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서울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주를 뽑자면 이번 주가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이사 준비,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한 잔, 가족들과 외식.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위에서 난리였다. 무슨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서울로 이사 가는 건데. 엄마는 캐리어를 끌고 가는 내 뒷모습을 보며 결국 눈물을 터뜨리시며 나를 안아주셨다. 하여튼, 우리 엄마 오보는 세상에서 제일이었다. 물론 엄마를 안아주며 나도 눈물이 날 뻔한 건 비밀이다. 동생은 아주 신이 났다, 이제 내 방도 지 거라면서. 철이 안 든다, 언제쯤 정신 좀 차리련지. 동생이 조금 얄미워서 동생이 숨겨준 초콜릿을 가지고 나왔다. 뭐, 남친이 벨기에에서 어쩌고... 지랄이다. 오빠보다 남친이 더 좋은 쓰레기 같은 새끼. 내가 지를 업어 키운 건 기억도 못 하고. 사실 업어키웠다기 보다는 같이 엄마 등에 업혀서 자랐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나. 나는 지금 매우 신이 난다. 예전부터 그렇게 가고 싶었던 서울로 이사를 가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중에서는 도시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항상 시골을 떠나지 못하고 함께 시골에서 살았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서울에 대한 환상이 조금 컸다. 티브이를 보면 도시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이 많았고, 사람들은 다 간지났다. 뭔가, 저 사람들이 먹는 물은 우리 집에서 먹는 물이랑 다를 것 같은 느낌? 서울에 가면 물을 가장 먼저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을 어릴 적부터 했다. 서울이 너무 가고 싶어서 하루는 엄마께 서울로 이사 가자고 했더니, 나를 목욕탕에 데려갔다. 왜냐고? 우리 동네 목욕탕 이름이 서울탕이었기 때문이다. 시골 주제에 무슨 서울을 따라 한다고. 엄마가 내게 서울은 정신 차려도 코 베이는 곳이라고 죽어도 갈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서울에 살 수만 있다면 그까짓 코쯤이야 다 내어줄 수 있던 나였다.



* * *


한 다섯 시간 버스를 타고 왔나? 드디어 창밖에 논밭이 아닌 높은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티브이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다. 내 키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초고층 건물들에, 손에 커피를 하나씩 들고 다니는 멋진 서울 사람들, 거기다가 차도를 꽉꽉 매운 차들까지. 절대로 내가 살던 시골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계속 그렇게 창밖만 바라보는데 도착했는지 버스가 완전히 멈추었다. 택배로 보낸 짐 빼고 나머지 짐들을 챙기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상쾌한 공기가 아닌 매캐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서울 공기가 더럽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이 정도 일 줄은 나도 몰랐다. 서울 사람들 폐는 분명 두 개가 아닌 네 개일 것이다. 매일 어떻게 이런 공기를 마시는 거지. 근데 뭐, 이제 나도 서울 사람이니 적응해야지 싶었다.


내가 살게 될 오피스텔은 버스터미널에서 얼마 걸리지 않았고, 주위에 지하철역도 있어서 교통 하나는 편리했다. 근데 조금 걸리는 게 주위에 주택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 골목에 있어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데다가, 밤이면 가로등이 있어도 조금 깜깜했다. 뭐, 키가 거의 190인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겁이 아예 없는 편이 아니어서 조금 무섭긴 무서웠다. 그런 날 보고 동생은 덩칫값을 못한다고 했었다. 무서운 걸 어떡하라고. 버스를 한 번 더 타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한 번 엄마랑 와 본 적이 있었는데 혼자 가려고 하니 괜히 또 떨렸다. 세 정거장 정도를 갔더니 오피스텔이 있는 골목길 쪽에 도착했다.


골목길에는 내가 캐리어를 끄는 소리와 내 발 소리, 그리고 앞에 가는 사람의 발소리 밖에 들리지 않아 조금 무서웠다. 무서운 걸 겨우 참고 계속 오피스텔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서 가던 사람이 멈춰 서고는 나를 째려봤다. 날 보는 게 아니겠지 싶어 계속 길을 가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예? 저요?"
"그럼 여기 그쪽 말고 누가 있는데요."
"그... 러게요. 저, 저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와, 존나 뻔뻔하네. 저기요, 저도 저 예쁜 거 알아요. 근데 이렇게 따라오시면 좀 곤란하죠."


엄청나게 당황스러웠다. 키는 나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나보다 조금 작았고, 되게 여우처럼 눈이 찢어져있어서 괜히 나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계속 보니까 여우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하고. 남자 치고는 꽤 예쁘장한 외모였다. 자기 입으로 예쁘다고 하는 게 조금 이해가 가기도 하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 머릿속으로 이해가 가지 않던 행동이었다. 갑자기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는 나를 치한으로 오해했다. 이게 무슨... 서울 오자마자 처음 만난 사람에게 처음 들은 말이 뻔뻔하다는 소리라니. 조금 충격이 컸다. 그렇게 계속 멍 때리며 그 사람 얼굴만 보고 있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그쪽도 할 말 없죠? 뭐 할 말 없겠지, 누가 봐도 나 스토킹하고 있는데."
"저, 저기 뭔가 있으신가 본데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
"웃기지 마세요, 거기 캐리어에 흉기 들어있는 거 저 다 알거든요?"
"아니, 진짜 저 아니에요. 진짜 저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요?"
"그럼 증명해 보던가요. 뭐 증거 있어요? 캐리어 열어보세요."

캐리어를 열어보라는 그 남자의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 이유는 내 캐리어에는 속옷 위주로 옷 종류가 들어있기도 했고, 그걸 남한테 보여줄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망설이고 있었는데, 저 남자는 내가 변명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진짜 나는 내가 이런 일을 겪을 줄은 죽어도 몰랐다. 내가 원래 살던 지역에서 나는 좀 만인의 사윗감으로 유명했다. 공부 잘 해, 운동 잘 해, 잘생겨, 요리도 잘 해, 자상하지.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부끄러웠지만 모두 다 내 이름이 나오면 따라오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 같았다. 저 사람은 나를 개 사이코 스토킹하고 다니면서 캐리어에 흉기나 들고 다니는 쓰레기로 보고 있었다. 나는 진짜 그런 사람이 아닌데. 한숨만 나왔다.


"하아... 아니, 저기... 저기 보이시죠? 오피스텔. 저 저기 사는 사람인데..."
"예? 제가 저기 사는데 뭔 헛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요, 뭐 들어나 봅시다. 어디, 몇 층 사세요?"
"저 7층 사는데요."
"저도 7층 사는데요. 와, 진짜 요즘 스토커들 엄청 무섭네요. 내가 어디 사는 줄도 알아요? 무섭다. 그래요, 그쪽 똑똑하니까 그만 따라와요. 경찰서에서 보기 싫으면."
"아니 저 702호 산다고요."
"전 701호 사는데, 702호에 어떤 여성분 살거든요?"
"그 분 이사 가고 제가 새로 이사 왔다고요!"


나는 너무 답답했다. 아니 씨발... 저 사람은 왜 도대체 내 말을 안 믿는 거지? 도끼병이 있는 건가? 저건 무슨 공주병이야 뭐야. 얼굴 좀 반반하게 생겼다고 진짜 그러는 거 아닌데... 근데, 정말로 내가 만난 남자 중에서는 가장 예뻤다. 내가 살았던 곳의 남자 애들은 다 똑같았다. 피부 까무잡잡하고 투박하고. 반면에 저 사람은 얼굴선이 되게 고왔다. 웬만한 여자 뺨칠 정도로... 그러면 뭐 해, 성격이 파탄인데. 이 사람 말로 보아하니 내 옆 집일 것 같은데... 앞날이 조금 두려웠다. 이제 가끔, 아니 거의 매일 저 사람을 마주해야 한다니... 어후, 소름이야. 나는 그냥 저 사람이 뭐라고 지껄이던지 신경 안 쓰고 빠르게 걸었다. 뒤에서 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냥 무시했다.


"저기요, 아니 진짜 골 때리네. 경찰서 가고 싶어요?"
"..."
"저기요? 와, 이제 말도 씹네."
"..."
"그래요,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진실은 오피스텔에서 밝혀지겠죠 뭐."


진짜 서울 사람들이 이상한 건지, 저 남자 혼자 이상한 건지. 나는 후자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저 남자 하나 때문에 내 서울 사람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진 않았다. 서울에 저런 사람도 있다니... 내가 시골에서 20년을 넘게 살았지만 저런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서울은 넓어서 그런가... 별 사람이 다 있네. 오피스텔이 눈에 보였다. 빨리 저 사람이 조금 창피한 줄 알면 좋겠기에 엘리베이터를 저 남자와 함께 탔다. 그래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좀 조용했다.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긴 한데 나한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혼자 별생각을 다 하다가 보니 벌써 엘리베이터가 7층에 도착했다. 서둘러서 우리 집인 701호로 갔다. 그 남자가 뚫어져라 날 쳐다보자 나도 조금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저기요, 뒤 좀 돌아주시죠."
"제가 왜요."
"그럼 저희 집 비밀번호 보시게요? 무단 침입하실 거 아닌가 몰라."
"제가요? 그쪽 집을요? 제가 무슨 미쳤다고. 저 안 미쳤거든요? 비밀번호나 누르세요."


나는 망설임 없이 비밀번호 네 자리인 0406을 눌렀다. 이 번호의 의미는 딱히 없다. 그냥 내 생일이라 외우기 쉬워서 0406이다. 엄마가 이 사실을 안다면 난 등짝을 백 대 넘게 맞았을 것이다. 너처럼 정신 빠진 애는 없을 거라면서... 엄마가 이 장면을 보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당황한 듯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뿌듯했다. 아마 지금 엄청 쪽팔릴 것이다. 벌받은 거다, 그러니까 누구를 스토커로 몰아. 이 김민규 님을. 마음만 같아서는 잔뜩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저 인간과 같은 인간이 되기는 싫어서 마음속으로만 웃었다. 남자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갰다.


"저기요, 쪽팔리죠. 그니까 왜 멀쩡한 사람을 스토커로 몰고 그래요."
"씨발..."
"이제 우리 옆집 이웃인데 사이좋게 지내요."


그래도 이런 상태로 계속 지낼 수는 없으니 나는 화해의 의미로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나와 손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그대로 자기네 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 씨발... 성의가 무시당하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은 없다. 착한 내가 참아야지, 착한 내가... 집 안으로 들어와서 아직 정리도 되지 않은 집에 대충 앉아서 생각을 하다가 괜히 자존심이 상해 벽을 한 번 찼다. 분명히 이 오피스텔은 방음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만큼 화났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유치하지만 누가 먼저 유치하게 나왔는데, 나는 진정한 유치함이 뭔지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 * *


어떻게 옆집을 엿 먹이면 좋을까. 이 시간에 청소기를 돌려? 아, 그건 너무 약한데. 노래를 크게 틀까? 아니,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어. 짐은 대충 던져두고는 소파에서 곰곰이 생각하는데 옆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몰래 야한 동영상을 봤을 때 들렸던 높은 신음 소리. 처음에는 이 사람이 나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야동을 크게 틀었나 싶었는데, 신음 소리가 그 사람의 목소리와 겹쳐 들렸다.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닌 이상 그 신음은 백 퍼센트 옆집 남자의 소리였다. 혼자서 하는 건가, 아니면 둘이서? 여자? 남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신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격해졌다. 계속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의 나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 씨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건전하면 김민규, 김민규하면 건전이었는데.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워도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신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들렸다. 신경질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옆집으로 향하고는 문을 세게 두드렸다. 씨발,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 * *


아, 씨발 존나 쪽팔렸다. 버스정류장부터 날 쳐다보는 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골목길까지 따라오자 나는 거의 빼박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어떤 사람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날 계속 쳐다봐, 거기다가 나를 계속 쫓아와. 이거 누구나 오해할 상황이지,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 정체 모를 엄청나게 큰 캐리어도 끌고 다니고.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 사람이 뭐를 끌고 다닐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나는 정말 그 남자가 나를 스토킹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는 내가 예쁜 걸 정말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도 나랑 자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아무튼, 집에 들어오고 나도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옆집 사는 사람이라니... 분명 저번 주까지만 해도 여자분 혼자 사셨는데. 당장 내일이 무서웠다. 집에만 처박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혼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옆집에서 벽을 세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지금 싸우자는 건가. 그리고 몇 번 더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짜증 나네. 화가 나서 작전을 계획했다.


[옆집 남자 괴롭히기 프로젝트]


이름 하나 엄청나게 근사했다. 멋져라. 어떻게 괴롭힐지 계획을 짜려고 하는데, 머릿속에 좋은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내 전 옆집 사람은 내게 스트레스를 엄청 줬었다. 매일 들리는 신음 소리, 살 부딪히는 소리, 침대 움직이는 소리. 근데 내가 뭔데 그들의 성생활을 방해하겠냐 싶어 참았다. 아, 이거 좀 괜찮은 것 같은데. 똑같이 해줘야지. 어젯밤에 보던 게동을 틀은 폰을 최대한 벽에 붙였다. 그리고 소리를 최대로 키웠다. 아, 재밌네. 옆집 남자 얼굴이 생각났다. 내가 볼 때는 지금 찾아올 것 같기도...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그 남자는 우리 집 문을 쾅쾅 쳐댔다. 아, 시끄러워. 야동을 멈추고는 문을 열어주러 나갔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 씨발. 좀 줄이시죠."
"뭐를요."
"댁 신음 소리요."
"저 씹 안 떴는데요."
"네? 아까 존나 신음 잘 들렸는데."
"꿈꾸신 거 아니에요? 괜히 멀쩡한 사람 몰아가네."


남자는 그런 내가 조금 수상했는지 계속 내 얼굴과 우리 집 안을 힐끔거렸다. 나는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다른 용건 없으시죠? 물어보고 문을 닫았다. 아, 존나 통쾌하다. 오늘은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네.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침실로 가서 에어컨을 틀고 잠에 들려고 했다. 하지만 난 잠에 들지 못했다. 자려고 하는 순간 옆집에서는 청소기를 돌리는지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씨,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마음만 같으면 따졌을 텐데 뭔가 지금 시끄럽다고 찾아가면 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워서 소리가 들리는 걸 참는데 이제는 락 음악이 내 귀에 들려왔다. 아, 나 락 존나 싫어하는데.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로 저쪽 집 문을 한 번 쾅 쳤다.


"저기요, 미쳤어요? 소리가 너무 크잖아요."
"아, 죄송해요. 이 집이 방음이 잘 안 되네."
"뭐라고요? 아니, 저기요. 이제 그만 하시죠."
"뭘 그만해요, 그쪽이나 그만 하시죠."
"그쪽이 먼저 시작했으니까 그쪽이 끝내셔야죠."
"제가 시작했다고요? 와, 어이가 없네. 그쪽이 먼저 저 스토커로 오해하셨잖아요."


말이 꼬리를 물고, 물고 또 물고. 그렇게 자리에서 한 십 분을 유치하게 싸웠나, 싸우다가 보니까 정이라도 드는 건지 그 사람한테 내가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사과하기는 조금 좀 쪽팔리고, 사과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혼자 계속 고민하는데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저기요."
"또 왜..."
"미안해요."
"예?"
"미안하다고요."
"네?"


그 사람이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괜히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 남자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존나 쪽팔린다. 진짜 자살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사람이었네요."
"..."
"사과해줘서 고마워요, 잘 지내보죠."


그 사람은 내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손을 잡고는 어색하게 웃다가 손을 놓으니까 그쪽이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자기 이름은 김민규라고, 오늘 처음 서울에 와서 좀 어색하다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그래서 나도 내 소개를 짧게 해주고는 맥주나 한 캔 할까 싶어 그 사람을 우리 집에 데리고 왔다. 나도 딱히 내 친구랄만한 또래가 주위에 없었는데,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 * *


2016년 8월 3일


서울 오고 드디어 첫 친구를 사귄 기분이었다. 원우, 전원우. 이름은 동글동글하면서 성격은 앙칼진 게 꼭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근데 또 쓰다듬어주면 얌전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재밌었다. 원우 형의 집에서 맥주를 한잔하다가 지쳐서 먼저 잠에 드는 걸 재워주고 나왔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라니. 뭐,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좋다고 할까. 서울 사람들은 다 전원우 같을까 싶었다. 다 저렇게 까탈스러운가. 근데 또 까탈스럽지만 귀여운 건가. 너무 귀여웠다, 전원우가. 졸린지 술 먹으면서 천천히 졸고, 눕히려고 했더니 또 안 졸리다면서 고집 피우고. 결국 맥주 캔 들고 자고. 첫인상이 고양이였다면 지금은 나무늘보와 고양이를 섞은 느낌이 들었다. 결론은 둘 다 귀엽다고.


2016년 8월 11일


전원우와 많이 이야기해 본 결과 전원우의 직업은 작가라고 했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며칠 동안 전원우의 인상이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싸가지 없는 왕자병에서, 지금은 앙칼지지만 얌전한 고양이. 그게 그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내 입장에서는 많이 변화된 거다. 생각보다 전원우라는 사람이 괜찮게 느껴졌다. 많이. 시골에서는 느껴본 적 없었던 감정이다.


2016년 8월 16일


내가 걱정했던 만큼 서울은 어려운 곳이 아니었다. 무서운 곳도 아니었고, 오히려 고향처럼 편안했다. 아직 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매일이 이런 일상이라면 서울로 온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뭐, 매일이 고통이어도 후회하지 않겠지만. 일단 내가 제일 잘한 행동은 오피스텔을 여기로 잡았다는 것, 전원우를 만났다는 것. 이 두 개가 아닐까 싶다. 만족스러웠다.


2016년 9월 7일


오늘 전원우랑 잤다. 잤다는 말이, 건전하게 잤다는 소리가 아니라 배 맞대고 섹스했다. 오랜만에 술에 거하게 취해서 온 전원우가 갑자기 우리 집으로 와서는 나를 꼬셨다. 섹스하자면서. 전원우의 엉덩이에 꼬리가 아홉 개 보였다. 저건 분명 내 간을 파먹으려는 게 분명했다. 근데 나는 제대로 홀렸기 때문에, 닥치고 전원우에게 간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2016년 10월 18일


요 며칠간 전원우와 냉전이었다. 조금 심하게 싸웠다. 우리 사이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사귀는 건 아닌데 배는 맞았고, 입도 맞았고. 나는 좀 억울했다, 그 모든 걸 다 나랑 했으면서 친구랑 키스하다니. 전원우는 내게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화를 냈다. 그러게, 내가 무슨 상관이더라.


2016년 12월 4일


오늘은 조금 좋은 날이다. 왜냐하면 전원우랑 사귀기로 했기 때문이다. 11월 중순까지 우리는 사이가 딱히 좋지 않았다. 그냥 마주쳐도 인사도 대충 하고, 연락도 안 하고. 그러다가,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술을 마시고 나도 모르게 전원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원우 목소리가 너무 예뻤다. 그렇게 우리는 또 배를 맞추고, 그러고 사귀게 됐던 것 같다. 이제 당당하게 전원우를 좋아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 * *


서울에 온 지 반년이 넘었다. 지금의 서울의 느낌은 처음처럼 바쁘고 빠른 느낌이 아니라 느리고 잔잔했다. 그건 아마도 나 혼자가 아닌 내 옆에 나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빠른 걸 추구해서 서울에 왔지만, 이제는 서울에서 잔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행복했다. 그것도 물론 서울이 좋아서가 아니라 전원우가 있는 서울이 좋아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 후기 *


이런 해괴망측한 글을 읽으시려 시간을 쓰신 모든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ㅠㅅㅠ 중간에 주제를 바꾸는 바람에 쓸 시간이 얼마 없어 글이 조금 깔끔하지 않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어요...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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