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5일
“컵라면 먹으러 갈래?”
참 멋없는 첫 마디였다. 물론 이 역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멋없지, 당시 나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고 생각했었다. 반 2등, 전교 16등이라는 애매하게 높은 타이틀을 지키려 야자를 하고 있던 나였다. 남녀공학인 우리 학교는 애초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남학생은 손에 꼽을 정도여서, 고3 4월임에도 내 옆자리는 늘 비어있었다. 헌데 오늘은 옆자리에 김민규의 가방이 놓여 있었고, 그 사실이 의아했으며 동시에 두근거렸다. 남녀공학에 합반, 여학생 비율이 남학생 비율의 2배인 이 학교에서 내 인연을 찾고자 하는 마음은 입학 당시부터 접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한심하게도 이런 상황에 설렘을 느끼는 것은 본능인 듯 했다. 대체 왜 김민규 가방이 내 옆자리에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에 야자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그렇게 남의 공부를 날린 주제에 9시가 조금 넘어서는 내 옆자리에 가방 주인이 도착했다. 평소 농구광인 저를 과시하듯 가쁜 숨을 헐떡이면서. 더불어 야자 안 하는 사람 티라도 내듯이 적막이 흐르는 야자실에서 나에게 내뱉은 첫 마디가 바로 저 말이었다. 김민규라는 사람은 애초에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꼴에 인문학영재반 따위의 학급에 합격했었고, 거기서 한 여학생과 친해졌다. 당시 그 친구와 썸타던 남학생이 김민규였고, 결국 2학년 초에 둘이 사귄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둘의 연애 소식은 꽤나 화제였는데, 여학생은 귀여운 외모와 성격, 인문학영재반 답게 전교 3등에 각종 동아리 회장, 학생회 임원까지, 서울대 직행 버스를 탄 애였고, 김민규는 농구하는 남학생들과만 어울렸기에 담배며 술이며 그다지 까일 게 없었고, 말도 안 되는 비주얼에 키, 거기에 내신은 아니었지만 모의고사만큼은 매번 전교권에 드는, 우리 학교의 암묵적 엄친아였다.
나는 그 커플을 꽤나 좋아했었다. 일단 둘이 있는 걸 보면 눈이 즐거웠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꽤나 얼굴에 약했기에, 여학생과 수다를 떨며 대리 설렘을 느끼는 것도 있었다. 덕분에 김민규도 나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었다. 향간에는 김민규가 나를 싫어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 여학생과 너무 친하다고. 그런데 3학년에 올라가기 바로 전 겨울방학 방과 후를 듣던 중, 둘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사실 그 전부터 여학생의 어머니가 고3때는 꼭 헤어지게 만들 거라며 자신을 압박한다면서 나에게 자주 하소연을 하곤 했었기에 그다지 놀라움은 없었다. 당시 나도 가망 없는 김민규 대리설렘 느끼기 보다는, 당장의 대학 입시가 더 중요했기에 그렇게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리고 나와 김민규는, 같은 반이 되었다. 눈은 즐겁겠네, 라는 뻘한 생각을 했을 뿐, 졸업 전에 쟤랑 말은 할 수 있을까, 했다. 교내 활동에 매우 활발했고, 늘 열심히 살았기에 쉽게 1학기 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회장이라는 명목으로 오늘 체육관이래, 컴퓨터실 가야돼, 등의 형식적인 말들만 주고받았을 뿐, 어색한 사이에 그쳐 있었던 게 우리의 관계였다.
서론이 길었는데, 아무튼 우리는 이렇게 둘이 컵라면을 먹을 사이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색함이 가미된 당당한 제안에 으..응…이라 대답했고, 어느새 학교 앞 편의점에서 묵묵히 라면에 물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어떤 말들을 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냥 반 얘기, 공부 얘기. 라면을 다 먹고 운동장에 도착하니 갑자기 김민규가 제안했다. 벤치에서 얘기하다 가자. 젠장, 내 심장 박살난다, 김민규야. 아무리 가망 없는 게임, 내 망상에 불과한 현실이래도 당장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혹시? 를 생각하는 내 모습이, 그 때는 참 확률 있어 보였다. 그렇게 9시 30분에 시작한 김민규와의 벤치 데이트는, 예상대로 전 여친에 관한 얘기였다. 사귈 때 어땠는지, 왜 헤어졌는지, 지금 너무 힘들어서 공부를 못 하겠다 등등, 처음 말 터놓는 애한테는 쉽사리 하지 못할 말들을 마구 꺼내놓았다. 거기에 나도 여학생을 통해 전해들은 에피소드가 많으니 대화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흥분해서 온갖 얘기를 꺼내는 김민규도 우스웠지만, 거기에 동조하며 이야기를 잇는 나도 우스웠다. 다만, 이렇게 김민규랑 좀 더 오래 마주하고 싶었다. 말을 참 다정하게 했다. 마치 연인을 대하듯이, 그러나 그 내용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11시가 되어서야 철장을 닫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고 헐레벌떡 가방을 들고 학교를 나섰다.
교문을 나서며 너랑 얘기해서 좋았어, 월요일에 봐 원우야. 라며 씩 웃는 너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흔들며 느꼈다. 좆됐다. 마음 속 본능이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김민규와 사귀는 꿈을.
집으로 걸어가는 길, 계속 웃음이 새어나왔다. 김민규랑 얘기도 하고 위로하면서 손도 꼭 잡아줬다. 행복하다.
내 성 정체성을 깨닫고 난 후, 친구들과 간 놀이공원에서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회전목마를 탄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백마를 탔었고, 어린 마음에 생각했다. 나랑 인연을 맺을, 백마가 언젠간 꼭 나타날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환상은 접은 지 오래였던 고3의 전원우는, 잠시나마 그 백마를 상상했다.
2016년 6월 5일
고3에게 6월 평가원 모의고사란 무엇일까, 사실 만년 수시러였던 나에게는 6월 모의고사를 철저히 준비한다는 개념도, 시간도 없었기에 그다지 기대도, 부담도 없었다. 하지만 부담이 없어서인지, 살면서 본 모의고사 중 제일 잘 나온 성적에, 기분이 좋을 때였고, 그 사이에 이미 모두가 베프라고 생각하고 있게 된 나와 김민규는,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평소 고3이 놀러가는 걸 금기시 하는 저였기에, 고3이 되어 이런 일탈을 즐기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김민규가 저를 끌고 데려간 영화관에서 보기로 한 영화는 무려 [도리를 찾아서]. 김민규 19년 인생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고 운 영화가 [니모를 찾아서]라고 한다. 영화를 무척 좋아하고 취향이 확고했던 저는, 정말 보기 싫었으나 김민규가 보자는데, 거절할 틈도 없이 강제로 시청하게 되었다.
벤치에서 떠든 그 날 이후, 급속도로 친해진 우리 둘은 김민규의 일방적인 다가옴으로 친한 관계를 이어갔다. 참 다정하고 착했다. 친구들이 너네 사귀냐고 물어볼 정도로, 야자실의 내 옆자리는 아예 김민규 자리가 되었고, 김민규의 책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많은 얘기를 했고, 많은 만남을 가졌다. 김민규는 거침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우회해서 말하는 법이 없었고, 훅 훅 들어오는 화법이었다. 나와는 정 반대로. 덕분에 ‘너 같은 친구를 처음 사귄다’, ‘우리 학교에 미래를 생각하는 남자애가 너밖에 없다.’ ‘너는 여자애들이랑 얘기하면 되지만 나는 여자애들이랑 못 놀겠다’ 등, 껌뻑 죽을 속 마음을 계속해서 터놓는 민규였다. 대화의 레파토리는 늘 비슷했다. 전 여친 얘기와 자신감 섞인 한탄, 대학 얘기, 사실 그 반복되는 대화가 나는 조금 지겨울 참이었다. 그 새 쓰인 콩깍지 덕에 아직도 받아주고 있을 뿐. 처음에는 진지하게 받아주었다. 워낙 김민규가 농구를 좋아하고 모의고사를 잘 치른다는 사실밖에 알지 못했기에 김민규가 털어놓는 본인의 속마음과 가족사는 김민규를 향한 마음과는 별개로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 대화도 계속 이어나가다보면, 결국 상대방이 파악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동성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배운 건 눈치 하나였다. 덕분에 남의 마음과 성격을 남들보다 잘 간파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나의 능력이었다.
잘난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잘난걸 안다고 누가 그랬었는데, 정말 딱 그 짝이었다. 심지어는 지금은 인기가 많이 없어졌다며, 중학교 때는 킹카 소리를 달고 살았다고 말하는 김민규에게, 오만 정이 떨어질 법도 했지만, 그 대단한 얼굴에, 충분히 맞는 말이라며 나를 다독였다. 오히려 맞아, 너 생긴 거에 비해 지금 인기가 너무 없긴 해, 거기에 공부도 잘하는데! 라며 맞장구 쳐준 내가 대역죄인이 아닐 리가.
원래는 체대를 가고 싶었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하지만 주변에서 자꾸 넌 체대가기 너무 아깝다며 말린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도 고민이라며, 외교관이 멋져 보인다며 정치외교학과를 가고 싶다는 김민규에게, 그럼,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는게 맞지~ 라며 극히 형식적인 응원을 해 줄 뿐이었다.
전 여친 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마냥 불쌍해 보이기만 했지만, 결국에는 자기가 너무 아깝다는 둥, 니가 봐도 내가 차인 건 이상하지 않냐 며 동의를 구하는 김민규였다. 이런 성격에 깔려 있는 김민규의 자시감과 자존감,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자만심이, 점점 귀찮아지는 저였다. 김민규의 성품이 나쁜 게 아니었다. 다만 필터가 없이 말을 밖으로 꺼내는 게 문제인 것이지, 너무 솔직한 게 죄라면 죄였다.
영화는 나름 볼만했다. 물론 내가 내 돈 주고 볼 영화는 아니었지만, 니모를 추억하기에 꽤 적합한 영화인 듯 했다. 영화가 끝나고 패스트푸드 점을 들렀다. 역시나 대화의 화두는 6평과 또 김민규의 여자관계였다. 점점 비참해짐을 느꼈다. 예상은 했지만, 결국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는 걸. 김민규도 역대 급으로 잘 봤다고 한다, 대체 6평을 왜 재수생 들어온다고 조심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며, 우리 반만 보더라도 애들 공부 진짜 열심히 하는데, 왜 다들 저보다 못 하는지 모르겠다며, 악의는 전혀 담기지 않은 막말을 서슴없이 하는 김민규였다. 그 열심히 하는데 저보다 못 하는 애에 내가 포함 된다는 걸 알고 저러는 건지, 모르고 저러는 건지, 다시 한 번 김민규의 얼굴에 감사하는 저였다. 너는 얼굴 아니었으면 진작 절교하고 남았다. 덕분에 두 배로 비참해지는 저였다. 중학교 때부터 매사에 열심히 하고 노력한 저였다. 학원은 일체 다니지 않고 온전히 저의 힘으로 노력해,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그다지 높은 성적이 아니었지만, 2학년 때부터 치고 올라와 지금의 성적과 등수를 가질 수 있던 저였다. 그런 저의 노력과 프라이드를, 한 번에 뭉개버리는 김민규가 참 원망스럽고 서러웠다. 그래, 머리 좋아서 좋겠다. 김민규는, 모든 게 쉬웠다.
김민규의 말처럼, 김민규는 지지리 공부를 안 했다. 뻑하면 자기 일쑤에, 점심시간 마다 농구하고 5교시는 또 꼭 잤다. 아니면 졸려서 뒤에 나가 공부하고 있는 저에게 다가와 장난을 치거나. 선생님들도 의아해 하는 부분이었다. 대체 쟤는 왜 공부를 잘 할까? 그러나 이유는 없었다. 다만 다른 아이들보다 이해력이 월등히 높을 뿐, 열등감을 가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다만 조금 서럽다 뿐이지,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김민규는 자존심이 세다. 장난 식으로라도 자신을 무시하는 투의 말을 들으면 정색을 하고 화를 낸다. 덕분에 김민규의 그 말들을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는 저였다.
이번엔 중학교 때 사귀던 여자애가 연락이 온단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며 저에게 묻는 김민규를 보며 그냥, 또 한 층 더 서러워졌다. 당연했지만, 얘는 정말 나를 친구로만 생각한다는 사실이 밀려왔다. 이럴 때는 끝도 없이 자괴감에 빠져든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에 대한 자문, 그리고 자격지심.
그렇게, 6월의 하루가 지나갔다.
2016년 9월 10일
힘이 들 땐 늘 나를 찾는 김민규였다. 처음에는 반가웠다. 김민규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자체가, 비단 김민규가 아니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저의 배려로만 이어지는 관계라면, 싫었다. 다시 말하지만 김민규는 내신을 챙기는 놈이 아니었고, 모의고사만 챙기는 놈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신에 목숨을 걸어야 히는 놈이었다. 성적이 막 높은 편이 아니라 더더욱, 하지만 김민규는 그런 배려가 없었다. 내신 2주 전이고, 1주 전이고, 야자실에서 공부를 하는 저를 불러 몇 시간동안 수다를 떨기 일쑤였다. 이제 2학기가 되어 별다른 상관은 없다지만, 그걸 거절하지 못한 저도 참 바보 같았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김민규는 배려가 없었다. 남의 기분이 좋고 말고는 상관하지 않았지만, 저의 기분이 나쁘면 남이 꼭 맞춰줘야 했다. 이 때 즈음인가, 지금까지 콩깍지로 버텨온 자칭 김민규 보호자의 자리가, 너무 귀찮고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저의 모의고사 성적이 조금 오르기 시작하자, 나를 대하는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7월 모의고사 수학을 96점을 맞아 전교 2등을 한 적이 있었다. 만년 2등급이었던 저에게 1등급도 행복했지만, 1등급 컷이 88점이었던 시험인 만큼 두 배로 기뻤다. 김민규는 늘 저에게 성적을 말하며 칭찬을 바랐기에, 저도 김민규에게 자랑스레 성적을 얘기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김민규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100점이 한 명밖에 없는 거냐며, 우리학교가 공부를 진짜 못하긴 한다는 말이, 화가 난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비단 이 한 가지 경우가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마음이 비좁은 아이였다, 김민규는.
생각해보면 그랬다, 중학교 때부터 엄친아 소리를 들으며 자라온 김민규를, 누군가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고 폄하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김민규가 입이 닳도록 말하는, ‘이런 얘기 하는 친구가 너밖에 없어.’라는 말처럼, 김민규의 친구들은 모두 밝고, 농구만 하는 친구들이지, 저처럼 공부를 하는 친구들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기를 기대하는 건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았다. 의외의 온실 속 화초였고, 작은 역경도 없이 자라온 터였다. 조금 열심히 하면 나오는 게 2등급 아니냐며, 만년 영어 3등급인 저를 또 비참하게 하는 김민규는 그 말처럼, 뭐든 조금만 하면 다 이뤘다. 그게 공부든, 연애든, 운동이든, 사람의 마음이든. 일단 호감형인 이미지가 가장 컸다. 때문에 나는 더 힘들었다. 김민규가 이런 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오직 저밖에 모르는 것이었다. 그 부분이 가장 힘들었고, 속은 계속 문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김민규는 퍽 다정하게 굴었다. 지나가는 애들마다 니네 사귀냐? 라며 장난스레 물었고, 그 때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김민규에 혼자 설레는 건 또 제 몫이었다. 이 설렘과 비참함의 반복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평소 스킨십을 좋아하지 않는 김민규가, 저를 껴안거나 할 때면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며 설레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사실 김민규는 모두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뿐이었다. 다만 이렇게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상대가 나뿐이었을 뿐, 여자애들이 왜 김민규에 환장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대화며 카톡이며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게 대화하는 김민규에 결국 또 죽어나는 건 저였다. 여기엔 또 남자애들한테는 틱틱대는 김민규의 행동이, 저의 샅날같은 희망을 계속해서 잡고 있게 만들었다. 늘 저의 자리에 찾아오는 건 김민규였고, 덕분에 친구들이 저를 나무라기도 했다. 너도 좀 김민규 자리에 찾아가고 그러라고. 이렇듯 또 겉으로는 나만 나쁜 놈이었다. 내가 김민규에게 가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나눌 대화가 없었다.
9평이 끝나고, 평소 모의고사가 잘 나오는 김민규는 당연히 논술로 가장 높은 최저등급을 갖는 대학에 지원했고, 논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1달 전에 시작하는 논술로 참 잘도 붙겠다, 싶었다. 저도 1년 동안하고 있고, 학원에서 매번 칭찬만 들어왔기에 논술이 1달 배운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민규가 누구인가, 남들이 포기하라고 하는 것도 해내는 게 김민규 아니었는가, 결국 1달 동안 예민의 끝을 달리며 논술에 시간을 투자한 결과, 잘 쓴 것 같다는 김민규의 카톡을 받았다. 김민규가 똑똑한 것이었다. 저는 똑똑하지 못해 늘 열심히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고, 또 노력은 언제나 빛을 본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건, 김민규를 알고 나서였고, 갈수록 저의 노력이 하찮게 느껴졌다. 이게 뭔가, 싶었다. 분명히 김민규를 향한 애정으로 시작한 나 혼자만의 연애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더 이상 김민규에게서 백마는 보이지 않았다.
김민규의 논술이 끝난 기념으로 또 치킨을 먹으러 갔다. 수시원서 접수는 끝난 지금, 남은 건 수능공부가 전부였고, 수시로 붙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지만, 수능에도 집중하고 싶었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되는 건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반면 김민규는 너는 수시로 붙을 건데 무슨 수능 공부를 하냐며 칭찬 섞인 합리화를 시켜줬다. 덕분에 또 시작되는 김민규의 전 여친 이야기, 이제 이 정도면 먼저 그만둘 때도 됐는데 정말 지치지 않고 이어지는 전 여친과의 파란만장 연애 스토리였다. 아, 김민규의 전 여친과 나의 관계는, 쉽게 말하자면 망했다. 하긴, 저라도 전 애인과 친해진 저의 친구와 예전같이 지낼 수 있을까, 싶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김민규의 전 여친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혹시, 걔라면 김민규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지 않을까. 혹, 헤어진 이유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 때문이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혹시나, 아직도 좋아하고 있으면 어떡해.
성의 없이 김민규의 푸념에 맞장구 쳐 주었다. 아, 이러면 김민규 또 기분 상해하는데, 예전이었으면 다시 적극적으로 대꾸해주며 기분 상할 틈이 없게 했겠지만, 지금 나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더 이상 순애보는 없었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얼굴에 껌뻑 죽는 저를 저 대단한 얼굴로 지치게 만든 김민규도, 참 대단한 놈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냥, 입시만으로도 지쳤을 때였는데, 잘생긴 놈 좋아하는 것 때문에 참 고생했다, 싶었다. 빨리, 이 입시가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더불어 김민규와의 관계도.
2016년 11월 18일
수능 다음날이었다. 그동안 지친 나는, 김민규에게 벽을 치기 시작했고, 김민규도 사람인지라 눈치는 가지고 있어서, 예전처럼 치대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의 관계가 더 어색하게 변했다는 점이 또 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오긴 했지만, 이제 다 끝날 일이었다. 수능은 평소보다 조금 더 못 본 정도였다. 다만 오늘 확정된 등급을 보자, 수학이 1등급이 아니라 2등급으로 내려간 덕에, 논술로 넣은 두 대학이 모두 최저에서 탈락해 버렸다. 엿 같았다. 1년 동안 논술학원에서 고생하며 노력했던 시간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아직 수시는 남아 있었다. 학생부종합의 위력을 보여줄 수 있다며 바람을 넣은 주변 선생님들과 친구들 덕에 다채롭게 지원한 저였다. 그다지 관심 없던 김민규의 성적도 알게 되었다. 누가 봐도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저에게 다가온 김민규는, 다짜고짜 옆에 있던 주차 방지용 고깔을 발로 차 부셨다.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저에게, 김민규는 성적을 줄줄이 말해주었다. 평소보다 훨씬 떨어진 점수에 저도 놀랐다. 그래도 두 군데 논술 최저는 맞췄다고 한다. 다만 평소보다 너무 못 나온 성적에 화가 단단히 난 듯 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저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차고 다니는 김민규에게, 이제 귀찮음을 넘어 혐오감까지 들기 시작했다. 그래, 실패란 없는 김민규의 얼마 안 되는 인생에서 처음 겪는 실패겠지, 저도 평소보다 못 나온 성적에 우울한 건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등급의 조합에 따라 같이 지원한 학교도 저는 최저를 못 맞췄지만, 김민규는 맞출 수 있었다. 나도 망했다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저에게, 니는 수시로 갈 건데 뭐가 걱정이냐며 소리를 지르는 김민규에게, 이제 정말 지쳤고, 미운 정마저 사라졌다. 내가 왜 이런 놈을 맞장구 쳐주고 있는 건지, 제가 한심했다. 이후로 나는 바빴다. 학생부 종합으로 지원한 남은 4개의 학교 중 3개는 탈락했지만, 가장 적합했던 1개의 대학을 1차 합격해 면접학원을 다니고, 또 등급 컷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었기에 논술학원도 다녔다. 결과는 처참했다. 믿고 있던 학교는, 결국 내 앞에서 예비번호가 끝났다. 허탈했다. 내 3년간의 고생이 머리를 스쳐갔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막막함이 가슴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2017년 2월 9일
졸업식 이었다. 그 날 이후로 서로 연락을 완전히 끊었다. 그 사이, 나는 재수결심을 했고, 2월 말 부터 학원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학교에 오니, 모두들 대학을 잘 간 모양이었다. 전교등수로 딱 저부터 수시 입시에 실패했다고 한다. 그 점이 또 서러웠다. 졸업식에서 마주친 우리였지만, 서로 지나칠 뿐이었다. 정신없이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주말에 만날 약속을 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자 했다.
학원에 가려니 9월 모의고사 성적표가 필요해 담임에게 가 성적표를 요청했다. 정말 너무 안타깝다며, 다른 애들도 아니고 네가 대학을 못 가다니 대학 눈이 다 썩었다며 저를 위로해주는 선생님과 교무실 선생님들에게, 다시금 희망을 얻는 저였다. 원우야, 네 노력은 정말 아무도 무시 못 할 거야, 라며 제 손을 잡아주시는 선생님에게 감동을 받으려는 찰나, 민규가 잘 위로해 주니? 라며 저에게 묻는 터에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선생님을 바라봤다.
“민규 말 없니? 민규 00대 경영학과 논술로 붙었다고 연락 왔길래, 너 위로 좀 해달라고 전했는데…”
아이고다, 주변 사람들은 다 이렇다, 아직도 베스트프렌즈겠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거기에 전혀 알고 싶지 않은 김민규의 수시 성공 얘기까지 듣게 되었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교무실을 나오자 수시를 다 떨어졌을 때보다, 재수 결심을 했을 때보다 훨씬 큰 서러움이 저를 휘감았다. 이를 열등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대학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 싶지만 사실 중요한 부분임은 옳았다. 대학들이 미웠다. 왜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 나를 뽑아가지 않았는지, 더불어 왜 김민규 같은 애를 뽑았는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저의 삶에 대한 강한 회의가 들었다.
2017년 2월 20일
같은 반 친구들과 치맥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적당히 꾸미고 나와 역으로 나왔건만, 어디냐고 묻는 내 카톡에 단톡방은 조용했다. 제 말을 무시해버리는 친구들에게 역 근처 피시방에 가 있겠다고 카톡을 보내고 오랜만에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20분 쯤 지나자 옆에 보기로 한 친구가 앉았다.
“화났어 원우?”
“뭐래…가자 치킨…”
조금 짜증났지만 화난 티를 안 내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씨발, 친구 뒤에 김민규가 서 있었다. 어색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친구 두 놈과 김민규,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친구 놈들을 패고 싶었다. 괜히 가자가자! 를 외치는 친구 놈의 머리통이 그렇게 짜증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눈치밖에 없었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셋을 따라 나섰다.
약속이나 한 듯 쪼르르 먼저 앉는 친구 놈들 덕에 김민규 옆에 앉아야 했다. 김민규는 어색하기만 했겠지만, 나는 정말, 좆같았다. 달갑지 않은 얼굴이다, 김민규는. 평소에는 멋 낼 줄 모르더니 대학생 됐다고 코트를 차려 입은 김민규가 멋있기보다는 같잖았다. 한 번 싫어지면 그 감정은 종잡을 수 없이 커지기 마련이었다. 다행이 모두 같은 반이었기에 대화가 없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화기애애한 이야기로, 크게 불편함 없이 넘길 수 있었다. 저의 눈치와 상황파악, 포커페이스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김민규였다. 앞서 말했지만 김민규는 말에 돌아가는 법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저와 어색한 사이라는 걸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술을 마시면 그게 아니라는 걸 생각하지는 못했다. 자리를 옮겨 근처 이자카야로 들어갔다. 그렇게 또 몇 시간이 지나고, 지난 고등학교 생활을 추억삼아 한 잔 한 잔 들이키니 다들 멀쩡하지는 않은 상태가 돼버렸다. 두 놈이 화장실을 가겠다고 빠지니, 남은 건 저와 김민규, 둘이었다. 숨 막히는 어색함이 계속되다, 김민규가 또 돌직구를 날렸다.
“너 왜 나한테 철벽 쳐?”
속으로는 온갖 욕이 난무했다, 이 개새끼야, 철벽을 치는 걸 느꼈는데 쳘벽 치냐고 묻는 건 어느 나라 법도야. 하지만 나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얼버무렸다.
“뭐래... 철벽은 무슨...”
“우리가 작년에 어떻게 지냈는데...”
지랄하네, 혼자 로맨스 드라마를 찍고 앉았다. 이제 안 넘어간다, 그 다정하고 소설에서 나올법한 말들, 어떻게 지내기는, 존나 힘들게 지냈지. 작년의 기억이 아예 다르게 남아 있는 김민규와 내가, 접점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 때 돌아온 친구 놈들이 맞아! 너 왜 민규랑 내외해? 겁나 붙어 다니더니! 또다, 나만 나쁜 놈 되는 마녀사냥, 그러려니, 하는 심정으로 가만히 안주로 나온 어묵을 들어 입에 쑤셔 넣었다.
“철벽 아니면, 다음 주에 나랑 만나.”
“...그래.”
깜빡했다. 김민규가 이런 애라는 걸.
그렇게 헤어진 후, 깊은 고뇌에 빠졌다. 다음 주에 만나면, 대체 어떻게 말을 이어가지? 머리속이 너무 복잡했다. 왜, 그냥, 차라리 잔잔하게 재수나 하게 해줘라 김민규새끼야, 끝까지 괴롭히는 김민규에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솔직히 말하자, 였다. 지금 김민규가 이렇게 싫어도, 말했다시피 김민규는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었다. 사실 성격 자체는 착한 거지, 누군가를 저렇게 좋아해주는 것도, 다 그 성품에서 나온 거니까. 다만 눈치와 판단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서 저렇게 짜증나는 거라는 결론에, 이렇게 된 거 김민규에게 선심을 베풀기로 했다. 내가 느낀 감정들을 그대로 전하기로. 김민규도 상황이 답답하긴 할 거다, 본인은 잘 지내는 줄 알았던 애가 갑자기 연락 끊고 철벽 친다고 느꼈으니, 그 오해 아주 단단히 풀어주겠노라 다짐하고 김민규의 연락을 기다렸다.
2017년 4월 6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김민규의 생일이었다. 나에게는 목요일, 그냥 학원을 가는 날이었다. 아, 화창해진 날씨에 마음이 더 뒤숭숭하기는 했다. 당차게 만나자고 외치던 김민규는, 결국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의아했지만, 나야 좋은 일이었다. 김민규한테 그런 말을 했다가는 김민규 자존심에 아주 커다란 스크래치가 나서, 나를 때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으니, 그냥 이렇게 서로 잊히지를 바란다. 재수는 생각보다 끔찍하지는 않다. 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더 높은 학교를 목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중이다. 대학이 종국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지만, 일단 현실이 그런 걸, 하고 체념해 높은 곳에 올라가 다 조져놓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공부 중이다. 더불어 유치하지만, 김민규 보다는 높은 곳을 가겠다는 아주 확실한 목표의식이 있기에, 공부가 하기 싫은 날이면 김민규랑 한 카톡을 본다. 그럼 곧, 내 노력이 불쌍해서, 다시금 공부하자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지금도 언젠가 김민규가 다짜고짜 만나자고 연락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김민규는 그런 놈이었으니까, 이따금 생각하면 가여웠다. 나도, 김민규도, 서로 뭘 안다고 그렇게 힘들어 했을까, 어찌 보면 내 자존심이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는, 의미 없는 추억미화를 하는 중이다. 학원 창틀에 몸을 기대고 밖을 쳐다보니 이제 정말 봄이었다. 지도 꼭 지 닮은 계절에 태어났네, 다정한 성격 하며...라며 기분 좋은 생각을 하다, 오늘 아침에 본 미세먼지 경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미세먼지 같은 새끼였지, 김민규는.
점심시간에 고등학교 친구가 전화가 왔다. 아직도 간간이 저를 구제해주는 친구들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며 전화를 이어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김민규 소식을 또 접하게 됐다.
[김민규 여친 생긴 거 알지? 오늘 놀이공원 간다더라, 지금 카톡으로 존나 자랑중임.]
“아... 놀이공원, 놀이공원 갈 날씨네, 그러고 보니까.”
[지 생일 기념이라던데, 아 너는 김민규 생일축하 해줬냐? 너가 안 해주면 걔 되게 섭섭해 할 것 같은데, 걔가 어지간히 널 좋아했어야지.]
신경도 안 쓸 거다, 친구야. 내가 얘한테도 김민규 싫다고 말 안 했구나, 사실 김민규가 싫다고 말해봤자 손해는 온전히 저의 몫이었다. 김민규가 싫다고? 걔 되게 착해 보이는데... 야 김민규가 맨날 너 챙기잖아, 같은 소리만 귀에 박히도록 들을 것이 뻔했다.
[어, 이새끼 지금 회전목마 탄다고 사진 찍어 보냄, 이 나이 먹고 회전목마는 무슨...]
문득, 김민규랑 처음 대화를 했던 날이 생각났다. 그 때 나, 아마 회전목마에 있는 백마가 김민규 같다는 생각을 했었지, 제 과거의 생각이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전원우야, 백마 다 죽었다.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가볍게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로 꽤나 좋아했던 모양이다, 김민규를.
“날씨 진짜 끝내준다.”
완연한 봄이었다.
이제 마음속에, 더 이상 백마는 없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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