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무진
무진마을은 예부터 마을의 앞은 바다고, 뒤는 산으로 둘러싸여 배산임수가 좋기로 유명했다. 여러 산의 능선 끝자락이 모여 위치한 마을답게 뒷산은 산세가 험해 마을을 오가기에는 꽤나 힘들어 산은 대부분이 약초꾼들의 놀이터로만 쓰였다. 그리하여 마을의 거의 유일한 통로는 바닷길이었다. 산을 따라 자연스레 형성된 계단식 논과 사계절 제철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무진은, 한때는 최고의 항구도시로 유명세를 떨쳤으나 지금은 항구도시 대신 안개로 더 유명한 마을이 되었다. 남쪽 땅 끝부터 북쪽 땅 사람들까지도 무진을 안개가 짙기로 유명한 마을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오죽 했으면 본래 제 이름 대신 무진(霧津)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랴. 어둠보다 짙은 안개가 내리깔리면 마을은 통째로 사라지는듯했다.
안개가 시작되면,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을 떼어 놓았다.*
비정상적으로 짙고 잦은 안개는 점차 마을을 지배해갔다. 무진의 사람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안개가 시작되면 문을 걸어 잠그고 안개가 갤 때만을 며칠이고, 일주일이고 기다렸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안개가 걷히고 나서야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왔다. 밀린 농사일과 물질을 시작했다. 마을에는 활기가 돌지 않았다. 죽지 못해 사는 곳. 딱 무진과 어울리는 말이었다.
특히 무진산(霧津山)은 난다긴다하는 약초꾼들 조차도 기겁을 하며 도망치는 곳 중 하나였다. 실제로 겁 없이 산행을 떠났던 이들의 반절 이상이 돌아오지 못했고, 돌아온 이들은 하나같이 ‘안개에 정신을 잃어, 정신을 차리니 마을 입구였다.’고 말할 뿐, 그 이상을 물으면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넋을 놓기 일쑤였다. 그렇게 돌아온 이들 중 또 반절 이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남은 반은 정말 정신을 놓고 평생을 모자란 이처럼 살았다.
그런 무진산의 악명에 길을 가던 중은 ‘산이 요(凹) 형상이니, 매 해 양기가 가득한 남성을 공양해야 한다.’며 말했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소금을 맞으며 쫓겨나기도 했고, 전국 팔도 용하기로 소문난 무당 모두 마을의 초입에서 몇 발자국을 떼어내기도 전에 줄행랑을 치며 달아났다. 무진산에 대한 소문은 점점 더 살을 붙여갔다. 도적 떼 소굴이다, 산신령이 노했다, 괴물이 산다, 요물이 산다- 등등. 민심을 어지럽히는 온갖 흉흉한 소문이란 소문은 다 돌아다녔다. 그 흉흉한 소문에 결국 이 곳을 오가는 이 하나 없으니 나루터의 뱃사공들은 절로 일거리가 사라져 그 식솔들이 딱한 사정을 관아에 알리려 찾았지만, 방탕한 관리는 여색(女色)에 빠져 어린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마을은 곧 외지인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
무진(霧津)기행 / w. 미스티
하나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법이라 했다.
“저 건너편 김 씨가 삼 캐러 무진산에 갔다 왔는디, 글쎄 완전 반병신이 되어 왔댜. 무진산의 ‘무’자만 나와도 기겁을 하고 난리를 친대잖어.”
“그럼 진짠거여? 무진산에 요괴가 산다는 게?”
“그야 모르제. 산신령이 노하셨는지, 요괴가 사는지-”
주막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시끌벅적했다. 자리를 잡은 민규는 관심 없는 척 나온 음식에 코를 박으면서도 귀는 계속해서 이야기들에 집중했다.
“그럼 그 마을은 어찌 먹고 산댜?”
“나루터 배는 뚝 끊겨, 짐승은 안개만 떴다 하면 픽픽 죽어가고. 지옥풍경도가 따로 없제.”
“수령은 뭣 허고?”
“예부터 무진의 여인들이 예쁘기로 소문나지 않았수? 여색에 빠져 마을 관리는 뒷전이라제.”
그 말까지 들은 민규가 몸을 아예 돌려 앉아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 뱃길이 뚝 끊긴 마을의 사정을 어찌 이리 잘 아는 것이오?”
“뉘, 뉘시오?”
“팔도를 돌며 다니는 객이올시다.”
“객의 행색이 아닌디?”
지나치게 화려한 비단과, 깔끔하게 정돈된 얼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이들이 각자 딴 곳을 멍하니 보더니 제 가게 핑계를 대며 막 발을 빼려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그 모습에 민규는 소매 단에서 짤랑이며 엽전을 꺼내 바닥으로 툭 던졌다.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엽전이 마루바닥에 떨어지자, 자리를 옮기려던 이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이내 다가와 다시 앉았다. 잽싸게 제 손에 하나씩 챙기고 나서야 말해 줄 마음이 다시 생긴 건지, 입을 연다.
“바닷길은 막혔어도 산길은 뚫려 있지 않수?”
“하나, 무진산은 요괴가-”
“객은 무진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 헌데, 어찌 이리 관심을 가지는 거요?”
“신기해 그러오. 종일 안개가 낀 마을과 요괴가 사는 산이라니.”
“산줄기 세 개가 동시에 만나는 곳이 바로 무진이올시다. 무진은 안개가 많아 늘 습하니 삼이 잘 자라는 곳이지라. 그 중 무진산의 삼이 제일이라 심마니들이 정신줄을 놓아가면서도 찾는 곳인디… 삼에 대해 좀 안다는 사람들은 무진산의 삼을 최고로 치지라. 뭐 지금은 마을이며 산이며 워낙에 흉흉허니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을 수도 없고.”
“무진산 말고 다른 산길도 있다는 것이오?”
“그렇지라. 다만, 산세가 워낙에 험한 탓에 마을 사람들도 잘 오르지 않으려 하제. 웬만한 길잡이로는 어림도 없다잖수. 아주 드물게 산에도 마을에도 안개가 걷히는 날이 오면 그때 무진산으로 오가곤 허요. 다른 산은 사람이 갈 곳이 못 됭께. 뭐 근디, 그거도 다 옛날말이제. 지금은 안개가 걷힐 생각도 안 허고, 바닷길도 막혔응께. 하는 수 없이 그 산으로라도 오가는거지라.”
그 말을 듣는 민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씩 웃는 얼굴이 대화의 내용과는 사뭇 달라 술술 말해주던 남자가 멈칫 입을 다물었다.
“어찌 웃고 그런 디야.”
“그 산, 많이 험하오?”
“험하지라. 무진산에서 정신을 놓고 온 이만큼, 그 산에서 떨어져 죽은 이가 상당항께.”
“그래도, 그 산의 ‘길잡이’는 있지 않소?”
하는 민규의 말에 옆에서 말을 않고 듣고만 있던 노인이 씩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엽전을 바닥으로 툭 던졌다. ‘고작 엽전 하나로는 소용없지라.’ 하는 말에 민규가 웃으며 소매 단에서 동전 뭉치를 꺼내 앞으로 던졌다.
“무사히 무진행(行)을 마치고 온다면, 내 이만큼 더 주리다.”
“어찌 객의 주머니가 이리 무겁수? 무진산으로 가다가 도적에 죽겄수다.”
“싫으면 내 다른 길잡이를 구하겠소.”
“누가 싫다헛능가? 기다려보시게. 내 채비를 하고 올 터이니.”
엽전 뭉치를 챙기며 일어나는 노인을 보던 민규가 만족스레 웃었다. 재밌는 여정이 될 것 같았다.
며칠을 걸려 도착한 무진산의 초입은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웠다. 해가 쨍쨍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옴에도, 산의 분위기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정말 요괴가 산다는 말이 맞는 것인지 산 쪽에서 바람이 불자 썩은 내가 진동해왔다. 그 냄새에 민규가 코를 틀어막자, 노인이 허허 웃으며 민규를 보았다.
“어찌 이 산에서만 이리 냄새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이오?”
“돌아오지 못한 사람만 수백, 수천에 생물이 살 수 없는 산이지라. 객은 시체 썩는 내를 안 맡아 봤수? 그렇담 그런 멍청한 질문을 이해합지.”
“그렇다면 무진의 사람들은 이 냄새를 종일 맡고 있는 거요?”
“바람의 방향이 다르니 그렇진 않지라. 꼭, 산에서 마을로 향하는 길을 막기라도 하듯 이리 입구에서만 악취가 진동헌께.”
“하나, 안개는 산에서 내려오는 거라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바람이 무진 쪽으로 간다는 말일 텐데-”
“거, 객이 그리 궁금한 게 많아 쓰나. 사흘 후면 무진에 당도할 터이니, 직접 확인해보든가.”
무진산을 지나친 두 사람은 곧 옆 산의 입구에 발을 디뎠다. 바로 옆의 산은 무진산의 을씨년스러움은 전혀 없었다. 그저 습하고 눅눅한 공기, 쾌쾌한 흙냄새가 전부였다. 실제로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것인지, 딛는 걸음마다 사람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길이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밟으며 민규는 노인의 뒤를 따랐다. 아직까지는 험하지 않은 산세였다. 노인은 정말 길을 잘 아는 듯 방향을 전혀 알 수 없을 것 같은 숲속에서도 척척 길을 찾았다. 산세는 점점 험해졌다. 빼곡한 나무 사이를 겨우겨우 비집고 올라가니,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바위산이었다.
“설마, 이 바위산을 올라가야 하는 것이오?”
“어찌 나 같은 늙은이가 바위산을 맨손으로 오르겄수? 객 같은 젊은이면 뭐 오를 순 있겄지. 한데, 아무리 올려보아도 끝이 없으니, 무진산도 아닌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면 오르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꽤나 살벌한 말에도 민규는 웃음기를 잃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거요. 무진산과 맞붙어 안개가 넘어오는 곳이니. 내 뒤에 바짝 붙어 따라와야 헌께.”
“계속 그렇게 가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근데, 어찌 무진으로 향하는 거요? 관상을 보아하니 팔도를 돌아다닐 팔자는 아닌데.”
“말하지 않았소. 산에 사는 요괴가 궁금하다 하여-”
“그렇다면 무진산으로 갔어야지. 죽기는 싫고, 요괴는 궁금하니 옆 산에서 구경이라도 하겠단 말은 아니지라?”
“…….”
“쇤네가 맞춰보아도…….”
“두시오. 불편한 여정이 되고 싶지 않으니.”
민규가 먼저 입을 다물었다. 앞을 향하는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어둑해지자, 안개는 더욱더 짙어졌다. 잠을 잘 만한 곳을 찾던 노인은 계속해서 뒤에 바짝 붙으라는 말을 반복 했다.
“거 바짝 붙지 않아도 어르신 목소리만 따라가면 되는 거 아니오?”
“시건방 떨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슈. 안개 속에선 나라님도 거지도 똑같이 까막눈잉께.”
“걱정 마시오. 어르신 바로 뒤에 붙어서 가고 있으니. 한데, 무슨 안개가 이리 지독한건지. 꼭 저승길 같소.”
“허허. 진짜 저승길은 이리 험난하지 않소.”
사방을 둘러싸던 안개가 점점 시야를 막아왔다. 이내 바로 코앞에 있던 노인의 등마저 보이지 않자, 민규가 발을 우뚝 멈췄다. 앞에서 무어라 잔소리를 하던 노인의 목소리와 축축한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스산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곧 내디딘 발걸음이 허공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고 난 뒤였다.
* * *
흙바닥을 구르고 나니 온몸이 칼에 찔리기라도 한 듯 아파왔다. 눈을 떴으나, 뜨나마나였다. 어디에 어떻게 떨어졌는지 알 수도 없었다. 눈앞은 여전히 부연 안개만 가득했으니.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으나 바로 앞이 낭떠러지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손에 짚이는 긴 막대기로 맹인처럼 앞을 두드리고 난 뒤에야 조심스레 앞을 향해 걸을 수 있었다. “어르신, 앞에 계십니까?” 따위의 의미 없는 부름만 계속했다. 소리는 몇 번을 울린 뒤에야 사라지고, 이윽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혼자만 남았다는 사실을 민규는 인정했다.
느릿하게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 흔한 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숲속에서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때, 얇은 도포 자락이 휘날렸다. 눈을 뜨자, 희미한 달빛이 안개를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뭉실거리는 안개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바람. 바람임을 느낌과 동시에, 무진산 초입에서 맡은 악취가 풍겼다.
무진산이었다.
지금 있는 곳이 무진산이라는 사실보다, 민규는 생각보다 제가 침착하다는 생각에 조금 더 놀랐다. 그리고 생각보다 아무런 위협적인 요소가 없었다. 이 산에 우두커니 홀로 서 있음에도, 안개 때문에 아직 요괴가 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아직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위협적인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물론, 악취에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했지만, 계속해서 맡으니 코가 마비라도 된 것인지 냄새조차 아무렇지 않아졌다.
이쯤 되자, 민규는 무진산의 악명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라 확신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주변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을 것이었다. 그러다가 산을 오가던 다른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당연히 요괴인 줄 알고 줄행랑을 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낭떠러지에 굴러 갇히게 되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리라. 그렇게까지 생각하자 민규는 제 속에 자리 잡았던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달빛도 꽤나 잘 보였으니. 이쯤 되면 꽤 고즈넉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손에 쥔 기다란 막대기로 파악한 편평하고 알맞은 땅 위에 얇은 보를 깔고 누웠다. 아침이 된다고, 이 뿌연 안개가 걷히고 밝아질지는 미지수였으나, 어찌되었든 무진산의 실체가 생각보다 별거 없다는 걸 알고 난 뒤라 마음이 홀가분했다.
봇짐을 베개 삼아 누워 멍하니 뿌연 앞을 보는데, 안개의 흐름 사이로 노란 불빛이 보였다.
“어르신?”
민규가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불빛은 거리감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비탈진 숲길을 걷다가 몇 번이고 넘어져도 굴하지 않고 빛을 향해 걸었다. 어쩌면 이곳이 무진산이 아니라, 그저 낭떠러지 아래일 수도 있다고.
몇 번의 넘어짐 끝에 당도한 곳에는 함께 무진으로 향했던 노인은 없었다. 대신, 아주 수상한 집 한 채만이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악취와 안개가 가득한 곳에, 홀로 세워진 집 한 채. 저 아래에서는 짙은 안개가 이곳으로 올라오니 조금은 옅어졌다. 집 안에서는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필히 사람이 사는 곳이다.
백성 중 산속에 숨어 사는 이들이 여럿 있다고 들은 적 있기에 산 중에 뜬금없이 나타난 집이 크게 수상하진 않았다. 허술한 울타리 밖에서 휑한 마당을 보던 민규는 어두운 산중에서 만난 인기척에 반가워 집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게 아무도 없소?”
묘한 기류가 흘렀다. 사람의 소리도, 들짐승의 소리도 아닌, 희미한 쇳소리가 짧게 들리다가 곧 멈추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집 안에서 보이지 않던 여인의 그림자가 보였다. 곧, 문이 열리며 얼룩진 옷을 입은 여인이 나왔다. 안개 속에서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시체의 것과 다름없어 보이는 핏기 하나 보이지 않는 창백한 피부에 퀭한 눈가.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인지 비쩍 골아 피골이 상접한 것 같은 얼굴까지. 있으나 마나 한 대문으로 나와 민규를 보던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왔다. 정면으로 보인 얼굴은 전체적으로 마르긴 했으나, 용모가 상당히 수려했다.
“누구십니까?”
뒤이어 들려오는 여인의 말소리. 그것은 사람의 말소리라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호롱불의 빛에 빛난 여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고,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여인의 눈동자가 세로로 죽 찢어진 채였다. 깜짝 놀라 다시 여인의 눈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동그란 눈동자였다. 안개에 헛것이 보이나 싶어 민규가 고개를 저었다.
“내 지나가는 객이올세. 무진으로 향하는 길에 길을 잃어 헤매다 이곳의 불빛을 보고 오게 되었는데… 혹시 이곳을 지나치는 노인을 보지 못했는가?”
“노인이요? 이곳을 지나치는 이는 한 달여 만에 선비님이 처음입니다.”
“한 달 동안이나 이곳을 지나가는 이가 없는데, 어찌 여인이 이런 산중에 홀로 살고 있는가?”
“고리대금을 갚지 못해 도망치다가 이 산으로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선비님도 아시다시피- 이 무진산은 누구도 오려고 하지 않으니, 쇤네같이 도망쳐 온 이들이 숨기에는 딱 좋은 곳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여인의 몸으로… 혹, 수상한 자들은 보지 못했고?”
“한 달 동안 본 사람이 선비님이 처음인데, 어찌 수상한 자들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하는 말에 민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이 났으나, 이 산에 숨어든 이유가 딱하고 안쓰러워 그마저도 길게 생각하지 못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민규는 곧 앞의 여인 너머로 다시 짙어지기 시작하는 안개를 보았다.
“한데, 길을 잃은 것이옵니까?”
“그렇소. 무진으로 가는 길을 아시오?”
“알긴 하나……. 어찌 이 밤에 가시려고요. 오늘 밤은 쇤네의 집에서 머무르지요, 선비님.”
“어찌 여인이 홀로 지내는 집에서 머무를 수 있단 말이오. 길만 알려준다면 내 홀로 떠날 수 있으니…”
“제가 밤길에 어두워 그럽니다. 그리고 이리 허름해 보여도 가끔 선비님처럼 길을 잃은 이들을 위한 빈방이 있으니 괘념치 마세요. 지내실 자리를 준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고 여인이 집 안으로 들어가면, 민규가 여인이 사라진 곳을 보다가 움직이는 안개들을 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안개들이 저절로 움직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바람의 흐름이 아닌 안개 스스로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서 있는데, 주변에서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벌써 코앞까지 내린 안개에 민규는 주변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집 안에서 ‘선비님-’ 하고 부르는 여인의 말소리를 따라 안으로 갈 뿐이었다.
“안이 많이 누추합니다. 눈이라도 잠깐 붙인다 생각하시고 계세요.”
“고맙소.”
여인이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민규는 아까 들은 발소리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혹, 함께 길을 잃은 노인은 아닐까. 그리 생각하며 막 방문을 열려 하는데-
“선비님,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여인이 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혹 실례가 아니 된다면, 무진마을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그곳 관리가 여색(女色)에 빠져 백성들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다하니. 사정을 살피기 위해 가오.”
“하나, 마을의 관리를 함부로 엄벌에 처할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쇤네가 이리 산 중에 산다지만, 무진이 납하는 세금도 많다 들었습니다.”
“나라에 세금을 많이 낸다고 해서 관리의 방탕함을 용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오?”
하는 물음에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때, 바깥의 허름한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란 여인이 벌떡 일어났다. 방을 밝히는 촛불에 여인의 눈이 빛났다. 이내 동그란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죽 찢어지더니 입을 벌린다. 혀가 기괴한 모양으로 양 갈래로 찢어지며 길게 날름거렸다. 흡사, 뱀의 혀와도 같은 모양새였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간만의 인간을 만나 ‘네 놈’이 진(陣)을 치는 줄도 몰랐구나.”
“천 년을 살아도 멍청한 건 똑같지.”
문밖에서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곧 여인의 피부가 뱀의 비늘처럼 변하더니 바람 소리도 아닌 것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인의 목소리를 제일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은 소리였다.
“허튼수작을 부리면 방 안의 인간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니 물러서거라.”
“그건 네 놈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내 영역 안에 있으니, 이 자는 내 밥이야. 한 달 만의 식사를 방해할 셈이더냐?”
“무슨 소리야? 네가 ‘그 먹잇감’에 침을 묻히는 동안, 네 집은 내 진(陣)이 되었는데.”
문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대화에 민규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러는 사이 여자의 형상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뱀, 구렁이에 가까운 형상이 되었다. 문밖으로 인형(人形)이 드러났다. 인형이 손을 들어 허공에 몇 자를 적어내리자 뱀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그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라 민규는 절로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뱀이 소름끼치도록 격렬하게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다가, 곧 배를 뒤집은 채로 멎었다. 엎어진 상의 음식들이 연기를 피우더니 곧 사라졌다.
문이 열렸다. 제법 큰 키의 사내가 서 있었다. 특이한 형태의 검은 옷을 입은 것이, 사내 역시 비단 평범한 이는 아닐 거라 짐작했다. 배를 뒤집고 죽은 뱀의 사체를 보던 민규가 다시 사내를 보았다. 창백한 피부였으나 뱀이 둔갑했던 여인처럼 시체와 같은 창백함은 아니었다. 날렵한 선으로 이루어진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민규가 경계의 눈빛을 계속해서 보이자 사내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을 열었다. 생김새와는 다른 저음의 목소리가 음산한 방 안을 울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 말에 놀란 민규가 벌떡 일어났다.
“어찌 이리 위험한 곳에 걸음을 하셨나이까.”
“정체가 무엇이냐.”
“말씀드리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눈앞에서 여인이 뱀으로 변해 죽는 것을 보았는데, 못 믿을 일이 있겠더냐?”
하는 말에 사내가 가벼이 웃으면서도 쉬이 긴장을 풀지 않았다. 사방을 살펴보고는 허공에서 글을 쓰는 듯 손을 계속해서 놀렸다. 그러자 방 안의 음산한 기분이 천천히 사라졌고, 뱀의 사체가 검은 재로 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민규가 살짝 놀라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음의 기운을 내쫓고 있습니다. 하나, 이 산 자체에 음의 기운이 가득하니, 이 진(陣)도 얼마 가진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몸을 회복하시는 대로 제가 이 산을 나갈 수 있도록 보필하겠습니다.”
“나간다면,”
“궁으로 향하시도록 말입니다.”
“나는 무진에 가기 위해 이 산에 들렀다.”
“무진은 갈만한 곳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
“특히 전하 같은 분이 발을 들인다면 온갖 귀(鬼)들이 달라붙을 것입니다. 조금 전의 여인의 형상을 한 뱀처럼 말입니다. 전하는 하늘의 아들. 귀(鬼)들이 가장 무서워하면서도 가장 좋아하는 기운입니다. 갑자기 안개가 짙어지고, 또 갑자기 절벽으로 넘어진 것이 정말 우연이라 생각하십니까? 이 산의 온갖 요괴들은 지금 전하의 혼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하늘의 힘이 깃든 혼을 먹으면 제아무리 염라대왕님이라 한들 신(神)을 먹은 귀(鬼)를 감히 멸(滅)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민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저는 본래 백여 년 전 이 산에 잘못 열렸던 귀문(鬼問)으로 인한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파견된 사자(使者)였으나, 지금은 옥황상제님의 명을 받고 전하를 안전히 보필하기 위해 온 차사(差使)이옵니다. 부디 제 말을 들어 돌아가 주옵소서.”
“이 산 너머 마을의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하는데, 어찌 군주가 될 자로서 외면할 수 있단 말이냐?”
“지금 무진에는 산 자가 없습니다.”
“…뭐라고?”
“인간의 행색을 한 것은 모두 인간의 몸을 뺏은 귀들입니다. 인간의 몸을 하고 인간처럼 살고 있을 뿐입니다. 당연히 그 마을의 수령 역시 산 자가 아닙니다. 여색에 홀려 몸이 빼앗긴 줄도 모르고 산을 헤매는 수령의 혼을 제가 직접 저승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면 나와 함께 온 어르신은, 어르신은 어찌 되었느냐?”
“그자 역시, 산 자가 아닙니다.”
하는 사내의 말에 민규가 놀라 고개를 흠칫 떨었다.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 사내가 무어라 말할 듯 입을 열었다. 그때, 방 안으로 작은 파장이 일었다.
“이 진(陣)도 곧 사라집니다. 이곳을 나가야,”
“무진에 산 자가 없다니. 그렇다면, 그 마을은 계속 그대로 두어야 하느냐?”
“산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이들의 시신이 그리 능욕되고 있는 걸 두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산 자가 가서 귀의 밥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네 말대로 네가 옥황상제가 보낸 차사라 하면, 네가 날 보필하면 될 것이 아니더냐?”
“전하.”
“내 눈으로 그 처참한 광경을 보아야겠다. 그리고 돌아가 폐하께 고할 것이다.”
단호한 민규의 표정을 보던 사내가 한숨을 쉬었다. 다시 방 안이 쿵, 울린다.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나는 무진으로 향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전하.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합니다.”
하는 말고 함께 사내가 민규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 기다렸다는 듯 집이 폭삭 무너지며, 안개보다 탁한 연기를 내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던 민규는, 곧 거친 숨을 토해내며 주저앉은 사내로 시선을 옮겼다. 가쁜 숨을 내쉬더니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어디 불편한 것이냐?”
“아닙니다. 괘념치 마옵소서.”
집은 뱀의 사념(邪念)과 산의 음기가 함께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뱀이 죽으며 함께 사라졌어야 하는 것이 정상. 하지만 사내가 민규를 위해 강제로 버티고 있었고, 결국 그게 사내의 몸에 무리를 가했는지 가냘픈 손이 바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민규가 가지고 있던 물을 건넸다. 하지만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저 역시 본디 죽은 자입니다. 하여 물과 음식은 제게 무의미합니다.”
“강림 도령(수명이 다한 사람을 잡아 저승으로 데리고 가는 일을 하는 사자(使者)) 은 술과 음식을 좋아한다 들었다. 못 먹는 게 아니라면 먹거라.”
민규의 말에 사내가 하는 수 없이 입 앞으로 가져온 물을 입에 댔다.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난 뒤에야 이제야 좀 살겠다는 듯 입으로 개운한 소리를 냈다.
“무의미하다더니, 한 모금 하니 조금 살 것 같다는 얼굴이구나.”
“…놀리지 마십시오.”
“집을 나오기 전 약조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 내 사자(使者)와의 약조는 옥황상제도 깰 수 없다 들었다.”
“전하.”
“어서 앞장 서거라.”
민규가 턱을 들어 씩 웃자, 사내가 입가에 흐른 물을 소매로 닦으며 일어섰다.
“옥황상제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전하를 안전히 궁으로 돌려보내라는.”
“네가 옆에서 나를 잘 보필하면 될 것이 아니냐?”
“전하, 말씀드렸다시피 무진은 사람이 가서 살아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내 바로 옆에 사자(使者)가 있는데 어찌 감히 내게 해코지를 하겠더냐. 그리고 나는 가서 무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겠다 했으면 이리 홀몸으로 오지 않고 군대라도 이끌고 왔겠지. 그저 마을을 살피러 가는 것이다. 그 상황이 어떤지, 얼마나 심각한지. 혹시나 살아있는 백성들은 어떤지.”
“귀(鬼)들이 먹어버린 땅입니다. 살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곳에서 죽은 이들의 혼은 이미 사자(使者)들이 저승으로 인도했습니다. 대부분이 죽음도 인지하지 못한 채 사자들을 따라 저승으로 향했고요.”
사내의 말에 민규가 입을 다물었다. 흐릿한 안개 속에서도 눈동자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곧 죽어도 마을로 향하겠다는 고집을 눈으로 피우고 있었다. 그 눈빛을 사내도 읽은 것인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을까지는 가지 못합니다. 산 중턱에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이 있으니, 그곳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알겠다.”
“또한, 가는 길에는 무조건 저만 따라 오시고, 제 말을 꼭 들어주십시오. 제가 전하를 무진으로 안내하는 것은 전하와 한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 제게는 옥황상제님의 명인 ‘전하를 안전하게 모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전하는 제 말을 따르셔야 합니다.”
“어허, 알겠다 해도.”
두 사람이 다시 길을 향했다. 지나간 자리는 다시 짙은 안개가 자리했다.
산길은 험했다. 곳곳에 도사린 낭떠러지에 민규가 넘어질 뻔한 것도 부지기수. 사내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민규의 곁을 보필했다. 신기하게도, 사내와 있기만 하면 안개가 걷혔다. 민규는 내내 그렇게 말했고, 그럴 때마다 사내는
“이 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 말에 민규는 괜히 입을 다물다가 괜히 혼잣말로 “재미없는 놈이 길동무가 되니 길마저 재미가 없구나.” 하고 말했다. 길은 그만큼 고됐고,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지친 산행에 잠깐 두 사람이 쉴 겸 나무기둥에 걸터앉았다. 꽤 오래전 있었던 전쟁에서 사용할 나무를 몽땅 베어 나무 밑동만 남고 뿌리째 썩어버린 것들이 가득했다. 민규는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나눠 마시다가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한데, 네 이름은 무엇이냐?”
“없습니다.”
“왜 이름이 없어? 제아무리 저승사자라 할지언정 이름은 있다 들었는데.”
“쓸모가 없으니 없습니다.”
“세상천지 어디에 이름이 쓸모없는 자가 있다 하더냐?”
“죽은 자의 이름은 쓸모가 없지요. 산 자의 이름은 사자(使者)의 부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이름을 부를 사자가 없으니 이름이 쓸모없지요.”
“…그, 이유 한 번 참 무섭구나. 그냥 이름을 말해주기 싫다 해라.”
“죽기 전 이름은 있습니다.”
“그거라도 들어보자.”
“원우입니다. 둥글 원(圓)에 도울 우(佑)자를 사용합니다. 제가 태어나던 날 할아버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남을 도우며 둥글게 살라는 뜻으로.”
사내가 이름을 말해주자 민규가 ‘원우…….’하고 중얼거리다가,
“이만 일어나자. 내 빨리 무진의 모습이 보고 싶으니.”
하고 일어났다. 동시에 먼 곳에서 바다의 내음과 함께 악취가 풍겨왔다.
“갈수록 이 악취가 점점 더 심해지는구나.”
“산자가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허면,”
“모두 죽은 이들의 시신이 부패한 냄새지요. 인간의 육신(肉身)은 가질지언정 자연의 섭리는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 귀(鬼)들의 현실입니다. 그들의 요술로 제아무리 숨긴다한들 역부족이지요.”
앞서 걷는 사내를 보던 민규는 문득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우뚝 멈추었다. 전하- 하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 민규가 멈춘 지 모르는 사내는 계속 앞을 걸었고, 사내가 점점 멀어지자 눈 앞의 안개가 짙어졌다. 그리고 목소리가 더욱 더 가까워졌다.
“전하, 어머니를 찾아주세요.”
아이는 울고 있었다. 고된 산행에 옷가지들은 다 찢어졌고,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혈색도 멀쩡했으며, 내내 풍기던 악취가 이 아이에게서는 나지 않았다. 인간이다. 살아 있는 인간. 무진에서 살아남은 인간. 그렇게 생각하자, 민규는 다급히 주저앉아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어찌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것이냐.”
“어머니가 사라졌습니다. 어머니를 찾아주세요, 전하.”
“그래. 나와 함께 어머니를 찾으러 가자.”
하며 헝클어진 아이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던 민규가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한데, 아이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순간, 아이가 저를 불렀던 호칭이 생각났다. ‘전하-’
“전하. 어찌 그러셔요?”
“…….”
“혹, 제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기라도 하셨나요?”
아이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소름 돋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리고 주변으로 괴상하게 썩은 시신들이 몰려왔다. 일어나 달아나려고 했지만, 아이가 민규의 손을 붙잡은 통에 달아나질 못했다. 웬만한 장사에 버금가는 악력이었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갔다.
그때 뒤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누군가가 제 혼이라도 빼 먹고 있는 것인지 점점 소리가 아득해졌고, 이내 민규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앞의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며 소리를 지르는 소리였다.
* * *
안개가 자욱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누구를 불러도 답이 없었고, 불러주는 이 역시 없었다. 걷고 있는 길이 무슨 길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안개는 손마저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나, 앞을 걷는 데 막아서는 장애물 따위는 없었다. 이윽고 민규는 자신이 걷고 있는 이곳이 저승길임을 깨달았다.
그러면 나는 그 길에 죽은 것인가? 안전하게 보필한다더니, 저승사자치고는 꽤 말의 무게가 가볍구나-
하며 중얼거리는데, 그때 눈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주변의 안개가 점점 걷히더니, 그 얼굴이 천천히 보였다.
“그러니 제가 그냥 돌아가라 하지 않았습니까.”
“군주된 자로서 어찌-”
“그리하여 귀(鬼)의 분신술에 속아 당하셨습니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찌 말을 그리 듣지 않으십니까?”
“잔소리는 궁 안에서도 충분히 들었다. 저승길에서까지 듣고 싶지 않으니 그만 그 입 다물라.”
“전하께서 있는 곳은 저승길이 아닙니다.”
“허면, 아직도 무진이란 말이냐?”
“눈을 떠 보십시오.”
“뭐? 내가 눈을 뜨고 있지 않으면 어찌 원우 널 보고 있겠느냐.”
“알려드렸더니 제 이름을 잘도 쓰시네요. 전하, 지금 전하께서는 눈을 감고 계시니 제가 보이는 것입니다. 눈을 뜨셔야 제가 사라집니다. 눈을 떠 보세요.”
그 말이 이상하여 민규는 눈을 감았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눈을 다시 떴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눈앞의 안개도, 사내도 없었다. 환한 빛과, 걱정스런 표정으로 보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의원만 있을 뿐이었다.
“…태자!”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찾는 듯 방 안에서 제가 깨어난 기쁨을 말하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제가 찾는 얼굴이 없다는 걸 깨닫자, 그제야 ‘눈을 뜨셔야 제가 사라집니다. 눈을 떠 보세요. 하고 말하던 꿈속의 소리가 떠올랐다.
1년여 간 실종되었던 민규는 어느 날 주인도 없는 말에 태워져 정신을 잃은 채로 궁 앞으로 당도했다. 말은 꼭 누군가의 지시라도 받고 알아들은 것처럼 궁 앞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순백의 말이 이목을 끌던 것도 잠시, 위에 타 있는 이가 사라진 태자라는 걸 안 순간, 황궁의 문이 열렸고, 문이 열리자 누군가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말은 달려 궁 안으로 들어왔다 전해 들었다.
“그러면, 그 말은 어디 있느냐?”
“그게, 어느 날 사라졌습니다요.”
“뭐?”
“폐하께서도 기이하다 여겨 특별히 폐하의 마구간에서 극진히 살폈습니다. 하지만 들어오고 난 뒤 내내 물도 먹이도 먹지 않더니 전하의 상태가 호전됐다는 소식 이후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아니, 말 한 마리가 나가는 데 아무도 못 본… 잠깐만. 물도 먹이도 먹지 않았다고?”
“네. 저러다 죽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 말을 듣던 민규가 난데없이 허탈하게 웃었다.
“내 꿈속에서 내가 한 말을 정정해야겠구나. 원우 너는 최선을 다해 날 보필했었구나.”
그리 말하며 웃는 민규를 다들 이상하게 볼 뿐이었다.
무진(霧津)기행
FIN.
*김승옥 「무진기행」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후기 *
하하.. 마감에 쫓기다보니 워래 하고자했던 이야기의 절반도 하지 못하고 마감을 해버렸습니다..!
원래의 무진기행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소설은 그런 내용아닙니다..
안개가 유독 많은 마을이라는 점에서 모티브만 따왔을 뿐입니다...
언젠가 시간이 나고, 기회가 된다면 못다한 이야기를 추가해서 써보고싶은 글입니다.
난잡하고 정체성없는 글, 후기까지 읽어주시느라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원우야! 생일축하해!
민규와 함께 뜨거운 시간 보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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