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ink too much, got a sickness.."
축제가 금방이었다. 드럼과 기타와 마이크가 있는 음악실에서는 세상이 죽은 듯 고요한 한밤중에도 시끄럽고 아득하게, 잔잔한 음악이 그 문틈으로 비집고 나와 온 밤을 어지럽혔다. 마이크를 붙잡고 부르는 거라고는 겨우 허구한 날 불러대는 시시한 사랑 노래였지만, 시월이 끝나갈 즈음의, 그 늦가을의 분위기라는 게, 혹은 어쩌면 그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그 날을 무섭도록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내 첫사랑이 처음으로 눈부시게 빛났던 날이었다.
전원우는 유독 추위를 많이 탄다. 한겨울도 아니고, 이제 겨우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날씨였건만, 매년 이맘때쯤 그는 두꺼운 가디건을 입고 손에는 작은 핫팩을 들고 있다. 그리 꽁꽁 싸매놓고 노래는 어찌나 열심히 부르는지 얼굴에는 홍조가 돈다. 그 얼굴에 홀린건지 어쩐건지 코드를 짚는 손가락이 어색했다. 놓친 박자를 잡아보려 애썼지만 머릿속이 백지여서 더 이상 기억나는 게 없었다. 노래가 멈추자 노래와 드럼소리도 멈췄다. 전원우는 날 빤히 바라보기만 했고 드럼을 치던 이지훈은 킥을 세게 찼다. 아오 김민규 똘추새끼야!
"이지훈 성깔 진짜... 귀 아파!"
"김민규야, 내 친구야. 정신 좀 차려 이 새끼야."
"아 미안, 코드 까먹음.“
저 봐라, 얼굴은 멀끔하게 잘 생겨가지고. 이지훈이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놓친 데 바로 전에부터 하자. 그 순간까지도 전원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지훈이 저기요, 전원우 씨? 하고 부르니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고 멋쩍게 웃는다. 아, 코드 까먹었다구 그랬지... 머쓱한지 까만 머리를 한 번 턴다. 이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구, 어이구, 또 한 박자 느리지. 김민규가 놓친 데 바로 전부터 하자고.“
응! 홍조가 띄워져 조금 더 수줍어진 얼굴을 하고, 전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존나 어이없다. 전원우가 순간적으로 귀여워 보였다. 미친 게 확실하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지낸 게 몇 년인데, 그런 전원우가 귀엽다니. 하얗고 멀겋게 되어서 키만 크던 애가 왜 갑자기 귀여워 보이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지훈에게 전원우가 좀 달라진 것 같다고 말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똑같은데? 라고. 분명히 거짓말이다, 전원우가 똑같다면 내가 달라졌다는 건데. 당치도 않은 소리다.
아, 큰일이다. 잡생각이 또 음악 사이를 비집고 뛰어들어왔다. 하여간에 모든 건 전원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도통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손 따위는 알아서 움직이라지. 중요한 건 쓸데없이 팔랑거리기나 하는 전원우였다. 머리부터 발끝가지 느리고 팔랑거리고 하앟기만 한 이 새끼는 가끔 알 수 없는 행동을 해댔다. 아니, 그런 전원우를 본 내가 알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굳이나 예를 들자면 저 멀리서 뛰어오는 전원우의 뒤에 쓸데없는 후광이 비쳐온다든가, 전원우가 웃을 때마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뛴다든가 하는 뭐 그런 류의, 절대 있을 수 없는 반응을.
"But I miss you, what did I do?"
중저음의 단단한 목소리가 드럼과 기타 소리를 뚫고 울렸다. 전원우는 그래, 남자치고 참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다. 아니 그냥 예쁘게 생겼다. 기생오라비같은 놈, 하고 놀려대긴 했지만 얘가 여자였으면 진작에 사귀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냥, 잘 모르겠다. 어릴 적에는 그냥 같은 거 달린 놈밖에 더 되나 싶었는데 어쩌다 걔만 보면 심장이 나대는 건지 모르겠다. 김민규는 혼란스럽다. 전원우가, 전원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Fuck it up, laugh it off and I lost-"
노래는 참 지랄맞게도 조용하고 잔잔했고 전원우의 목소리는 사람을 참 나른하게 만든다. 드럼을 치던 이지훈도 하품을 하자 전원우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살풋 웃었다. 뭐야아, 졸려?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가 꽤나 애교스러웠다. 그냥 입이 느린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전원우는 작정한 듯 사랑스러웠다. 아니, 그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그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말도 안 되게.
"우리 뭐 남았냐."
"거의 다 했을 걸. 마지막 곡만 더 하면 됨."
"축제가 다음주니까... 남은 건 내일 하자.“
물음을 던진 사람은 나였고 대답은 드럼 스틱을 정리하던 이지훈이 했다. 마지막 말은 전원우가, 또 쓸데없이 말꼬리를 늘리며 말했다. 남은 건 내일 하자아, 하고 작게 벌어지던 입이 계속 맴돌았다. 진짜, 쓸데없이 모든 게 느리고 나긋나긋했다.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지훈은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나즈막이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제사 납득이 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전원우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오묘한 분위기에 빠져들게 한다. 그냥 전원우라는 사람이 그런 거였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벌써 이지훈은 드럼 스틱을 가방에 쑤셔넣었고 전원우는 악보를 챙겼다. 기타는 기숙사로 가져가야 했다. 야, 전원우, 기타 가방 봤냐?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돌리니 전원우가 손에 가방을 들고 있었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전원우는 내 기타를 들어다가 제 몸만한 가방에다 넣고 그대로 들쳐맸다. 민규 너는 내 가방이나 들어. 참 쓸데없는 짓만 해대는 놈이었다. 저거 꽤 무거울 텐데.
"지훈이 가?"
"엉. 잘 자라, 내일 보자.”
전원우는 또 뭐가 좋다고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야, 춥다, 빨리 가자. 이지훈네 기숙사와 우리 기숙사는 반대 방향이어서 항상 본관에서 갈라져야 했다. 전원우는 이지훈이 가는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잰걸음으로 나를 뒤따라왔다. 기타 가방이 무거운지 가끔 끄응거리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걸어와서 아무래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계단을 오를 때에는 더 그랬다. 평소에 그냥 계단 올라다니는 것도 어쩐지 위험해보인다 싶었는데 기타까지 매고 있으니, 어지간히도 늦었다.
"줘, 가방."
"으응?"
"너 무겁잖아. 줘, 계단 올라가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들고 가게."
내가 들어도 되는데...... 너 무겁잖아. 순수한 고양이같은 얼굴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 어이구 그러세요, 너는 안 무겁고? 하고 슬쩍 면박을 주니 금방 웃고 만다. 그럼 내 가방이라두 주라. 어깨 너머로 전원우를 흘낏 보고 그냥 그대로 올라갔다, 왼 쪽에는 기타 가방을, 오른 쪽에는 전원우 가방을 매고서. 전원우는 평소답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야아, 나 뭐 잘못한 거 있어? 묻는 전원우를 뒤로 하고 방까지 걸음을 옮겼다. 짜증나게도 자꾸 뒤처지는 전원우와 발을 맞추기 위해 걸음은 알아서 느려졌다. 아, 약간 짜증이 났다. 몸의 리듬이 모두 전원우에게 맞춰져 있었다. 부러 걸음을 조금 빨리 해 전원우보다 한 걸음 정도 앞장서서 방에 도착했다.
기숙사방 문은 너무 쉽게 열렸다. 두 명이 쓰는 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하필 올해 일 년은 전원우와 같은 방이었다. 그러니까, 씻고 눕고 잠에 드는 순간까지도 나는 전원우를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나만 짜증나고 전원우는 아무것도 몰랐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눕는 전원우를 빤히 바라봤다.
"민규야."
"......"
"나 뭐 잘못한 거 있어?"
연습 때 뭐 맘에 안 든 거 있어? 입은 그렇게 움직였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꼭, 넌 하루종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니, 하고 묻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나도 모르겠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아서 생각해."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분명했다. 전원우는 어릴 때부터 꼭 내가 조금 장난을 치거나, 심하게 굴거나, 할 때마다 저런 표정을 지었다. 눈꼬리는 살짝 내려가고, 눈썹은 팔자가 될랑말랑, 입을 꾹꾹 눌러대는. 보고만 있기에는 가슴 언저리가 조금 이상했다. 전원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욕실로 먼저 들어섰다.
한참 동안 틀어진 물을 맞고만 있었다. 아, 스트레스. 욕실을 나가면 또 마주해야 할 전원우가 제일 무서웠다. 이상해진 마음이 무서웠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욕실을 나섰다. 전원우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야, 전원우, 가서 씻어. 전원우는 그 새에 깜빡 잠이라도 들었던 건지 금세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일어났다. 으응... 하고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민규야, 나 수건 좀."
전원우는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오 분이 채 안 되어서인가, 그 즈음에. 한 번도 제 몸을 보여준 적이 없는 전원우는 늘 욕실에서 잠옷을 아예 입고 나왔다. 맨날 머리도 깔끔하게 다 말리고 나왔는데. 오늘은 옷만 입고, 젖은 머리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하얀데 뽀송해진 피부가 말랑말랑해 보였다.
"머리 안 말려?"
"귀찮아......"
전원우는 받아든 수건을 어깨에 대충 걸쳐놓고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민규야아. 왜. 나 너무 졸려... 그래놓고 씨익 웃는다. 그렇게 웃으면 나보고 뭘 어쩌란 거야.
"뭐, 불 꺼줘?"
"으응..."
웅얼웅얼.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애 마냥 칭얼거리는 전원우를 위해 노란색 스탠드 조명 빼고는 모두 불을 껐다. 전원우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갸우뚱, 살짝 기울이며 웃는데 아마 쟤는 자기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다. 아까 애 같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니 사실 그냥 애인가 보다. 노란빛이 물들인 하얀 천장을 똑바로 보면서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원우가 애라는 생각에서부터 참 어처구니없게도 전원우가 어릴 적 모습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때는 나랑 키도 비슷하고 마르고 하얗고, 공부도 잘하고 책만 읽어대고. 그다음에 중학교 때는 쟤도 인기 진짜 많았는데. 고등학교 올라오고는, 어쩌다 이렇게 됐냐...... 딱히 주제랄 것도 없는, 그냥 달밤의 이래저래 들뜬 생각들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눈앞이 바로 전원우였다. 얘는 왜 저러고 잔대냐. 이불은 목까지 쓰고 얼굴만 빼꼼 나온 참 귀여운 모양새였다. 입을 작게 벌리고 자는 게 어릴 때랑 달라진 게 없다 싶어서 몰래 핸드폰으로 사진을 한 장 찍어두었다. 아, 존나 웃겨. 핸드폰 갤러리에는 <전원우> 폴더가 있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사진, 어릴 때 같이 찍은 사진...... 그 사이에 거진 이 년 만에 새로운 사진이 들어섰다. 바로 옆에 있는, 다섯 살인가 여섯 살 즈음의 전원우도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다.
사진은 혹시 몰라 몇 장 더 찍어두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뒤척이며 몸을 이 쪽으로 돌려놓는데, 참, 이건 반칙이다. 왠지 모르게 그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지훈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전원우가 아니라 내가 변했다는 말이다. 말도 안 되지만 그래야 말이 맞았다. 전원우는 그저 한결같이, 어김없이, 늘상 마르고 하얗고 팔랑거리기나 했다. 결국 변한 건 전원우가 아니라,
김민규였다.
_
축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다음날이 바로 축제였고, 하루에 족히 네다섯시간씩은 연습을 하는 바람에 나는 기타줄을 몇 번이나 갈았고 이지훈의 드럼 스틱은 결이 다 나갔다. 다만 전원우는 멀쩡했다. 관리를 잘 하는지 원래 말이 없어서 그런지 하여간 이지훈은 늘 너라도 말짱해서 다행이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낮고 단조로운 전원우의 목소리는 사람을 유하고 나른하고 편안하게 만든댔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고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됐다.
전원우는 일부런지 어쨌는지 유독 나와 붙어있는 것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부러 피한다는 느낌이 조금 컸다. 설마 얘 내가 지 좋아하는 거 알고 있는 거 아냐? 싶었지만 남들보다 한 걸음, 아니, 다섯 발자국씩은 느린 전원우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며칠만 지나도 다 알아서 해결될 일이었다.
문제라면 이지훈이었다. 저 새끼는 눈치가 빠른 수준이 아니라 거의 광속이라서 내가 알기 전에도 진작에 알고 있었을 놈이었다. 하기야 그러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이지훈은 전원우가 저 앞에서 혹은 뒤에서 잰걸음으로 다닐 때마다 어떻게 돼가냐, 혹은 고백은 언제 할 거냐, 뭐 이딴 식의 질문을 던졌다. 대답할 만한 질문도 아니었고 사실 대답할만한 대단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하튼 눈치 빠른 이지훈은 조심해야했다.
전원우는 여전히 둔했고, 다만 가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그제사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 의도가, 의중이 무엇인지 알기는 어려웠으나 그런 바람에 다가가기가 더 힘들어지긴 했다. 전원우는 알 수 없는 침묵을 지켰다.
"벌써 내일이 축제냐."
".......아,"
연습을 끝내고 누워있는 전원우 옆에 가서 털썩 앉았다. 그치? 하고 다시 묻자 으응...으로 얼버무리며 자리를 피하려는 전원우를 붙잡았다. 어디 가, 너 요즘 왜 자꾸 나 피해. 그냥 있어. 전원우는 몸을 반쯤 일으키다 말고 내 말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을 쏟았다. 한 이 초 쯤을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그래, 하고 몸을 다시 누이는 전원우였다.
"뭐하냐."
"보면 몰라?"
"응 넌 그냥 앉아있고 쟤는 그냥 누워있는 것 밖에는."
그래, 그게 다야. 이지훈은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마냥 아, 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전원우는 뒤늦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하하, 웃는 것도 느린지 아니면 그냥 전원우라서 그리 느껴지는지 웃음소리가 천천히 귀에 박혀들어왔다.
"민규야아."
"왜."
"나 졸려."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뭐 무릎베개라도 해줘? 그랬더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전원우다. 이지훈이 방금 그랬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
"뭐?"
"너 쟤 졸리다고 하면 맨날 무릎베개 해줬잖아."
"......그랬나?“
뭘 그랬나야, 김민규 이 새끼야. 전원우는 그 새에도 꾸물꾸물 허벅지께로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참 전...은 아니고 고등학교 갓 입학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이지훈은 그 앞 책상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전원우는 그 새에 선잠이 들었다. 손에 살짝 스치는 전원우의 머리카락이 익숙했다. 그러게 참 전원우는 한결같구나.
"뭔 생각 하냐."
"딱히 아무것도."
"지이랄, 전원우가 어쩌고 김민규는 어쩌고 그러고 있었겠지."
"알면서 왜 묻냐 그럼."
"궁금하니까.”
뭔 말이야 그게. 이지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나는 아냐 이지훈아. 이지훈은 개의치 않고 전원우를 쳐다봤다. 얘는 어릴 떄랑 달라진 게 없냐, 하고 말하는 걸 보니 쟤도 아마 나랑 비스무리한 사고회로를 거쳤을 거다. 애 입 돌아간다, 하는 말에 입고 있던 후드를 벗어 전원우 위로 덮었다. 이제 만족하냐? 이지훈은 뭐 하는 놈이지,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왜 뭐 왜.
"어이구, 김민규 너도 참 둔하다.“
"뭐가."
"모르면 됐어."
글쎼 분명히 쟤도 정상은 아니다. 전원우는 세상모르게 잘 자고 있었다. 얘 이러고 자는 거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네 근 이년동안 좀 이상했어,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갑자기 말도 잘 안하질 않나, 전원우는 맨날...... 하고 무심하게 말하다 아, 하고 입을 다물었다.
맨날 뭐, 말을 해 임마. 이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둘이 그렇게 해서 얼마나 가겠냐? 맨날 하다 말고 하다 말고 나한테는 지랄 염병을 하면서. 나와 전원우를 번갈아 보는 이지훈의 눈매가 살짝 날카로운가 싶더니 다시 핸드폰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여튼 빨리 고백을 하든 마음을 접든 해,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이지훈은 눈께까지 내려온 앞머리를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고백했다가 차이면 어떡해."
"차이기는 뭘 차여."
"차이겠지, 십팔년 된 친구가 고백을 하는데. 너 같으면 받아주겠냐?"
"내가 전원우냐. 쟤는 다를지 어떻게 알아."
"그래도 딴 애들보다는 네가 조건에 좀 더 맞지 않냐."
아 네 병신 김 민규 씨- 진짜 귀찮은 듯 말하는 이지훈이었지만 쟤도 분명히 신경은 쓰일 테다. 그럴 만도 한 게 나이만큼이나 오래 본 부랄친구끼리 고백을 하고 차이고 하소연하고 아주 멜로드라마를 찍겠다는데. 이지훈은 원래 저랬다. 내성적인 전원우와 외향적인 김민규를 갖다가 겨우겨우 붙여놓는 것도 이지훈이었다. 자꾸만 상극으로 치닫는 둘을 열심히 응원하고 있으니 아무 생각도 없을 리 만무했다.
이지훈이 살짝 비아냥거렸다. 아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고백도 안하고 그냥 이렇게 지내겠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그럼 뭐 그거 말고 안 멀어질 게 뭐가 있는데. 이지훈은 헛웃음을 지었다.
"잘 생각해 김민규야. 쟤 십팔년 동안 연애 했어 안했어."
"안 했어."
"쟤 아플 때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누구야."
".......나."
"요즘 쟤가 수업시간에 누구만 보고 있게.“
".......나?"
진짜 못해먹겠네. 이지훈은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이니까 얘기 해 준다, 쟤 마음은 네가 함부로 생각 못 할 정도야. 그러니까 생각 잘 하라고. 어떻게든 안 부딪히겠다고 아등바등 멀어지려고 하다가 전원우한테 상처주지 말고. 쟤 마음이든 쟤든 네가 함부로 대할만한 거 아니니까, 얼마 안 된 네 감정 가져다가 안 그래도 마음 약한 애 맘대로 굴려먹지 말란 소리야.
딱히 할 말이 없어 창 밖으로 해가 지는 모습만 보고 있었다. 잠깐 적막이 흘렀고 전원우의 얕은 숨소리가 오디오를 다시 채워넣었다. 아....... 작은 탄식을 뱉자 이지훈이 말했다. 이제 좀 알겠냐?
"쟤 몇 년동안 너 좋아했어."
"......”
"너만 몰랐어, 너만. 네가 쟤 첫사랑이야 김민규."
저물어가는 햇빛이 창 안으로 들어와 음악실을 붉게 물들였다. 이지훈도 붉었고 전원우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내 손도, 그 아래 전원우의 하얀 얼굴도 발그레해졌다. 이지훈은 나와 전원우 사이의 어딘가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애매한 관계에 놓인 두 사람은 너무 어렸고 그 사이에 끼인 하나는 어른스러웠으나 어쨌든 모두 치기 어린 열여덟이었다. 근데 이지훈 있잖아.
"왜."
"얘도 내 첫사랑이야."
...어 방금 전원우 눈썹 꿈틀거린 것 같은데.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 음악선생님이 들어섰다. 얘들아, 미안, 음악실 이제 닫아야 될 것 같은데. 벌써 일곱 시다. 그 말에 전원우의 머리통을 조심스레 눕혀 놓고 몸을 일으켰다. 벌써 전원우 것 까지 가방을 다 챙겨놓은 이지훈은 나보고 그 가방을 들고 먼저 가랜다. 부스스하게 일어난 전원우는 별 말이 없었다. 마치 생각이 많은 듯이, 혹은 혼이 빠진 듯이 바닥을 보고 서 있었다. 이지훈은 나를 보내놓고 전원우에게 몇 마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랐다. 그저 뭐 축제에 대해 몇 마디나 하겠지 싶었다.
기숙사방에 들어서 씻고 나오니 전원우가 앉아있었다. 눈가가 살짝 부었는지 빨갛게 되었는데, 신경이 쓰였다. 울었냐?
"아냐, 자서 그래."
"그럼 됐고.“
가서 씻어. 전원우는 씻으러 들어갔고 나는 생각 정리가 필요했다. 쟤도 내가 첫사랑이고 나도 쟤가 첫사랑이면 뭐지 이게. 이 칠십억 지구에서 그럴 확률이 있기는 한가. 오늘은 전원우가 나오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 사이에 나는 <전원우> 폴더를 보고 있었다. 그러게 얘는 이지훈이랑도 아니고 나랑만 붙어있었네. 한 이십분 뒤에야 전원우가 걸어나왔다.
"일찍 자, 원우야."
"......"
전원우는 벽을 보고 누웠다. 뒷모습이 어쩐지 평소보다 작아 보였는데 그냥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오늘은 스탠드 조명도 키지 않았다. 바깥에서 지나다니는 차 소리에 전원우가 훌쩍이는 소리가 묻혔다.
_
축제 당일이었다. 리허설을 하겠다고 무대에 올라갔는데 전원우가 유독 밝아 보였다. 그러니까 텐션이 높았다는 게 아니라, 빛이 나 보였다는 것이다. 예쁘고 하여튼간에 빛이 났다. 오늘은 어쩐지 이지훈도 말을 아꼈다. 전원우야 뭐, 늘 말이 없고. 이지훈은 무표정을 유지했고 전원우는 여전히 팔랑거렸는데, 평소보다 많이 웃었다.
"전원우."
"왜애."
"그냥, 잘 하라고. 목 상하지 말고."
으응! 하고 배시시 웃는 게 꽤 예뻤다. 바람은 살랑거리고 날씨도 십일월 치고 그다지 춥지 않아 전원우도 웬일인지 롱패딩을 벗고 하얀 티에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춥지 않아? 하고 물으면 괜찮댔다. 전원우가 왜 기분이 좋아보이는지는 몰랐지만 어쨌거나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무대는 금방이었다. 처음에서부터 두 번째 순서였다. 전원우는 마이크를 소중하게 붙잡았다. 평소랑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이지훈도 그 위에 올라가서만큼은 즐거워보였다. 전원우는 웃었꼬 그를 따라 이지훈과 나도 웃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를 뚫고 머릿속 가득 울렸다. 좋은 울림이었다.
겨우 두 곡이었지만 전원우는 행복해보였다. 특유의 그 미소는 사람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아마 내가 그걸 가장 크게 느꼈을 테다. 전원우는 노래를 부르는 간간히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칠때마다 전원우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다섯 시가 되어 거의 다 져가는 해를 전원우가 마주하고 서서, 뒤에 있는 내가 보기에는 그저 그가 빛나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정말 전원우가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대에서 내려온 전원우가 웃었다. 수고했다는 이지훈의 말에도 전원우는 생글생글 웃었다. 저 웃음이 축제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좋아서 나오는 웃음이라기에는 어딘가 어색했다. 그러니까 꾸며낸 미소 같았다는 말이다. 전원우는 감정을 잘 숨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일그러진 미소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전원우는 애써 웃었고 나는 불안했다. 늘 그랬다. 알기 힘든 전원우의 속내는 나를 항상 불한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늘, 한결같이. 마찬가지였다.
축제는 밤늦게까지였다. 누가 나와서 춤을 추는가 하면 노래를 부르고 그 다음은 다시 춤을 췄다.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 가운데서 전원우는 위태롭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보다못한 이지훈이 나와 전원우를 끌고 나왔다.
"존나 시끄럽네 진짜.“
"그니까, 나 머리 울려."
"지훈이 기숙사 갈 거야?"
전원우가 불안한 듯 물었지만 이지훈은 그런 그를 흘낏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 거야, 벌써 열한 시구만. 전원우는 알겠다고 했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나는 할 만한 게 없어서 그냥 이지훈이 기숙사로 들어가기까지 학교 운동장이나 빙글빙글 돌기로 했다.
"전원우 넌 잠깐 이리 와 봐."
"...응."
"김민규 너는 여기서 얼어죽어라."
너무한 새끼. 전원우는 어김없이 팔랑거리며 이지훈을 따라 들어갔다. 날씨가 아까보다 많이 추워졌다. 아, 이대로 있으면 전원우 추워할텐데. 기분이 좋았다. 이지훈이 뭐 때문에 전원우를 데리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할 말을 정리할 시간이 생겨서 좋은 거였다. 뭐라고 말하지.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한다고 잘 할 수야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한다고는 말하고 싶었다. 혹시 싶어서 이지훈이 있는 기숙사 입구를 쳐다보니 얇은 실루엣이 운동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전원우는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길이가 이지훈 거는 아닌데, 아마 제 거를 가져다가 그 방에다가 놔둔 거였을 것이다. 전원우는 코를 훌쩍이며 와서 옆에 앉았다. 코가 빨갰다.
”공연하는 데로 다시 갈래?"
"아니이..."
전원우는 발을 가져다가 모래장난을 쳤다. 이지훈이 뭐래? 으응, 별 거 아니야. 그리고 잠깐의 적막. 하늘에는 별이 떠 있었고 멀리서는 음악 소리가, 가까이에서는 귀뚜라미 소리가 울렸다. 춥다, 그치. 전원우는 대답이 없었다.
"있잖아, 민규야.“
고개를 돌려 전원우를 쳐다봤다. 전원우는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땅바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말을 잇기가 힘든지 입을 달싹이는데, 나는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시간을 이렇게 오래 끌어, 하는 말에도 전원우는 눈을 끔뻑이기만 했다. 있잖아. 나 어제 네가 했던 말, 다 들었어. 전원우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봤다. 아, 전부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했던, 내 첫사랑이 저라는 말을 다 들었다고 한 거다. 벌어진 입술이 마르는 게 느껴졌다. 전원우는 말을 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너네가, 아니, 네가 나 자는 줄 아는 것 같아서...... 얼버무려진 뒷말에 무언가 더 필요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고.
"그래서?"
"어?"
너는 어떤데. 전원우는 토끼눈을 했다. 내가 한 말의 의중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아서 저러는 건지. 한숨을 쉬니 김이 나왔다. 그니까, 너는 어떠냐고. 이지훈 말로는, 너도 나 좋아한다며.
”그랬지.“
...그랬지? 물음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왜 과거형이야, 이지훈은 현재형이랬는데. 전원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나도 너 좋아했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근데 너는 아닌 것 같아서...... 전원우가 자꾸 눈을 피했다. 불안했다. 나는 이제야 내 마음을 알았는데 너는 무뎌지고 문드러져서 이미 다 닳아버렸구나. 전원우는 정말 울고 싶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근데, 근데...... 촉촉한 목소리가 거기서 끊겼다. 성질 급한 김민규는 대답이 듣고 싶었다. 원우야.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나 안 좋아해? 전원우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족히 이십 초 동안을, 전원우는 도망쳤다. 이십 초가 이십 분, 이십 시간, 아니 이십 년 마냥 느껴졌다. 심장은 점점 빨리 뛰었고 점점 불안해졌다. 원우야, 원우야. 전원우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니다.“
”.......“
”나 먼저 들어갈게, 천천히 와.“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전원우는 마음을 진작에 접었고 나는 알게된 지 며칠 안 된 이 짝사랑을 접어야 했다. 그게 다였다. 전원우를 천천히 스쳐 지나가려다가, 멈춰섰다. 민규야, 하는 부름이 애달팠다.
”내 말만 들어주면, 안 돼?“
몸을 돌려 전원우를 바라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리고 있어 동그란 뒤통수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니까, 민규야, 나느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전원우가 나를 올려다 볼 적에는 올라간 그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너 좋아했었는데, 너는, 넌 아니니까 그만두려고 그랬는데. 근데 너도 나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너무 힘들고, 억울하고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떨렸다. 올려다보는 눈빛이 처량했다.
”민규야.“
”......“
”너는, 너는 나 좋아해?“
”응.“
전원우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는, 나도 너 좋아해.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서글픈지 입꼬리가 자꾸만 삐죽였다. 어어, 울지 마. 전원우는 눈물을 조금씩 흘렸고 울음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애절했다. 원우야, 울지 마. 내가 네 마음 몰라줘서, 그래서 속상했어, 으응, 그랬어. 고개를 푹 숙인 전원우를 위해서 쪼그려 앉았다. 나도 너 좋아해 원우야.
열여덟 말,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즈음의 치기 어린 감정이었다. 늘 느렸던 전원우가 날 먼저 좋아했고 늘 빨랐던 나는 사랑을 뒤늦게 알았으나, 그것은 분명히 첫사랑이었고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전원우는 어김없이 팔랑거리고 하얗고 얇았으며 김민규는 갈피를 못 잡고 계속 변했다. 짓궂게도 엇갈렸던 시간은 둘을 저 멀리서 이 가운데까지로 데려왔다. 이지훈이 지난 주엔가 그랬었다. 전원우는 어김없이, 한결같이, 늘 하얗고 마르고 팔랑거렸고 변한 건 김민규라고. 그 말은 그저 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다만 우리는 어린 사랑을 했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한결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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