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렸다. 이유? 건방지게 고객님께 말대답을 했기 때문에. 씨이발.





많이 봐줘도 나보다 열 살은 족히 어린 초등학생 손님들 께서는 학교 앞에 꼴랑 하나 있는 피시방을 열렬히 사랑했으며 딱 그만큼 알바생인 나를 존나게 싫어했다. 왜긴 왜야. 전 알바생이던 예쁘장한 휴학생 누나가 그만두고 새로 들어온 게 덩치 크고 선불계산 얄짤없는 김민규였으니까지. 억울해 뒤지겠다. 나는 아마 전생에 조선시대 서당 앞뜰에 기거하던 삼돌이가 아니었을까? 못돼처먹은 댕기머리 맹꽁이 도련님들에게 등교할 때 발로 채이고 하교할 때 돌맞고 심심하면 꼬리 밟히는 똥개 삼돌이.



그래도 나는 시급 7000원 값을 하기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지금 사장이 지껄이는 것처럼 마냥 날로먹지 않았다고!







"너 또 좌석정리 제대로 안해놨냐? 돈 들여서 일시켜놨더니 허구헌날 가게 들리면 뵈는게 애새끼들이랑 쌈박질하는 꼴인데 내가 지랄을 안하고 배겨? 아니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게 왜이리 융통성이 없어- 여기 쟤네들 때문에 장사하는거 몰라서 그러냐구. 그냥 대충 오냐오냐 해주고 어? 좀 시끄러워도 모른척 넘어가주고, 초딩이랑 똑같은 수준으로 이겨먹으려고 들지 좀 말란말이야! 너 스물 둘?"

"슴셋이요."

"셋이나 먹었어? 민규야, 남의 돈 벌어먹는데 왜 쓸데없이 자존심은 대쪽같이 세우고 그래.. 그러다 똑 부러져도 할 말 없다 너? 사회생활은 융통성! 응? 융통성이 생명이라고-"







개뿔이 융통성. 그냥 노예근성이라고 하세요. 걍 눈 딱 감고 빌빌 기어라- 하시라고. 짤리는 마당에 좀 개겨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지금까지 일한 돈 곱게 못받을까봐 그마저도 못했다. 좌석정리 그거 좆빠지게 했는데. 하필이면 오늘 수학시험을 말아잡수신 초딩 분께서 그 화풀이를 나한테 했을 뿐인데.. 헉 나 울거같아. 서러움에 눈밑이 그렁그렁해진다. 아니 도대체 어떤 손님이 모니터 화면에 지문 좀 묻어있다고 그렇게 득달같이 태클을 걸어요? 최대한 강경한 투로 대꾸하려고 했는데 목이 메어서 목소리가 찌질하게 나가버렸다. 지금 내 표정 되게 병신 같겠지.





힘 쭉 빠진 다리로 피시방 지하계단을 터덜터덜 걸어올라간다. 계단 한 칸에 꿍얼거림 하나씩. 키보드 사이에 껌 붙여놓은 거 내가 다 뗐는데. 침범벅 재떨이 내가 일일이 손으로 다 씻어놨는데. 초딩새끼들 맨날 뒤에서 나더러 밍구라고 부르는데. 계산 안하고 튀는 놈 내가 잡은 게 몇 번인데. 컵라면 시켜놓고 물부으니까 일부러 취소하고 딴걸로 바꾸는 거 다 참아줬는데. 그것 땜에 억지로 먹은 컵라면이 몇 갠데.





계단 끄트머리에 다다라 햇살을 한몸에 받으니 감정이 북받친다. 으아아악! 소리를 꽥 지르니 좀 시원해지는 것 같기도...는 개뿔이 화만 더 난다. 그 와중에 바깥공기는 또 더럽게 상쾌하네. 그래그래 안그래도 드으러워서 그만두려고 했어! 이제 볕도 안드는 침침한 피방알바는 쫑이야. 돈이 좀 없어서 그렇지 나도 집에선 귀한 왕자님인데. 정당하게 대우받고 돈도 많이버는 그런 개쩌는 새 알바를 구할거라고!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장은 취소. 나는 집에서도 삼돌이 신세를 못 면한다. 궁시렁거리며 현관문을 열어제끼니 거실에서 콩나물대가리를 뜯던 엄마가 어쩐일로 일찍 들어왔느냐 묻길래 드러워서 때려쳤다고 말했다가 날아오는 스댕 볼에 머리를 맞았다.







"대학도 안 가, 직장도 안 구해, 기껏 한다는 아르바이트는 한달을 못가서 갈아치우고. 정신머리를 어따 빼먹고 다니는거야?"

"아 엄마아.."







너 그럴거면 군대나 빨리 갔다 와! 씨.. 군대는 또 뭐 아무나 가고싶다고 보내주는 지 알아? 그렇다. 작년 쯤부터 이렇게 허송세월할 바엔 차라리 싸나이로서 국방의 의무나 후딱 해치워볼까 하고 입영신청을 넣어봤지만 전산추첨에서 장렬히 탈락해버렸다. 여태 마시고 있는 사회의 공기가 약간 죄악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니 무슨 군대 한번 갔다오려는데도 경쟁자가 한 트럭이야. 이게 말이 되는건가. 대학을 갈래도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도 매사 피튀기는 경쟁, 경쟁, 경쟁. 사회가 미쳐돌아가는구나.



나이를 먹을수록 패배자로써의 내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아 슬슬 짜증이 밀려오려는 참이다. 하늘에서 뭐 좀 안떨어지나.







"당장 다른 일 안하면 집구석에서 쫒겨날 줄 알아!"







노란 콩나물대가리들을 머리카락에 잔뜩 매달고 시무룩하게 소파에 앉으니 그래도 아들이라고 불쌍해보였던 모양이다. 끌어안고있던 스댕 볼을 뺏어가며 엄마가 그런다. 아들, 오늘 저녁 아구찜이야. 됐어 안 먹어.. 힘없이 대꾸하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자마자 얏호 소리없는 환호를 질렀다. 와! 아구찜!









* * *









"그 형이랑 결국 쫑 낸거냐?"

"내가 쫑 내고 말고 할 주제나 되니. 까인거지. 일방적으로."

"야 차라리 잘됐어 잘됐어. 존나 너 이용당한거라니까. 내가 옆에서 그렇게 뜯어말릴땐 들어쳐먹지도 않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만."

"너 나 위로해준다고 만나잔 거 아니였냐..? 왜 상처에 소금뿌려, 고등어도 아닌데.







아,미안미안. 그래도 전원우 드디어 정신 차리는구나. 다 잊고 새출발 해. 응? 등을 툭툭 토닥여주는 친구의 손짓에 영혼이 없다. 허한 맘에 얼음이 다녹아 밍밍해진 아메리카노를 바닥까지 쭉 빨아들인다. 내가 형한테 버려진 게 시원해 죽겠다는 표정을 못감추고 실실 웃는 얼굴이 원망스러웠다. 정태영 그자식은 정말 날 호구새끼로 보고 빨대 꽂았던걸까. 물론 내 쪽도 원하는 바가 있어서 먼저 접근했던거긴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되니 참, 마냥 서럽다.





내 자존감이 만년 바닥을 기는 이유. 넌 멀쩡하게 생겨서 왜 그러니 라는 말을 귀에 박히도록 듣게 한 쓰레기같은 고질병. 과민성대장증후군. 말이야 고상하지 조금이라도 자세히 설명하려 들면 이만큼 찌질한 것도 없다. 한큐에 내 인생을 거하게 꼬아놓은 그 걸림돌은 중요한 순간마다 불청객처럼 막무가내로 들이닥쳤다. 중학교 2학년 질풍노도의 시기, 나는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을 처음 보고 신하균 같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연기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물론 떨어지긴 했지만 아역 오디션도 두어번 봤다. 고3. 연극영화과 실기시험을 치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언제든 연기자가 될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는데. 내 앞 순서의 지원자가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고 면접교수들에게 칭찬을 받던 순간 갑자기 명치 아래가 경련했다.



결국 복통을 참지 못하고 면접장을 뛰쳐나온 병신같은 전원우.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야하는 배우 지망생으로써 치명 수준이 아닌 사망선고와도 같은 단점이다. 도피하듯 군대를 갔다 온 이후 다시 도전한 입시에도 연이어 실패했다. 돌이켜 생각하기도 괴롭다. 연영과 입시 횟수로는 벌써 사수생. 나이는 어느새 반오십. 아무것도 이뤄낸 게 없는 무익한 스물 다섯이다.







"저기.. 괜찮으시면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아, 예.."







너같은게 뭐 좋다고 맨날 여자가 꼬이냐. 왜, 부러워? 카페에 들어설 때부터 이쪽을 계속 흘긋거리던 여자에게 번호를 따였다. 모여 앉은 무리들끼리 소근거리며 들떠하는 양이 퍽 귀엽다. 여대생인가? 참 난 대학도 못갔는데. 조금이라도 우월감을 느껴볼라치면 득달같이 따라붙는 자격지심은 습관이 배서 고칠수도 없다.



괜히 주눅이 들어 애꿎은 카페 냅킨만 쥐어뜯는데 옆에서 또 속뒤집는 소리를 했다. 그러지말고 아이돌같은거라도 해봐. 너 좋다는 회사 많았잖아. 속도 모르고 뚫린 입이라고 나불거리는 저 입을 언제 한번 꼬매버리든지 해야겠다. 많기야 많았지. 그것도 오디션에서 싸그리 다 말아먹었지만. 이젠 나이먹어서 그나마도 힘들단다.



잘생긴 얼굴 두고 왜 그리 백날 죽을 쑤냐며 의아해하는 친구며 학원 선생, 심지어 부모님께도 차마 낮부끄러워 말을 못했다. 제가 똥쟁이라서 이모냥이라고는. 냉한 외모 덕에 주변에선 그런식의 결점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조차 안한다. 불행인지 그나마 개중 다행인지. 눈물겹게 고독한 똥쟁이 전원우. 와 극혐이다 정말.





하도 되는 일이 없으니 인맥에 집착했다. 매달리듯 만난 정태영과의 연애도 별 다를 것 없었다. 타고난 기럭지로 간간이 피팅모델 알바를 하다 만난 정태영은 과장을 살짝 더해서 하늘에서 내린 동앗줄 비슷한 사람이었다.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도 독립영화며 드라마 조연이며 경력이 꽤 화려한 그에게 자석처럼 끌려갔다. 정태영에게 끌렸는지 그놈 능력에 끌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후자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한다. 톱스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준연예인 정도는 되는 그는 손 닿는 곳에서 유일하게 제가 원하는 위치에 가까이 다다른 인물이라서, 이런식의 연애는 잘못되었다는걸 알면서도 쉬이 인연을 놓지 못하던 차였다.





사달라면 사주고 해달라면 해주고, 대달라면 대줬다. 만나면서 가르치듯 던지는 영양가없는 조언이나 오디션 팁, 슬쩍 과시하는 방송관계자들과의 인맥에 눈이 멀어서. 지금 생각해보니 미련 곰탱이도 그런 곰탱이가 없다. 간 쓸개 심장 후장까지 다 뽑아주고 내가 얻은게 뭐지? 아, 잠깐 그의 팬들 사이에서 쟤가 정태영 남친이라고 소문이 나긴 했었다. 우습게도 그 일 때문에 차였지만.







"콱 죽고싶다...."

"그럼 니 코트 내꺼 찜."







집 앞에라도 찾아가서 싹싹 빌어볼까. 나는 아직 정신을 덜 차린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마트폰으로 그가 좋아하는 유명 베이커리의 에클레어 따위를 검색하고있진 않을테니까. 다 팔리기 전에 얼른 가야겠네. 어느새 친구의 어깨에 걸쳐져있는 코트를 낚아채 서둘러 꿰어입었다.









* * *









아직 입가에 묻어있는 아구찜 양념을 휴지로 대충 문대닦으며 컴퓨터 전원을 발로 켰다. 알바괴물 사이트에 접속해 진지한 얼굴로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마우스 휠을 도로록도로록 굴리기를 한참. 다운받을 야동파일을 고를 때 만큼이나 신중하게 재고 또 재서 하나를 선택했다. 제티랜드 캐스트 아르바이트. 놀이공원은 하나의 연극무대고 알바들은 그 등장인물들 중 하나이므로 무려 캐스트라고 불러준댄다.



짱인걸? 대기업이라 그런가 동네 후진 피시방이랑은 마인드 자체가 급이 다르네. 절대 절대 캐스트식당 밥이 맛있다는 후기를 보고 결정한 건 아니다.





뭐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사이트에서 지원서를 작성하고 사전 인적성검사까지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이야 뭔가 굉장히 일이 잘 풀릴것만 같은 느낌인데. 내친김에 마우스를 몇번 더 움직여서 면접 후기며 일하게 될 부서까지 샅샅이 알아봤다. 한 세시간 쯤 그러고 있으려니 이 몸이 바로 준비된 인재가 아닌가 싶다. 벌써부터 귀여운 유니폼을 입고 프로페셔널하게 꿈과 희망을 전달하는 상큼이 알바생이 된 기분에 사로잡혀 실실 웃기도 했다.



와 나 드디어 사람구실 하는구나. 캐스트들끼리 그렇게 정분이 난다는데 나도 꼭 여자친구 하나 장만해야지. 꺼진 모니터에 잔뜩 들떠서 잇몸이 만개한 내 얼굴이 비친다. 어머 딱 서비스직에 적합한 용모네. 최고다 김민규. 자알생겼다 김민규.









태연자약하게 염장을 지를땐 그렇게도 얄밉게만 보이던 친구가 이리 예쁠수가 없다. 순영아, 내가 너 많이 아끼는 거 알지? 나중에 꼭 비싼 밥 살게. 감격에 젖어 전에없이 들쩍지근한 목소리로 애정을 표현하자 핸드폰 스피커 너머에서 까칠한 목소리가 대꾸했다. 됐어 미친새끼야. 너 정태영한테 한번만 더 비굴하게 기면 내 친구도 아냐. 아는 누나가 이번에 거기 FD로 들어간대서 간신히 꽂아준거니까 가서 또 삐끗하지나 말고.



말은 모나게 해도 분명 지 친구 빌빌거리는 꼴 보기가 안쓰러워 맘을 써준거다. 다시는 정태영에게 연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걸고서 학원 친구 소개로 뮤직비디오 남자 주연배우 오디션 기회를 얻었다. 그 누나한테 니 얘기 해놨으니까 가면 알아서 잘 해줄거야. 응응 알았어 알았어. 게다가 미리 지인을 깔아놓고 보는 오디션이라니.거의 출연 확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게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그러니 이번엔 뒤를 틀어막는 한이 있어도 꼭 해내야만 한다.





결의에 차서 삼일을 물만 마시고 쫄쫄 굶은 탓에 위가 쓰렸다. 원래도 입이 짧고 체질이 말라서 다들 밥좀 먹고다니라고 성화였는데 지금은 정말로 언제 픽 거꾸러져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몸에 맥아리가 없다. 흐물텅한게 맛 가기 직전의 숙주나물 상태라고나 할까. 몸 쓰는 연기가 많지 않은 배역이라 다행이다. 설사 배탈이 난다고 해도 나올 게 없으니 괜찮겠지.



오늘만큼은 정말 이전과 달라야했다. 뮤직비디오의 간략한 콘티는 이별한 남자가 헤어진 연인과 함께 탔던 놀이기구를 홀로 타며 슬픔에 잠기는 거였다. 콘티마저도 내 상황에 딱 맞아떨어진다. 매번 절망과 모멸감만 선사하던 신께서 이제야 예쁜맘을 잡숫고 나에게 복을 주기로 한게 분명했다.







"아직 시간도 널널하네.. 뭐라도 좀 마실까."







오디션은 실제 촬영이 진행될 놀이공원의 어트랙션 안에서 카메라 테스트로 진행된다고 했다. 간만에 샵에 들러서 머리도 새로 손질했고 가볍게 메이크업도 받았다. 잠을 설친탓에 조금 일찍 나왔더니 놀이공원 입구의 도시락집 앞에서 순영이 말한 FD와 만나기로 했던 시간까지 약간 마가 떴다. 빈속에 아메리카노라도 한잔 때릴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며 카페를 찾는데 웬 발발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덩치는 대형견마냥 큰데, 느낌이 딱 발발이다.







김민규는 단점이 많다. 잠꼬대가 심하고 양말도 아무데나 휙휙 벗어두고, 키만 컸지 여러모로 허당이다. 그건 정말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런데 길치에 방향감각까지 빵점인 줄은 오늘 또 처음 알았네. 벌써 똑같은 건물을 몇번이나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벌써 면접시간은 오 분이나 넘겼는데 핸드폰 지도 어플 위의 빨간 점은 갈피를 못잡고 뱅뱅 돌기만 했다. 아니 그러니까... 이쪽이 무슨 방향이지? 몸을 어느 쪽으로 돌려야할지 고민을 거듭하며 액정에 코를 박고 뒤뚱거리다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혔다.



미간을 찌그리고 입술이 댓발 나외서 아픈 이마를 문지르는데 저 앞에서 누군가 이쪽을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안그래도 면접에 늦어서 다운되어있던 기분이 확 나빠져 세모눈을 뜨고 째리려는데 뭐가 그리 재미진지 피식 웃는 얼굴이 겁나 청초해서 눈가에 힘이 풀려버렸다. 헐 개쩐다. 연예인같다. 그것도 정통 청순파 여배우. 남자한테 여배우라고 하긴 뭐하지만 쨌든, 그거.







"저, 저기요!"

"예?"







생각보다 낮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지금 이 사람한테 말건거야? 리얼리? 실화냐? 미쳤네. 그래도 칼을 뽑았으니 달랑무라도 썰자는 심정으로 남자에게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나랑 다르게 엄청 지적이고 똑똑할 것 같애. 짱이다 정말.







"여기 혹시 주변에 쓰리썸플레이스있는 큰 건물 어딘지 아세요?"

"아아.. 저도 이쪽은 초행길이라서. 마침 카페 찾던 중인데 지도 같이 볼래요?"







하하. 나직한 웃음기가 섞인 말투까지 완벽했다. 살짝 빈혈기가 있는지 창백한 얼굴로 가는 목께를 문지르는데 구라 안치고 바로 뻑갔다. 비주얼만 쇼크인 줄 알았더니 세상에 이런 젠틀맨이 없구나. 나 지금 입은 옷 괜찮나? 남자와 머리를 나란히 핸드폰에 가까이하고 걷자니 뒤늦게 차림새가 신경쓰였다. 미용실 갈 돈 아낀다고 엄마가 잘라주다 망해서 눈썹위로 깡둥하니 올라간 앞머리에 잡히는대로 주워입은 후드집업과 무릎나온 청바지. 아 이럴줄 알았으면 예쁜거 입고나올걸. 어차피 장롱 안에도 비슷한 옷만 잔뜩이지만 밝은 베이지색 코트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 옆에 서자니 괜히 그런 생각만 들었다. 내려다보이는 동그란 정수리까지 완벽하다. 보라는 지도는 안보고 그 정수리만 열심히 구경하다가 갑자기 올려다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맞죠? 여기. 다 온거 같은데."

"가감사합니닥!"







모르는 척 해주려고 해도 정수리에 꽂히는 뜨거운 시선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어찌어찌 건물 앞에 도착해서 이때다 싶어 불시에 눈을 맞추니 지레 제풀에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힌다. 삑사리까지 내가며 허둥허둥 대답하는게 진짜 동네 발발이 같아서 자꾸 웃음이 샌다. 딱히 귀엽다거나 호감이라기보다는 그냥 뭐 재밌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순진하고 세상물정 모르고. 남자를 두고 카페 쪽으로 몸을 움직이자 따라오고 싶은 것처럼 계속 제자리를 종종거리더니 이내 발길을 돌려 제 갈길을 간다. 잘가, 발발이.









* * *









우여곡절 끝에 놀이공원 입장시설에서 살짝 비껴있는 캐스팅센터 표지판을 발견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십오분이나 늦었다. 아, 나 면접도 못보는거 아닐까? 이렇게 될거였으면 아까 그 형한테 말이나 좀 더 붙여볼걸.. 뒤늦게 밀려오는 후회에 살짝 들어가길 망설이고 있는데 누군가 덜컥 팔뚝을 잡아챘다.







"오디션 보러 온 애. 너지?"







머리를 하나로 대충 틀어올려 묶은 여자가 그렇게 질문한다. 어 아르바이트를 캐스트라고 부르니까 면접도 오디션인가? 오 역시 대기업. 고개를 급하게 끄덕이니 생각보다 빨리왔네 하며 팔을 붙잡은 채 어딘가로 질질 끌고간다. 캐스팅센터 표지판은 반대쪽인데. 면접장소가 바뀌기라도 했나보다. 그래서 시간도 뒤로 늦춰진 건가? 아무렴 어때. 지각을 면했으니 잘된 일이었다.







"근데 너 옷은. 설마 그러고 온거야? 따로 의상 챙긴 거 없고?"

"예? 아 그냥 단정하게만 입고가면 된대서.."

"아무리 외모위주로만 본다지만 너 너무 편하게 입고온거 아냐? 아.. 됐다 됐어. 가서 뭐 빌리던지 해."







인터넷에선 추리닝에 슬리퍼만 아니면 다 괜찮다고 했는데. 초장부터 살짝 기가죽어서 얌전히 따라가는데 입구의 그리팅직원에게 스태프카드를 보여주더니 한발짝 뒤에 서있는 나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파크 안으로 들어가요? 당연하지, 그럼. 설마 홀에서 찍겠니. 또 뭘 찍기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만만하게 봤는데 이거 되게 어려운 거였구나. 역시 세상에 쉬운 일 하나없다.



주말도 아닌데 늦은 오후라 그런지 입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홀에서부터 은근하게 느껴지던 놀이공원 특유의 군침도는 단내가 안으로 안으로 향할수록 짙어졌다. 얼마만에 놀이공원인지. 회빛의 하늘 대신 투명한 돔 천장에 둘러싸인 내부의 공기가 어쩐지 반가웠다. 사람들 머리마다 하나씩 얹혀있는 동물머리띠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착용한 채 청소도구를 들고 요정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는 그린캐스트들의 양갈래 머리가 조금은 낮부끄럽기도 하고. 헉 설마 나도 여기서 일하면 저런거 막 쓰고 그래야하나? 그럼 난 기린으로 해야지.





줄이 길게 늘어선 인기 메인 어트랙션 사이를 지나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과 식당이 옹기종기 모인 중심부까지 들어왔다. 삼삼오오 붙어앉아서 나 즐거워요 행복해요 오오라를 퐁퐁 뿜어내는 애딸린 가족들과 연인들. 소란스럽고도 평안한 그 분위기 속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절대 f&b파트로는 지원하지 말아야겠다는 것 정도? 동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파스텔톤 복장을 하고 신나죽겠다는 목소리로 제티랜드 트레이드마크 손동작을 연발하는 와중에도 직원들의 눈은 냉동실의 묵은 동태처럼 썩어있었다.









아메리카노든 뭐든 물 아닌건 먹는게 아니었다. 자꾸 신물이 역류하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 변기커버를 붙잡고 멀건 위액만 한참 게워냈다. 장이 얌전하려니까 이제 위쪽이 아우성이구나. 레버를 내린다. 둥글게 소용돌이치며 내려가는 걸 슬쩍 곁눈으로 보는데 빈 속인 탓인지 덩달아 머리가 핑 돈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손을 씻다가 갑갑한 속에 무의식적으로 양손에 물을 받아 세수하듯 얼굴에 문질렀다. 아, 나 메이크업했는데. 뒤늦게 깨달은들 이미 저지른 일. 화장을 다시 갖다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물을 튀겨가며 깨끗이 싹 다 지워버렸다. 턱 아래로 물을 뚝뚝 흘리는 거울 속의 얼굴을 점검한다. 아자. 정신차리자. 뺨을 찹찹 두드리며 잘 할수 있다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분명히 이 앞에서 만나기로 한게 맞는데 약속시간을 넘기도록 FD라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이 건물 안에 도시락집은 여기 하나뿐인데. 초조한 마음에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서성이길 얼마간. 고객만족센터 데스크의 테마파크 여직원이 말을 붙였다.







"혹시 면접보러 오신 분 아니세요?"

"아 네. 맞아요. 누굴 좀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안오셔서.."

"빨리 들어가시는게 좋을텐데. 면접 이미 시작했어요."







벌써요? 토끼눈을 뜨고 데스크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서류 한장을 내민다. 대기표 뽑으신 다음에 이거 간단하게 작성하시고 캐스팅센터 안으로 들어가세요. 번호 순대로 면접 진행할거예요. 지금 아마 중간번호까지 들어갔을텐데.. 원래 늦으면 면접 시에 불이익 있는 거 아시죠. 여유있게 도착한 줄 알았더니 전달과정에서 착오가 생긴 모양이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잠잠하던 심장이 예상치 못한 이탈상황에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야단이었다. 내가,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억울함은 잠시 제쳐두고 황급히 서류를 작성했다.





대기실 안엔 남성지원자들 뿐일 줄 알았더니 더러 여성지원자들도 섞여있었다. 손톱을 물어뜯는다. 카메라테스트는 현장에서 진행한다고 하지 않았나. 장소도 상황도 생각하고 준비했던 것과 너무 다르다. 평소같았으면 습관적으로 다른지원자들을 둘러보며 눈대중으로 스스로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을 터인데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인드 컨트롤이 시급했다.



잘해야 돼. 지금껏 수많은 오디션을 거치면서 매번 빼놓지 않고 속으로 다짐했던 말이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간절하다. 진짜로, 잘해야만 돼. 사전에 전달받은 콘티를 되새김질하며 어디서 어떻게 감정표현을 보여 줄 지 시뮬레이션을 거듭했다.





대기실 문이 열리고 맨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다른 지원자 두명과 면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식의 오디션은 처음인데. 카메라테스트 전에 대사연기라도 보려고 하는건가. 따로 레퍼토리 준비해오란 말 없지않았나? 물론 연습해둔 게 있긴 하지만 영 찜찜했다. 관계자들 앞 의자에 세명이 줄지어 나란히 앉자 제일 먼저 나에게 질문이 날아왔다.







"전원우씨? 원우씨는 만약 방금 어트랙션을 이용한 탑승객이 바로 한번 더 타겠다고 우긴다면 어떻게 대처하시겠어요?"







뭐야. 오디션에서 돌발질문 쯤이야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지만 해도해도 너무 산으로 간 질문이었다. 놀이기구 안에서 촬영한다더니 저런 것까지 알아야 하는건가? 당황했지만 최대한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김없이 장이 배배 꼬이는 것을 느끼면서 두뇌를 풀 가동해 그럴듯한 대답을 만들어낸다.







"이미 뒤쪽 대기선에 인원 맞춰 기다리는 다른 손님들이 계시기 때문에 어렵다고 양해를 구하고, 다른 어트랙션으로 안내를 드리겠습니다."

"흠.. 지원 동기가 좀 특이하시네요. 표정연기와 프로포션이 장점이시라고."

"옙."

"오, 대놓고 외적인 부분을 강조하시는 분들은 많이 드문데.. 혹시 그리팅 쪽 희망하시나요? 외모 괜찮은 분들은 그쪽으로 많이 보내는 편인데."







스스로 뱉어낸 꽤 만족스러운 대답에 뇌세포와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잠시, 돌발질문 수준을 넘어선 난데없는 단어의 등장에 애써 진정시킨 불길한 예감이 스믈스믈 증폭된다. 정말 진짜로 설마 혹시나 싶은 마음에 입을 열었다. 지금 배우 오디션 보는거 맞는거죠? 살짝 어려운 질문들이 많아서.. 하하.







"배우라면 배우죠. 제티랜드에선 모든 아르바이트 분들을 캐스트로 보고 대우해드리니까요."







예미시벌 뭐요? 육성으로 욕지기가 나갈 뻔한 것을 간신히 눌러참고 앉은 자리에서 정승처럼 벌떡 일어났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한번 꼭 쥐고 문을 박차고 나가자 깜짝 놀라 말문이 막힌 채 쳐다만 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거야! 꼬아질 장이 비어있으니 대신 인생 전체가 야무지게 팍팍 꼬이는가 보다.



하도 어이가 없으려니 다리에 힘이 풀려 살짝 삐끗했다. 면접 중에 어디가시냐며 붙잡는 데스크 여직원을 팩 쏘아봐주고 걸음을 바삐 한다. 벌겋게 달아오른 표정에 흠칫한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다 당신때문이잖아! 아무리 남탓해봐야 결정적인 잘못은 이쪽에 있다는 걸 이미 안다. 면접이니 오디션이니. 자잘한 용어의 차이나 돌아가는 상황을 진작에 알아채고 바로잡지 못한 제 잘못이 일등이다. 긴장에 눈이 멀어 별 병신같은 실수를 다 한거다.









* * *









와, 진짜 나빼고 다 신경써서 입고왔네. 일시적으로 일반운행을 정지시켜놓은 저속의 레일형 어트랙션 내부로 들어가니 이미 다른 지원자들 대여섯이 대기중이었다. 그 중 하나는 이미 멈춰놓은 기차 위에 폼을 잡고 앉아서 이리저리 얼굴 각도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는다. 장난감 나라에 온 듯한 유치찬란한 내부인데 어쩐지 밝게 웃으며 찍지 않고 잔뜩 무게를 잡는 것이 영 저사람은 안되겠거니 싶었다.







"생각보다 색감이 밝지? 근데 어차피 다 색 빼고 흑백으로 들어갈거라 신경 안써도 돼."







구석진 곳에 쭈그러져 있으려니 잠깐 사라졌던 아까의 여자가 한 손에 종이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이거 갈아입어. 최선은 아닌데.. 여튼 그 옷보단 나을거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셔츠와 짙은 색의 면바지가 들어있다. 되게 잘 챙겨주네. 역시 대기업이라 이건가. 돈 잘버는 이유가 있구나. 급한대로 내부 화장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이번엔 손바닥에 왁스를 녹여 머리까지 정돈해준다. 앞머리가 살짝 들려올라가 이마가 드러났다.



아깐 웬 시골쥐 한 마리가 와 있나 싶었는데 너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야. 제법이네. 칭찬에 입꼬리가 실실 들려올라갔다. 나 에이스인가 봐. 알고보니 꽤 호감형 인지도? 차례를 기다리며 조명과 카메라를 움직이는 스탭들 뒤에 붙어서서 면접 상황을 관찰했다. 저기 저 안경 쓴 대머리 분이 제일 대빵같은데. 지원자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던지는 목소리가 카리스마있다. 근데 왜 다들 우울한 분위기로 찍는거지? 놀이공원 하면 무조건 신나고 즐거운게 최고 아냐?







"마지막 분 볼게요."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제자리에서 콩콩 몇 번 뛰어 몸을 풀고 기차 위에 올라앉아 살짝 미소를 짓자 대빵 분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먹히는구나! 탄력이 붙어 강냉이를 다 쏟을 기세로 헤벌레 웃고 김민규 전매특허 깜찍이 포즈 삼종세트도 선보였다. 일번 꽃받침. 이번 눈 깜빡깜빡. 삼번 개죽이 눈웃음.







"쟤 누구야? 뭐 저런 애가 다 있냐. 이름 뭔데?"

".........?"







마지막은 뺼걸 그랬나봐. 눈웃음에 이어지는 연속동작으로 아까 슬쩍 눈여겨봐두었던 제티랜드 핸드롤링 제스쳐를 시전하자. 안경을 아래로 내리고 미간을 슬쩍 찌푸리더니 옆에 있던 한 직급 아래로 보이는 사람에게 뭐라 귓속말을 한다.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나. 다른 사람들처럼 슬픈표정이라도 지었어야 했던걸까. 기가 죽어서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는데 저 뒤에서 지금까지 살뜰히 챙겨주던 직원분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정말 괜찮은 걸까.







"야 됐어! 됐어! 감독님이 너 맘에 든댄다. 표정은 일부러 그렇게 한거야? 튀려고? 암튼 잘했어. 순영이 학원친구라더니 부탁받은 보람이 있네."

"감독님이요? 아까 그 분이 감독이에요? 왜, 왜 그런사람이 여길 와요? 그리고 저 수영이라는 친구 없는데.."

"얜 또 무슨 헛소리야. 수영이 말고 순영이."







색전구가 화려하게 깜박이는 장난감 나라의 한가운데 느닷없이 태풍에 휩쓸려 똑 떨어진 도로시가 된 느낌이다. 아직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데 감독님이라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척 얹는다. 존나..존나.. 누구세요..? 천천히 고개만 돌려 그의 이목구비 안에 해답이라도 쓰여있는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보려니 이상한 이름을 부른다. 전원우라며? 니가 해.







"제가요?"

"그래 너. 생각보다 별로 안 기쁜가봐?"

"제가 뭐를 하는데요..? 아르바이트?"







주연, 뮤비 주연. 너로 하시겠다잖아. 빨리 인사드려. 손아귀에 힘을 실어 내 뒤통수를 억지로 숙이려는 여직원의 손을 쳐내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근데 저는 전원우가 아닌데요? 셋 사이에 영문모를 눈빛교환만 이어지길 몇 초간. 장비를 정리하는 사람들 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오디션 끝났구요. 너무 늦으셨다니까요. 지금 못들어가세요."

"아니 제,제가 사정이..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지 마시고 마지막으로 잠깐만 기회주세요!"

"배역 맡을 분 이미 다 결정났습니다. 그만 가세요."







아저씨, 잠깐만요옥! 사정하다 결국 억지로 끌려나가는 동그란 뒤통수만 봐도 알겠다. 친절하게 건물 앞까지 데려다 줬던 그 형이었다. 근데 저형은 또 왜 여깄지? 황망히 바라만 보고 있는데 여직원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고 뭐라뭐라 한참 통화를 하는 것 같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위아래로 훑는다. 감독이라는 아저씨는 그새 자리를 떴다. 너 누구야? 저요..? 저는 김민균데요. 면접보러 왔는데요..









물어물어 겨우 오디션 현장을 찾아 들어가기 전 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 됐다며. 그렇게 엄살이더니 막상 가선 잘했나봐?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통에 답답한 속을 못이기고 쉰소리로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나 아직 카메라 구경도 못했는데 무슨소리야! 너 너 아는 누나가 앞에 기다리고 있을거라며어 왜 아무도 없었는데에에 나 어떡해애어어엉. 종국엔 우는것처럼 되어버린다. 뭔가 꼬인것을 그제야 직감했는지 누나에게 확인해보겠다며 전화를 끊는다. 툭 끊기는 통화종료음이 야속했다.





이미 테스트를 다 끝냈는지 파장분위기인 스탭들 틈을 파고들자 너무 늦었으니 돌아가라는 싸늘한 말만 메아리처럼 되돌아온다. 그래도 차마 그냥은 갈 수가 없어 감독에게 얼굴이라도 한번 비추려고 기둥을 끌어안고 버티는데 주위를 빙 둘러 싼 머리들 너머로 혼자 불쑥 튀어나와있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너..너! 요전의 그 발발이가 멍청하게 입을 헤에 벌리고 있었다. 와 나 지금 저새끼 데려다주고 정작 내가 늦은거야? 그렇다면 억울해서라도 더더욱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 빨판이라도 달린 것처럼 기둥을 부둥킨 팔에 더 꽉 힘을줬다.







"너 오디션 처음이야?"

"아닙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결국 감독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미루어보아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다. 아니 그리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나쁘다. 그럼 예의는 어디 갖다 팔아먹었어? 늦은건 니 개인사정인데 왜 우리가 봐줘야해, 뭐 기회 맡겨놓은거라도 있어? 끝까지 매달려보려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가고 말문이 막혀 고개를 푹 숙였다. 틀린말 하나 없네. 종쳤다. 종친걸로도 모자라서 깽판까지 부려 남에게 민폐를 끼친거다.







".............!"

"잘 할수 있습니다. 배역 안주셔도 괜찮으니 테스트라도 보게 해주십시오."







양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나올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모양인지 더이상 험한 말도 나오지 않고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싸해진 촬영장에 그저 눈만 꾹 감는데 난데없이 끼어든 목소리 탓에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달았다.







"저 저 이거 안할게요.. 애초에 오디션 보기로 되어있던 사람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던거 같.. 아니 그냥 저 없던일로 할테니까 저분 오디션 보게 해주세요."

"이제와서 무슨소리하는거야!'

"저 전원우 아니고요. 저분이 그 진짜 전원우 분이신데.. 아 아 그러니까.."

"당신 저 사람 알아?"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만 대답했다. 차라리 모르고싶었다. 간만에 평탄하게 굴러가나 싶던 인생에 태클 건 사람 따위는. 아마 발발이가 배역을 땄던 모양인지 감독은 돌연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도끼눈을 뜨고 그쪽을 부라렸다. 발발이는 똥마려운 개새끼처럼 시종 안절부절이다. 상황 다 끝내놓고 안하겠다면 다야? 니가 오늘 시간낭비한거 다 책임질거냐고. 여기 스탭들, 다른 지원자들. 우습지? 다 장난으로 보여? 감독이 내뱉은 말 그대로, 나 역시 발발이에게 똑같이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나 간절하게 원하는 기회가 너한테는 그렇게 가벼운거야? 온통 엉망진창이고 화가 났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는 스스로에게도 역시, 화가 났다.



아, 시발 다 좆됐어.









* * *







보는 사람이 참 많기도 했다. 낮선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들 한가운데 드디어 이름을 알게된 그 형과 나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쭐이 났다. 성인이 된 이후 그렇게 공개적으로 자근자근 짓밟힌 것은 처음이다.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기에. 우연과 작은 실수가 나비효과처럼 불러일으킨 소동에 휘말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창피하고 쪽팔렸다. 하지만 지금 내 기분이 꽁기한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저거다. 앞서 걸어가는 축 처진 등.



일부러 그런건 아니지만 공연히 남의 밥그릇을 빼앗은 듯한 야리꾸리한 기분이었다. 따지자면 나도 오늘 보려던 면접 못봤는데. 집에 들어가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쫒겨날지도 몰랐다. 무어라 사과하거나 할 용기도 없어서 그의 그림자만 따라밟으며 걷는데 처져있던 등이 뒤를 돌아본다.







"니가 뭔데 덜컥 그 누나를 따라가?"

"......"

"모르는 사람이었다며. 원래 오디션 보려던 것도 아니라며. 그런데 왜? 내가 아니고 왜 니가?"







그리고 감독은 왜 하필 니가 맘에 들었대? 자기 할말만 속사포처럼 두다다 늘어놓더니 대답은 듣지도 않고 도로 몸을 틀어 저 멀리로 뛴다. 털실 가닥같은 마른 다리가 휘적이며 바삐도 움직였다.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따라 뛰었다. 뛰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도 못해서 얼마안가 뼈가 도드라진 어깨가 손에 잡혔다. 어, 이 형 운다.







"미안해요. 왜 울고 그래.."

"끄으, 시발아.. 안울어 안운다고."

"내가 오늘 여기 오는게 아니었는데.. 형 그거 중요한거 였잖아요. 난 어쩌다-"

"그걸 알면서! 야, 너는 거기서 못하겠다고 하면 안됐어. 모르는 척 그냥 하겠다고 했어야지. 니가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내가 뭐가 되는데?"





그 인간들 앞에서 무릎까지 꿇은 나는 뭐야, 병신 호구야? 아무래도 나는 죽을 죄를 지은 모양이다. 눈물이 고여서 떨어지기 직전인데 죽어도 우는건 아니랜다. 사실 한번도 뭔가 간절하게 원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온전히 이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 어깨가 땅으로 꺼지듯 푹 주저앉는게 느껴졌다. 안그래도 키에 비해 쳐진 어깨인데 지금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눈알이 잔뜩 빨개서 노려보는 중에도 복숭아같이 달아오른 얼굴이 예뻐서 더 죄스러웠다. 와 이형 대박이라고 생각했다가 존나게 미안했다가 아무튼 갈팡질팡 머리가 복잡했다.







"........."







옆 가판대에서 제티랜드MD를 판매하던 캐스트가 발랄한 목소리로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버블건을 발사했다. 아롱아롱 무지개빛으로 반사되는 그 동그라미들이 바람에 날려 그와 내 주위를 떠다니고 타이밍도 환장스럽게 가로등마다 달린 스피커에선 인디밴드의 토나오도록 달달한 노래가 울려퍼졌다. 그러니까 뭐에 홀린듯이 그 눈가에 손을 댄건 내 고의가 아니다. 뭐, 엄청 부드럽긴 했다. 손 끝에서부터 흘러든 감각에 온몸의 솜털이 다 기립할 정도로.







"미안하면.....밥이나 살래?"







밥만 살까. 장기를 꺼내 팔아서라도 뭐든 사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해서 이 사람의 시름이 조금이라도 덜어진다면.









다른 이유 없이 일단 배가 고팠다. 삼일 밤낮을 굶고 험한 꼴까지 봤더니 탈력감과 함께 허기가 밀려왔다. 더 화를 낼 기운도 명분도 없었다. 순영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FD쪽에서 지레짐작해 끌고간 거라고 했으니까. 쟤도 어이없긴 마찬가지겠지. 그래서 화풀이 좀 했다. 오라지게 풀 구석이 없어서. 그래서 조금이라도 미안하냐고? 아-니. 나만 잘못있냐고 맞받아칠 법도 한데 깨갱 꼬리를 내리고 기껏 한다는게 눈물 닦아주기다. 진성 호구병신 여기있었네.





발발이는 별로 돈도 없어보이는 주제에 코트자락을 잡아끌고 파크 내의 멕시칸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먹으면 비싸고 맛없는거 모르냐고 면박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얻어먹는 마당에 구차해서 관뒀다. 어디 한번 계산서 받아들고 얼이나 빠져보라지. 온통 초록 빨강 노랑으로 떡칠한 레스토랑에서 그나마 탁 트인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이어 판초를 뒤집어쓴 직원이 마라카스를 짤짤 흔들며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먹고싶은거 다 시키세요! 눈동자가 부담스럽게 초롱초롱했다.





동그란 나무테이블 한가득 음식이 차려진다. 부리또 퀘사디아 볶음밥 엔칠라다 나초 샐러드. 거기다 그릴에 구운 채소까지. 과카몰레에 나초를 푹 찍으며 동태를 살피자 생각보다 음식값이 많이 나와 놀랐는지 명세서를 흘금흘금 곁눈질 하고있다. 쌤통이네. 입안에서 부서지는 고소한 나초와 보들보들한 과카몰레의 감촉이 감격스럽다. 원래 입이 짧고 많이 먹는 편이 아닌데 살짝 오버하긴 했다.



뭐해 안먹어? 그제야 꾸물꾸물 타코를 집어든다. 한입 물자마자 내용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칠칠맞기는. 테이블 위로 흩어진 양파와 할라피뇨 조각을 냅킨으로 허둥지둥 닦는데 그마저도 허술하다.





기세가 살짝 주춤한 것도 잠시, 꽤 입에 맞았는지 벙글거리며 신나게 우물거린다. 형, 형 기분풀어여. 오디션 그거 담에 또 보면 되져. 씨익 웃는데 잇새에 토마토가 끼어있어서 그만 빵 터져버렸다. 흐흐 야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저 대책없고 생각없음이 옮기라도 했는지 가라앉았던 기분이 이상하리만치 멀쩡하게 돌아와있다. 어! 웃었다! 근데 어떻게 삼일을 굶었어요? 배고프면 막 이유없이 화나고 예민해지고 그런다는데. 혹시 그래서 형이.. 좀 봐주니까 가랑이 사이에 숨겼던 꼬리를 붕붕 세차게 휘두른다. 어쭈 기어올라? 근데 형 첫인상이랑 다르게 엄청 말을 막하시네요. 되게 착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꼽니?"

"아아니요-?"







그것도 형이랑 엄청 잘어울려요. 건방져서 치즈가 잔뜩 엉겨묻은 포크로 찌르는 시늉을 했더니 이젠 쫄지도 않는다. 지금까지는 그냥 좀 모자란 애처럼 보이던 얼굴이 뜯어보니 퍽 귀여웠다. 아까 현장에서는 어째 괜찮게 입었나 싶더니 역시나 제 옷이 아니었는지 지금은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차림 그대로다. 그래도 머리는 올리니까 좀 낫네. 이마가 잘생겼다. 감독님이 너더러 하랬다고? 주연? 넹. 전 그냥 놀이공원이니까, 웃어야 되는 줄 알고 혼자 막 신나했더니 감독님이 너 하라고, 그랬어요.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다. 이새끼 웃는얼굴. 미워할 수 없는 뭐가 있다. 너, 인정. 면상에 대고 검지손가락을 콕 집자. 예의 그 감자같은 얼굴이 광대가 들려올라가 둥글둥글해진다. 잉? 갑자기 뭘 인정해요. 내가 많이먹어서? 잘 쳐먹는거 인정? 응 그거 포함. 용케 칭찬으로 들었는지 치즈를 일부러 주욱 늘여가며 퀘사디아를 손으로 잘도 집어먹는다.







"원래 매사 그렇게 태평해?"

"모르는 소리 하지마세요. 저 원래 대박 소심해요. 지금 안그런 척 하는거지 막 속으로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고요. 안그래도 오늘 면접 잘봐서 알바자리 구하려고 집에서 연습도 엄청 해왔는데. 여기만큼 시급쎄고 주휴수당 잔업수당 다 챙겨주는데 없단말예요. 볼래요? 질문하는 상황별로 대처방법도 다 생각해서 외웠어요."







봐요, 원래 제티랜드는 MD상품 따로 포장 안해주거든요? 그런데 손님이 선물포장을 요구하면 이렇게 딱! 어머- 손님 죄송하지만 따로 포장서비스는 준비해드리고 있지 않아서요- 대신 종이봉투를 제공해드리는데 그건 어떠세요? 시키지도 않은 재롱을 비위좋게 잘도 떤다. 좀 장단을 맞춰줄까 싶어 팔짱을 낀채 상체를 뒤로 기댔다. 싫은데요? 저는 죽어도 포장 해가야겠는데?







"어, 거기까진 예상 못했다."

"원래 그런거 면접 볼땐 일부러 면접관이 진상손님처럼 굴고 막 그러잖아. 야야 너 오늘 안이랬어도 떨어졌겠네 뭐. 딴 일 알아봐라."







어차피 여기 한번 불합격하면 일년동안 다시 지원 못해요. 다시 시무룩해진 발발이. 딱 얘만큼만 단순무식하고 솔직했으면 내가 이정도로 힘들어지진 않았을텐데. 저것도 복은 복이다 싶었다. 문득 전 애인과 와인바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그런 쪽으론 문외한이라 메뉴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고민하던 나에게 넌 그런것도 모르냐 촌스럽다며 바텐더 앞에서 면박을 줬었지. 난 호구병신같이 미안하다고 했고. 또 그는 넌 매사에 뭐가 그렇게 미안하냐고 짜증을 냈더랬다. 아, 담번엔 얘처럼 나 잘 웃기는 사람이랑 만나야지.





?! 존나 내가 방금 무슨 개뼉다구같은 생각을 한거야.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무슨 얘같은 앨 만나. 절대 안될 일이지. 이성은 밥만 딱 먹고 다시 보지 말라고 하는데 혓바닥은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였다. 야 너 바로 집에 갈거야? 켁, 왜요..? 뭐 더 드시고 싶으신 거라도.. 사레가 들렸는지 입가엔 살사소스를 매달고 불쌍한 멍멍이처럼 올려다본다. 내가 설마 발발이 돈 더 뜯어먹겠니. 이왕 다 말아먹고 쫑난 김에 롤러코스터라도 한 판 때리고 가자니까 입에 물었던걸 반쯤 열심히 꼭꼭 씹어삼키더니 다 뭉개진 발음으로 그런다.







"오아요!"







방글방글한 그 얼굴을 한참 보다가 실없이 웃고, 엔칠라다를 칼로 썰면서 상상했다. 발발이 목줄을 끌고 각자 손엔 츄러스를 하나씩 쥔 채로 롤러코스터를 향해 달려가는 가벼운 발걸음을.



너도, 나도 참 파란만장한 하루였지. 둘 다 되는 일 하나 없었고. 접시가 조금씩, 하지만 빠른 속도로 비워져간다. 우리도 언젠간 잘 풀리는 날이 올거야. 그렇지? 마주보는 시선 속에서 입으론 부지런히 음식을 씹으며 말없이 눈만으로 그런 대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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