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진 지도를 집어들었다.
너는 없었다.
소란스러움이 자취를 감춘 푸른색의 밭들은 아직 오지 않는 장마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옆집 순이네 아저씨가 며칠을 바쳐 잡초 없이 깨끗해진 밭들에는 참새들이 가끔 몸을 뉘였다가 다시 날아가는 선착장이 되었다. 어머니가 요즘 내내 걱정하던 가뭄은 멈출 새를 보이지 않았고, 습기 없고 구름 없이 맑은 하늘은 여전하게도 따가운 햇살을 쏟아내기만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간간히 내 단잠을 깨우는 이 시골촌구석은 ‘평화롭다’ 라는 표현이 적당했다. 전과 다를 것 없이 반복되는 하루와, 살갗이 태워지든 말든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 오늘도 여전히 난 무료했다. 저 위 도시는 한 번도 구경가지고 못했고, 해봐야 석달에 한번 이장님이 데려다주시는 조그만 번화가가 다였다. 난 그런 조그맣고 볼품없는 번화가를 그토록 좋아했다. 길고긴 석달의 시간을 버티기가 어려워 4시간에 한 번 오는 시내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겁도 많고 아는 것도 없어 버스요금조차 몰랐지만, 그 순간만큼은 시골이 아닌 도시에 조금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어 그 뒤 한참동안은 혼자 뿌듯해했다.
무료함을 잊으려 갔었던 시내조차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마을에 크디큰 짐을 담은 이삿짐 버스가 소란스러움을 마구 내뿜으며 마을로 도착했다. 우리 집에 연결된 골목을 딱 세 번 지나면 도착하는 집에 한 아이가 이사왔더랬다. 이사, 새로운 아이. 무료했던 나의 흥미를 앗아가기 참으로 좋은 소재였다. 어머니에게 하루 종일 그 아이를 물었다. 끽해야 돌아오는 대답은 ‘도시에서 아파서 내려왔더라.’였지만 나는 떨리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설렘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시’ 아이란다. 도시. 시내 번화가가 비교가 안 되는 조용할 틈 없는 도시. 그 아이를 동경했을 뿐 더러 낯을 한 번도 보지 않아 미치도록 궁금했다. 이삿짐을 정리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도시에 대한 건 마구 물어볼 셈이었다. 비록 친해져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어야만 했으나.
그 아이와 처음 얼굴을 마주한 날은 다른 날과 달리 유난히 번잡했다. 아버지의 손을 도와 하루 종일 밭에만 있어야 했다. 오늘은 꼭 한 번 찾아봐야지, 하며 약속했던 날 중 하나였는데 밭 아래 살갗을 태우며 참으로 많은 걱정을 했다. 혼자 한 약속이지만 그 날이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애타는 내 속을 모르는 건지, 짓궂게 할 일만 더 던져주셨다. 뉘엿뉘엿 하루 종일 빛을 내뿜어 피로해진 태양이 집으로 돌아갈 무렵에 밭에서 빠져나온 나는 무작정 그 아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숨이 차서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닫혀있는 파란색 문 앞에 섰다. 괜히 머리를 만지작대고, 혹여 냄새가 날가 옷에 코를 박고 냄새도 맡아 보았다. 문 틈 사이로 보이는 정원과 무성한 꽃들은 설렘에 시동을 부추겼다. 조심히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을 때,
“누구세요?”
그 아이가 나타났다. 설렘이 극에 달해 온몸이 초조해지는데, 아이의 얼굴을 보자 모든 것이 차분해졌다. 뽀얗고 예뻤다. 도시 아이들은 다 그런 것일까. 뽀오얗고, 기다란 속눈썹이 자리한 어여쁜 얼굴. 까무잡잡한 나와는 상반됐다. 하이얀 옷을 입고 깡마른 몸에 나를 올려다보았다. 으어, 바보소리 말고는 딱히 낼 목소리가 없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을까, 아이의 눈에 의심이 담기기 전에 머리를 굴려 할 말을 생각해보았다. 저, 안녕! 나는 김민규라고 하는데. 수줍음과 서투름이 아이의 눈에 보였는지 금세 아이의 눈은 웃음이 담겼다. 금방 내가 이 마을의 아이인걸 알았던지, 저도 제 소개를 한다. 그래, 난 전원우야. 원우, 원우였다. 얼굴과 맞게도 참 예쁜 이름이었다. 여기 동네 살아? 상상했던 목소리가 아니였다. 아니 솔직히 상상했던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동네에 살아?”
“어? 어, 어.”
“그럼 나 동네 좀 소개시켜줘.”
여기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귀를 간지럽혔다. 아, 동경이 아니었던가. 사랑이었을까.
-
원우가 도시에서 시골로 올라오게 된지 어연 3개월 즈음에는, 나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짧으면 짧을 석달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꽤나 긴 시간이었고, 친해지기엔 충분한 기간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심장? 빈혈? 통 알아듣지 못하는 말 뿐이었으나 -물론 심장은 알았지만- 전원우는 많이 아파서 이쪽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하루가 지나고 항상 동네를 돌아다니며 서로 만나 얘기할 때 마다 나는 그에게 건강과 도시에 대해 물었다. 항상 웃으며 귀찮지도 않은지 내가 묻는 어마어마한 질문에 모두 답해주었지만, 건강에 대해서는 왜인지 항상 웃으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냥 꿍꿍이가 있겠거니 싶었다. 원우와 친해져 같이 다닐 동안에 나는 아버지에게 참으로도 많이 맞았다. 그때였을 것이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이라는 걸 해본 것은. 아이와 항상 만나 놀고 싶었고, 밭일은 저 멀리 내팽겨쳤다. 처음 아버지도 나와 그 아이가 노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또래 친구가 생겼다며 흐뭇해하기까지 하셨다. 근데, 내가 생각해도 심할 정도로 나는 전원우와 어딜가든 붙어 다녔다. 아이가 몸이 약하다, 나와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 라는 변명도 슬슬 사라지게 될 무렵, 나는 처음으로 전원우에게 ‘사랑’ 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솔직히 겪어본 적이 없던 감정이라 무서웠다. 덜컥 하고 찾아오는 전과는 다르게 전원우 앞에서만 서면 뛰는 설렘과 두근거림. 계속 보고 싶고, 하얗고 말랑한 볼을 만져보고 싶고. 그래서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이 옆집 아들에게서 욕정을 느낀다. 아버지가 뒷목을 잡다 못해 쓰러지기까지 할 참 딱 맞는 조건이었다.
“원우야.”
오늘도 나는 아버지의 꾸중을 피해 새벽 일찍부터 아이의 집으로 도망쳐왔다. 5시쯤에 아이의 집에 가면, 방에 새근새근하며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처음에 도망쳐왔을 땐 넓은 거실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해가 뜰 때 까지 같이 잠을 청했는데, 요즘들어 아이의 방으로 들어가 원우의 얼굴을 보는 일이 잦았다. 그냥, 이 떨림을 자고 있는 뽀얀 얼굴을 보면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저번주에는 처음으로 그 아이 몰래 얼굴을 건들였다. 볼이 따끈하고 말랑거렸다. 뽀얀 볼따구는 깡마른 몸과 달리 포동했고, 만질수록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다. 이틀전에는 속눈썹을, 어제는 콧대를. 오늘은 처음으로 입을 맞췄다. 새벽 입을 맞추고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떨림에 시달려 바로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원우가 온 뒤 처음으로 아이의 집에서 아침을 맞지 않는 날이었다.
-
해가 뜨지 않았다.
가뭄이 끝나 긴 장마의 시작이었다.
-
입을 맞추고 난 뒤 나는 꽤나 자연스러웠다. 전과 달리 원우를 만나고, 여전히 걸으며 여전히 기를 나눴다. 달라진 게 없었고 평화로웠다. 단지 조금, 아주 조금 달라진 거라곤…, 전원우의 말 수였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내가 항상 떠들고, 그가 항상 듣는 역할이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말 수가 적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얘기를 꺼낼 때도 있었는데, 요즘따라 항상 시작은 내가 했던 것 같다. 어제는 동네 조그만 도서관을 갔었다. 생긴지 오래되어 책이 다 바래져 있었지만, 원우의 부탁으로 인해 나도 몇년만에 가본 도서관이었다. 아이는 도서관에 들어서자 표정이 밝아지며 무언가를 마구 찾아댔다. 신나게 삼분쯤 돌아다녔을까, 금세 나에게로 찾아와 묻는다. 그럴 줄 알았지.
“민규야, 여기 동네지도 없어?”
“지도?”
지도를 찾는 아이의 물음은 굉장히 특이했다. 이장님 댁에만 가도 볼 수 있는게 지리표인데. 한창 도서관이 새로 만들어졌을 때 미리 와서 도서관의 지리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나는 금방 지도를 찾을 순 있었지만, 한껏 설렘을 안은 얼굴로 지도를 보는 원우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동네가 좋은 것인가, 이제 와서 다 소개해준 동네를 더 알고 싶은 걸까. 자세히 들여 봤다가, 멀리 떨어져서 봤다가. 내가 책을 한권 다 읽었을 때에도 아이는 지도만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하고 다가갔을 때는 한껏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민규야, 우리 바다가자.”
“무슨 바다, 우리 동네에 없는데?”
“여기, 조금만 나가면 있는 바다.”
동네에 바다가 없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4시간을 기다려 한번 온다는 버스를 타고 삼십분을 달리면 나오는 바다가 있는 것도 맞았다. 무슨 바다야, 됐어. 하며 거절하려는 내 마음과는 다르게 아이의 표정은 이미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바다 한 번도 안 가봤어? 다정한 나의 물음에 한껏 다정함을 실은 그도 대답했다. 몸이 아파서어, 절대 못 가게 했어. 지금의 건강이 호전됐다고 해도, 무턱대고 내가 그를 바다로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못가잖아. 한마디에 무너지는 그의 표정은 가만히 있어도 흥미로웠다. 그래도, 꼭 한번은 보고싶어. 내 소원이란 말이야. 내가 약한 표정. 항상 나는 전원우 앞에서면 모든 것이 약했다. 모든 것을 원하든 난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선택한 완전한 갑을관계였다. 철저히 내가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꽤나 나는 이런 삶에 만족했다. 그에게 내 모든 것을 줄 만큼 나도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었으니까. 선택한 갑을관계라. 다른 것과는 다르지, 내가 그를 마음에 담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가자, 바다.”
“진짜?”
“응, 데려다 줄게.”
그렇게 나는 또 그를 이해한다. 너에게 내가 있는 행동은 들어줄 수밖에 없지.
-
그 날은 새벽부터 집을 나섰다. 원래 다섯시면 원우의 집을 향했었는데, 오늘은 조금 더 서둘렀던 것 같다. 원우의 집골목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항상 오후에 잠에서 깼었던 원우마저도 옷을 챙겨 입고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눈을 비비며 서성이다, 이내 나를 보고서 자신보다 한참은 커 보이는 옷을 입고 달려왔다. 이미 얼굴에 잔뜩 껴버린 미소를 지워낼 수 없었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지금 나에게로 달려오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분홍빛으로 보이기만 했다.
덜컹이는 버스 제일 뒷자리에서 한 칸 앞자리에 자리를 잡은 나와 원우는 가는 내내 서로 기대어 잠을 청했다. 덜컹이는 버스와 덜컹일 때마다 점점 가까워져 가는 거리 덕에 나는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심지어 곤히 자는 그의 얼굴이 밉기까지 했다. 이렇게 깊어만 가는 내 마음을 아는 건지, 하나도 모르는 건지. 뽀얀 볼과 선홍빛 입술에 마구 내 입술을 문대 버리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나오면 너는 어떨까. 애타는 나의 속은 전혀 모르는 건가. 미웠지만, 그가 알든 모르든 나의 짝사랑을 막을 요인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기까지 했고. 버스는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항상 가던 번화가를 지나쳐, 숲에 도착할 즘에는 어둑했던 하늘이 밝아지고 금세 눈을 떴다. 날씨가 좋았다. 하지만 가뭄이 끝나 장마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간 지난여름의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벌써 가을이 오려나, 원우의 얇은 옷을 한 번 더 여미어 주었다. 지나긴 숲을 지나면 바다가 보일 것이다.
깜빡 잠이 들었나, 눈을 찌르는 햇빛에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나타난 푸른 바다가 나를 반겼다. 오랜만에 보는 바다의 풍경이 꽤나 아름다웠다. 아직도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원우를 깨웠다. 원우야, 바다 다 왔어. 부스스하고 일어난 원우는 버스 창밖의 파아란 바다를 보며 한순간 표정이 맑아졌다. 바다다. 한껏 들뜬 목소리가 귀를 적셨다. 민규야, 나 내릴래. 내리자. 아무도 없는 버스에서 내린 저와 원우는, 바다로 달려갔다. 눈부신 바다를 처음 보는 원우는 버스에 내리고 나서 바다에 시선이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고, 세상 원우의 그토록 맑은 표정을 본 적 없는 나는 버스에 내리고 나서 원우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각자 행복한 미소를 띠우며 바라볼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바다와 아이를 바라봤다. 시간차로 뒤죽박죽 시원한 소리를 들려주며 파도치는 바다와, 눈을 감으며 바다의 소리를 즐기는 원우.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원우는 나를 봐주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바다를 느끼던 원우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바다가 너무 넓어.”
“…예쁘지 않아?”
“예뻐, 근데 너무 넓어서 무서워.”
민규야, 나는 내가 아픈 게 무서워. 원우가 처음으로 꺼낸 자신의 속 이야기였다. 나는, 죽는게 너무 두려워. 세상 가장 맑았던 나의 소년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직 바다의 푸른빛만 담을 것 같았던 아이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있다. 있잖아, 나는 너랑 평생을 같이 하고 싶어. 원우의 건강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눈치 채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심각성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을망정, 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나와 만나던 순간, 너는 얼마나 아팠던 걸까. 민규야, 나는 네가 너무 좋아. 눈물을 한 움큼 머금은 눈은 이내 감겨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도 이내 눈을 감았고, 따뜻한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서툰 키스였다. 서툰 우리의 첫키스였다. 내가 훔쳤던 그날의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그렇게 깊게 입술을 문대다 금세 원우는 힘을 차리지 못하고 내 품으로 곯아떨어졌다. 힘들어, 집에 가고 싶어. 원우의 부탁을 들어줘야만 했다. 그래,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
바다를 다녀온 날이 벌써 삼일이 흘렀다. 그동안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하지 않았던 밭일을, 결국에 바다에 갔다가 원우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걸려 삼일 내내 아버지 옆에서 일손을 도와야했다. 아침 일찍 밭일을 다녀오면, 온몸이 피곤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멀었다. 키스 후의 떨리는 감정도 그를 피하는 이유에 더해졌다. 솔직히, 피곤한 이유가 절반이었지만 그를 피한다는 게 더 맞았다. 처음 겪는 감정의 감기였고, 아직 나아지기엔 내가 준비가 덜 됐다. 조금 더디고 느린 나를 기다려줄 네가 필요했다. 너의 참을성이 고팠다. 이제 나의 감정이 겨우 출발점에서 선을 떼었으니 말이다.
다음날 얼굴을 가꾸고 머리도 몇 번 빗고 나온 아침의 공기는 제법 쌀쌀해졌다. 오늘 같이 있게 되면, 꼭 옷을 단단히 입으라고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래도 공기가 맑았다. 맑은 너를 찾아가는 모든 순간이 맑았다. 원우의 집으로 향하는 첫 번째 골목에서는 그와 만나면 처음에 말할 거리를 생각했다. 일이 많았다, 라는 핑계로 둘러댈 셈이었다. 두 번째 골목에서는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전해주기 위한 말거리를 또 생각했다. 사실 내가 너를 먼저 좋아했었어, 골목을 지나며 나의 말에 반응할 원우를 생각하며 한 번 더 웃었다. 세 번째 골목을 지났을 때 그와 내가 함께할 미래를 생각했다. 아이의 몸이 낫게 되면, 그때는 서울로 올라가 내가 좋아하는 시끄러움을 느끼고 싶었다. 번잡함도 번잡함이지만, 그와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두근거렸다.
그렇게 그의 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의 집은 누구보다 번잡했다.
“여기에 사는 남자애, 몸이 많이 아팠나봐.”
“그렇게 한순간에 가버릴지 누가 알았겠어.”
세상이 무너졌다.
항상 문틈으로 보았던 그의 집이,
정원에 만개했던 꽃들이,
누구보다 맑게 웃었던 너가.
-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년 전이었더라. 마지막으로 봤었던 것이, 그때 그 집 앞이었다. 서울의 번잡함을 느끼고 산지도 벌써 오년이 넘었다. 당연히 시내 번화가는 비교도 안됐다. 아주 시끄러웠고, 지루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너무 시끄러워서, 너무 어지러워서. 그럴 때 마다 항상 조용했던 너가 생각나곤 했다. 그때는 어렸어서 몰랐었지. 마냥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시간들이 그토록 고파질줄 상상도 못했었지. 아직 공기가 찼다. 봄이 오기엔 아직 시간이 남았나보다. 혹시나 따뜻한 바람을 마주할까 하고 얇게 입고 나온 나를 탓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 너와 내가 사랑을 고백했던 바다 위에 서있었다. 시골은 재개발 따위 눈독들이지 않고 여전히 그의 시간과 그의 존재를 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나만 홀로 한참 멀어져있었다. 그때의 사랑고백과 차가운 바람을 몸소 느꼈던 너를 기억한다. 그토록 아팠으면 말이라도 해주지, 하며 그를 미워해보기도 했고, 쌀쌀했던 것을 알았음에도 그를 챙겨주지 못했던 나를 탓하기도 했다. 사춘기의 열병은 꽤나 깊었다. 한동안 집에 박혀 울기만 했었다. 나를 사랑하던 너를, 내가 사랑하던 너를 내가 망가뜨려 버렸단 사실이 마음에 박혀 상처를 더 깊게 만들기만 했다. 지나간 시간들을 스쳐 되돌아보면 나는 그때와 달리 한참은 커 있었다. 사춘기의 열병에 허덕거리기만 했던 소년과는 달랐다. 아니, 다르고 싶은 걸까. 한참은 커 있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바라던 키도 훌쩍 자랐고, 그때와는 달리 이목구비도 또렷해졌다. 바라던 바였다. 그저, 외적으로 말이다.
나는 너가 지나간 시간에 하나도 자라지 못했다.
이미 멀어진 너의 시간에 헤어나오지 못했다.
바보같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시간에 멈춰있었다.
잊는 다는 것도 무서웠고,
잊혀 진다는 것도 무서웠다.
바래진 지도를 집어들었다.
너는 없었다.
* 후기 *
벌써 두 번째로 참여하는 민원합작인데, 이번에는 마감에 밀리고 밀려서 황급하게 썼던 것 같아요. 글 중간중간에 문장 문맥이 안 맞는 부분도 많을 거고 맞춤법도 많이 틀렸을 것 같은데 급하게 쓰느라 수정도 못했네요, 죄송합니다ㅠㅠ.. 서툰 솜씨로 원우와 민규의 순수하고도 애틋했던, 또 아프고 깊게 사랑했던 첫사랑을 담고 싶었는데 끝내는 원우의 죽음으로 끝이 났네요... 민규의 순수하고 원우의 깊은 아픔이 여러분에게 잘 전달됐을지 모르겠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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