 짝이었다. 담임이 일시적으로 정해놓은 자리에 가서 앉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때부터 나의 지독하고 지고 지순한 짝사랑은 시작되었다. 옆에 앉은 걔는 나와 정말로 반대였다. 무슨 바둑의 흑돌과 백돌만큼 말이다.
나는 책상에 엎드렸고 걔는 반듯하게 앉아 교과서를 폈다. 나는 피부가 까무잡잡했고 걔는 새하얬다. 그리고 나는 몸통이 두꺼운데 걔는 완전 얇았다. 진짜 얇았다. 지켜주고 싶은 욕구가 마구마구 솟아올랐다. 대한민국 남고생은 무심하지 않다. 오히려 더 섬세하고 예민하다. 그래서 자꾸 걔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짝을 계속 했다. 나는 걔를 관찰했다. 주로 볼 수 있는 모습은 교과서를 펴서 필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걔랑 너무 점심이 먹고 싶어서 나는 가방에 있는 공책을 뒤적거려 북 찢은 뒤 좀 별로인 내 글씨로 또박또박 점심 같이 먹자는 쪽지를 썼다. 말을 걸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나는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걔가 오히려 더 환하게 웃으면서 좋다고 말했다. 와 최고였다. 내가 그 해 제일 잘한 일을 뽑으라고 하면 걔에게 쪽지를 건넨 것 이었다. 점심시간이었다. 대한민국 남고생이 아무리 섬세하다고 해도 몸집은 무시할 수 없었다. 우르르 누떼처럼 뛰어나가는 고딩들은 어떻게 보면 좀 호러물 같았다. 그날도 그렇게 세렝게티 초원의 누떼같이 달려나가는 남자애들 사이로 우리는 여유롭게 걸어갔다. 하필이면 그날 급식이 치킨에 후식은 아이스크림이어서 진짜 애들이 미친 듯이 뛰어갔다. 우리 반에는 유도부가 한 명 있었는데 뛰어가다가 걔랑 부딪혔다.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걔는 선이 엄청 얇았다. 역시나 걔는 힘없이 휘청거렸는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휘청거리는 걔를 잡아줬다. 포즈가 약간 "아- 빈혈이!" 하면서 쓰러지는 유치한 순정만화의 한 장면 같았지만 그 때 나는 발 끝부터 척추를 따라 머리, 손 끝이 다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살짝 풀린 눈에, 새까맣고 단정한 머리, 그리고 대비되는 새하얀 얼굴과 붉은 색 입술. 나는 말이지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세가 뻘쭘해서 곧바로 걔를 놓아주었다. 아무튼, 사랑은 내게 너무 한 순간에 찾아왔다. 그 날 이후로 내가 걔를 사랑하는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숨길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반도의 남고는 시끄럽고 섬세하면서 때론 조용하며 거칠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첫 중간고사를 치루는 날이 25일이 남았을 때 일이다. 나는 엄마한테 공부 좀 하라고 뒤지게 혼났어서 책상에 앉아 교과서를 폈다. 순간 뒤에서 공이 날라와서 내 머리에 꽂혔다.
"야! 김민규 공부한다!"
큰 소리로 이석민이 외쳤다. 걔는 내 얼얼한 뒤통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이석민은 웃기고 어이없다는 듯이 낄낄 거리며 날 놀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 김규 니가 공부 하는 날도 오는 구나"
"아 뭔 시비야 나 어제 엄마한테 존나 혼났어. 말 걸지마. 머리 개아파"
이석민은 우리학교의 유일한 1학년 축구부장이었다. 별명이 말벅지인 만큼 허벅지가 겁나 딴딴했는데 공에 맞으면 진짜 아프다. 나는 공을 주워 이석민에게 패스 했고 이석민은 발로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이석민이 발로 찬 공에 걔가 나보다 더 세게 뒤통수를 맞았다.
"퍽-"
"야!! 미친놈아!!"
"우아아악!! 괜찮아??? 어떡해!!"
걔는 진짜 약한지 코피를 쏟았다. 나는 걔를 들춰 업고(차마 공주님 안기는 못 했다) 보건실로 빠르고 안전하게 도착했다.
"괜찮아?"
"응. 이러니까 좀 바보 같다”
코에 거즈를 꽂고 헤실헤실 웃으니 진짜 바보 같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그런 모습도 사랑한다.
나는 얼굴에 살랑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 할 그때 손이 스쳤다.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는 열 일곱 살 남고딩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그래도 아무도 다가가진 못했다. 내 얼굴은 이미 붉어진지 오래고 걔 얼굴도 살짝 붉어졌다. 우리 둘은 진짜 아무 일 없는 척 큼큼 해댔다. 그러다가 그만 빵 터져서 깔깔 웃었다. 이게 김민규 18년 인생 짝사랑 대서사시에 웅장한 시작이다. 김민규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근데 이석민의 공로가 크니 이석민을 오작교로 해주어야겠다.
그 뒤로 걔랑 나랑 엄청 친해졌다. 왜, 성격은 진짜 반대인데 완전 잘 맞는 친구들이 종종 있잖아. 그게 우리 인 것 같다. 심지어 1학년 때 같은 반 같은 짝이었는데 2학년도 같은 반이 되어버렸다. 사랑은 내게 불가항력적 작용을 했다. 약간 한 번 까먹으면 계속 먹게 되는 마이쮸 같이 말이다. 그래서 계속 걔가 보고 싶다. 해맑게 웃는 너, 점수가 생각보다 잘 안 나와 울상을 짓는 너, 밥 먹을 때 집중하는 너, 가끔씩 쉬는 시간에 엎드려 자는 너.
우리는 수업시간에 쪽지로 계속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주로 내가 먼저 시작했다.
‘오늘 집 가는 길에 밥 같이 먹을래?’
‘좋아’
이런 내용이나
‘너 오늘 되게 산뜻해 보여. 잘 잤어?’
‘산뜻해는 무슨. 나는 잘 잤어. 너는?’
‘내 하루가 산뜻한 이유는 너가 오늘 산뜻해서야ㅎㅎ’
혹은
‘있잖아 사람이 첫사랑을 하면 엄청 아프대. 근데 나 요즘 여기저기 엄청 아파. 첫사랑 생겨서 그런가 봐’
‘너 그런 거 믿어?!?!??!’
‘한 눈에 반한 사람은 놓기 어렵대. 근데 그거 맞는 말 같아’
‘김규 요즘 문과 선택해서 무슨 작문 연습하냐?’
그렇게 나와 걔가 나눈 쪽지는 3호 상자에 꽉꽉 눌러 담을 수 있는 정도로 쌓였다.
나는 아직도 새벽에 센치하게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내 맘이 너에게 닿을 수 있을 까. 근데 이미 내 표정만 봐도 내 맘이 다 드러나는 것 만 같다. 표정 관리가 안 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만 되는 표정 관리가 너에게만 안 돼. 같이 걸어가는 집 가는 길에 귀퉁이에 있는 거울을 걔 몰래 슬쩍 봤다. 얼굴에 누가 봐도 ‘나 얘 좋아해요’가 쓰여있었다. 아무렴 어때, 너가 몰라주는 것 같은데. 별 수 없지. 사실 조금 속상하기는 했다. 그래도 일년 반을 너만 좋아해왔는데 이젠 좀 봐줬으면 좋겠다. 안 되겠다. 문과생의 매운 맛을 볼 차례다. 딱 기다려.
‘원우에게.
원우야 안녕, 나 민규야. ㅎㅎ 사실 글씨만 봐도 나인 거 알겠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장문 편지 써서 엄청 놀랐겠다. 요즘 길을 걷다가 보면 너가 예전에 스쳐 지나가는 말로 갖고 싶다고 하던 게 뜬금없이 생각나서 살 까 말 까 엄청 고민해. 길 고양이 보면 네 생각이 나서 밥도 준다. 멋지지. 음 심지어 집 가는 길에 있는 꽃집에 하얀 장미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네 탄생화인 거야. 그래서 당장 한 송이 사서 내 집에 꽂아뒀어. 너가 아팠을 때 집에 혼자 가는 길이었는데 늘 같이 걷던 길을 혼자 걸으니까 너무 쓸쓸하고 외롭더라. 지인짜로 많이 네가 보고 싶었어ㅠㅠ 있잖아 내가 매일 해가 뜨고 달이 질 때까지 너만 생각하는 거 넌 알아? 모르는 거 같더라고. 너무 속상했어. 그렇지만 더 사랑하는 사람이 져주는 거라고! 그래서 내가 항상 꾹 참았지. 너 그거 생각 나? 우리 일학년 때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급식 먹으러 가다가 너가 넘어지면서 내가 받쳐줬잖아. 그때 난 진짜 세상이 멈추는 줄 알았어. 너의 그 단정하고 까만 머리와 대비되는 깔끔하고 하얀 얼굴, 그리고 나른하게 풀린 눈동자에 붉은 입술. 넌 말이지 내가 본 사람 중에 처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야. 너도 그 때 나한테 한 눈에 반했을 까? 이런 멍청한 상상도 가끔씩 해. 아, 맞다. 우리가 주고 받은 쪽지들을 나는 모아두는데 벌써 작년 것까지 합해서 2호 상자에 꽉 채워지는 거 알아? 신기하지. 근데 더 신기한 건 널 향한 내 마음도 이래. 걷잡을 수 없이 너무 커져버려서 바닥에 넘쳐 흘러. 너가 내 맘을 알아준다면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모두 너에게 쏟아질 거야. 이런 생각도 해. 너가 처음엔 가랑비같이 스며들었는데, 요즘 너는 내게 장맛비가 되어서 콸콸콸 쏟아지는 중이야. 너가 너무 좋아. 있잖아 너는 마치 우주 같아. 고요해 보이지만 사실 끝없이 팽창하고 있는 아주 역동적인 우주. 나는 네 안에 있는 아주 작은 소행성이야. 네 맘을 가로지르는 궤도를 따라 나는 공전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너의 마음 안에서 숨 쉬고 살아있다는 거야. 우주가 아니면 사실 바다 같아. 푸른 빛의 깊은 바다는 계속해서 파도가 되어 내 마음에 부딪히고 쓸어내려. 쓸려간 자리에는 사랑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이 있어. 근데 너에게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전할 지 모르겠어서 2년동안 끙끙댔어. 근데 드디어 이렇게 너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편지를 적어. 아, 편지 너무 어렵다. 원우야, 너는 내 맘이랑 똑같지 않아도 돼. 내가 몇 일이든 몇 개월이든, 몇 년이든 기다릴게. 네 앞에만 서면 자꾸 떨려서 심장을 토해낼 거 같아 좀 못난 글씨로 써. 실망은 말아줘. 조금 서툴러도 눈 감아줘. 하 이제야 내 맘을 털어 놓으니까 조금 시원하네. 난 항상 계절이 바뀌어도 너만 생각한다는 거 알아줘. 왜냐하면 넌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거든. 정말로 너 덕분에 이런 감정들을 처음 느껴봐. 정말 고마워. 내게 설렘을, 사랑을, 고마움을, 기쁨을, 행복을 선물해줘서. 아무튼 편지가 너무 길다. 난 이만 여기서 줄일게!
민규가
PS. 혹시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이 편지는 너가 그대로 갖고 있구, 그냥 너만의 방식으로 같다는 마음만 알려줘! 편지도 좋구, 카톡도 좋아. 전화도 좋구. 난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니까’
‘너가 그랬지. 나는 우주고 너는 내 맘을 가로지르는 궤도를 따라 공전하는 소행성이라고.
근데 그거 아니? 너는 내 세상의 전부야. 민규야.
어제보다 더, 내일보단 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의 너를 아낌없이 사랑해
From. 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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