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여행이야!
 
바글바글한 입장 줄을 엄청 엄청 기다려서 겨우 안으로 들어왔더니 둘러보고 어쩌고 할 새도 없이 뛰어! 하는 누군가의 외침에 다 같이 우다다 달렸다. 왜 뛰는데 왜! 맨 끝에서 겨우 따라 붙으며 외치는 원우에게 답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쟤들도 아마 다 모르고 뛰는 모양이다. 둘러보니 남들도 다 뛰고 있다. 다들 왜 뛰는데 도대체!
 
원우야! 앞만 보고 뛰는 원우를 잡아챈 건 준휘였다. 아니었음 지구 끝까지 갈 뻔 했다. 여기 서야 돼. 준휘가 세워주는 대로 멈춰서 땀이 솟은 이마를 닦아내며 둘러보자 먼저 뛰기 시작한 순영과 승관은 죄다 원우 눈을 피하느라 바쁘다. 이거 누가 오자 그랬냐. 물어봐도 다 못 들은 척. 응, 이거 얘네 둘이 오자 그랬어! 해맑은 준휘의 대답에 순영이 괜히 헛기침을 한다. 형, 여기만 지나면 돼요. 진짜 여기만 지나면 돼요. 승관은 그 말을 스무 번째 하고 있다.
 
일본 한 번도 안 가봤으니까 다 같이 가자는 것까진 좋았다. 와글와글하게 시작된 인원이 줄고 줄더니 결국 남은 사람이 순영, 준휘, 승관, 그리고 원우 이렇게 네 명 뿐이었다. 그때 빠졌어야 했는데, 세 명이면 호텔도 애매하고 어쩌고, 우는 소리 하는 승관을 이기지 못한 게 잘못이다. 계획 없는 애와 계획을 잘못 세우는 애와 그저 해맑은 애, 그리고 게으른 나.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시작부터 불안했는데 왜 따라왔지….
 
힐링하자고 온 여행인데 첫날부터 고행 중이다. 자고로 힐링이란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시간 보내는 건데 호텔에 짐 풀자마자 시내 관광을 핑계로 하루 종일 걸었다. 그리고 오늘은 새벽 여섯 시부터 승관이 카톡을 하고 룸으로 전화를 해댔다. 형들 빨리 일어나요. 우리 유니버셜 가야 해요.
 
오사카까지 와서 유니버셜 스튜디오 안 가는 건 오사카에 온 게 아니에요! 거기 가면 스파이더맨도 있고 미니언즈도 있어요! 스파이더맨에 솔깃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이게 이렇게 고생스러울 줄은 몰랐다. 심지어 가위바위보를 져서 스파이더맨은 삼순위로 밀렸고 해리포터부터 보기 위해 이 긴 줄을 계속해서 서고 있는 거다.
 
“이거 줄 서면 이제 해리포터 보러 들어가는 거야?”
“음…, 어….”
 
순영과 승관이 서로를 바라본다. 아니야? 눈썹 끝을 구기며 물었더니 아니, 아닌 건 아니고. 하고 순영이 손을 내젓는다. 아닌 건 아닌 게 뭐야. 말꼬리를 잡자 어어. 하고 또 둘이 서로 바라보고.
 
“그니까, 해리포터관에 들어가려면 확약권을 사야해갖고,”
“…그거 사는 줄이라고?”
“형, 이게 입장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갖고 지금 안 사면 엄청엄청 늦게 들어가야 해요.”
“…….”
 
말 할 기력도 없다. 입 딱 다물고 바라보고만 있었더니 은근히 시선을 돌린다. 원우야, 그래도 오늘 날씨 좋잖아! 준휘가 해맑게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 너무 좋아서 덥다, 임마.
 
입장에만 삼십 분이 더 걸렸는데, 확약권인지 뭔지 또 줄을 서서 기다린다. 지쳤다, 지쳤어. 너무 지쳤다. 걸을 힘도 없는데 줄이 은근히 멈추질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이니까 어디 앉아서 쉴 수도 없다. 시계를 자꾸 보니까 더 시간이 안 가서 어느 순간부터 안 보기 시작했다. 날씨는 정말 좋다. 정수리 뜨거울 정도로. 원우는 지쳐서 말을 잊었는데 나머지 셋은 그저 해리포터 본다는 생각에 신이 나는 모양이다. 시원한 거 마시고 싶다. 호텔가서 자고 싶다….
 
손끝으로 팔랑팔랑 부채질을 하다 문득, 저쪽에 눈이 닿았다. 긴 줄과는 좀 떨어져서는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 해리포터 보러 왔다고 자기가 해리포터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망토인지 가운인지 아래쪽이 바닥에 다 끌리고 있었다. 저런 거 뭐라 그러더라, 코스프레?
 
저거 봐. 준휘를 툭툭 두드려 손으로 가리키자 어, 뭐야, 해리포터야. 하고 준휘가 깔깔 웃었다. 알바인가 봐, 더운데 고생하네. 순영과 승관도 돌아보았지만 이내 관심 끄고 셋이 떠들었다. 원우도 눈을 돌렸다.
 
근데 또 돌아보게 됐다. 할 게 없으니까 괜히 눈이 가서. 쪼그리고 앉아서는 땅바닥에 두 손을 모으고 있다. 뭐 하는 거지. 초점을 맞춰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했다. 아이참. 삐죽하게 나온 입모양이 보인다. 땅바닥에 모으고 있던 두 손을 거두고 푸르르 턴다. 그 사이에 손 아래 가려져 있던 게 보였다. 새. 자그마한 참새.
 
손을 좀 풀더니 새를 두 손으로 감싸 든다. 저렇게 건드리면 날아갈 만 한데 미동이 없는 걸 보니 괜히 찜찜하다. 뭐야, 죽은 거야, 죽인 거야. 미간이 꾹 찌푸려졌다. 이 더위에, 저런 옷 입고, 동물 죽이는 미친놈인가? 저거 신고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파르륵, 손 안에 있던 새가 움직였다. 어? 눈이 커다래졌다. 분명히 꼼짝도 안 했는데. 손바닥 위에서 날개를 팔락팔락 거리더니 이내 포르르,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야, 봤어? 다급히 준휘를 두드려 가리키자 어, 봤잖아, 알바. 한다. 새 살아난 것도 봤어? 눈이 커다란 채 돌아보자 뭔 소리야. 하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 저 사람이 새 살렸어. 손에 이렇게 쥐고서. 죽었는데 날아갔어. 살아서. 횡설수설하니까 준휘가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왔다. 원우야, 덥지.
 
“나 잠깐만.”
“형, 어디 가요!”
 
자리에서 일어나 흙이 묻은 옷자락을 탁탁 터는 사람을 향해 뛰어갔다. 저기요! 금방 사라질 것 같아서 불렀는데 못 들었는지 안 들리는지 휙 돌아서서 걷는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아무도 없는 것처럼 거침없이 걸어가서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놓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열심히 따라가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조바심이 다 난다.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걷던 남자가 문득 몸을 틀어 길이 없는 풀숲으로 사라졌다. 어어. 급한 마음에 후다닥 달려갔다.
 
이게 뭐야. 마찬가지로 길이 없는 풀숲으로 들어서자마자 멍하니 굳었다. 나무들 사이에서 이미 공중으로 떠오른 아까 그 사람. 무려 빗자루를 타고. 나 이거 무슨 꿈꾸는 건가. 멍하니 있다가 점점 높아지는 빗자루에 일단, 손을 뻗었다. 콱, 움켜쥐니까 손바닥 안에 분명하게 까슬거리는 빗자루가 잡힌다. 붙잡았는데도 계속 떠오르는 걸 나머지 손도 뻗어 두 손으로 잡았다. 야, 너 뭐 하냐. 머리 한 쪽에선 내내 의아한 물음이 끊이질 않고, 다른 한 쪽에선 일단 잡고 보자, 싶고.
 
등을 보인 채 빗자루에 탔던 사람은 뭔가 이상하다 싶은지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하게 돌아보았다가 빗자루 끝을 두 손으로 붙잡은 채 낑낑거리는 원우를 발견하곤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뚝, 바닥으로 떨어진다. 바람에 잡아당기던 힘 그대로 원우는 뒤로 넘어져버렸고. 완전히 나동그라진 원우를 보고 뭐라고 묻는데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야야. 뒤늦게 엉덩이에서 아픔이 밀려온다.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키려니까, 그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뭐라고 말하는데 여전히 못 알아듣겠고. 생긴 건 동북아시아인데 중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니고, 도대체가 모르겠다.
 
아무튼 내미는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봤는데. 저쪽에서부터. 말이 안 통하니까, 손짓발짓을 하며 새 살리던 걸 시늉했더니 눈이 또 커다래진다. 뭐라고 또 못 알아듣는 언어로 막 말을 하다가 아. 하고 멈추더니,
 
문득 손을 뻗어 손끝으로 원우의 입술 위를 눌렀다. 뜨끈한 체온이 갑자기 입술을 눌러서 깜짝 놀라 물러나자 잠깐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다. 눈을 깜빡거리면서, 다시 한 번 입술 위로 손이 올라왔을 때는 그대로 기다려 주었다. 손끝으로 입술을 가볍게 누른 채 눈을 감더니, 뭐라고 중얼거린다. 삼 초? 오 초?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더니,
 
“아, 이 말이구나.”
 
다시 눈을 떴을 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한다. 이건 어느 나라 말이에요? 해맑게 웃으면서 물으니까 눈만 자꾸 깜빡거리게 됐다. 한국말 알아요…? 계속 현실인데 믿을 수가 없어서 더듬거렸더니 한국말이구나아. 한다. 아는 거 아니고, 베꼈어요. 이렇게 하고 주문 외우면 베껴올 수 있어요. 원우의 입술을 눌렀던 손끝으로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떼며 가르쳐 준다. 가르쳐 준다 한들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지만.
 
“근데 나 보였어요?”
 
검지로 제 얼굴을 가리키며 물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보이면 안 되는데. 주문 잘못 외웠나봐. 말은 되게 큰일 난 것처럼 하는데 얼굴은 여전히 해맑다. 자꾸 그러니까 안 믿기는데 믿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어, 그쪽이,
 
“…마법사에요?”
“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안 믿기는데 믿겨….
 
아까 걔는 다리가 부러져서, 뼈를 잇는 마법이 있거든요. 그거 해봤어요. 처음에 잘못 외워서 뼈가 녹았다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눈이 너무 진지하고, 반짝거려서 아무것도 거짓말 같지가 않다. …다른 것도 할 줄 알아요? 물었더니 네! 하고 또 힘차게 대답했다.
 
“마법 보여줄까요?”
 
천진하게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작은 것부터…. 하며 손바닥을 펼친다. 눈을 감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니까 손바닥 위에 물방울이 떠오른다. 조금씩 조금씩 커지는 둥근 물방울에 우와. 하고 눈이 커다진 원우에게 받아보라고 그런다. 얼른 두 손을 내밀었더니 물방울을 넘겨주자마자 손바닥 위로 툭 떨어져 펑 터졌다. 손이 다 젖었는데 그게 뭐라고 엄청 웃기고.
 
지잉지잉, 주머니에서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어서 꺼내들었더니 애들이 다 난리가 나 있다. 이거 인원수 안 맞으면 아예 못 들어가요. 울면서 보내놨는데 무시할 수도 없고, 돌아가야만 했다. 친구들이 기다려서…. 이번엔 손바닥 위에 불꽃을 만들어 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더니 아. 하고 주먹을 쥐어 불을 끈다.
 
“가야 돼요?”
“…….”
 
그래봤자 십여 분 마주 앉아 있었을 뿐인데 엄청 서운한 표정을 한다.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 하고 있으니까 괜히 걸음이 안 떨어지고. 같이 갈래요? 질문은 입술 안쪽까지 올라왔는데 확약권인지 뭔지 그거랑 사람 수 안 맞으면 안에 못 들어간다 그랬으니 데려가기도 애매하다. 그전에 애들한테 뭐라고 설명해. 이 사람 아까 저기서 쪼그리고 앉아 있던 사람인데 알바 아니고 마법사래. 나 같아도 안 믿을 소리다.
 
“나 이름 하나 지어줄래요?”
 
핸드폰은 계속 울리고, 혼자 갈 수는 없고,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데 문득 그런다. 이름? 눈이 동그래져서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한국 이름. 근데 이름이 뭐예요? 그때까지 통성명도 안 했다. 전원우예요. 이름을 가르쳐주자 입안에서 굴리듯 몇 번 불러본다. 이름 뭐예요? 되물었더니 긴 이름을 말하는데 못 알아듣겠다. 어렵죠. 눈치 채고선 웃으며 물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한국말로 이름 지어줘요. 제일 좋아하는 걸로.”
 
뭐 좋아해요? 이거? 이런 거? 주변의 풀이나 꽃 같은 걸 손으로 가리킨다. 이게 뭐라고 고민을 하게 되고, 이게 뭐라고,
제일 좋아하는 거 말고, 제일 좋아했던 건 떠오른다. 제일 좋아했던 이름.
 
“…민규 어때요?”
“민규?”
“김민규.”
“좋아요.”
 
무슨 이름인지도 모르면서 활짝 웃는다. 괜히 입 밖으로 꺼냈지. 떠올리니까 기분이 가라앉았다. 자, 이제 그러면. 하나도 안 닮았는데, 웃고 있는 얼굴을 보는 게 어쩐지 어려워져서 눈을 내린 원우의 입술 위로 다시 한 번 손끝이 닿아왔다. 내가 주문을 걸게요. 입술을 누른 채 눈을 감는다.
 
“나중에 내가 보고 싶으면, ‘김민규’ 세 번 부르면 돼요. 그럼 내가 찾아갈 수 있어.”
“…….”
 
역시, 괜히 말했다. 갈게요. 아직 손끝이 입술 위에 머물러 있는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가요. 앉은 채로 고개만 올려 인사를 한다. 가지 말라는 소리를 한 번을 안 하네. 당연한데 서운하게.
 
그래봤자 몇 미터 움직이지도 못 했으면서 원우가 나타나자마자 어디 갔다 왔냐고 난리다. 그냥, 잠깐. 어설프게 둘러대고 사이에 끼어들었다. 김민규. 너무 오랜만에 불렀다. 뭐에 홀려서는, 덜컥, 괜찮을 줄 알고. 옅어지기만 했지 여전히 그대로인데, 겁도 없이.
 
 
 
 
 
 
 
 
 
 
 
 
 
네 이름은 김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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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람에 다 망쳤다. 힐링 핑계로 괜히 따라갔다가 힘들기만 힘들고, 다 지나간 일이 파도처럼 덮쳐 와서 다녀온 후로 한동안 무기력증 비슷한 게 왔다. 우울한 건 아닌데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거. 며칠을 멍하니 지냈다. 왜 그랬지, 바보 같이.
 
지나고서 생각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가 막혔다. 마법이라니. 눈속임 같은 걸 텐데 홀딱 빠져서는 우와, 우와, 어린애처럼 감탄하면서 신기해 한 게 뒤늦게 창피했다. 사람을 뭘로 봤을까. 손바닥 위에서 툭 터진 물방울은 진짜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진짜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이상한 언어로 얘기하던 것도, 애초에 한국 사람인 거 알고 놀리려고 그런 건지 알 게 뭐람. 생각해보면 거기 그런 망토 입은 사람 천지였는데 그 사람이 뭐가 특별했다고 그렇게까지 쫓아갔나 싶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면서 뛰던 걸 생각하면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근데 남아 있는 감촉들은 다 진짜라서, 어이없다가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따라오긴 하는 거다. 물방울이라든지, 빗자루라든지, 입술을 누르고 있던 손끝이라든지. 그런 느낌들은 다 너무 생생해서. 설마 혹시 정말로, 싶은 마음이 자꾸 들었다.
 
세 번 부르면 돼요. 그럼 내가 찾아갈 수 있어. 걸어놓은 주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세 번 불러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부를 수가 없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서. 첫사랑이 다 그러니까. 아프고, 안 이루어지고.
 
 
 
 
 
 
 
 
 
 
 
일주일 정도 지나고서 그 멤버가 다시 모였다. 형,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유니버셜 스튜디오 이후로 계속 컨디션이 저조한 걸 제일 신경 썼던 승관이 보자마자 울상이다. 아니야. 손을 내젓고 앉긴 앉았다.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연락도 잘 안 되고 걱정 엄청 했잖아. 순영이 말하는 동안 승관은 울상인 채로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엄청 걱정했어요. 형 오늘도 안 나오면 집에 쳐들어갈라 그랬어.
 
원우 때문에 모인 것 같더라니 주제가 순영의 연애사로 흘러갔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술이 술술 돌고. 남의 연애사에 참견할 상황이 아니라서 도는 술을 받아 마시기만 했더니 좀 일찍 취했다. 다른 때 같았음 이미 테이블에 이마 박고 잠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취한 건 알겠는데 잠이 오진 않아서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셨다. 야, 원우 취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준휘가 저를 가리키는데 손끝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질 않는다. 취했다. 나 갈래. 더 있다간 얘네한테 민폐라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갈 수 있냐고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보니 죄다 취했다.
 
비틀비틀 나와서 비틀비틀 걸었다. 버스 타면 멀미할 것 같아서 택시 타는 데까지만 걷자 싶었는데 걷다 보니 계속 걷게 됐다. 밤, 따뜻한 공기, 취기, 그런 게 뒤섞이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다. 코끝이 찡해지더니 펑펑, 밸브가 열린 것처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씨, 왜 이래…. 소매를 끌어다 아무렇게나 문질렀더니 금세 눈가가 따끔거렸다. 진짜 왜 이래….
 
왜 이러는지 너무 잘 안다. 잘 눌러놓고 살았던 게 다 파헤쳐졌으니까. 결국 길 한가운데 걸음을 멈추게 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감은 눈 안쪽이 빙글빙글 돌고 난리가 났다.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 가득 찼다.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까,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말.
 
“…김민규 보고 싶어….”
 
말이 진짜 무섭다. 참다참다 뱉고 나니까 감정이 따라서 폭발한다. 이렇게까지 보고 싶었나. 미처 몰랐는데 그랬던 모양이다. 보고 싶어 죽겠다. 김민규.
 
“김민규우….”
 
세 번째 부를 때는 말꼬리가 길어졌다.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아서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나 진짜 취했다…. 눈물이 계속계속 솟았다. 집에 가야 하는데. 김민규 보고 싶어. 그만 울어야 하는데. 김민규 보고 싶어. 맥락 없이 결론은 같은 생각들이 이리저리 떠오르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큰일 났다, 진짜….
 
“아, 찾았다.”
 
뚝, 귓가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눈가를 닦아내고 눈을 떴다. 그러자마자 보이는 게, 신발 앞코,
 
빗자루. 어? 얼른 고개를 들었더니 한참을 올려다 본 위쪽에서 김민규가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니까, 보고 싶어 하던 그 김민규가 아니라, 원우가 김민규라고 이름을 붙여준 그 김민규가.
 
“…마법사…?”
“네!”
“…….”
“술 마셨구나? 냄새 엄청 나요.”
 
엄지와 검지로 제 콧망울을 쥐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안 불러줘서 서운할 뻔 했잖아. 일주일 지났는데 소식 없어서. 한국까진 왔는데 불러줘야 찾으니까. 묻지도 않은 걸 알아서 얘기하는데 헛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진짜 왔어. 불렀다고 진짜로 왔어. 울다 말고 비집고 나온 웃음이 점점 커져서, 심각하다 싶은지 말을 잇다 말고 민규도 무릎을 굽혀 마주 앉았다. 정신 차려요. 눈앞에 대고 손바닥을 휘휘 내젓는 걸, 탁, 잡아채서 당기자 도리어 원우가 끌려간다. 툭, 단단한 어깨에 이마가 닿았다.
 
“…진짜 올 줄 몰랐어….”
“내가 찾아간다 그랬잖아요.”
“거짓말인 줄 알았지….”
“마법사는 거짓말 하면 큰일 나요. 쥐로 변해요.”
“…그게 뭐예요….”
 
또 웃음이 터졌다. 근데 술냄새 너무 많이 나요. 또 콧망울을 쥐었는지 맹해진 목소리로 말하는 민규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다가, 필름이 끊겼다.
 
 
 
 
 
 
 
 
 
 
 
 
 
 
 
 
 
 
 
 
 
속도 안 좋고 머리도 아프고, 입도 마르는 것 같아서 깼다. 들러붙은 눈꺼풀을 억지로 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이네.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나 어떻게 들어왔지? 모르겠다. 목마른데 일어날 기운이 없다. 누가 물 좀 갖다 주면 좋겠다….
 
“계속 자요?”
 
묻는 목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누가 있어? 황급히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더니 아깐 없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다. 김민규. 진짜 김민규 말고 원우가 이름을 지어준 김민규.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꾹 감았다. 셋을 세고 다시 떴는데 여전히 있다. 김민규.
 
“…여기 왜….”
“원우가 가지 말라 그래갖구.”
 
딱히 갈 데도 없고. 씨익 웃으면서 말하는데 어젯밤 일이 전혀 떠오르지가 않아서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언제… 어떻게…. 오사카에서 헤어지고 끝이었는데 갑자기 집에 있는 것도 너무 현실성이 없고. 기억이 다 조각나서 드문드문했다. 무심코 돌아본 현관에 빗자루가 서 있다. 저기. 원우는 다시 민규를 바라보았다.
 
“나 좀 꼬집어줄래요?”
“왜요?”
“안 믿겨서….”
“그래요.”
 
주저 없이 양 볼을 꽉 꼬집어 흔든다. 아야야. 잡힌 피부가 아픈 걸 보니까 진짜는 진짜고, 그러면 정말로,
 
“…세 번 불러서 찾아왔어요?”
 
세 번이 뭐야. 김민규 이름 열 번은 더 부른 것 같다. 엉엉 울면서.
 
“네!”
 
고개를 끄덕끄덕. 그럼 다 봤겠네…. 못 볼꼴을 보여준 게 뒤늦게 창피해서는 도로 몸을 기울여 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썼더니 머리 아프죠? 하고 묻는다. 네…. 골치 아파 죽겠다.
 
“약 줄게요.”
“네….”
 
무심히 대답했다가 약이 어디 들어있는 지는 아나 싶어서 뒤집어썼던 이불을 끌어내리고 돌아봤다.
 
“…뭐해요?”
 
망토인지 가운인지, 주머니에서 뭘 꺼내서 늘어놓는데 끝이 없다. 저게 뭐야.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약 주려구. 좁은 원룸 안에 뭐가 금세 꽉 들어찼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화학 실험 도구 같은 게 주르르, 그리고 뭔지 모를 게 들어 있는 병들이 또 주르르. 머리가 아플 때느은. 흥얼거리면서 엄지손가락만한 유리병 위로 건반을 두드리듯 손가락을 움직여 고른다. 검은색 가루가 든 병을 집어서 램프 같이 생긴 작은 주전자에 툭툭 뿌리더니 그 다음엔 이끼색 가루를 집어 든다.
 
“…뭐해요…?”
 
두 번째 물었다. 약 주려구요. 같은 대답을 두 번째. 온갖 이상한 것들 중에 특히 이상한 것들만 골라서 주전자 안에 넣더니 뚜껑을 덮고 두 손으로 주전자를 쥔다. 눈을 감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 아마도 주문을 외우는 거겠지. 나참, 주문을 외우고 있다고 아무 거리낌 없이 생각하다니. 어이가 없으려는 찰나에 펑, 주전자 뚜껑이 풀썩였다. 됐다. 손을 움직여 컵 하나를 가져와 쪼르르, 따라준다.
 
“……약이에요?”
 
거무죽죽한 초록색인 게, 먹었다간 죽을 것 같은데 약이라고 내민다. 네! 머리 아플 땐 이게 최고예요! 뭐뭐 들어갔냐면. 원재료를 설명해주는데 늘어날수록 점점 더 입에 못 댈 것들이다. 약 저기 있는데. 결국 잔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찬장에서 타이레놀을 꺼내들고 보여주자 아…. 하고 눈을 깜빡인다.
 
“그건 누가 만들어준 거예요? 되게 째끄맣게 잘 만들었다….”
“이거….”
 
제약회사…. 상표를 찾으려고 손바닥만 한 박스를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이상한 것들 사이에서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얼굴이 눈에 걸린다. 그게 더 좋으면 그거 먹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컵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다. 이거 마법 들어간 거라 아무 데나 버리지도 못하고… 원우 생각하면서 만든 거라 내가 먹으면 독이구…. 중얼중얼하는 말에 맘은 약해지는데 그래도 저건 못 먹겠다. 저건 대체,
 
“…무슨 맛이에요?”
 
왜 생각과 입이 따로 놀아. 못 먹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걸 묻고 있다. 맛? 눈을 반짝이며 되묻는다. 무슨 맛 좋아해요? 좋아하는 맛으로 바꿀 수 있어요. 이제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딸기요…. 체념해서 대답하자 잠깐만요. 한다. 저 딸기 뭔지 알아요! 검지를 짠, 하고 치켜들더니 공중에 대고 휘휘, 몇 바퀴를 돌리며 중얼중얼, 주문을 외운다.
 
그러니까 컵 안에 든 거무죽죽한 초록색 액체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금세 포르르 끓어오르더니 사라락 가라앉은 걸, 자기가 먼저 향을 맡아 본다. 됐어요, 딸기. 해맑은 얼굴로 내미는데 어째서 색은 계속 그 초록색인 거죠…. 마지못해 받아 들었더니 진짜로 딸기향이 나긴 한다. 그래서 더 이상해. 한숨을 폭 내쉬곤 코를 쥐었다가, 향이 아니라 색이 문제지, 싶어서 눈을 감았다. 한 번에 다 마셔야 해요. 꿀꺽! 애 다루듯이 코칭을 한다. 네에….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향 빼고 다 문제야. 색깔도 식감도. 미끄덩거리는 게 입안으로 들어오더니 금세 목구멍 너머로 쑥, 사라져 버렸다. 웩. 혀에 닿았을 땐 이대로 토할 것 같았는데 그러진 않고 위까지 한 방에 꽂힌다. 아유, 잘 먹네. 박수를 치더니 돌려받은 컵이며 병이며, 다시 주머니에 넣기 시작한다. 방을 가득 채울 만큼 늘어섰던 것들이 좁은 주머니 속으로 죄다 들어간다. 보면서도 안 믿긴다. 나참….
 
효과가 있긴 있어서 먹자마자 두통이랑 그런 건 싹 가라앉았다. 정신이 맑아지니까 정리가 필요해졌다. 얘기 좀 해요. 민규를 불러다 침대 위에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진짜 마법사예요?”
“네.”
“몇 살이에요?”
“이십 년 백십오 일이요.”
“인간 나이로? 마법사 나이로?”
“나이 똑같이 먹어요. 그냥 좀 더 오래 살 뿐이지.”
“해리포터 같은 거예요?”
“그게 뭐예요?”
“호그와트….”
“아, 거긴 저는 못 들어가요. 그 나라에 안 살아서.”
“아….”
 
뭐 그런, 나름의 법칙도 다 있나 보다. 잘 모르겠지만. 그럼 이제. 어차피 신상명세 같은 건 물어봤자 알 수 없는 소리들뿐이니,
 
“어떻게 할 거예요?”
“뭘요?”
“그니까, 어디서 지낼 거냐구요.”
“어….”
 
대답 대신 눈동자를 도르르, 굴려 주위를 돌아본다. 여기? 다시 시선이 마주치자 뾰족한 송곳니가 다 드러나도록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웃었다. 여기요? 되물었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갈 데… 없어요? 조심스럽게 묻자 네! 하고 힘차게 끄덕끄덕.
 
“…한국에 아는 사람 없어요?”
“있잖아요, 원우.”
 
검지로 콕, 원우를 가리키며 웃는다. 아니, 나 말고…. 나 말고는 없다는 말이구나…. 갈 데도 없는 사람을 불러들인 건 나니까 내가 책임을 져야 하나…. 아니 근데 정말로 올지는 모르고 그런 거였는데 그래도 책임을 져야 하나….
 
“그… 집으로 돌아가는 건요?”
“어….”
 
눈동자가 또 도르륵, 구르더니 이번엔 금세 돌아오질 않고 어디에 꽂혀서 멈췄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현관에 세워둔 빗자루가 보인다. 지금 좀 날기 싫어하는 상태라. 빗자루를 향해 손바닥을 펼치곤 짧은 주문을 외치더니 이봐요, 안 오죠. 한다. 원래 이렇게 하면 와야 하거든요. 한 번 더 시도. 다시 시도. 역시 빗자루는 현관에 선 그대로. 이러니까 또 헷갈린다. 내가 계속 속고 있는 걸까?
 
“…진짜 마법사 맞아요?”
“네!”
 
하여튼 대답은 씩씩하다. 그러면 어, 무슨, 자격증 같은 거 있어요? 마법학교 졸업증이라든지, 아님 뭐 인증서라든지. 아는 서류라곤 그런 것들뿐이라 되는 대로 불렀는데 있어요. 하고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안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주머니를 한참 뒤적뒤적 헤집더니 여기 있다. 하고 리본이 예쁘게 묶인 두루마리를 꺼낸다. 진짜 마법사가 되려면 말이에요. 리본을 잡아당기며 진지하게 말한다.
 
“만 스무 살까지 연애를 하면 안 되거든요.”
“…….”
“제가 올해 4월에 정확히 만 스무 살이 돼 가지구. 두세 달만 빨리 만났어도 이거 못 보여줄 뻔 했다, 그쵸?”
“…….”
 
두루마리를 차르르 펼쳐서 보여주는데 그래봤자 글씨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거라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일단, 스무 살까지 연애를 안 해야 마법사가 된다니. 이거 무슨 인터넷 유머 같은 거 아니냐. 이십 년 동안 연애를 못 하면 마법사가 되고, 삼십 년 동안 연애를 못 하면 대마법사가 되고…?
 
“…그럼 대마법사 되려면 삼십 년 동안 연애 안 해야 돼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눈이 동그래져서 바라보는데 피가 식는 기분이다. 진짜 사람을 갖고 노네. 여태 장단 맞춰준 게 기가 막히기도 하고, 그런다고 또 이렇게까지 우습게 볼 건가 싶어서 화도 좀 솟았다. 그럼 나도 마법사겠네. 이십 년이면. 입이 불퉁해져서 말했더니 에이. 하고 웃는다.
 
“원우는 안 돼요. 사람이니까.”
“그쪽은 사람 아니에요?”
“마법사라니까요. 마법사는 피가 달라요.”
“뭐, 피가 보라색이고 그래요?”
“어? 진짜 잘 아네.”
“…….”
 
되게 열 받네. 원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두루마리에 다시 정성스레 리본을 묶으면서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침대에서 몇 걸음 벗어나 두 손을 허리에 짚고선 숨을 좀 골랐다. 한 대 패볼까. 코피 나면 알겠지. 피가 빨간색인지 보라색인지. 이게 무슨 경우야, 정말.
 
“왜 놀려요?”
 
휙 돌아보고 물었더니 눈이 커다래져서는 아…. 하고 난처한 표정을 한다. 저렇게까지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인데. 기가 막혀. 내내 놀리고 장난치는 건데 다 속고 있었어.
 
“…화났어요?”
“네.”
“미안해요….”
 
피는 똑같애요, 빨간색이에요….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처럼 하는 변명에 미간이 콱 찌푸려졌다. 그 얘기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며 신경질을 냈더니 도로 얼굴을 든다. 뾰족하던 눈꼬리가 쳐져서는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
 
“그거 말고는 거짓말 한 거 없는데….”
 
 
 
 
 
 
 
 
 
 
 
 
종일 시험했다. 진짜인지 아닌지 밝혀야 속이 시원하니까. 이거 보여줘요, 저거 해봐요. 뭘 시켜도 민규는 군말없이 다 보여줬다. 집안의 수많은 게 바뀌고, 돌아오고, 온갖 동물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방 안에 바닷물이 가득 찼다가, 사막의 모래로 뒤덮였다가 다시 멀쩡해지고.
 
해가 넘어갈 즈음 되니까 민규가 완전히 지쳤다. 아, 나 이제 못 해. 방 한가운데 길게 누워버리는 민규를 따라 원우도 침대 위에 풀썩, 누워버렸다. 하루 다 갔네.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믿어요?”
“네.”
 
믿을 수는 있다. 속이는 것도 아니고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진짜, 진짜 마법사라는 거. 사람이 왜 그렇게 의심이 많아…. 힘들긴 힘들었는지 말꼬리가 뭉그러진다. 의심이 많은 게 아니라 조심성이 유난한 거다. 이렇게 조심해도 매번 다치는 건 나였어서. 하물며 정말 어디서 뚝 떨어진 사람인데 어떻게 덥썩 믿어.
 
“원래… 이렇게… 안 되는데… 원우가….”
“네?”
 
드문 거리는 말에 몸을 일으켜 내려다보았다. 방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누운 채 눈을 감은 민규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피곤한 건지 잠이 잔뜩 묻은 목소리엔 기운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원래… 이게… 근데 원우가 의심하니까….”
“…….”
“나는 민규니까….”
“…….”
“다 해줘야지….”
“…….”
 
그리곤 까무룩, 잠들어 버린다. 올라와서 자요. 뒤늦게 맨 바닥에서 잠든 걸 깨닫고 침대를 내려가 흔들었지만 꼼짝도 안 한다. 어쩌지…. 무릎을 굽히고 앉은 채 잠시 내려다 보다, 그냥 두기로 했다. 억지로 깨우느니 일단은 자게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여분의 베개가 따로 없어서 그냥 제 베던 걸 머리 아래로 끼워넣어주고, 담요 하나를 조심스레 덮어 주었다.
 
나는 민규니까 다 해줘야지. 잠들기 전에 한 말이 빙빙, 귓가를 맴돈다. 곤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살짝,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진심이든 아니든, 고마워서. 일어나면 미안하다고 해야지. 고맙다고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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