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를 본 것은 3년이었다. 블루를 보지 못한 것도 3년이었다. 블루는 자기 이름이 싫다고 했다. 한국도 싫다면서 꼭 떠날 거라고 했다. 자길 아는 사람이 있는 게 싫다면서. 그럼 나는? 내가 널 아는 것도 싫어? 내 물음에 블루의 대답은 멈췄다. 원래 물어보면 바로 대답해주는 아이였는데. 똑똑해서 뭘 물어도 전부 바로 대답해줬는데. 오늘따라 블루는 유독 느렸다. 사실 대답이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서운함에 툭 튀어나오는, 애처럼 투정부리는 그런 거였다. 나는 너밖에 없는데, 내일 당장이라도 미련 없이 떠날 것처럼 저런 말을 하니까. 블루의 침묵에 덩달아 나까지 말이 없어졌다. 그러면, 블루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연다.

"너 나 보고 싶어서 그렇지. 그럼 맨날 편지 써줘. 나도 맨날 너한테 편지 쓸게."

블루는 웃었다. 서운하다고 말할 수도 없게 웃었다. 말간 웃음이 어딘가 아렸다.









학교를 하루 결석했다. 가봤자 하루종일 멍한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있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구형 핸드폰에는 연락 하나 오지 않는다. 애초에 누구한테 번호를 준 적도 없긴 했지만.

블루의 기일이었다. 벌써 세 번째다. 익숙해질리가 없고 덤덤해질리가 없는 날이다. 울상인 내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블루의 사진은 끝내 나를 울렸다. 나는 그 앞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 네 앞에 서면 나는 항상 무너진다. 그리고 이젠 일으켜줄 사람도 없다.

블루의 사진 앞에 서면 하루종일 울고 있을 것만 같아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먹은 것도 없었는데 울렁거리는 기분이 꽤 역했다. 버스를 타면 멀미가 날 것 같아 그냥 걷기로 했다. 한 시간을 꼬박 걸으면 동네다. 그 정도는 멍하니 걷기만 하면 금방 갈 수 있다.

짜증나게 하늘이 파랗다. 저번에는 기분이 좋았는데 이번에는 그냥 짜증이 났다. 울컥하고 또 울음이 날 것 같아 입술을 잘근 물었다. 이럴 땐 누구 하나 날 달래줄 사람이 없다는 게 서러웠다. 분명 사람을 무서워한 것도 나였지만, 옆에 사람 하나 두지 않은 것도 나였지만, 오늘은 그게 너무 서러웠다. 오늘은 서러워도 되는 날이다. 오늘은 마음껏 세상에서 제일 슬퍼해도 되는 날이다. 난 오늘을 그렇게 정했다.


나중에 성인이 됐을 때 뭘 하고 싶냐고 묻자 블루는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벌써 영어 이름도 정해놨다고,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뭘로 정했는데? 하고 묻자 금세 블루, 하고 대답한다. 

"블루는 이름으론 잘 안 쓰지 않나?"
"뭐 어때. 예쁘잖아."
"너 파랑색 좋아해?"
"응. 나 샤프랑 노트랑 다 파란색인데?"
"몰랐네."
"근데 블루에는 우울함이라는 뜻도 있대."
"응, 알아."
"솔직히 난 네가 블루든 핑크든 블랙이든 다 상관 없는데,"

이름 따라서 우울해지지만 마. 그럼 나 진짜 속상할 것 같아.







한참을 멍하니 걸으니 벌써 동네다. 다들 바쁜 평일 오후의 거리는 한적했다.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었다. 남들 시선 신경 안 쓴지는 오래지만 한껏 우울한 얼굴로 동네를 활보하긴 싫었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인사할 정도로 친한 사람은 없었지만 혹시 수근거리고 갈까봐.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수근거리고 그러는 것들. 머리가 지끈거린다.

"야, 전원우!"

부름에 몸을 돌리니 거기엔 김민규가 있었다. 아, 이럴까봐. 이럴까봐 기분이 그렇게 안좋다고 아우성을 쳤던 것이다.

"너 왜 학교 안 왔어."
"잠깐 어디 다녀왔어."
"기분은 왜 이렇게 저기압이야."
"그냥."
"눈은 왜 빨개. 울었어?"

사람 정신 쏙 빼놓게 다발로 연달아 묻는다. 둔한 줄 알았는데 눈치는 엄청 빠르다. 울었다고 단번에 터놓긴 싫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더니 내 손목을 덥썩 잡고 어딘가로 간다. 어디 가는데.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묻자 김민규는 가만 있어봐. 하면서 내 말을 막는다. 


김민규가 나를 끌고 간 곳은 전에 나비를 보러 갔던 공원이었다. 김민규는 자판기에 동전 몇 개를 넣고선 음료수 하나를 뽑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고선 벤치에 털썩 앉는다. 저번과 같은 벤치, 저번과 같은 음료수, 저번과 정반대인 기분.

"무슨 일 있으면 말해도 돼. 다 들어준다고 했잖아."
"너 학교는."
"조퇴했어."
"왜?"
"그냥 있기 싫어서."
"김민규 완전 양아치네."

나 놀아줄 짝꿍이 없어서 그랬지, 하고 김민규는 입술을 쭉 내밀며 투덜거린다. 난 원래 너 잘 안 놀아줬는데. 내 말에 김민규는 금세 조용해진다. 김민규를 조용히 시키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

"그래서 왜 울었는데."
"꼭 말해야 돼?"
"너 걱정돼서 그래."
"……."
"평소엔 잘 웃지도 않던 애가 울면서 오니까."
"……."
"걱정하는 게 당연하잖아."

다정했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김민규는 너무 다정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것들인데 순간 다 터놓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렇게 다정하면 말하기 싫다며 매몰차게 잘라낼 수도 없다. 유독 김민규한테만 이랬다. 얜 블루와 닮았다. 말간 웃음을 짓는 것도, 자꾸 말을 거는 것도, 

"걱정돼, 원우야."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것까지 전부.

"……넌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줘?"
"잘해주는데 이유가 필요해?"
"너 나 안지 오래 되지도 않았잖아."
"그렇지."
"너랑 많이 얘기한 것도 아니고."
"그것도 그렇지."
"근데 왜 이렇게 챙겨줘?"
"그냥 챙겨줘야 할 것 같아."
"그냥?"
"응, 그냥."
"……"
"애가 하루종일 말도 없고, 웃지도 않고. 밥도 안 먹고. 너 나 전학 온 날부터 쭉 그랬잖아."

김민규는 나를 쭉 지켜봤다고 했다. 자기가 전학 온 날부터 쭉. 그냥 시선이 갔다고 그랬다. 이유없이 마음이 쓰여서, 친해지고 나를 꼭 챙겨주고 싶었다고. 

"……오늘 친구 기일이었어. 거기 다녀왔어."
"그래서 울었어?"
"안 울었어."
"거짓말."

대답도 안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달리 할 말도 없었으니까. 김민규가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싼다. 그러곤 느리게 토닥인다. 꼭 어린아이 달래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하고 묘했다. 근데 또, 너무 몽글몽글. 기분 좋은 무언가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무언가가 이상하게 바뀌었다. 김민규는 나를 신경쓴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만큼 김민규를 신경쓰는 건 내가 되었다. 꼭 그 날의 김민규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았다. 나는 김민규만 신경쓰면 됐지만 김민규는 나 말고도 신경쓸 사람이 많았다. 챙길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여전히 김민규는 다정했다.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나는 김민규가 내게 보여주는 다정함이 좋았고 자꾸 김민규의 걱정어린 다정이 받고 싶었다. 말을 거는 건 내가 되었다.

블루, 나야. 오늘은 내가 먼저 김민규한테 인사했어. 얘는 너를 많이 닮았어.

글씨를 꾹꾹 눌러적고선 옆에 앉아있는 김민규를 한 번 힐끔 쳐다봤다. 수학 문제 하나에 낑낑대는 모습을 보다 작게 픽 웃어버렸다. 블루와 김민규는 참 많은 게 닮았다. 말투도, 성격도,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같은 취향도. 사소한 곳에서 많이 겹쳐버리니 가끔은 나도 헷갈리곤 했다. 이렇게까지 닮을 수 있나 하고.

김민규가 가장 다정해지는 건 점심 시간이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온 이후로 점심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김민규는 그게 영 신경쓰였는지 자기 친구들이랑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김민규랑 같이 점심을 먹는 건 좋아도 그 옆에 있는 김민규의 친구들은 여전히 불편했다. 사람을 불편해하는 게 꽤 나아진 줄 알았더니 그냥 김민규만 편해진 거였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불편했다. 고개만 절래절래 저었더니 김민규도 다른 말은 더 하지 않았다. 이젠 김민규도 나를 잘 알아서.

대신 김민규는 매점에서 빵이랑 우유를 사왔다. 그것도 나름 센스있게 매번 똑같은 빵이랑 우유 말고 다양하게 돌려가면서. 그것도 질려갈 쯤이면 다른 요깃거리들을 사왔다. 문제는 내가 우유를 못 먹는다는 것이었다. 우유만 덩그러니 책상 위에 그대로 올려놓으면 내가 다른 것까지 다 안 먹은 줄 알고 김민규는 잘 좀 챙겨 먹으라면서 나를 나무라고 또 걱정했다. 나는 그 걱정이 좋았다. 그게 좋아서 일부러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가만 앉아있을 때도 있었다. 걱정을 받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니까, 블루가 죽은 이후로 딱 3년만이었다.


"너 그냥 나랑 같이 밥 먹어. 맨날 사다준 것도 다 안 먹고."
"아니, 나 네 친구들…."
"그냥 나랑만 먹으면 되잖아. 그럼 괜찮지?"

또 불편하다고 도망갈까 걱정이었는지 김민규는 아예 내 손을 깍지까지 껴서 잡고 급식실로 데려갔다. 계속 저런 것만 먹어도 몸이 상할 것 같아 걱정이라면서 그냥 자기랑 같이 밥을 먹자고, 김민규는 그렇게 말했다. 근데 김민규가 하나 모르는 게 있었다. 같이 밥을 먹으면 내가 잘 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눈 앞에 있는 김민규가 신경쓰여서 먹는 거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짝꿍이라 매번 같이 붙어있긴 했어도 이건 느낌이 달랐다. 밥이 어디에 들어가는지를 모르겠어서 겨우 몇 입 깨작대고 나머진 다 버렸다. 그러면 김민규는 내가 아픈 줄 알고 울상을 짓는다. 덩치만 컸지 아무것도 모르고 허둥대는 게 조금 귀여웠다.

처음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건 나 하나밖에 없었다. 김민규는 그대로였다. 똑같이 다정했고, 똑같이 나를 신경써줬고, 똑같이 말갛게 웃었다. 나는 달라졌다. 김민규를 신경쓰기 시작했고, 자꾸 흘끔였고, 김민규가 말을 거는 것을 기다렸다. 학교에 먼저 와 자리에 앉고선 지각 직전에 아슬하게 도착해 원우 안녕, 하고 말을 거는 김민규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혹시 김민규가 나비를 보러 가지 않을까 싶어 공원에 가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여전히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랬다. 한참을 공원 벤치에 앉아 김민규를 기다리던 날. 김민규가 줬었던 똑같은 음료수를 하나 사 그것만 한참 만지작대던 날. 그날 덜컥 깨달았다. 너무 순식간이라 무서웠지만 헤매지 않고 당장 알 수 있었다. 오늘도 편지에 쓸 말이 하나 늘었다.

블루, 어떡하지.
나 얘 좋아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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