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다짐했는데 깨어나질 않았다. 하루를 꼬박 잘 때까지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넘겼지만 하루 반이 되고, 이틀이 되고, 사흘째에 접어드니까 덜컥, 겁이 났다. 자는 게 아닐까 봐. 코 아래에 손을 대 보면 분명히 호흡이 느껴지고 가슴에 귀를 기대어 보면 분명히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데, 아무리 흔들고 불러도 꼼짝 하질 않았다. 어떡하지. 119에 신고할까 싶다가도 마법사인데 그냥 사람들 다니는 일반 병원에 갔다가 더 큰일 날 것 같기도 하고, 병원에 간다한들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접수를 하고, 어떤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고, 그런 걱정들에 결국 핸드폰을 내려놓게 됐다. 어떡하지.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었다. 오사카에서 만났던 마법사가 지금 우리 집에 있는데 죽은 것 같아. 아니, 죽지는 않았는데 죽을 것 같아. 그걸 누가 믿어줘….
아무것도 못 했다. 열이 나면 물수건이라도 올려주고, 앓으면 간호라도 할 텐데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옆에 앉아서 불안한 마음에 자꾸 코 아래에 손을 대 보고, 왼쪽 가슴 위에 귀를 기울여 보고 그것 밖에. 그래도 불안하면 세상 모든 신을 찾으면서 기도하고. 제가 잘못했어요, 깨어나게 해주세요.
밤을 지새우고 사방이 푸르게 밝아지는 시간에 원우도 지쳐서 민규의 곁에 눕게 됐다. 괜찮은 거죠. 손을 뻗어 곤한 가슴 위를 짚었다. 두근두근, 손바닥 아래에서 뛰는 심장에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진짜 괜찮은 거죠…. 걱정에 피곤이 겹친 탓인지 감정이 부푼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이런저런 안 좋은 예상들에 끝도 없이 슬퍼져서, 결국 눈물이 났다. 깨어나게 해주세요….
갑자기 눈이 떠졌다. 반짝, 망설임도 없이 눈을 떴을 때 마주 보이는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히잉…. 하는 우는 소리가 다 나왔다. 난생 처음 새어 나오는 소리에 당황하는 건 나중이었고, 일단 끌어안았더니 놀라서는 바짝 굳는 게 느껴졌다.
“죽는 줄 알았잖아요….”
파묻힌 품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와 따뜻한 체온에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죽긴 내가 왜 죽어요. 조심조심 등을 토닥여주는 손에 또 히잉…. 하고 칭얼거리게 됐다. 괜찮아, 괜찮아. 아주 어른처럼 몸을 두드리며 달래준다. 괜찮아, 괜찮아. 주문 같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다시 잠이 밀려온다. 따뜻하게 안긴 채로.
무슨 법칙이 그렇게 많아요. 설명을 다 듣고선 입술을 삐죽하니 내밀었더니 그래야 통제를 하죠. 하면서 웃는다. 그러니까, 전쟁 같은 특이한 상황을 제외하곤 하루에 쓸 수 있는 힘의 양이 정해져 있는데 이것저것 해 달라고, 보여 달라고 하는 원우 때문에 며칠 치를 다 끌어다 써서 힘을 죄다 소진한 탓에 사흘 반을 잘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그런 거면 적당히 그만 두게 했어야 할 거 아니에요. 미안한 마음에 탓을 하는데도 웃기만 한다.
“나는 민규니까, 원우가 해 달라면 다 해줘야죠.”
“…….”
김민규랑 하나도 안 닮은 김민규가 하는 말인데도 단지 그 이름 때문인지 괜히 마음이 이상해진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어쩐지 마주보기가 어려워서 시선을 피하게 됐다. 음.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입술을 말고 망설인 민규가 한참 만에 원우 그거 모르죠? 하고 물어왔다. 뭐요? 잠깐 가라앉은 기분에 억지로 목소리를 끌어올려 되물었다. 뒤늦게 눈을 들자 시선이 다시 마주 한다.
“주문이라는 게 말이에요, 일종의 이름이거든요. 힘에 이름을 붙여주는 거예요.”
“…….”
“이름이 되게 중요해요. 이름이 붙으면 그게 되는 거니까.”
“…….”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이름’이 자꾸 반복 되니까 도리어 그 단어가 낯설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고만 있는데 민규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툭 내쉬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원우가 나한테 이름을 줬잖아요.”
“…….”
“원우가 이름을 줬으니까 내가 김민규가 됐잖아요.”
“…그거는….”
“원우가,”
“…….”
말을 하려다가 삼킨다.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어질 얘기가 어떤 것일지 잘 모르겠어서, 멍하니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원우가,
“주인인 거예요. 김민규 주인.”
“…….”
…그게 뭐예요. 한참 만에 어설프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시종일관 해사하게 웃던 사람이 갑자기 진지하게 저런 소리를 해서 그런가, 괜히 좀 어색해졌다. 얼굴을 똑바로 못 보겠어서 자꾸 천장 모서리 같은 데를 살피게 됐다. 이름이라는 게 정말로 대단한가 봐. 사람을 막 뒤흔드네. 이름만 김민규일 뿐인데도 원우가 김민규 주인이라는 말에 마음이 좀 덜컥거린다.
네 이름은 김민규
下
w.dobby
자려고 누웠다가 문득 몸을 돌려 침대 아래를 내려다보게 된다. 왜요? 그런 기척은 귀신 같이 알아채고 얼른 눈을 뜨고 마주 본다. 아냐, 자. 도로 몸을 돌려 등을 지고 누웠다. 그랬다가도 또 금세 궁금해지고.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지?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일본에서 만난 신원미상의 남자가 말을 듣지 않는 빗자루를 핑계로 내 집에 눌러앉은 건데, 앞뒤가 엉망진창인 상황인데도 어느 하나 불편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게 없다. 세어보니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손을 꼽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지나가 버린 시간 동안 어땠더라. 팔을 접어서 머리 아래로 받쳤다. 생각이 길어진다.
재미있었지. 그랬다. 지나간 하루하루가 떠오르면 웃음이 피식피식 나온다. 그새 말도 편해졌다. 민규야. 부르는 것도 익숙해졌고. 말을 베끼는 것뿐이라던 민규는 반말과 존댓말의 체계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원우씨’도 아니고 ‘원우형’도 아니고 그저 ‘원우’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였다. 감고 있던 눈을 가만히 떴다.
내가 김민규를 편하게 부르는 날이 다 오네. 그 이름을 떠올리면서 수많은 밤을 지새우고, 넘치도록 울고, 수없이 많은 것들을 세우고 무너트리고 그랬었다. 이렇게 금세 익숙해진다. 민규. 김민규. 빗자루가 말을 안 들어서 우리 집에 눌러앉은 마법사, 김민규.
“왜 자꾸 불러요.”
등 뒤에서 투덜거린다. 안 불렀는데, 그냥 생각했는데. 몸을 빙그르르 돌려 침대 끄트머리에 엎드린 채 내려다보았더니 다 들려요. 그런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들려? 눈이 커다래져서 묻자 아니이. 하고 고개를 젓는다.
“그냥 이름만 들려요. 민규, 김민규, 그러는 거.”
“신기하다.”
“잠 안 와요?”
“응.”
“주문 걸어줘요?”
“아니.”
자고 싶지 않은걸. 원우의 말에 민규가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그럼 어떡하지. 밤엔 자야 하는데. 이불을 둘둘 싸맨 채 원우를 향해 모로 누우며 민규가 고심했다. 그러게. 엎드린 채로, 누운 채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말야. 한참 그냥 그러고 있다가 문득 궁금한 게 떠올라서 원우가 입을 열었다.
“거기 왜 있었어?”
“거기?”
“오사카, 그 놀이동산에.”
“그냥 갔어요.”
“그냥?”
“마법사 된 기념으로 아무 데나 다니고 있었거든요. 빗자루가 가는 대로. 그러다 그냥 간 거예요. 어쩌다 보니까.”
“신기하다.”
빗자루가 그날 다른 데로 갔으면 못 만났겠네. 여전히 현관에 우두커니 선 빗자루를 흘깃 돌아보았다. 근데 저거, 다시 날긴 할까. 계속 저 모양인데.
“내가 더 신기해요. 그때 분명히, 주문 쓰고 있었거든요. 남들한테 안 보이게. 원우가 나 어떻게 봤는지, 그게 더 신기해요.”
“나만 본 거 아니라 내 친구들 다 봤어.”
“원우가 먼저 본 거 아니에요?”
“맞아.”
“원우가 봐서 깨진 거예요. 원우가 나를 봐 버려서.”
어렸을 때 귀신같은 거 보고 그랬어요? 어이없는 질문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잡히는 대로 베개를 던졌더니 얼굴에 맞기 직전에 손을 세워 공중에 멈춰 세운다. 둥실둥실 돌아오는 베개를 끌어와 턱을 받쳤다. 자꾸, 빗자루에 눈이 간다. 건네지 못하는 질문도 입술 안에서 맴돌고.
빗자루가 다시 날면, 갈 거야?
원우! 원우! 흔들어 깨우는 손에 눈이 떠졌다. 끼잉.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가 그대로 굳었다. 좁은 방, 그다지 높지 않은 천장, 그 얼마 안 되는 공간에,
떠올라 있는 빗자루. 이불을 확 걷어내고 일어났다. 이제 정신 차렸나 봐요. 제 눈높이까지 올라와 있는 빗자루를 쓰다듬는 민규의 표정이 신나 보였다. 아…. 원우는 멍하니 빗자루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날아 버렸네…. 어젯밤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자서 그런가. 영원히 그렇게 현관 구석에 서 있을 줄 알았더니 이렇게, 살아나고 말았다.
“빗자루 타 볼래요?”
“…나 탈 수 있어?”
타면 막, 떨어트리고 그러는 거 아닌가. 자기 주인 이렇게 오래 붙잡아 두고 있어서 심술 나갖구. 민규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하죠! 저렇게 신나하는데 싫다고 말하기도 좀 그랬다. 그러자, 그럼….
빗자루는 어떻게, 어떠한 준비를 하고 타야 하는 거지. 외출 준비까지는 마쳤는데 그 다음을 모르겠다. 다 됐어요? 빗자루를 쥐고 묻는 민규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더니 그러면. 하고 손을 뻗어 원우의 머리 위를 짚는다. 뭐해? 눈을 들어 손을 올려다보았다.
“주문 거는 거예요. 남들한테 안 보이는 주문.”
하긴. 다 큰 남자 둘이 빗자루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걸 누가 봤다간 난리가 날 테니. 머리 위를 짚은 채로 눈을 감고는 긴 주문을 외운다. 잔뜩 집중한 얼굴을 바라보다 원우도 슬쩍, 눈을 감았다. 같이 집중하면 마법이 좀 더 잘 듣지 않을까 해서.
됐다. 한참 만에 손을 뗀다. 나 안 보여? 민규에게 묻자 나는 보이죠. 한다. 거울 봐봐요. 끌어다가 현관에 걸린 거울 앞에 세워준다. 와. 진짜 안 보여. 벽과 천장이 다 담겨 있는 거울에 원우만 없다. 신기하다. 비어 있는 거울 앞에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제 가요. 그런 원우의 손을 민규가 잡아끌었다.
“나랑 떨어지면 안 돼요. 일정거리 이상 멀어지면 효력 없어지니까.”
“응.”
“아, 그리고.”
현관을 나서려다 말고 다시 한 번 머리 위를 짚는다. 또 뭐? 동그래진 눈으로 묻는데 주문은 외우지 않고 으음. 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이건 약해지면 안 되는데. 고민하느라 입술이 삐죽삐죽 움직였다.
“눈 감아 봐요.”
시키니까, 순순히 감았다. 절대 눈 뜨면 안 돼요, 제대로 안 걸리면 큰일 나니까. 당부하는 말에 대체 뭐길래.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꼭 감았다. 머리 위를 둥글게 쥐고 있던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눈 위를 덮는다. 눈 뜨지 마요. 다시 한 번 당부. 응, 알았다니깐. 고개를 끄덕이고 민규의 손바닥 아래에서 좀 더 꾸욱, 눈을 감자 또 다른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아까랑 별 다를 게 없는 긴 주문인 것 같은데,
“…….”
입술에 말랑한 게 닿았다. 흡.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자 숨 쉬어요. 하고, 입술이 닿은 채로 속삭인다. 눈 뜨지 말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몸이 다 굳어서, 눈을 뜨는 것도 물러나는 것도 못하겠다. 멍청하게 열린 입술 새로 민규가 숨을 불어넣었다. 따뜻한 숨이 입 안쪽에 고였다가 기도를 따라 몸 안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래서인지, 온몸에 열이 올랐다. 됐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고 손도 내린다. 그래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이게 제일 확실해서….”
“…….”
“안 다치는 마법 걸었어요. 이건 혹시 나랑 떨어져도 풀어지지 않을 거예요. 하루 정도는.”
“…….”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괜찮죠?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저를 살피는 민규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열이 오르는 것 같았는데, 몸도 생각도 다 얼어버렸는지 눈을 뜨고서도 멍하니 있게 됐다. 미안해요. 그게 불쾌함 때문이라 생각하는지 민규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아냐.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대답하곤 먼저 걸음을 옮겼다. 정말 그냥 주문을 건 것뿐인데, 이러면 빗자루고 뭐고 어색하기만 할 거 아는데 어디가 고장 난 것처럼 제대로 맞물리질 않는다. 삐걱삐걱, 녹슨 소리가 날 것처럼 걷는데 민규가 얼른 곁에 따라 붙는다.
“화났어요?”
“아냐, 그냥 좀….”
놀라서…. 놀란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게 제일 가까운 설명인 것 같다. 생각이 제대로 굴러가질 않고, 쉬운 말들도 제대로 떠오르질 않고,
심장이 너무 뛰니까. 미안해요. 민규는 벌써 세 번째 사과했다. 아냐, 괜찮아. 이제 어디로 가? 다치지 말라고, 생각해서 주문을 걸어준 건데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부러 목소리를 좀 끌어올렸다. 높은 데요. 민규가 답싹, 손을 잡았다. 어디 갈지 생각해요, 데려가줄게. 괜찮다는 말에 금세 마음이 풀어진 민규가 해맑게 웃었다. 입꼬리가 둥글게 올라간다. 웃으니까, 심장이 더 뛰는 것 같다. 어떡해.
왜 안 되지…. 빗자루를 쥔 민규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안 돼? 뒤쪽에 타 있던 원우는 민규의 어깨 너머로 빗자루 앞머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입술이 삐죽하게 나와서는 뒤돌아보는 얼굴이 생각보다 너무 가까워서, 지레 놀라서는 얼른 물러났다. 나는 안 태워주고 싶은가봐. 그만 해도 된다고,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 내려왔다. 가자. 응? 가자아. 민규는 이제 거의 애원하는데 여전히 미동. 내려가자. 시무룩하게 쳐진 어깨를 꾹꾹 주물러주었더니 히잉…. 하고 입술이 삐죽한 채로 빗자루에서 내려온다.
“이렇게 계속 안 움직이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그냥….”
터덜터덜,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며 원우를 바라본다. 여기 있어야겠네. 할까 말까 망설이는 말을 먼저 했더니 표정이 또 금세 풀린다. 있어도 돼요? 이미 있을 만큼 있어놓고선 묻는다. 안 된다 그럼 나가게? 핀잔을 줬더니 원우가 싫어하면…. 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안 싫어. 괜찮아.”
생각보다 대답이 먼저 톡 튀어나왔다. 진짜요? 되물으니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게. 하나도 안 싫어. 괜찮아. 있어도 돼.
또 졸려? 집에 돌아오자마자 길게 누워버리는 민규에게 묻자 이미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힘을 쓰는 만큼 잠이 쏟아진다고 했다. 두 가지 뿐이던 주문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것 같다. 침대 가서 자. 맨날 그렇게 바닥에서 자는 게 신경 쓰였어서 누운 민규를 토닥토닥 두드려 일으켰다. 그럼 원우는? 눈이 다 감겨서는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묻는다. 난 안 졸려. 침대 밖으로 비죽 나온 두 발을 쥐어 안쪽으로 밀어 넣고 엎드린 민규의 얼굴 아래로 베개도 끼워넣어주었다. 졸리면 얘기해요, 비켜줄게…. 잠이 흠뻑 묻은 목소리로 중얼중얼, 한다. 자, 빨리. 이불도 덮어주고 났더니 곧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린다.
아무 책이나 꺼내들고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새근새근, 귓가에서 들리는 고른 호흡에 가끔 뒤를 돌아보게 됐다. 잘 자네. 평온한 얼굴을 확인하면 괜히 웃음이 흘렀다. 어느 순간부터는 책보다 민규를 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김민규.
침대 위로 팔을 올리고 얼굴을 기댄 채 민규의 얼굴만 들여다보게 됐다. 신기해. 기억이 잘 안 나. 진짜 김민규. 아주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 같던 모든 것들이 민규를 만난 이후 급격하게 닳고 낡아서, 이제는 다 희미했다. 김민규는 아주 처음부터 너 하나였던 것 같이. 혹시 내가 모르는 새에 민규가 마법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잊어버리게, 너만 남게.
너만. 이라니. 입 밖으로 낸 것도 아닌데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돌렸다. 내려놓았던 책을 도로 들어 펼쳤지만 어디까지 봤는지, 무슨 글자가 채워져 있는지 모르겠다. 글자가 죄다 흐트러져서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다. 민규가 정말로, 나한테 마법을 걸었을까?
틈 날 때마다 다시 시도해보았으나 역시 실패했다. 에이씨, 몰라. 먹통이 된 빗자루에 대고 며칠을 어르고 달래보았지만 안 되니까 기어이 확 내팽개쳐 버린다. 그러다 영영 안 뜨면 어쩌려구. 빗자루를 대신 주워오고, 민규를 끌어다 누군가 옥상에 간이로 만들어놓은 벤치에 앉았다. 균형이 안 맞아서 흔들거리고 삐걱이는 좁은 벤치에서 어깨가 부딪쳤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더니 입술이 한 움큼 나와 있다.
“내일은 너 혼자 해봐. 나 있어서 안 되나봐.”
빗자루를 건네주며 말하자 입술만 삐죽한 채 대꾸를 안 한다. 원우 태워주고 싶은데…. 원우는 벌써 마음 접었는데 민규는 아직 포기가 안 되는지 얼굴 가득 속상하다. 말없이 등허리를 다독여주었다. 어쩌면 정말로 나 때문에 안 되는 걸지도 몰라.
민규가 애쓸 때마다 내심 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효력 같은 건 없겠지만, 마음을 담아서. 날아가지 마. 나쁜 마음이지.
밤공기가 선선하고 맑아서, 한참 동안 그냥 앉아 있었다. 깜깜한 하늘엔 별도 없고, 달도 보이질 않는다. 근처의 가로등 불빛만 환하게. 늘 시끌시끌한 동네인데 지금은 어쩐지 고요하고. 이것도 민규가 마법을 부린 걸까?
“시간 멈췄어?”
“네?”
뜬금없는 물음에 눈이 동그래져서 돌아본다. 아니, 그런 것 같아서. 민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진짜 잠깐만 할 수 있는 거예요. 몇 초 정도만. 더 하면 다 뒤틀릴 수가 있어서. 조곤조곤 설명해주더니 다시 원우를 바라본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글쎄….”
“아님 시간을 되돌렸음 좋겠어요?”
“…….”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바라보았다. 다들 그러고 싶어 하잖아요. 별 얘기 아니라는 듯 웃는다. 그 소원을 제일 많이 빈다고 그러던데.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제일 소중했던 순간으로 갈 수 있게. 그런 건 마법사가 아니라 신이어도 못 하는데 말이에요.
“…멈췄으면 좋겠어.”
“…….”
길어질 것 같던 얘기가 뚝 끊어졌다. 먼 데를 보고 있던 시선이 다시 원우를 향한다. 돌아가고 싶던 때가 있었다. 민규에게 이름을 주던 그 순간에도.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나에게 김민규는 이제 너 밖에 없어. 그럼 이제,
“어떡하지….”
너무 잘 알아서 벌써 서러운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감당이 되지 않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김민규가 주문을 건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빨리, 이렇게 크게 굳어버릴 수 있을까.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낼 수가 없게 됐어. 또다시 김민규를 보내는 건 너무 어려울 것 같단 말야.
가만히, 민규가 어깨를 쥐어 끌어당겼다. 순순히 안기자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어떡하죠. 같은 질문을 한다. 대답은 아무도 하지 못하고.
같이 잘래요? 물은 건 민규였다. 응. 원우는 망설임 없이 침대를 내려가 민규의 곁에 누웠다. 그랬더니 더 잠이 안 온다. 맑은 눈으로 어두운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있잖아요. 한참 말이 없던 민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응. 고개를 돌려 민규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는 원래 인간이랑 섞이면 안 되거든요.”
“…….”
“그래서 만나고 나면 정리를 꼭 잘 해야 돼요.”
“…….”
“그 사람의 세상에 남거나, 그 사람을 내 세상으로 데려오거나,”
“…….”
“아니면 그 사람의 기억을 다 지우고 나만 돌아가거나.”
“…….”
너무 많은 법칙들이 있다. 이걸 어떻게 다 감당하고 살까. 민규는 아마도 맨 처음부터 끝을 고민했겠지. 그러면서도 웃는 얼굴로만 저를 대했던 걸 생각하니까 얕은 한숨이 쏟아진다. 아예 원우를 향해 돌아누운 민규와 얼굴을 마주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만가만 만져준다.
“그 사람의 세상에 남으면, 그 사람처럼 평범한 인간으로 살게 되는 거고…. 근데 반대로 그 사람이 내 세계로 들어온다고 해서 마법사가 되지는 않아요. 내 세계에서도 그냥 인간이고, 그래서 너무 위험하고.”
“…….”
“그러니까 대부분은, 기억을 다 지워요. 아무리 짧게 만났어도 내가 마법사인 걸 알면, 그 사람 기억 속에서 나를 지우고 헤어지거든요.”
“…….”
“별 거 아니라고 다들 그랬는데,”
“…….”
“나는 처음도 어렵더니,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아요.”
“…….”
아무 말도 못하겠다. 손을 뻗어 민규를 끌어안았다. 이런 순간에 너무 옹졸한 질문이 떠오른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데,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질문이.
“…처음으로 기억을 지운 건 누구였어?”
바람 빠지는 소리 비슷한 걸 내며 민규가 웃었다. 품에 꼭 끌어안아 주고선 등을 쓰다듬는다. 누구일 것 같아요. 되묻는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나서, 꼭 놀리는 것 같았는데 끄트머리에 한숨이 섞인다. 소중한 사람이었나 보네. 한숨에서 묻어나는 무게감으로 짐작했다.
“부모님이요.”
“…….”
“그래서 한동안은 내 세계에서만 살았어요. 아무도 안 만나면 누구의 기억도 지우지 않아도 되니까.”
“…….”
“근데 만나버렸어….”
안은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고민의 괴로움을 겨우 그렇게 표현한다. 무작정 고개를 들어 입을 맞추자 놀랐는지 잠깐 숨을 멈췄다가, 이내 깊게 맞물렸다. 괴로움을 나누는 방법 같은 건 모르겠다. 다만 이렇게라도 하면,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지우지 마….”
입술이 젖은 채 속삭였다. 그건 안 돼요….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져 준다. 다 해준다며, 내가 해 달라는 거 다 해준다 그랬잖아. 어린애처럼 떼를 쓰게 됐다. 지우지 마. 기억하게 해줘.
“사라지지 마….”
눈을 마주하자 엷게 웃는다. 그만 자요. 손바닥으로 가볍게, 눈가를 덮는다. 싫어. 손목을 붙잡아 끌어내리려고 했지만 민규가 나지막이 외우기 시작한 주문을 끝까지 듣지도 못하고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당연하게도 혼자 남아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종일 울었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형, 도서관 가요? 품에 안고 있는 책 중 몇 권을 승관이 덜어갔다. 이따 순영이형 만나는 거 알죠? 핸드폰 풀면 전화한다 그랬는데 아직 안 풀었나 봐요. 첫 휴가인데 쌩깠다간 평생 시달릴 걸요. 형 꼭 와야돼요. 그 얘기하고 싶어서 도서관까지 졸졸 따라붙은 모양이라 대충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도 좋을 때 휴가 나오네. 꽃도 많이 피구.”
승관이 올려다보는 대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도서관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길 양쪽엔 벚꽃이 한가득이다. 다다음 주는 돼야 예쁘지. 떨어질 때가 더 예쁘잖아. 원우의 말에 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튼 이따 봐요. 저 이제 수업 가요. 반납 대기 줄에 선 원우에게 책을 돌려주곤 손을 흔들고 뛰어간다. 가. 등 뒤에 대고 인사를 하곤 차례를 기다렸다.
반납만 하고 도서관을 나섰다. 떨어질 때가 더 예쁘긴 하지만 오늘 날씨도 좋고, 좀 걸어도 괜찮을 것 같다. 캠퍼스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길을 따라 느리게 걸었다.
시간이 참 아무렇지 않게 잘 간다. 가을, 겨울, 지나가더니 다시 봄이 왔다. 휩쓸리면 어떻게든 살게 돼 있다. 당연한 얘기를 매번 새삼스럽게 깨닫곤 한다. 어떻게든.
순영의 첫 휴가를 축하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밀려온 무기력함에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미안. 몸이 좀 안 좋다. 뻔한 핑계를 대자 핸드폰 너머의 순영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빽빽 소리를 질렀다. 내일 봐. 내일도 있잖아. 겨우 어르고 달래서 약속을 새로 잡고 전화를 끊었다. 귀가 먹먹한 것 같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건물 현관으로 들어섰다.
타박타박, 계단을 올라 집으로 향했다. 열쇠 어디 있더라. 주머니를 뒤적이느라 복도에 올라서서 잠시 멈춰 섰다. 열쇠를 찾아 손에 쥐고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가,
또 멈췄다. 아…. 자그맣게 소리를 냈더니 현관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돌아본다.
“…화 많이 났을 것 같다고 하니까, 이거 추천해주던데.”
“…….”
꽃송이가 작은 꽃들로만 묶은 작은 꽃다발을 내민다. 금방 오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좀…. 변명하느라 눈을 제대로 마주치질 못한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더니, 슬쩍, 눈을 들어 바라본다.
“…나 잊어버린 거 아니죠?”
그때 마법 안 걸고 갔는데…. 긴장했는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어깨가 순간 가라앉는다. 그때. 민규 없이 혼자 일어났던 아침이 떠올라서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곧장 걸어가서 그대로 끌어안았다. 보자마자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알아챘는지 민규가 등허리를 토닥여준다. 나 이제 아무것도 못하는데, 그래도 괜찮죠? 당연한 걸 묻고 있다.
마법사인 거 포기하는 절차가 좀 복잡해요. 그거 다 마치느라 길어졌어요. 절차 다 끝나면 세 가지 소원 빌 수 있거든요. 나 뭐 빌었는지 알아요? 전원우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전원우랑 말 통하게 해주세요. 전원우랑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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